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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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발전
4. 자유도시의 현실
5. 창작물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Stadtluft macht Frei[영문표기]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언어별 명칭
라틴어
urbs
독일어
Freie Stadt
영어
city
중세 로망스어
Burgo Franco

중세 유럽사에서 도시중세군주 혹은 영주로부터 헌장을 수여받아 코뮌에 의한 자치권을 보장 받은 행정구역을 말한다.

본 문서의 표제인 "자유도시"는 중세도시를 현대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인구의 대규모 밀집 정착지'로서의 "도시"와 구분하고자 신성로마제국의 imperial Free city에서 착안하여 임의로 붙인 명칭이다. 중세 당시에도 프랑스 왕국의 모범 자유 도시(ville de franchise)나 신성로마제국의 자유 제국시(Freien Reichsstadt) 같은 여러 명칭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도시는 그 자체가 특권적 공동체였고, 대부분은 그냥 "도시"라고만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또한, 본문의 내용 상당수는 코뮌 문서와 밀접하므로, 해당 문서를 함께 보는 것을 권한다.


2. 배경[편집]


유럽의 자치공동체적 도시는 그 기원이 고대 로마로 소급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미 각 지방 도시에서 지방자치가 행해져 지방의회를 형성하여 집정관, 원로원, 그 외 '명예로운 직위' 등을 로마 시와 똑같이 선출하였다. 이러한 자치공동체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곧 무니키피움(Municipium)[1]으로, 무니키피움은 현재의 지방자치제(municipality)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자치에 행해지는 모든 비용은 현지 사회에서 부담했다. 로마는 절대적으로 도시 공동체 위주의 사회였다. 한 지역은 중심도시(civitas)가 근처의 촌락을 일방적으로 지배 및 장악하는 형태였으며, 전 로마 국토행정은 그러한 중심도시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나중에 제국의 유력 종교로 성장해나가게 된 기독교 역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교구를 편성하였다.

그런데 서로마 지역 중앙정부가 붕괴하자 이러한 자치도시는 그 자체로 각기 독립적인 국가가 되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듯 고대 로마는 공공 조세, 공공부조, 공공재정의 개념이 미약했고 투표로 선출되는 공직자가 자기 사비로 행정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무니키피움의 자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미 제국 말기부터 지방행정비용은 물론 중앙정부에서의 소요 증가까지 다방면에서 압박받던 지역 유력자들은 명예로운 경력이랍시고 지방도시에 돈을 뿌려대느니 그냥 자기 대농장과 거기 딸린 요새에 틀어박히는 것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시 사회 내 공백이 발생하는 상황에, 도시 자치 정부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도시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준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였다. 스스로 관료 조직을 갖췄을 뿐더러 신자들로부터 기부받은 재정을 가진 교회는 곧 도시 정부의 중심이 되었고, 각 도시마다 설치된 주교구의 주교는 사실상 도시영주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 초기에 도시의 주교를 뽑는 것은 곧 시장 선거에 가까웠고, 도시의 온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사업이기도 했다. 원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는 각 주교구 별로 주교를 선출하였는데,[2] 이 무렵에는 신실함 외에도 도시 행정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상류층 신분으로서 이를 부담할 여력이 있는지를 선출의 판단 근거로 삼고는 하였다. 이렇게 도시를 책임지게 된 주교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단연 로마교황일 것이다. 교황 자체가 원래 로마의 주교이며, 곧 베드로의 전승자로서 교회의 으뜸이 되었는데, 서로마 붕괴와 여러 게르만계 부족이나 사라센인, 노르만족의 침입 등 혼란 속에서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와 이탈리아 각지의 안녕을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렇게 고대 로마 전통 + 가톨릭 교회로 이뤄진, 주교 하 도시 통치 조직은 그 본질이 도시민의 필요와 합의하고 결부되었다.[3]

10~11세기에 들어 서유럽의 혼란이 끝나고, 인구 증가와 상업 발달에 힘입어 도시 및 도시민이 성장하여 새로운 도시들이 생성되었다. 또 중세 초기에 도시의 사법권이나 경영권 등을 주교에게 위임했던 도시들은, 차츰 그 시민들이 그것을 다시 되찾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도시민 간의 서약공동체, 즉 코뮌 혹은 코무네가 탄생하였다. 이들 조직은 도시의 확산을 따라 서유럽에 더 많이 오밀조밀하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무력을 사용한 도시들도 있고, 주교와 원만하게 합의한 경우도 있고, 을 주고 산 경우도 있다.


