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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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은전궁 추증 궁주


대한제국 장조의 손자
풍계군 | 豐溪君


조선 장종의 손자
풍계군 | 豐溪君

봉호
풍계군(豐溪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당(瑭)
양부
은전군
양모
군부인 평양 조씨(平壤 趙氏)
생부
은언군
생모
미상[2]
부인
광산군부인 광산 김씨
(光山郡夫人 光山 金氏, 1803 ~ 1864)
자녀
1남
장남(서자) - 익평군(益平君, 1824 ~ 1863)[3] 측실 전주 이씨 소생
양자 - -경평군(慶平君, 1832 ~ 1895)-[4] 파양
양자 - 완평군 이승응(完平君 李昇應, 1836 ~ 1909)[5]
생몰
기간

음력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
양력
1783년 3월 3일 ~ 1826년 6월 13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과 후손



1. 개요[편집]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손자이자 은언군의 넷째 아들. 철종 즉위 후 삼촌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2. 생애[편집]


1783년(정조 7년) 2월 1일, 한성부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상계군과 이창순, 이창덕 등이 있었다. 그의 유년 시절의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이후에도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에도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1786년(정조 10년) 형 상계군의 추대 사건에 연좌되어 온 가족이 강화도로 갈 때 같이 가서 성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812년(순조 12년) 8월 사옹원봉사 박종일과 한광우 등이 역모를 꾸미다 발각당했다. 이때 은언군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추대하려 했다 하여 사간원,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순조가 사건을 무마시켜 이성득, 이철득, 이쾌득 등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사형당할 위기를 모면했다.

상계군의 문제도 있고 이런저런 역모 사건과 관련있기 때문에 핏줄만 왕족일 뿐 전혀 그에 걸맞게 예우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전에는 봉군되지 않았다. 그 어떠한 일체의 대외활동도 자제하며 조용히 살다가 스트레스로 인한 잦은 잔병치레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1826년(순조 26년) 5월 8일 만 4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 소의대부(昭義大夫)에 증작(贈爵)되었다. '풍계군(豐溪君)'이라는 군호가 언제 내려졌는지는 미상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종 즉위년부터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증직될 무렵에 같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51년에는 왕명으로 은전군의 양자가 되었는데 둘 다 죽은 뒤였다. 1858년 11월에는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으로 다시 품계가 올라갔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군 동막동에 자리잡았으며 나중에 경기도 과천군 남면 당정리(현재의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은전군묘 근처로 이장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훗날 위치가 잊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3. 가족과 후손[편집]


본 부인인 광산군 부인 광산 김씨(1803 ~ 1864) 사이에는 자녀가 없고, 첩인 전주 이씨[6]에게서 서자 익평군 이희를 보았다. 그러나 익평군은 은언군큰아들이자 풍계군의 생가 큰형 상계군양자입양갔다.

그래서 정작 실제 풍계군의 대는 끊기게 되었다. 이에 풍계군 사후인 1851년(철종 2년)에 조정에서는 촌수로 17촌[7] 조카뻘인 이세보(李世輔)를 풍계군의 사후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세보는 이름을 이호(李晧)로 바꾸고 '경평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경평군은 안동 김씨세도정치를 비판하다가 정권에 밉보여 1860년(철종 11년)에 강제로 파양당했다. 다시 끊긴 풍계군의 대는 다시 19촌[8] 조카뻘인 이신덕(李愼德)이 새 양자로 들어와 이었다. 이신덕은 '완평군'으로 봉해지고 이름을 이병(李昺)을 거쳐 이승응(李昇應)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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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호는 경기도 남양주 일대에 있던 '풍양(豊壤)'의 '풍(豊)'을 따고 친형의 작호 상군(常溪君)의 '계(溪)'자 돌림에 맞추어 지었다.[2]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선원보》, 《선원계보기략》에는 풍계군을 은언군의 서자로 적어두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863년(철종 14년)에 만든 《선원보》, 《선원계보기략》에는 서자가 아닌 것으로 나와 있다.## 다만 같은 책에서 풍계군의 서자인 익평군도 적자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이쪽에 오류가 있고 이를 후대에 서자로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 적자라면 상산군부인 송씨가 어머니이고, 서자라면 은언군의 여러 첩 중 한 명이 어머니일 것이다.[3] 이복 형 상계군의 양자로 출계.[4] 원종의 차남 능원대군의 8대손.[5] 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6] 원래 조선은 엄격한 성리학적 유교 사회이기 때문에 동성동본 간에는 절대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풍계군뿐만 아니라 풍계군의 아버지 은언군까지도 동성동본인 전주 이씨를 첩으로 두었다. 이 때문에 익평군의 생모 전주 이씨는 전주 이씨 선원세계나 선원보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1863년에 병조판서 김병학이 그의 시호를 청하는 시장을 올릴 때, 익평군의 생모 전주 이씨의 존재를 언급하며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7]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8]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