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궁 4대 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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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장조[1]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이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문서 참조. 의 현손 완림군 이재원 | 完林君 李載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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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장황제의 현손 완림군 이재원 | 完林君 李載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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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 완림군(完林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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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재원(李載元)[2]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㷩)'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3] 사족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저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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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순팔(舜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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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효정(孝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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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
| 흥녕군 이창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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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모
| 군부인 임천 조씨 (郡夫人 林川 趙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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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부
| 흥완군 이정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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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
| 졍경부인 대구 서씨 (貞敬夫人 大丘 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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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 정경부인 청송 심씨 (貞敬夫人 靑松 沈氏) 정경부인 수원 김씨 (貞敬夫人 水原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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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1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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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1년 9월 8일(음력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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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1년 3월 28일(음력 2월 19일) (향년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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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족 출신 관료.
고종 이형 과
완순군 이재완,
완영군 이재긍,
흥친왕 이희의 사촌형이자.
남연군의 손자이며
흥완군 이정응의 친자이자
계동궁의 사손이다.
1831년(
순조 31년) 9월 8일,
한성부에서
남연군의 둘째 아들
흥완군 이정응과 부인 대구 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연군의 맏손자였기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3년 전 자식없이 죽은 큰아버지
흥녕군 이창응의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은신군 -
남연군 -
흥녕군의 제사를 받드는 계동궁의 사손이 되었다.
종친이라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영릉,
선릉의
능참봉으로 일했다. 1853(철종 4)년에는
철종이 춘당대
[4]에서 시 짓기 행사를 열었을 때, 부(賦)
[5]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않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
에서 1등을 하여 직부전시
[6] 초시,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
의 명을 받았다.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와 교리,
성균관 사성 및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864년 1월 사촌동생 이재황이
고종으로 즉위하고 삼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더욱 승승장구한다. 고종 즉위 직후에 동지경연사(同知經延事)로 승진했고, 승진 기념으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면세전
[7]를 왕에게 바쳐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받았다.
요즘 같으면 김영란법에 걸린다.이후에도
사헌부 대사헌,
종친부 유사당상 ,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한성부 판윤
[8]과
의정부 우찬성 및
공조[9],
예조[10] 현재의 대한민국 외교부, 대한민국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형조,
병조[11],
이조[12]의
판서[13]를 지내는 등 조정의 주요 보직을 맡았다. 1868년
경복궁 중건 시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 공사를 관리했다. 그 뒤
수원부 유수와 판의금부사 직도 맡았다.
1874년(
고종 11년) 11월에 삼촌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었다. 다행히 이재원은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아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잘나가지는 못했고,
조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평안도와
경기도 관찰사 및
광주부와
강화부의
유수 등
지방직을 전전했다. 그러다 1879년(고종 16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881년(
고종 18년)
개화 정책 추진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할 때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로 임명받고 교련국(敎鍊局)으로 배치받아
군대의
근대화에 힘썼다. 1882년(고종 19년)에는 이조판서를, 1884년(고종 21년)에는 병조판서를 재역임했다.
병조판서로 다시 제수받았던 그해 10월에
조선에서 대사건이 일어나니 바로
갑신정변이다. 이 때
왕실 인사들을 포섭하려던 일부 개화당원들의 추천으로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연달아 임명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화당 정권의 영의정이었지만 그들과 가깝지 않고, 또
종친이라는 이유로 무사하여 정변 후에도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85년(
고종 22년)에는 독판내무부사, 1887년(고종 24년) 7월에는 예조판서로 임명받았으나 응하지 않아서 한 때
충청도 평택로
유배갔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판돈녕부사로 임명받았으나 또다시 응하지 않았다.
왕이랑 밀당하나[14] 이 때 고종은 정말 많이 서운했는지, "옛 정을 생각안하고 문안도 안오면서 승부하듯이 버티니 앞으로 나랑 안볼려는건가? 명에 응하든지 말든지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까지 했다.#
이후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종정경, 판돈녕부사 직을 재역임했다.
1891년(
고종 28년)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 한달 뒤인 3월에
시호 '효정(孝貞)'을 받았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
[15] 계좌에 안장되었다.
1899년(
광무 3년)
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그래서
황족의 범위에 들어갔기에
[16] 종친의 범위는 임금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 봉군될 수 없었다.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받고 상보국숭록대부로 추증받았다.
[17] 봉호는 왕실의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조씨의 본관 임천(林川)의 '임(림, 林)'에서 따왔다.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지은
연생전과 1888년(고종 25년) 복구한
교태전[18] 경복궁 내 왕비의 침전.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1876년 화재로 불타고 12년이 지난 이 때에야 다시 복구했다.
의
현판을 그가 썼다.
## 두 건물 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던 것을 1995년에 복원했는데, 현재 연생전 현판은 새로 써서 만든 것이지만, 교태전 현판은 1900년대 초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서 지금 경복궁 교태전에 가면 그의 글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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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KBS 〈
찬란한 여명〉에서는 양영준
[19]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민우 前 국회부의장 역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의 친구 신대근 역을 맡았다.
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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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KBS 〈
명성황후〉에서는
허기호[20] 허장강의 장남이자 허준호의 이복 형.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인촌 김성수 역을, 〈징비록〉에서 정언지 역을 맡았다.
가 연기했다.
갑신정변 에피소드에서 개화당 내각의
좌의정 직을 맡은 모습으로 잠시 등장했다.
- 양부 :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 ~ 1828)
- 양모 : 군부인 임천 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1805 ~ 1871) - 참봉 조재익(趙在翼)의 딸
- 생부 :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 ~ 1848)
- 생모 : 증 정경부인 대구 서씨(贈 貞敬夫人 大丘 徐氏, 1810 ~ 1834) - 서탁수(徐鐸修)의 딸
- 계모 : 정경부인 순천 박씨(貞敬夫人 順天 朴氏, 1818 ~ 1888) - 박해익(朴海翊)의 딸
- 양동생: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 1855 ~ 1922) - 이신응[21](李愼應)의 아들
- 정부인 : 정경부인 청송 심씨(貞敬夫人 靑松沈氏, 1831 ~ 1877) - 심우영[24]
청평위 심익현(靑平尉 沈益顯)의 현손, 영의정 심지원(領議政 沈之源)의 5대손
(沈愚永)의 딸, 민영휘(閔泳徽)의 이모- 장녀 : 심상만[22]
대사성 심희순(大司成 沈熙淳)의 아들, 증 비서승 심정우(贈 秘書丞 沈正愚)의 손자, 영의정 심상규(領議政 沈象奎)의 증손
(沈相萬)의 처 - 차녀 : 음판관 조준호[23](蔭判官 趙駿鎬)의 처
- 계부인 : 정경부인 수원 김씨(貞敬夫人 水原 金氏, 1859 ~ ?) - 감역 김기헌(監役 金基憲)의 딸
부인이 정경부인 청송 심씨와 수원 김씨 두 명이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수원 김씨[26] 1859년생. 완림군보다 28살 연하이며 심지어 완림군의 사위 심상만(沈相萬)보다도 13살 연하였다.
사이에서 딸 하나와 아들 이기용을 얻었다. 이기용은 그가 59세에 낳은 늦둥이였는데 2년 뒤 이재원이 사망하여 고작 3세의 나이에 이기용은 계동궁 사손이 되었다. 이후의 가계는 이기용 문서 참조. 문제는 이기용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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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림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