3. 발전[편집]


자유도시라고는 하나, 중세 성기 초입 당시의 자유의 개념은 현대의 자유와는 조금은 달랐다. 중세의 자유도시들은, 일반화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개별의 사례가 전부 상이한 봉건제 특유의 계약을 기반으로 한 귀족 계층, 성직자 계층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정치적 주체들을 묶을 수 있는 개념에 가깝다.

사실 중세 유럽은 행정 능력은 극히 부족했으나, 가톨릭 교회가 보전한 고대 로마의 유산 덕에 법적인 개념 자체는 비교적 풍부한 편에 속했다. 게르만족의 관습에만 의존했다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영주 XX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면 끝날 것을 교회 덕에 '영주 XX에게 이 지역의 사법권, 십일조 징수권, 금지령권, 징집권, 시장세 징수권, 벌금 징수권을 부여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왕권이 바닥을 치던 중세 혼란기에는 그저 표현을 고급스럽게 하는 것에 불과했고, 저런 그럴싸한 표현과 무관하게 영주들은 관습과 무력에 기반한 자의적 지배를 행했다.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1세기부터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고대 로마에서부터 전해진 도시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기반으로 도시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화하여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다.

도시의 대부분은 장원(농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영주에 의해 지배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한 마을에 섞여 살더라도 누구는 A 영주, 누구는 B 주교의 지배를 받거나, 주교는 사법권과 징세권을 행사하고 영주는 징집권을 행사하고, 주교는 교회법 법정을 주최하고 영주는 세속법 법정을 주최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여려 영주들이 대단히 복잡하게 지배권을 행사했다.

농노제 문서에서 보듯, 시간이 흐를수록 자유민과 농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면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몇 가지 대표적인 인신 상의 예속이 강제되는지 여부로 판단하였다. '인신 상의 예속이 되었는가' 를 구분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결혼세와 같은 게르만의 관습에서 유래한 납세 항목과 부역에 대한 동원 여부였다.

코뮌에 의한 자치가 퍼지기 전 도시민을 이루는 주 계층은 첸수알레스(Censuales)였다.[4] 이들은 교회에 예속된 예속민으로서, 농촌에 예속된 예속민인 농노와는 법적으로 구분되는 계층이었다. 농노와 다르게 거래와 이주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다만 인두세와 상속세와 결혼세가 부과되었다. 10세기 말엽 귀족들이 신앙심이 깊어지고, 유럽의 경제가 활성화되자 귀족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귀족에게 돈을 지불하여 '이전 주군의 위령 미사를 바치는 조건'으로 교회의 예속민으로 주군을 갈아탄 것이다.

도시민의 투쟁, 즉 코뮌 운동은 대체로 이러한 책임과 위에서 말한 관습에 기반한 자의적 지배에서의 해방, 즉 성문화 된 법과 계약에 의거해 지배 받는 것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도시들은 자치권을 얻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과정이 필요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그냥 자유민들이 무력을 행사해서 영주나 주교를 쫓아내버리고 자치를 행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시민들이 주교를 조지고 자치를 획득한 리에주,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플랑드르 지역들의 도시 자치가 있으며, 스위스 동맹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가 되고 오스트리아로 본거지를 옮기자 본래 영지인 합스부르크 백작령에는 신경을 못 쓰는 사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잠깐 제위를 잃자 그 틈을 타 무력으로 독립선언을 한 것이었다.[5] 물론 이러한 시도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플랑드르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잘 먹혀들어갔지만, 캉브레처럼 주교가 인근의 백작 등 귀족에게서 지원을 받아 유혈진압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왕과 귀족들은 머리가 커진 자유민들을 별로 달가워하진 않았다. 이를테면 프랑스카페 왕조 이래로 파리가 공식적인 수도였으나, 프랑스 왕들은 성질 더러운 파리 시민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파리에 직접 입성해서 살기보단 파리 근교에 궁전을 짓고 지내는게 보통이었으며,[6] 영국의 수도 런던도 왕조차 런던 시민들의 자치에 간섭하는 것이 매우 제한되었기에 이 문제를 두고 왕이 런던 시민들과 권력 싸움을 벌이는게 흔했다.[7]

