조상호(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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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청소년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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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부장관 (1982~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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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문화부와 통합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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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대 체육부 장관
조상호
曺相鎬 | Cho Sang-ho


파일:139424.jpg

출생
1926년 11월 29일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행성리 309번지[1]
사망
2007년 8월 25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19호
본관
창녕 조씨
자 / 호
필방(弼邦) / 여남(與南)
재임기간
제6대 체육부 장관
1987년 7월 14일 ~ 1988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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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유순임
자녀
슬하 1남 4녀
학력
광주북정공립심상소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1] (졸업 / 21회)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2])
종교
원불교[3]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0
경력
대통령 의전수석 비서관
주 이탈리아 공화국 특명전권대사
86서울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
88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제6대 체육부 장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조직위원회 집행위원
수상내역
국민훈장 무궁화장
엘살바도르 건국1등 대십자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수교훈장 광화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이다. 신승남검찰총장이 그의 맏사위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상임고문으로 생활체육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2. 생애[편집]


1926년 11월 29일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행성리 309번지에서 아버지 조희인과 어머니 국도순 사이의 1남 2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북정공립심상소학교광주서중학교(21회)를 졸업하고 1945년 일본 규슈제국대학에 입학했으나 8.15 광복으로 곧 중퇴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1948년 군에 입대하여 통역장교로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초등군사반 통역장교로 미국에 파견되어 조지아 대학교 야간부에서 수학했고 1957년 귀국해 대한민국 육군 무관 연락실 실장으로 근무했다. 1958년 조지아 대학교에서 수료한 학점을 인정받아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중령으로 예편한 뒤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그해 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면담할 때 통역을 담당했다. 이후 1963년에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의전수석비서관에 정식으로 발탁되어 1974년 물러날때까지 14년간 의전을 책임졌으며 수많은 정상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다.[2][3]

1974년 8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별세하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주 이탈리아 대사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77년 8월부터는 유엔식량농업기구 상주 수석대표를 겸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사의 임기가 끝난 뒤에는 1979년 2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동시에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80년 대한체육회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겸임)을 맡았다.

뛰어난 영어 실력과 외교력을 바탕으로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조직위원회를 이끌었고,[4]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 7월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체육부 장관으로써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1988년 12월 장관직에서 퇴임한 뒤에도 세계체육장관회의에서 부의장으로 피선되기도 했으며, 1989년부터는 대한체육회 상임고문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창조장학회 이사장, 세계한민족체전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체육청소년심의위원장, 2002월드컵축구대회 유치위원회 집행위원,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상임고문,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개최자치단체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뇌출혈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007년 8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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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김종신 사회언론담당 비서관은 조상호 의전수석비서관의 영어 실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3] 현재는 외교부에서 특채 등을 통해 실무급 직원을 발탁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 영어 통역은 차관급인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이 담당했다.[4]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됐지만 조직위원회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겸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