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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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고등학교 출신
- 경북대학교 출신
- 문화공보부 차관
- 원내대표
- 정무장관
- 조선일보 관련 인물
- 한국의 정치인 자녀
-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1. 개요[편집]
"어떻든 간에 정치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더 길게 간다."
허주(虛舟) 김윤환
대한민국의 정치인. 호인 허주(虛舟)를 붙여 보통 "허주 김윤환"으로 불리며, 현대 한국 정치판의 대표적인 킹메이커 및 선거 전략의 대부로 통하는 사람이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3개 정권의 내각과 집권여당에서 주요 직책을 두루 맡은 보수의 아이콘이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정치인들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친화력으로 수많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본인의 정치공학 구상대로 2명의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에게 토사구팽 당하여 한나라당을 떠나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실패하고 세상을 떠났다.
2. 생애[편집]
2.1. 출생 ~ 신문기자 시절[편집]
1932년 경상북도 선산군 장천면 상장동(現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에서 독립운동가 김동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수창국민학교(31회)와 경북중학교·경북고등학교(32회),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와 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주미, 주일 특파원 및 편집국장 대리를 거쳤다.
경북중학교 시절 동창인 이맹희[2] 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중략) 자장면과 배갈을 실컷 먹은 다음 하나씩 도망쳤던 일과 이른바 김윤환 의원의 소변 사건이 가장 생각난다. 학교 건물 2층 교보재 창고에서 김윤환이 오줌을 쌌는데 늦은 점심을 먹던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 도시락에 떨어졌다.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3]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4] 하는 등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2.2. 정치인 시절[편집]
[5]
1978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고,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고등학교 동창인 노태우와의 친분으로[6] 민주정의당 창당 멤버로 합류했다.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아래 청와대와 집권당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정치권을 주무르는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한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의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공부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돼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7]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1986년 8월 개각 때 허문도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1987년 7월 김정렬 내각이 출범하자 박영수의 뒤를 이어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됐다.
1988년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퇴임한 뒤 민정당으로 복귀했고, 2개월 뒤 13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상북도 군위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개원한 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어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최형우,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김용채와 함께 4당 체제를 이끌어 갔다. 3당 합당 이후에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사무총장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14대 총선을 앞두고 당대의 킹메이커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올랐다. 김영삼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구 민주정의당 출신 민정계 인사들을 설득해 강력한 김영삼의 지지 세력, 일명 신민주계를 구축했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환은 민정계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군부 출신 민정당 인물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일단 김영삼을 세워서 정권을 이어가고, 그 다음에 우리(TK+민정계)가 주도하는 보수 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윤환은 전두환 밑에서는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옹립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노태우 밑에선 김영삼을 후계자로 지원해 역시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직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 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와 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8] 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3년 대구 동구 을 재보궐선거,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자당 후보가 TK에서 모두 낙선하자 1994년 말 서청원의 뒤를 이어 정무 제1장관에 임명됐다.[9]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한 데 이어 민자당 대표에 취임하면서 명실상부한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10] 당시 그의 조용하지만 등등한 위세를 볼 수 있었던 사례가, 이영희 여의도연구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5, 6공 출신이 당을 이끌 수는 없다"라고 발언한 것을 이유로 사퇴시킨 사건. 원래는 민주계에서 경고 처분으로 넘어가려던 걸 '그런 언행을 하면 내가 어찌 대표 자리에 있겠나. 경고로 되겠는가.'라고 쐐기를 박아버렸다고.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에도 대표로 유임됐고 15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11]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이 때의 회자된 말이 "자기가 전부 공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의도에 어긋나는 공천은 없었다". 다만 총선 승리 이후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에게 당 대표 자리를 물려주었다.[12]
