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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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fal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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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팔츠 중 가장 오래 살아남아 영향력을 끼치면서 '팔츠 선제후'라고도 불렸던, 옛 '라인 궁중백작령'의 소재지인 라인란트팔츠.

언어별 명칭
라틴어
Palatium
독일어
Pfalz, Königspfalz
영어
Pfalz, Kaiserpfalz[1]

1. 개요
2. 역사
2.1. 탄생
2.2. 소멸
3. 건축 및 시설



1. 개요[편집]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궁정백이 관리했던 궁정. 로마팔라티노 황궁에서 기원한 라틴어 Palatium에서 유래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팔츠.[2] 라인란트팔츠의 어원이다.


2. 역사[편집]



2.1. 탄생[편집]


중세 유럽에는 현대와 같은 고정적인 수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3], 황제 혹은 은 정기적으로 팔츠에서 팔츠로 이동하면서 머무르는 동안 수도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유럽에서도 상대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많았거나, 상공업이 발달했던 영국, 프랑스남유럽 등지는 고정된 수도가 있었지만[4], 그럴 여유가 없고 상대적으로 지방분권적인 경향이 강했던 동유럽이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고정된 수도를 둘 수 없었다. 팔츠는 교통 요지나 부유한 지역, 농업 생산력이 좋은 지역에 위치했으며, 일일행(一日行)을 염두에 두었기에 하루 동안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인 30km 간격마다 팔츠가 세워졌고, 이러한 팔츠를 따라 생긴 길을 이왕도(移王道)라는 의미에서 이티네라레(Itinerare)라고 불렸다.[5]

팔츠를 옮겨 다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왕들은 국토를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을 감시하고 계약관계를 상기시켰으며, 팔츠에 머물며 칙령을 발표하고 봉신들을 중재했으며, 궁정회의와 재판, 대관식, 선거, 기타 대규모 행사를 주재했다. 또, 당시로서는 부족하고 한정된 지역생산성을 극복하여 왕과 가신들을 먹여살려야 했으므로, 부유하고 농업생산이 좋은 지역에 팔츠가 위치할 수 밖에 없었다. 각 팔츠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세웠기에, 왕은 주기적으로 팔츠를 옮겨다님으로써 해당 팔츠와 그 지역의 물자가 고갈되는 것을 방지했으며,[6][7] 이러한 일상적인 순방은 궁정의 경제적 궁핍함을 잠재울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 이러한 곳은 제국칙령과 같은 특권을 지닌 주요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평시 황제가 부재한 경우에는 각 팔츠에 배치된 백작, 즉 궁정백이 팔츠 일대의 직할령 재산을 관리하면서 주변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팔츠의 용도는 황제 혹은 왕의 취향에 따라 모습이나 용도가 변용되기도 했는데, 특히 황제들이 겨울을 보내는 겨울궁전, 여러 축제를 즐길 축일궁전과 부활절 축제를 위한 부활절 궁전 등이 있으며, 때때로 주교좌 성당이나 수도원으로 변용되기도 했다.


2.2. 소멸[편집]


후일 팔츠들은 왕이 한 곳에 정착하면서 원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기술 및 산업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으로 지역생산성이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팔츠가 주로 운영되었던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는 차츰 군주들이 본인의 확실한 근거지를 토대로 통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왕국에서는 일드프랑스 일대의 부유한 직할령을 토대로 제후들을 하나씩 제압해나갔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공위 후 선거군주제가 도입되어 선출된 황제가 자기 영지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선제후 등 유력제후가 권한 및 의무를 분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팔츠 및 궁정백은 그 존재의의를 잃고 군주나 유력 제후의 봉신이 되거나 라인 궁정백처럼 독자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팔츠들이 대체로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이면서 농업 생산량이 많았으므로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로마, 취리히, 파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등 큰 팔츠들은 누가 들어도 알 만한 대도시들로 성장하였지만,[8] 팔츠 내부에 있던 건물들은 앞서 언급대로 파괴되었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체 팔츠들의 목록은 독일어판 위키피디아의 관련 항목에 정리되어 있다.#


3. 건축 및 시설[편집]


