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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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1949-2016).svg 대한민국 문화공보부 차관
전두환 정부
11대
김은호

12대
허문도


13대
박현태



대한민국 제13대 국토통일원 장관
허문도
許文道 | Heo Moon-do


파일:허문도.jpg

출생
1940년 2월 26일[1]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도전리 초선마을
사망
2016년 3월 5일 (향년 76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본관
김해 허씨[2]
재임기간
제12대 문화공보부 차관
1982년 1월 6일 ~ 1984년 10월 19일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1984년 10월 20일 ~ 1986년 8월 27일
제13대 국토통일원 장관
1986년 8월 27일 ~ 1988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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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이수경[1]
자녀
2남 1녀
장남 허동혁(許東赫)[2], 차남 허태동(許泰東)[3]
학력
부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 / 학사)
도쿄대학 대학원 (사회학 / 석사)
약력
조선일보 기자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조선일보 외신부 차장
주일대사관 공보관
중앙정보부장[4] 비서실장
국가보위입법회의 문공분과 위원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비서관
제12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제13대 국토통일원 장관
불교TV 사장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선거 이력
5. 수상 경력
6.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언론인이자 정치인.

전두환 정부 당시 '쓰리 허'[3] 가운데 1명이다.


2. 생애[편집]


1940년 2월 26일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도전리 초선마을[4]에서 아버지 허종섭(許宗燮, 1919. 1. 1 ~ 1962. 6. 6)과 어머니 전주 최씨(1915. 3. 25 ~ ?)[5]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10회),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기자로 입사하였고 일본 특파원 등을 지냈으며 김옥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이 실권을 잡자 일본에 있던 허문도는 제 발로 한국까지 날아와 전두환하고 접촉하여 자문을 해주었다. 그 후 전두환이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면서 허문도를 잊지 않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였고 군 출신인 허삼수[6], 허화평[7]과 더불어 전두환의 최측근인 속칭 '쓰리 허'의 일원으로 꼽히게 되었다. 5.17 내란 이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문화공보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전두환 정부의 언론과 문화 정책을 총괄하게 되었다. 1980년 9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산하 공보비서관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관제 축제인 국풍81을 기획하였다. 언론통폐합 및 언론기본법 또한 그의 작품인데 허화평과 허삼수에게 언론 통폐합의 필요성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2년 1월 문화공보부 차관에 임명되었으며 1984년 대통령비서실 정무 제1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는데 1985년 여름에 문제를 일으킨 학원안정법안이 그의 작품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 후 1986년~1988년 동안 제13대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89년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에 출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80년 대규모 기자 해직을 진두지휘한 혐의로 소환당하자 그에 응하지 않고 도망친 것이나, 1990년 5월 최종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민주자유당 특임위원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자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고성군-충무시-통영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정순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현역 도지사한나라당 김혁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9년 불교TV 사장이 되었으나 노조와 언론 단체, 불교계의 반발로 6개월만에 해임되었다. 2000년에는 자유민주연합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8]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자유민주연합의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장을 스스로 반납하고 불출마 선언을 하기도 했다.[9] 2002년 특임위원장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6년 3월 5일 오전 7시 30분경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만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충무·통영·고성

[[무소속|
무소속
]]

33,471 (29.9%)
낙선 (2위)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157,337 (12.5%)
낙선 (3위)



5. 수상 경력[편집]


  • 보국훈장 천수장 (1980)
  • 청조근정훈장 (1992)


6. 여담[편집]


  •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 '朝聞道 夕死可矣' (조문도 석사가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를 한때 '許文道 夕死可矣' (허문도 석사가의, 허문도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로 바꿔 말하는 풍자가 유행했었다. 허문도가 한창 극강의 권세를 부리던 5공 시절, 어느 고등학교 한문 교사가 학생들에게 '朝聞道 夕死可矣'를 가르치시면서 실수를 빙자해 '許文道 夕死可矣'라 칠판에 쓴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 도쿄대학원에 유학하던 시절에는, 재일교포 사업가인 박용구 씨가 세운 박용구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건 박용구는 개혁 우파 성향이며, 혁신계 인사인 조용수의 민족일보 창간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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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월 19일.[2] 25세 ◯도(道) 항렬.[3]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4] 마암면사무소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5] 최정순(崔挺淳)의 딸이다.[6] 두 사람은 부산고등학교 10회 동기생이다.[7] 두 사람은 전두환의 미움을 사 토사구팽당했지만, 허문도는 5공 마지막까지 측근으로 남아 권세를 누렸다.[8] 허문도는 금곡동에서 거주하였다.[9] "외지 사람이 수원에 와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것은 지역 발전에도 문제가 있다"는 일각의 지적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