1997년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과 신한국당 이회창대표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했다.[13][14] 김윤환은 "부정축재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와 민심에 반하여 12.12 사태의 반란군 주역들은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고 12.12 사태 주역들의 재산 환수 조치는커녕 사면받은 쿠데타 주역들은 국방부를 상대로 군인연금을 달라며 소송까지 벌이는 등 쿠데타 세력의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15]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16]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당내 민정계와 영남 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메이커'로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이회창은 아들들의 병역 문제와 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패배했고,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이회창에게 팽당해 공천탈락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한다.[17]
이후 조순, 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신상우 등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16대 총선에 나섰지만,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도의원 출신의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에게 패배해 낙선했고, 민주국민당 또한 지역구 1석, 전국구 1석에 그쳤다. 낙선 후 조순의 뒤를 이어 민주국민당의 대표를 맡았으나,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18] 가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그 잘 생긴 얼굴은 어디로 갔는가. 그 훤칠한 키는 어디에 감췄는가. 그 당당하던 기세는 어디로 숨었는가.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두꺼운 이불 밑에 잠겨 있었다. 말라버린 얼굴은 해골이었다. 눈은 천장만을 응시했다. 얼음장 같은 손 위엔 거미줄 같은 핏줄이 솟아 있었다. 간간이 고통을 호소하는 "아" 하는 소리만이 그의 영혼이 남아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 정치부 기자 이연홍의 글 '허주와 나' (별세 얼마전 문병한 후 남긴 글)
이 시기 이분과 함께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실제로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19] 김윤환은 대선 직전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미국까지 가서 투병했지만, 결국 회생 불가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2003년 12월 15일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회창이 사망 직전 사과의 뜻을 표했으나 공식적인 화해 없이 세상을 떴다. 요절까진 아니지만 그때의 평균수명보다도 일찍 사망했다. 김영삼은 김윤환이 죽은 게 이회창암 때문이라고 촌평했다.#
3. 평가[편집]
대화와 협력을 명분으로 실제론 막후 밀실에서 정치 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야합하는 일본식 정치의 대명사였다. 한국에서 내각책임제에 부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정치인이 오랫동안 의회를 장악해 자기들끼리 나눠먹는 계파 정치판으로 만들 거란 우려이고, 실제로 지금의 내각제도 아니고 대통령 중심제도 아닌 어정쩡한 대한민국 국회 구도에서 보수 계파의 노회한 수장 이미지를 구축한 인물.
하지만 노무현이 실제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으로서[20] 당선된 것이나, 홀로 여러 계파를 다룬 점 등 정치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킹메이커라는 별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류를 보는 눈도 탁월했다.
민주화 운동가로 민정당 정권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어 김윤환을 만난 다음 "그래도 김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장내에서 민주주의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고, 언론계 인사들 역시 "허주는 순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물 흐르듯 한다."는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의회주의자로서 어느 정도 평가받을 부분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4. 선거 이력[편집]
킹메이커, 선거의 제왕, 전략가, 인싸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의원 선수는 5선 뿐이었으며 이마저도 한번은 유신정우회, 한번은 전국구(비례대표)로 당선되어서 순수 지역구 당선으로는 3선 정도밖에 안 된다. 다만 2003년 작고 당시 정계 원로로 불리던 이들은 3공 초기 때인 1960년대부터 정치 생활을 해온 반면 김윤환은 실질적으로 5공 때 정계에 입문했음은 감안해야 한다.
5. 소속 정당[편집]
6. 기타[편집]
- 2003년 그가 죽자 그의 호인 허주(虛舟), 즉 빈 배처럼 갔다고 해서 권력은 무상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 문명자 기자의 취재 수첩에 의하면, 김윤환의 형인 김규환은 경북중학 시절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고 대구 10.1 사건 때도 가담했으며 6.25 때는 북한군 군복까지 입고 행세했다고 한다. 출처 김윤환 본인은 6.25 당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갈모형제의 전쟁 경험이라 뭔가 기묘하다. https://youngchanh2.tistory.com/124/#
- 사석에서도 절대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위에도 쓰여져 있다시피 제15대 대선 당시 각종 악재 속에서도 대통령 후보로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제16대 대선 당시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통일민주당 및 민주자유당 출신 다선 정치인들의 구조조정을 주장한 윤여준의 정치적 조언을 정치공학적 전략에 따라 전향적으로 받아들여 그를 토사구팽하듯 읍참마속한 이회창만은 예외였다. 이런 사례는 선거철 컷오프나 물갈이 사례가 나올 때마다 소환되며 이따금씩 회자된다.
