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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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육군사관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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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th=20%><rowbgcolor=#dcffed,#003318> 초대
이형근 ||<width=20%> 2대
원용덕 ||<width=20%> 3대
정일권 ||<width=20%> 4대
송호성 ||<width=20%> 5대
김백일 ||
||<rowbgcolor=#dcffed,#003318> 6대
최덕신 || 7대
김홍일 || 8대
이준식 || 9대
안춘생 || 10대
김종오 ||
||<bgcolor=#dcffed,#003318> 11대
박병권 ||<bgcolor=#dcffed,#003318> 12대
장창국 ||<bgcolor=#dcffed,#003318> 13대
백남권 || 14대
이한림 ||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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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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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호 || 20대
김희덕 ||
|| 21대
심흥선 || 22대
최세인 || 23대
최우근 || 24대
정승화 || 25대
백석주 ||
|| 26대
차규헌 || 27대
김복동 || 28대
최연식 || 29대
황인수 || 30대
지일환 ||
|| 31대
최문규 || 32대
장준익 || 33대
민병돈 || 34대
이필섭 || 35대
임인조 ||
|| 36대
김정헌 || 37대
장성 || 38대
김정남 || 39대
장창규 || 40대
한승의 ||
|| 41대
오남영 || 42대
박준근 || 43대
김충배 || 44대
김선홍 || 45대
임충빈 ||
|| 46대
김현석 || 47대
정승조 || 48대
이봉원 || 49대
박종선 || 50대
박남수 ||
||<bgcolor=#dcffed,#003318> 51대
고성균 || 52대
양종수 || 53대
최병로 || 54대
김완태 || 55대
정진경 ||
|| 56대
김정수 ||
||<-5><bgcolor=#008940> ※ 초대~13대, 17대, 19대, 51대 : 대령, 준장, 소장 / 14대~현임 : 중장 ||
||<-5><bgcolor=#008940>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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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동구 갑)
선거구 개편
박준규[1]

제14-15대
김복동


선거구 통합
강신성일[2]





파일:대한광업진흥공사 CI.svg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
제4대
이규광

제5대
김복동


제6대
윤승식




제27대 육군사관학교장
김복동
金復東 | Kim Bok-dong

파일:김복동 중장.jpg
출생
1933년 3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면
(現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사망
2000년 4월 19일 (향년 67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본관
신 안동 김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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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영한, 어머니 홍무경
형제자매
형제 김진동, 김익동
남매 김옥숙, 김정숙
배우자
임금주
자녀
슬하 1남 2녀
친인척
매제 노태우, 금진호
조카 노소영, 노재헌
학력
대구덕산국민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신체
178cm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4, 15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5년 ~ 1982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사관학교장
주요 보직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제5보병사단장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군인 시절과 하나회
2.3. 예편 이후 정치인 시절
3. 선거이력
4. 둘러보기
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제14-15대 국회의원.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1933년 3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면(지금의 청송읍)에서 아버지 김영한(金永漢, 1905. 8. 7 ~ 1980. 7. 5)과 남양 홍씨 홍무경(洪戊庚, 1908. 9. 18 ~ 1997. 8. 9)[2]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옥숙 영부인의 친오빠로 노태우가 그의 친구이자 매제이며, 금진호상공부장관도 여동생 김정숙과 결혼해 그의 매제이다. 박철언체육청소년부장관은 그의 고종사촌 동생이고[3], 노소영노재헌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종교불교다.

증조부 김광규(金光圭, 1845. 6. 21 ~ 1922. 5. 6)는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138위로 입격했다.


2.2. 군인 시절과 하나회[편집]


대구덕산국민학교,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4]를 졸업하고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등과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하였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서 행정학 학사 학위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육사 재학 시 성적도 가장 앞서면서 11기의 선두주자로 등극한다.[5]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등과 하나회라는 군부 내의 사조직을 결성하였으나 육사 시절부터 위관 때까지만 해도 하나회의 같은 리더그룹이던 전두환과 중령 이상이 되면서 점차 선두를 다투는 경쟁관계에 들어갔다.[6] 이 때문에 김복동은 전두환과 멀어졌으며 또 기질적으로 달라 하나회 핵심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어 이후 "비하나회" 인사로 여겨진다.[7]

이로부터 비롯된 전두환의 견제는 1972년 말 준장 진급 심사 대상에서 동기인 전두환과 손영길이 올라가는데 자신이 누락된 것에서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김복동은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강창성이 이를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여 결국 전두환과 함께 준장에 진급한다.[8] 이후 소장 진급 후에는 제5보병사단장을 지냈는데, 전두환과 같은 1차 진급자였었다.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재직하던 중 1979년 10.26 사건의 책임을 지고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9]으로 좌천되었다. 12.12 군사반란에는 반대하였으며[10] 이후 1980년 7월 중장 진급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임되었다가 1982년 1월 예편하였다.

전두환의 눈 밖에 났음에도 매제 노태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최근 이를 뒤집는 기사가 나왔다. 신동아에 연재되는 당시 정호용의 측근이었던 특전사 보안반장 김충립의 수기에 의하면 김복동과 불화를 겪은 것은 오히려 노태우였다는 것.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과 달리 후발주자격이었던 노태우가 쿠데타 이후 실세가 되면서 자신을 무시하자 술상을 뒤엎었다고 한다. 노태우는 그를 강제 예편시키려 했으나 정호용이 이를 중재하여 막아주었다고 한다.


