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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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에서 발원하여 황해 연안 및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길이 58.60km, 유역면적 1,649.87㎢이다.
북쪽으로 흐르다가 예당저수지를 거쳐 오는 무한천[1] 과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서 합류한다. 그러다가 다시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하구 부근에서 천안시 광덕면에서 발원하는 곡교천과 합류한다.
2. 명칭[편집]
충남도청 이전 신도시인 내포신도시가 조성되어 있는 예산군 삽교읍을 통과하여 삽교천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삽교'라는 이름은 과거에 섶(땔나무)으로 다리를 만들었다고 '삽다리'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2] 이 때문에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삽교천은 고려시대에 한자 섶 신(薪)자를 쓴 신교천(薪橋川)이라 불리기도 했다. 揷이라는 한자는 '삽'을 표기하기 위해 나중에 붙었다. 예전에는 사읍(沙邑)이라고도 했다.#
3. 주변 지역[편집]
예산평야, 아산평야 일대의 관개수원이 되며, 하천 연안에 홍성읍, 삽교읍 등이 있다. 예산군과 당진시의 행정경계구역이라는 특색이 포함된다.
근처에는 삽교호 함상공원 및 삽교호조각관광지가 있으며, 충청남도 예산군에 본사가 소재한 충남고속이 운영하는 삽교천시외버스터미널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버스는 천안, 당진, 서산, 태안행 시외버스이나, 서울남부, 안산, 수원, 평택, 안성, 합덕 등 기타 다채로운 노선도 존재한다.
3.1. 삽교천방조제[편집]
일명 삽교호 일대로 통용되는 삽교천방조제가 존재한다. 삽교호는 삽교천 하구의 거대한 인공호이다. 해당 일원에 삽교천 방조제를 1976년 12월에 착공하여 1979년 10월 26일에 준공하였다. 삽교천방조제 준공 당시 왕복 2차로 포장도로가 처음부터 방조제 상에 가설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34번 국도, 38번 국도, 77번 국도[3] 가 지나가며, 방조제 완공 19년만인 1998년 국도 34호선 왕복 4차로 확장 및 선형개량 공사로 인해 삽교호 방조제 서쪽 갑문을 통과하는 구간은 일반국도 구간에서 해제된 상태인데, 해당 구간 자체가 통째로 개량 및 이설되어 일반국도 구간은 당시 개량으로 이설 개통된 삽교대교로 대체되었다.
4. 사건사고[편집]
4.1. 오페르트 도굴 사건[편집]
삽교천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서 에른스트 오페르트 일당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소재)를 도굴하기 위한 침투 경로로 활용되었다. 삽교천 또한 서해로 흘러가는 강 답게 썰물 때는 강물 수위가 크게 낮아지고 펄이 드러나는 특성[4] 이 있어서 밀물이 끝나기 전에 선박이 바다로 나아가지 않으면 꼼짝없이 펄밭에 갇히게 되므로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5] 한 오페르트 일당은 썰물이 되기 전에 배를 타고 서해상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4.2. 박정희의 마지막 공식 행사[편집]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이 열렸는데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면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외부에 공개된 박정희의 마지막 공식 행사 참석이 되었다.
사실 이 행사가 끝나고 중앙정보부 시설인 KBS 당진 송신소 시설 보강 준공식에 참석했는데 이 행사는 국가보안시설 관련 행사였기에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7] KBS 당진 송신소는 북한과 중공 등 당시 공산권 국가에 대한 심리전 방송을 하는 시설이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깊이 관여했기에 중앙정보부 시설이라고 불렀다.[8] 실제로 준공식 때 그날 저녁에 터질 사건을 암시하는 듯 소소한 해프닝들이 있었는데, 10.26 사태 문서 참조.
이 때문에 삽교천방조제에서 박정희 추모제를 지내기도 한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생전 마지막 공식 행사가 삽교방조제 준공식이었던 관계로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행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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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삽교천의 지류로 분리되어 있으나, 유로 연장이 삽교천보다 훨씬 더 길어 수리수문학적인 관점에서 사실상 삽교천의 본류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2] '다리'가 교각이 아니라 들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3] 준공 당시에는 34번 국도 한정이었으나(1981년 3월 14일 일반국도노선지정령 개정에 의거 국도 제34호선의 일부로 공식 지정, 당진~영덕선), 1996년 7월 1일 국도 제38호선 포승~대산 구간 노선 연장에 의거하여 38번 국도 구간 편입, 2001년 8월 25일 일반국도 77호선 신설로 77번 국도 중복 지정이 성사되었다.[4] 강 하구에 방조제나 하구둑이 없는 강의 하류 지역은 바닷물이 강을 따라 역류하기 때문에 강과 바다의 중간적인 성질을 가진다. 강과 바다의 중간 성질이 있는 지역을 기수(汽水)지역이라고 하는데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하류 지역도 하구둑을 건설하기 전에는 기수지역이었으며, 한강도 김포대교 옆에 설치된 수중보(水中洑)의 하류 지역은 기수지역이다.[5] 조선 후기에 사대부가의 묘는 관 주변에 현대의 콘크리트와 비슷한 회반죽으로 덮어버리는 회곽묘 양식인 경우가 많은데 오페르트는 회곽묘의 존재를 알지 못해서 단단한 회벽층을 깰 수 있는 장비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굴 시도에 실패했다. 오페르트는 당시 도굴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이 두꺼운 회벽을 깨지 못하자 관 주변에 마치 철판을 깔아놓은 것 같다고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회곽묘의 두껍고 단단하게 굳은 회벽층은 곡괭이로 깨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현대에는 회곽묘 출토를 위해 착암기 헤드가 장착된 굴착기가 동원된다.#[6] 이 사진이 박정희의 생애 마지막 사진이기도 하다.[7] 훗날 박정희의 당진 송신소 준공식 참석 장면은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후 26년이 지난 2005년 KBS 영상실록에 등장한다.[8] 이날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자신이 맡은 중앙정보부 관할 시설의 준공식이었으므로 본인도 당연히 참석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이 전화로 "지금 시국이 어지러운 판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국가안보상 곤란합니다. 내가 각하를 모시고 다녀올테니 김 부장은 서울을 지키시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안 그래도 차지철의 전횡에 분노한 김재규는 차지철의 이 전화 때문에 그날 '거사'를 치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