- 180cm가 넘는 장신에 미남이었다.[30] 김윤환의 친화력이 남달랐던 데는 이런 호감형 외모도 한몫하였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 선산 김씨 집성촌이다.[2] 이맹희는 1931년생이지만 1년 늦게 입학했다. 반대로 김복동은 1933년생임에도 1년 일찍 입학해 이맹희, 김윤환, 김복동 모두 동문이었다. 노태우도 마찬가지. [3] 김종필, 박태준과 더불어 대표적인 일본통 정치인이었다.[4] 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 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5] 옆에 있는 노태우도 175cm로 그 당시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장신인데도 불구하고 김윤환이 확연하게 더 크다.[6] 사석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와 서로 반말하면서 술 마시는 사이였다고 한다.[7]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한다.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8] 박준규는 부동산 투기 의혹 이후 국회의장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해야 했고, 박철언은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돼 국회의원직을 잃었다.[9] 당시 김영삼 정부의 사정 태풍으로 기존에 권력을 누리던 TK 인사들이 축출되면서 대구-경북지역 민심이 싸늘해진 것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이었다.[10] 당시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했으므로 대표위원이 서열 2위였다.[11] 승리라고는 했지만 의석 과반수를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여론상 참패가 예상된 상황에서 총 139석으로 1당이 된 것이 승리한 것으로 간주된 것. 특히 대구의 경우 13석 중 2석만 건졌지만, 경북에서는 19석 중 11석을 건지며 자민련 바람을 견제한 것이 컸다.[12] 총선 승리 이후 당 총재(김영삼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겠다면서 자신을 포함한 당직자 일괄사표를 제출했는데 수리돼 버렸다...[13] 1997.4.8 경향신문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입장 밝힐 예정[14]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60020910100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6&officeId=00020&pageNo=1&printNo=23501&publishType=00010| 李(이)대표全(전)|盧(노)씨 사면건의 검토 金潤煥(김윤환)고문"대법 刑(형)확정후 실시 이미 건의"[15]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5839_19482.html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16] 신한국당 차기 대권 주자 9룡(김윤환, 이한동, 최형우,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김덕룡, 이인제) 중 하나로 꼽혔었다.[17] 이 당시 이회창의 책사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개혁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 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 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 공천은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다만 이회창은 훗날 김윤환과의 결별이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자신을 대선 후보로 밀어준 일등 공신을 쳐내야 했으니...[18] 공천 탈락 이후 민주국민당 창당을 앞두고는 이회창을 비도덕적인 놈 운운했을 정도.[19]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20] 개혁 성향의 영남 후보를 세워서 영남표를 잠식하고 수도권의 개혁 성향 야당표를 결집시켜야 한나라당의 호남 포위 구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 천하삼분지계가 제갈량만의 독창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주요 책사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던 것처럼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 소위 영남후보론도 정치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던 내용이다. 당시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노무현의 지지율이 2~3%에 불과할 때도 일단 민주당 후보 경선만 통과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은 가장 높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21] 칠곡군, 군위군, 성주군, 선산군[22] 2000.2.24 탈당 (공천 불복)[23]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24]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5]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6] 총선 공천 결과 불복에 의한 탈당[27] 칠곡3번 경운대행이 장천시외버스터미널에 정차하기 전에 오상중고교를 지나지만, 무정차 통과한다.(상장1리에는 정차한다.) 칠곡3번을 탔다면 장천터미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28]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 작품인 "꽃"도 KNU 센트럴 파크에 새겨져 있다.[29] 본인이 직접 증언했던 육성이 방송에서 나왔고 생전에 애청자였다고.[30] 여담으로 김희선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만난 정치인 중에 가장 호감형이 김윤환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