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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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 생애[편집]
1935년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28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주로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서 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1월부터 9월까지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9월부터 1981년 3월까지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83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 김완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경질되었다. 내무부 장관 재임 시절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악명이 높았고 민주화운동세력, 학생운동권에 대한 강경대응을 지시해서 박종철 사건을 촉발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1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3년까지 정무제1장관[2] 을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자유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다시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2000년 자유민주연합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2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는 탄핵 사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탄핵소추안에 반대하였고[3] 같은 해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불출마 선언을 하였으며 동시에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국회의원직도 내려놓았다.[4]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증평군 선거구에 출마해 국회 복귀를 노렸으나 통합민주당 김종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09년 9월 김종률이 뇌물수수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함에 따라 치러진 2009년 재보궐선거에는 별도로 출마하지 않았고, 나이도 고령인데다 친박연대를 탈당해 당적도 정리하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2018년 3월 3일 향년 83세로 사망.
3. 여담[편집]
- 애연가로 유명했으며 하루에 두 갑 이상씩 피웠다고 한다.
-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이낙연과 함께 탄핵안에 반대표를 던진 2명 중 1명이다.
4. 소속 정당[편집]
5. 선거 이력[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2] 본래 김용채 의원이 임명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재검표를 실시하면서 선거결과가 번복되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다. 국회 및 여당과 청와대의 관계를 조율하는 업무를 맡는 정무1장관 특성상 김용채 장관은 의원직 상실과 더불어 장관직까지 50일만에 사퇴해야 했다.[3] 새천년민주당 이낙연 의원과 함께 탄핵안에 반대한 2명 중 1명이다. 이낙연은 노무현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 당연히 탄핵에 반대할 만했지만 김종호는 매우 의외인데 이는 단순히 자민련 의원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출신 자체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민정당 계열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을 하면 했지 도저히 반대할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같은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추미애는 끝내 탄핵에 찬성했다.[4] 남은 임기를 승계한 사람은 전국구 후보 6번이었다가 5번까지만 당선되는 바람에 당선되지 못 했던 변웅전이었고, 이 덕분에 변웅전은 정치 역정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5]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6]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7] 한국국민당 김완태 후보와 동반 당선[8] 2004.3.22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9] 7번의 선거 중 첫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