2.3. 예편 이후 정치인 시절[편집]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의 처삼촌인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구속되자 대타로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노태우의 친인척 배제 방침에 따라 뜻을 접었고#[11], 노태우 정부 말인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反) 김영삼 진영에 섰으며[12], 결국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그 해 가을 고종사촌 동생 박철언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정주영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민자당 탈당 과정에서 매제(매부)인 노태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무작정 탈당계를 제출하는 바람에, 기자회견을 위하여 대구 지역구 사무실로 가던 도중 동대구IC 톨게이트를 지나 호남정유 주유소 앞쪽#[13]에서 경찰 관용차에 강제로 모셔져서 서울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당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노태우가 직접 부른 건데, 이 과정에서 경찰이 개입해 강제로 끌고 오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건 초기에는 납치로 알려져 떠들썩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지금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실시간 연락이 어려웠고, 하필 손윗처남이 탈당한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노태우가 경찰까지 동원했던 것이다.[14] 한편 탈당 과정에서 노태우의 친인척 중 가장 YS에 우호적이던 금진호는 자신의 보좌관을 시켜 탈당 번복 보도자료를 작성하게 한 다음 김복동 의원실의 여직원에게 각 언론사에 이를 보내도록 지시했고, 당연히 김복동의 보좌진은 탈당 번복 보도자료에 대하여 반발했다.#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민자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해 정주영 후보의 선거 운동을 적극 도왔지만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결국 3당 합당으로 인해 막강한 세력을 갖추었던 김영삼이었고, 이듬해 출범한 문민정부와 민자당이 국민당 의원들을 대거 빼가며 와해공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끝끝내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1994년 박찬종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으로 출범한 신민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에는 자유민주연합과 합당하면서 신민당 대표 자격으로 자민련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 갑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15][16]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DJP연합에 참여해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으며,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에 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으며[17] 총선이 끝나고 불과 6일만인 2000년 4월 19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67세.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구역에서 침산동, 경북대학교 북문, 복현동, 불로동, 봉무동에 이르는 노선이 아닌 현재의 동대구역 경유 안심행 노선이 된 것에는 동대구역의 수요뿐만 아니라 동구 갑 출마를 준비하던 김복동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3.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동 갑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54,557 (59.28%)
당선 (1위)
초선 [18]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8,134 (37.59%)
재선 [19]


4. 둘러보기[편집]







5. 창작물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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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봉공(參奉公) 극인(克仁)파 28세 동(東) 항렬.[2] 홍종목(洪鍾穆)의 딸이다.[3] 작은고모 김당한(金棠漢)의 둘째 아들이다.[4] 노태우, 정호용, 김윤환, 이맹희, 유수호, 이상경과 32회 동기생이다.[5] 육사 11기로 임관한 156명 중 하나회에 소속된 소위들의 임관 성적은 김복동 13등, 권익현 55등, 노태우 67등, 손영길 81등, 정호용 86등, 전두환 126등이다. 1등은 김성진으로 생도 시절부터 수학 천재로 알려졌으며 야전 군인 대신 교수요원의 길을 걸었다.[6] 하나회에서 노태우, 정호용만 해도 이미 소령 진급 때 선두그룹보다 1년이 늦었다.[7] 김충식의 저서인 <남산의 부장들>에 의하면 김복동은 전임이던 황인수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맹호부대로 나가게 되자 그 후임으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됐다고 하는데, 당시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였다.[8]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윤필용 사건이 발생하여 이런 하나회의 인사권 횡포는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임명 때까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9] 이 시절에는 야전군사령관이 중장 2~3차 보직이었기 때문에 부사령관은 소장 3~4차 보직이었다.[10] 그 덕에 훗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때 매제인 노태우가 감옥에 갔을 때 12.12와 5.18 두 사건과 무관했던 김복동은 무사히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11] 노태우의 동서이자 자신에게는 둘째 매제인 금진호상공부장관도 13대 총선에서는 출마하지 못하고 14대 총선에서 출마했다.[12] 김영삼은 김복동을 아주 싫어하진 않은 듯 했지만, 김복동 본인이 김영삼은 '체질에 맞지 않다' 했다고#. 김영삼을 지지했음에도 김용태김윤환에 밀려 딱히 대우받지도 못하고 노태우의 탈당으로 대구에서 반 김영삼 정서가 생겨나며 탈당했다는 말도 있으며#, 김복동 자신도 대권을 꿈꾸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3] 당시에는 동대구IC가 현 동대구JC 자리에 있었다. 중앙고속도로 대구-부산 민자구간 공사로 인해 구 IC는 분기점이 되고, 새로 동대구IC를 건설하게 된 것.[14] 그 뒤로 둘은 한동안 만나지 않다가 94년 1월 노태우가 김복동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재회하게 된다.[15]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당선된 김해석윤영탁은 민주자유당으로 건너가서 15대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한 걸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잘 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16] 하나회 소속이었던 육사 후배 이종구국방부장관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3위로 낙선했다. 2위는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강)신성일.[17] 이 때의 당선인은 이전 선거의 경쟁후보인 (강)신성일.[18] 1992.11.19 민주자유당 탈당 및 통일국민당 입당[19] 2000.04.19 임기 중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