팔츠의 건축 양식은 대체적으로 로마네스크로 추정되고 있으나, 대다수의 팔츠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파괴되었거나 용도가 변질되는 과정을 거쳤기에[9], 대략 어떤 모습인지 알기 어려워진 것이 많다. 주로 황제 혹은 왕을 비롯한 많은 수행원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형부지에 세워졌으며, 동시대의 들과 같은 성벽으로 둘려싸인채로 성벽 내부로 성벽 가까이에 위치한 탑과 그레이트 홀이자, 왕가의 거주지인 팔라스와 예배당, 숙소, 마구간, 창고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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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미 상으로는 동원어인 'Palace' 혹은 'Imperial palace'로 옮길 수 있으나, 역사적으로 독일사적 개념의 궁정을 가리킬 때에는 대체로 그냥 독일어 표기 그대로 쓴다. 이는 독일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독일어에서 궁전에 해당하는 단어는 'Palast'나 'Schloss'로, palast도 동원어이기는 하나 pfalz와는 별개의 단어이다. 참고로 'Pfalzgrafschaf'(Palatinate)는 단순히 시설만이 아니라 그 시설을 중심으로 설정된 궁정백작령을 가리킨다.[2] 독일어의 PF는 F의 입모양에서 기식을 P처럼 파열시켜야 하는 무성순치파열음이다. P와 F를 동시에 연달아 발음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당연히 이 발음은 한글로 나타낼 수 없다.[3] 설령 법적으로 어디를 수도라고 명문화했더라도, 그냥 군주가 대관식을 치르는 곳 내지는 개인 취향으로 자주 방문하는 곳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대표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명목상 수도였던 디종이 있다.[4] 대표적으로 동로마 제국이 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이래로,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멸망할 때까지,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잠시 아나톨리아 반도로 쫓겨났을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수도를 이전하지 않았다. 영국로마 제국령 시절부터 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국제적인 상업도시로 성장했던 런던의 경제력이 압도적이었던 탓에, 노르만 왕조 시기에 처음 런던에 수도를 정한 이래로 왕실이 내내 그곳에 뿌리를 박았고, 같은 이유에서 프랑스파리에서 중세 시기에서 현대 공화국 시기까지 단 한 차례도 수도 이전을 하지않았다.[5] 현대 영어의 itinerary로도 이어졌는데, (주로) 비행기 티켓 교환권의 통칭으로서 교환용 고유번호와 이동경로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 또한 itinerary는 토익 빈출 단어로서 여행일정표를 가리키는 데에 많이 쓰인다.[6] 궁정에서 요구하는 물자량이 엄청났다. 동시대 전거(典據)인 색슨족의 제국연대기 “Annalista Saxo”에 따르면, 오토 1세 대제가 팔츠에 머물렀을 때, 대략 천여 명 정도의 수행원을 먹이기 위해 매일 1,000마리의 돼지와 양, 마차 10대 분량의 포도주와 맥주, 15,000포대의 곡식, 소 8마리, 이외에도 닭, 새끼돼지, 생선, 계란, 채소 등이 소비되었다고 적고 있다. 수행원의 가족과 기타 인원도 동행하였을 터이니, 실제 기록보다 몇 배는 먹여살려야 할 인원이 많았을 것이며, 어지간한 선제후라도 이런 막대한 물자 소모를 계속 버텨내진 못했을 것이다.[7] 게다가 중세 유럽은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수도에 물자를 운송하다가 손실을 입느니, 차라리 왕이 수도를 옮겨다니는 게 경제적이기도 했다.[8] 로마는 원래 대도시가 팔츠가 된거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로마는 이미 동서 로마 분할 이전부터 크게 쇠퇴하여 지방 도시 수준이 되었었다. 서방 정제들의 수도는 사실상 메디올라눔라벤나가 지속적으로 채택되었으며 당연히 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커녕 같은 펜타르키였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다.[9] 근동에서나 유럽에서나 후대로 가면서 건축물이 원래의 용도를 상실한 경우, 무식한 주민들이 집 짓는답시고 벽돌을 빼가거나 석재를 재활용하기 위해 부숴서 훼손한 건축 유물들이 상당히 많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의 지구라트, 그 유명한 플라비우스 원형 운동장과 로마의 각종 수도교들이 그 예이다. 혹은 고대 말~중세 초처럼 험난한 시기에는 현지주민들도 그게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운용할 여력이 없어서 해체 후 자재로 전용하거나 건축물 자체는 남기되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아미앵의 시민들은 외침이 하도 빈번해지자 고대 로마시대부터 사용해오던 원형극장을 성채로 재건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