한편 자유도시를 역으로 이용해보자고 생각한 군주들도 있었다. 특히 왕이나 황제의 입장에서, 지방 영주들에게서 그런 강력한 자유민 집단이 독립해나간다는 것은 곧 제후들의 이 약해진다는 뜻이었으므로, 도시들에게 자치권을 수여하는 것은 귀족을 견제하기에 매우 좋은 수단이었다. 이에 군주들은 직접 칙령, 특허장을 도시들에게 줘서 지위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일반적으로 도시는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고 군주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고 군주 직속 군복무 의무를 지니며, 군주는 자치적인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할 수 있게 인정해주는 교환이 이뤄졌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제국시(Freien Reichsstadt)와, 프랑스 필리프 2세가 시작한 모범 자유도시(ville de franchise)다.[8]

한편, 교회와 도시민 상호 간에 대한 태도는 복잡했다. 많은 경우 전통적으로 도시영주는 주교였고,[9] 도시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상당수 도시민은 인근 장원에 속한 농노 등 부자유민이었다가 대금을 지불하고서 자기 보호자, 즉 주군을 도시 주교로 바꾸어 교회 장원공동체나 도시공동체에 적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도시민이 된 후에는 상인이나 장인, 기타 임노동자로 살아갔고, 혹은 도시주재 ministerialis로서 주교의 가신이 되어 도시 행정 및 사법 업무에 종사하였다. 이렇듯 교회는 도시민의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시민의 축재와 신분상승 등에 기여하는 존재였다. 도시민이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려고 할수록 교회와 충돌하는 빈도가 커졌으나, 코뮌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는 곧 지역교회(현지 주교)와 중앙교회(교황청), 세속군주(황제) 간 갈등이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해서, 교회와 시민이 서로 피흘리며 싸우는가 하면, 상호 간 이해가 일치할 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서로의 존재권리를 지지하기도 하였다.[10]

12세기에 들어 경제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자유도시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자유도시가 설치되면 시장이 설치되어 상인들을 유입시킬 수 있어서 인구가 자연히 증가하고 수공업자들도 정착해서 미개발된 지역의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독일 지역은 도시 자치법의 발전 및 대장장이, 탐광꾼, 광부 등 금속 공업자들이 도시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동방식민운동도 그런 자유 도시 설치를 통해서 독일 상인들이 동유럽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3세기 아우크스부르크, 쾰른 등이 자치권을 보장받은 자유도시가 되었다. 15세기 이후로는 자유도시(Freie Stadt)와 제국시(Reichsstadt), 자유 제국시(Freien Reichsstadt)라는 이름이 동의어처럼 쓰이게 되었다. 자유 제국시들은 다른 영방 국가 제후에 비해 정치적 권력은 미약했지만 제국의회의 참석권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프랑스에서는 지방별로 세 유형이 있었는데, 각각 북부의 코뮌 도시(ville de commune)와 중부의 모범 자유 도시(ville de franchise), 남부의 집정관 도시(ville de counsulat)로, 이 중 북부의 코뮌 도시와 남부의 집정관 도시가 중부의 자유 도시보다 더 많은 자치권을 누렸다. 상술하였듯 모범자유시는 국왕에게 직접 특허를 딴 대신 꽤 많은 의무를 졌다.

영국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11]도 일종의 자유시였으며, 지금도 그 독특한 전통을 변형해서 운용하여 조세피난처로 활용되고 있다.

