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군(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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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왕자
의창군
義昌君

봉호
의창군(義昌君)[1]
시호
경헌(敬憲)
본관
전주(全州)
이름
광(珖)

장중(藏中)

기천(杞泉)
부왕
조선 선조
생모
인빈 김씨(仁嬪 金氏)
부인
양천군부인 양천 허씨
(陽川郡夫人 陽川 許氏)
생몰
기간

음력
1589년 미상 ~ 1645년 10월 15일
양력
1589년 미상 ~ 1645년 12월 2일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1. 개요
2. 생애
3. 사망과 이후
4. 여담
5.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선조의 서8남으로 후궁 인빈 김씨에겐 4남이다. 의안군신성군, 정원군의 친동생이다.

2. 생애[편집]


어머니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았고, 본인도 총명해서 아버지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15세 되던 1603년(선조 36년) 4월에 혼인하였다. 부인은 양천 허씨로, 허난설헌의 오빠이자 허균의 형인 허성의 딸이다. #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유영경의 옥사가 마무리된 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의창군은 광해군폐모살제를 안좋게 생각하여 폐모살제를 결정하는 회의에도 불참하였다. 이에 유학 지차택이 그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처숙부 허균의 역모 사건 때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작호를 박탈당하고 경기도 내 모처에[2] 위리안치되었다.[3]#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작호를 회복하였다. 이후 인조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종친으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살았다.

3. 사망과 이후[편집]


1645년(인조 23년) 사망했다. 향년 57세.[4]

4. 여담[편집]


글씨를 매우 잘 써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큰 글씨(大字)를 잘 썼다고 한다. 1636년, 5차 조선 통신사닛코 동조궁 참배를 앞두고 에도 막부가 편액으로 사용할 인조의 어필 및 여러가지 선물을 요청하였는데 조정에서 어필 만큼은 반대하여 의창군이 글씨를 대필하여 보냈다.

구례 화엄사대웅전 편액[5]일주문에 걸려있는 '지리산화엄사' 편액[6]도 의창군이 썼다. 대웅전 편액은 번각(飜刻)되어 인근의 하동 쌍계사, 서울 조계사, 진관사, 완주 송광사 등 여러 사찰에도 걸렸다. 예산 수덕사, 정읍 내장사에도 걸렸으나 이쪽은 나중에 교체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어머니 인빈 김씨의 묘소인 순강원 권역에 있다.

5. 가족 관계[편집]



  • 정부인 : 양천군부인 허예업(陽川郡夫人 許禮業, 1589 ~ ?) - 허성(許筬)의 4녀
    • 봉사손 : 낙선군 이숙(樂善君 李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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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호는 경상남도 창원의 옛 지명인 의창(義昌)에서 유래했다[2] 실록 원문에는 ‘기읍(畿邑)’이라고 되어있다. 기읍은 ‘경기도 내의 고을’이란 뜻으로, 의창군의 정확한 유배지는 적혀있지 않다.[3] 圍籬安置.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4] 세는나이 57세.[5] 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이라는 낙관이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6] 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낙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