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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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두현(張斗鉉)[1]
초명
장두현(張斗炫, 張斗玹)

구암(龜岩)
생몰
1875년[2] 12월 10일 ~ 1938년 11월 21일
본관
고성 장씨#
출생지
한성부 남부 대평방
(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
사망지
경성부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한국의 기업인, 체육인,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체육회 초대 회장이자 중앙대학교 설립자이다.

2. 생애[편집]


장두현은 1875년 12월 10일 한성부 남부 대평방(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숙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사직했고, 7월에 경성양조합명회사 중역을 맡았으며 8월 재실회계심사국 심사원, 11월 장례원 전사, 1908년 농공상부 대신관방 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한일병합 후인 1911년 8월 동양용달합자회사 유한책임사원으로 활동했으며, 경성부 수하동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조선상업은행 감사, 광장주직회사 이사, 시정5주년 기념 조선물산장려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및 상의원을 맡았으며, 공동무역주식회사 대주주 겸 중역을 역임했다.

이후 동양물산주식회사 발기찬성인, 서산식산철도주식회사 창립 찬성인, 대동무역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했으며, 1919년 12월 박영효, 최진(崔鎭), 박해달(朴海達) 등과 함께 조선 경제를 연구하여 농업, 상업, 공업을 진흥하고 동포의 생활을 개선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조선경제회(朝鮮經濟會)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1924년 3월 대정친목회, 노동상애회 등 여러 친일 경제단체와 함께 ‘내선(內鮮) 양민족의 융합’, ‘관민일치(官民一致)’, ‘사상선도’ 등을 강령으로 하는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을 결성하는 등 친일 행위를 수행했다. 또한 장두현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지방 이재조선인 구제회 발기인 겸 회계를 맡았고, 1924년 조선척후단 조선총연맹 발기회 이사로 활동했다.

이후 동민회 평의원을 맡아 반일운동을 배척하고 일선융화를 부르짖는 대표적인 인사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동아일보 이사, 조선일보 고문, 흥일사 사장를 역임했고 흥업구락부 창립회원, 경성융흥주식회사 이사, 부평수리조합 평의원, 중앙유치원 원장,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 이사를 맡았다. 한편 그는 민족 문화 보전 및 실력 양성에도 관심을 보여 조선어 사전편찬회 발기인, 조선비행학교 창립위원을 역임했고, 박희도 등과 함께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고 대한체육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조선증권금융주식회사 설립 발기인을 맡았으며 소작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조선소작령제정촉진회 위원을 맡기도 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무죄방면되었고 1938년 11월 21일에 사망했다.

장두현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긍정했으며 친일단체를 결성하고 일선융화를 부르짖으며 반일운동을 배척하는 등 일련의 친일 행위를 벌였다. 하지만 조선소작령제정촉진회 위원을 맡아 소작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조선 민중의 삶의 질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해 조선인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대한체육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조선어 사전 편찬, 조선비행학교 설립에 관여하는 등 조선인의 실력 양성 및 문화 보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로 볼 때 그가 친일파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조선인을 배반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부역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여담[편집]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장두현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1] 1913년경 이 이름으로 한자 표기를 바꿈.[2] 대경성공직자명감에는 187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