농노가 도시로 도망쳐서 1년+1 일동안 잡히지 않으면 자유민이 되었는데, 이것은 도시가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 영주의 사법권 같은 권한도 적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도시에 거주하는 농노도 영주의 사법권을 적용받지 않았던 것. 문서 상단에 언급된 '도시의 공기자유를 만든다'는 것은 이 도망농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4. 자유도시의 현실[편집]


일단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가장 편한 위치인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시민들이 모두 자유민이라는 점에서 영주의 지배를 받는 도시 내지는 장원보다 더 살기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상은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이 된다고 도시 내의 유력자, 특히 배신(陪臣. Vavasour)이나 도시 내 행정·사법업무를 수행하던 ministerialis, 소수의 부유한 대상인이 사실상의 영주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수도와 인접한 지역이 아니라면 국왕이나 황제가 직접적으로 통제하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도시 내 유력 가문의 수장이 시장이 되어 봉건 영주와 다를 바 없는 권한을 행사했고, 시 의회(번역에 따라서는 시참사회)에서는 여러 상인조합 및 동직조합의 알력다툼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쯤 되면 속된 말로 거주자들의 대가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지라 봉건 영지에 비해 정치적 불안정성이 상당히 심했다. 즉 여러 유력 가문들이 시장 자리를 두고 정치적인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중세말~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역사는 이런 면이 특히 두드러진다. 특히 자유도시도 여전히 기존 기득권 세력과 자유도시에서 성장한 신흥 세력 간의 갈등이 이어졌다. 이 신흥 세력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봉건 영주나 교회 세력에 비하면 세력이 미약했기에 결국에는 국왕 혹은 황제와 결탁하게 되고, 이는 절대왕정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신성로마제국의 경우는 황제-영주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 곳들이 대부분이라 어차피 누군가의 말이나 편을 들어야 하는, 이름만 자유도시인 곳들이 일반적이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도시들은 황제-교황-영주들 간 힘겨루기 속에 열심히 줄을 갈아타야했다. 무엇보다 자유도시들은 국력에서 황제와 영주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고 군사력도 미약하다보니 그들의 눈밖에 난다 싶으면 황제와 영주들이 보낸 군대에게 공격당하여 도시가 망할수도 있었다. 특히 북이탈리아는 줄 잘못 섰다가 도시가 쑥대밭이 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실권이 적었던 교황까지 당시에도 꽤 강한 도시인 피렌체의 대표였던 단테가 말을 잘 듣지 않자 그냥(...) 호출해서 추방하기도 했다.

또한,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기반이 되었기에 자유도시의 위상을 높게 쳐주지만, 실상은 자치 특허를 부여받은 행정구역의 이름이었을 뿐 도시라고 할 정도로 큰 곳은 드물었다. 14세기 중반 기준 독일의 자유도시는 3천 개에 이르렀지만 고작 인구 1천을 넘는 곳이 불과 200여 개였고, 1만을 넘는 곳은 20개에 불과했다. 전근대 시기 최소한의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준 인구가 2천인걸 생각하면, 중세 유럽의 대다수 자유도시는 현대로 치면 큰 마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유럽 대륙에선 프랑스 혁명 시대 직전까지 이어졌다. 성벽을 두른 도시도 별반 다를 바 없었는데, 성벽이 주거지에서 저 멀리 떨어져있고 널찍하게 밭, 목초지를 둘러서 도시라기보다는 그냥 시골(...)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고 성벽은 그냥 울타리 정도로만 보이는 케이스가 상당수였다.# 특히나 성벽은 축조 자체가 돈이 많이 깨지는 터라, 오히려 실거주자인 도시민은 어떻게든 성벽을 안 짓거나 자기 몫을 줄이려고 들고, 주군인 군주나 영주는 기필코 성벽을 쌓게 만들려고 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12]

또 이런 도시민들은 자신들이 촌락의 사람들과 구분되는 특권 계층이라는 의식이 무척 강했고, 배타성도 강하여 주변 농민들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경향도 있었다. 빌런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촌락민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을 정도니 도시민들의 촌락 멸시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만하다.#


