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친왕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완친왕은 조선의 왕자이자 (사후) 대한제국의 황족. 생전에 받았던 봉호는 완화군(完和君). 시호가 효헌(孝憲)이라 '완효헌왕(完孝憲王)' 혹은 '완왕(完王)'이라고도 한다.
고종의 첫 아들이었지만 서자였다.[1] 즉, 고종의 전체 9남 4녀[2] 중에서 맏이로 서장남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렸을 때 이미 9살이나 연상인 궁녀 이씨를 총애했었고, 그래서 명성황후와는 신혼 때 서먹하게 지냈다. 그 때 이씨에게서 얻은 아이가 바로 완화군이다.
2. 생애[편집]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많은 왕손들이 태어나자마자, 혹은 유아기때 죽거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려[3] 왕실의 손이 귀해졌고, 후궁 소생의 서자나 그 서손들이 왕위를 잇는 일이 흔했다. 때문에 생모가 미천한 신분이여도 왕의 자식으로만 태어나면 아들 딸 막론하고 적출 못지않은 존귀한 대접을 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들, 그것도 왕의 장자를 출산했다면 왕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의 모후를 꿈꿔보는 것이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신분은 낮았으나 아들이 세자 책봉을 받거나 왕위에 올랐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 등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왕자가 탄생하자[4] , ‘영보당’이라는 당호만 가진 승은상궁 소생의 서자임에도 원자 탄생 못지않게 온 조정과 왕실이 기뻐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첫 손주인 완화군을 정말로 귀여워하며 육아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로 완화군은 사실상 암묵적인 원자 대접을 받았다.[5] 또 완화군은 서출 왕자로선 파격적인 대우로 강학청을 설치해 별도의 교육을 받았다. 강학청은 원자나 왕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이니 당시 완화군의 왕실 내 입지가 어떠했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3년 후 명성황후가 원자를 낳자 대원군이 자신이 아끼는 완화군을 세자로 삼기 위해 명성황후의 아들을 인삼을 보내 독살했다는 야사까지 생겼다.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말이니 속지 말자.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서자를, 그것도 아무 뒷배 없는 궁녀가 낳은 왕자를 후계로 세우겠답시고 적손을 죽인단 말인가. 훗날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정적이 된 것 때문에 생긴 소문일 뿐이다. 정사에는 분명히 항문 기형[6] 으로 출생 4일 만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직후인 1874년(고종 11년), 명성황후와 고종 사이의 차남이자 적자인 척이 태어나자, 당시 7살이던 완친왕은 원자의 입지를 위해서였는지 어머니 영보당 이씨와 함께 궁 밖에 나가 살았다.
3. 사망과 이후[편집]
1880년(고종 17년)에 열병을 앓다 1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월곡산에 있었다가, 8.15 광복 이후 도시 개발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 근처로 옮겼다.#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성립 후 완친왕으로 추존되어 군(君)에서 왕(王)으로 작호가 격상되었다.
4. 여담[편집]
- 명성황후가 완친왕 모자를 꺼렸던 것 때문에 시중에는 명성황후가 완화군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제대로 된 근거는 없다.[7] 심지어 완화군 생모인 영보당 이씨마저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1928년 12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1880년이 아니라 그 이틀 전 17일 정오에 영보당 이씨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보아 자살설은 낭설인 듯 하다.
-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완화군이 죽자 조 대비가 매우 애통해하며 완화군의 제삿상에 생전에 좋아했던 군밤을 올리도록 했으며, 행여 군밤이 식기 전에 영전에 올리라고 상궁들에게 성화를 냈다고 한다. 고종 군밤 루머의 진짜 주인공은 완화군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도 야사라서 정확한 사실은 모른다.
- 원자나 왕세자가 아닌 서출 왕자의 신분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 완화군 한 사람만을 위한 별도의 교육기관 강학청이 관례를 올린 이후 시점인 1876년 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879년까지 유지되었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