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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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라이히스크로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 때 사용되던 왕관이자 제국의 상징으로, 10세기 후반부터 1806년에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역대 황제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선제후들이 선출한 새로운 황제는 선출 직후 로마인들의 왕에 즉위할 때에 이 왕관을 썼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의 보물고(Schatzkammer)에 전시되어 있다.
2. 역사[편집]
황제관은 오토 1세의 재위기인 962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제관에 대한 첫 문헌 상의 기록은 12세기의 것일 정도로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물건이다. 로마왕에 즉위할 때에 대부분의 황제들이 이 관을 쓰고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그 상징성 덕분에 황제의 상징물들[1]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다고 여겨졌다. 신성 로마 황제들은 1806년까지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왕관을 상징으로 사용했고,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하고 들어선 독일 제국은 자신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국임을 표방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제관의 모습을 본따서 독일 카이저의 왕관을 디자인하기도 했다.[2]
물론 황제관이 황제의 상징 그자체이기는 했지만 워낙 무겁고 장식성이 컸던 탓에 황제들이 매일 이 관을 쓰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황제들이 이 관을 실제로 썼던 것은 대관식이나 정말 중요한 행사 한정이었으며, 그 외의 경우에는 잘 착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들은 이 관을 프라하, 뉘른베르크 등에 소재한 황실 수장고[3] 등에 넣어두었다가 대관식 때에만 아헨이나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가져와서 썼다. 1796년에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유럽 각국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소실을 우려하여 레겐스부르크로 가지고 왔고, 1800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으로 또 가지고 왔다.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에도 황제관은 여전히 빈에 남았고, 1938년에 안슐루스가 일어나기 전까지 쭉 오스트리아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나치 독일은 황제관을 독일의 뉘른베르크로 가져가버렸고,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는 공습을 우려하여 일부러 뉘른베르크 황제 거성 지하 깊숙한 곳의 금고에 넣어 보관했다. 나치 독일이 1945년에 패망하면서 미군이 그해 8월에 황제관을 금고에서 꺼내 1946년 1월에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의 국립은행 건물로 가져왔다. 여담으로 1945년 미군이 장난스럽게 쓰고 있는 사진도 있다. 사진 그 이래 지금까지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에서 계속 전시되고 있다.
3. 모습[편집]
독특하게도 8개의 면을 가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정면에 큰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그 뒤로 홍예 하나가 뒤로 뻗어져 있는 구조를 하고 있어 꽤나 인상깊게 생겼다. 이같은 팔각형의 모양은 동로마 제국의 제관이나 아헨에 있던 카롤루스 대제의 예배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관 자체는 22캐럿 정도의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진주나 사파이어, 루비 등이 박혀 있어 겉보기에도 굉장히 화려한 느낌을 준다. 총 144개의 보석들이 왕관에 박혀 있으며, 그와 비슷한 수의 진주들이 역시 촘촘하게 박혀있다.
제관의 각 면에는 여러 글들이 새겨져 있는데, 정면 오른쪽 금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2명의 케루빔 사이에 서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ME REGES REGNANT', 즉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라는 문장이 써있다.[5] 뒤편 오른쪽 금판에는 예언자 이사야와 유다 왕국의 국왕 히즈키야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뒷편 왼쪽 금판에는 다윗 왕이 두루마리를[6] 들고 있는 모습이 있다. 정면 왼쪽 금판에는 솔로몬 왕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 있다.
황제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뒤쪽에 고정되어 있는 아치형 홍예 장식이다. 역시 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콘라트 2세의 이름이 진주로 새김되어 있다. 홍예 왼편에는 '콘라트, 하느님의 은총으로(CHUONRADUS DEI GRATIA)'가, 오른편에는 '로마인들의 왕, 아우구스투스(ROMANORU(M) IMPERATOR AUGUSTUS)'라고 글이 있다. 이 홍예 장식은 원래는 없었으며 9세기 경 콘라트 2세가 덧붙인 것으로 추정되며, 운송할 때는 보관하기 쉽도록 일부러 떼었다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참고로 황관 안쪽의 안감은 벨벳으로 만들어졌는데, 대략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옛날에는 주교관처럼 뒤에 띠를 길게 늘어뜨릴 수 있게 되어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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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 검, 오브 등이 있었다.[2] 정작 호엔촐레른 가문의 독일 황제들은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을 뿐더러 독일 제국이 멸망할때까지 나무로 만든 목업을 제외하면 왕관은 제작되지 않았다.[3] 프라하에는 아예 이 관을 보관하기 위해서 수장고용 성 하나를 짓기도 했다.[4] 물론 카롤루스 대제는 실제로 이 황제관을 쓴 적이 없다. 그는 800년대의 인물이고 황제관은 10세기 중후반에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5] 잠언 8: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6] 시편 99:4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가 쓰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