5. 창작물에서[편집]


대부분의 창작물에서는 이러한 중세 도시의 특성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정치사·경제사·사회사적으로 꽤나 복잡한 내용들을 다루어야 하는데다가, 보통 중심인물들이 도시민인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대개 봉건귀족적 인물을 내세워 서사를 전개하므로, 그만큼 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협소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중 등장하는 이름은 자유도시이지만, 실상은 그다지 중세적 도시스럽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나마 도시가 등장한다면 특히 이탈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해상 공화국(maritime republic)을 모티브 삼는 경우가 많다. 대신에 이 경우는 봉건군주국과 도시공화국 간 독특한 상생관계를 잘 담아내는 경우도 있다.

반면 늑대와 향신료와 같이 아예 상인과 도시민을 주제로 다루는 몇몇 작품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 GTA 시리즈 - 리버티 시티[13]
  • 늑대와 향신료 - 뤼빈하이겐, 크멜슨을 비롯하여 주인공 일행이 들린 도시
배경의 모티프가 12세기~14세기 중세 유럽이면서도 지중해 연안보다는 중유럽이나 북유럽이라서, 그 묘사를 보면 실제 역사 속 도시의 모습과 거의 같다. 15권에서는 상업이 발달한 자유도시 레노스를 바라보며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만든다."를 모티브로 한 "모든 시민에게 자유 있으라."라는 크래프트 로렌스의 독백도 등장한다.
연합체이고 가맹한 각국의 규모가 도시국가급이라서 이렇게들 생각하지만, 사실 중세도시 및 도시국가하고는 거리가 멀다. 원문은 "Free Marches"인데, 제대로 번역하면 "자유(변경)주들"로 번역해야 한다. 실제로 각 도시국가의 수장들은 도시하고는 거리가 먼 공작(duke)이나 변경백(margrave; markgraf), 국공(prince), 부백작(viscount), 국왕(teyrn),[14] 대사(ambassador), 상서경(lord chancellor) 등 봉건적 관직이나 작위의 일종으로 칭해진다. 대체로 여러 도시공화국과 봉건제후국이 난립하였던 중세 이탈리아의 정치환경을 연상케 한다.
일부 봉건군주국이나 교회군주국도 있지만, 그 구성국은 대체로 공화정 도시국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도시와는 거리가 먼,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도시이다. 문명에 속한 도시가 여러가지 이유로 충성심을 잃게 되어 그 수치가 0에 도달하면 반란이 일어나 자유도시로 바뀐다. 자유도시가 되면 원래 그 도시를 지배하던 문명은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며 해당 도시는 어느 문명에도 속하지 않은 아나키 상태의 적대적(모든 문명에 호전적으로 바뀐다) 중립도시가 된다. 자유도시는 자유도시로서의 기본 영향력으로 10의 충성심을 턴마다 얻지만 높은 수치는 아니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 주변국중 가장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는 문명으로 다시 편입을 요청한다. 다만 만약 주변에 기본 충성심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명이 없을 경우 충성심이 올라가는 자유도시로 남을 수도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종종 발생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자유도시는 전쟁으로 인한 페널티가 전혀 없이 무력으로 흡수할 수 있는 도시기에 모든 플레이어가 무력점령을 노릴것이므로 설사 충성심이 상승하는 자유도시가 되었어도 멀티플레이에서는 현실적으로 오래 존속하기 힘들다. 또 예외적으로 지도자를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로 플레이하면 자유도시 상태를 건너뛰고 타 도시를 자신의 문명으로 흡수 가능하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도시국가도 영향력을 행사해 턴당 충성심 감소를 일으켜 자유도시로 바꿀 수 있지만 도시국가는 도시국가로서의 기본 영향력으로 인한 턴당 충성심 획득이 자유도시의 두배인 20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상황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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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표기] Urban air makes (you) free.[1] 단순히 읍락이라는 뜻이나, 제국화 되는 로마 초기에는 로마 시민이 사는 콜로니아(colonia)와 구분되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맹시, 즉 2등 도시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국화 된 로마가 전 인민에게 시민권을 뿌려서 그러한 구분이 사라졌고, 그 대신 자치공동체의 의미로 변화했다. 무니키피아의 거주민인 무니켑스municeps는 '(시민의)의무자'라는 뜻이었으며, 무니키피움은 '공동 의무'라는 의미가 되었다.[2] 새 주교구의 탄생도 멀리 교황청에서 내려보내거나 하는 게 아니라 이웃한 주교에게서 서품 받아 이루어졌다. 이러한 절차는 지금도 마찬가지. 반면 고대 로마의 권역 밖 부족제 사회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아일랜드 등의 켈트 교회는 주교 하 도시단위 주교구가 아닌 부족단위 수도원 중심의 독특한 종교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였다.[3] 그래서 코뮌 운동이 일어나는 동시에 서임권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주교와 도시민의 관계도에 따라서 양자가 교황청의 간섭에 공동대응하거나 역으로 교황과 연대하여 지역교회를 공격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4] 한국 역사학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개념이라서 이렇다할만한 번역어가 없다. 일본의 한 논문에서는 제단민(祭壇民)이라고 옮겼다. 당대 문서에서 사용된 용어는 첸수알레스이나, 이하 서술에서 교회 예속민으로 언급된 서술들도 다 이 첸수알레스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5] 베른, 취리히 같은 자유도시들은 아예 영토국가 수준으로 주변 영지들을 하나씩 합병하여 넓혔고, 나중에 아얘 스위스 연방에 통째로 가입하였다.(...) 합스부르크의 탈환시도도 무력으로 저지시켰다.[6] 베르사유 궁전이 대표적이다.[7] 이러한 흔적은 시티 오브 런던으로 남아있다.[8] 도시는 부유한 재정으로 세금은 물론 양질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는데, 이 점이 군주의 권력에 큰 보탬이 되었다. 군주들이 도시에서 이익을 취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필리프 2세가 부빈 전투에서 다국적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데에도 일조하였고, 신성로마황제들이 교황 지지세력이나 유력 제후를 상대할 때도 큰 도움을 주었다.[9] 서로 격이 다른 영주가 넷이나 있었던 아미앵처럼 도시 내 공동영주가 둘 이상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 이들 영주 사이에는 권리와 영역이 나뉘어있거니와 주교가 백작이나 성주 등 다른 영주보다 도시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당장 아미앵에서는 백작도 주교에게 거의 봉신으로 행세하였을 정도.[10] 전자의 경우는 교황의 편에 가담한 주교에 맞서 황제의 편을 들어 자치권을 획득하려했던 독일 주교도시, 돈이나 무력으로써 주교를 몰아내려고 했던 몇몇 북부~중부 프랑스 및 북이탈리아 도시들이 있다. 후자의 예시로는 개혁교황 시대에 교황청의 간섭에 맞설 세력을 자기 도시에서 구했던 지역주교나 자기 권역에서 새 주교구/도시가 분구해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주교 및 시민 일동(...) 등이 있다.[11] 그레이터 런던이 아니다. 그레이터 런던은 광역시로서, 원래 시티(city)나 보로(borough) 등으로 불리던 여러 별개 도시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탄생했다.[12] 성벽의 축조 및 관리는 도시를 분할하는 몇 개의 소규모 공동체(특히 재판공동체나 종교공동체) 단위로 부과되었고, 그 외에도 성문 및 성벽에 파수병을 세우거나 직접 파수임무를 맡는 일, 방어 시 무장하고 성벽에 투입되거나 그 일을 대행할 용병을 유지하는 일 등 몇 가지 의무가 뒤따랐다.[13] 이름이 자유(Liberty)시(City)인거지 도시 자체는 자치권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설정상으로는 미국 내 리버티 주라는 가공의 행정구역에 있는 도시이다.[14] 웨일스어로 왕(king)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는 웨일스 공국(principality of wales) 성립 이전에 웨일스 내 군주들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지닌 자가 자칭하던 예가 많았고, 오늘날에는 체스 기물 중 을 부르는 다른 용어 정도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