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브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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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 前 야구 선수. 포지션은 경력 초기에는 투수, 이후 우익수였다."스포츠 선수를 목표로 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종목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좋아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그 종목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 있는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요? 저는 공 치는 걸 가장 사랑했습니다."[1]
야구라는 스포츠의 아이콘 격으로 인식되는 선수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최초의 5인으로 헌액되었다.
2. 일대기[편집]
2.1. 명투수로 시작한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편집]
1895년 2월 6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독일계 이민자 가정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가족이 술집을 운영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이롭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하여[4] , 동네의 문제아로 손꼽히던 아이였다. 6살 때부터 음주, 흡연을 하였다고.[5] 그러다 7살 때 들어간 성모 마리아 직업학교(St. Mary's Industrial School)에서 선생으로 일하던 머사이어스[6] 보틀리어(Matthias Boutlier, 1872~1944) 수사를 만나 야구에 입문, 야구 선수 인생을 시작한다. 또래 선수들 보다 두 배는 되는 체격을 살려 처음에는 포수로 뛰었지만[7] 이후 투수로 전향했다.[8]"마운드에 올라갈 때 이상한 익숙함이 느껴졌어요. 마치 거기서 제가 태어난 듯한 느낌이요. 저로서는 공을 던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죠."
ㅡ 베이브 루스[2]
이후 성모 마리아 직업학교의 야구 팀에서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9] 의 잭 던 감독의 눈에 들어, 1914년 2월부터 마이너 리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베이브'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프로 생활이 처음이라 뭘 몰랐던 데다, 아직 촌티를 못 버리고 감독만 따라다녔기 때문에 "어린애"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처음에는 애칭(愛稱)이 아니라 멸칭(蔑稱)이었다.
보스턴에서 5년째인 1918년 시즌, 워낙 독보적인 타격 재능을 숨기지 못하고, 투수로서 13승을 올림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단 95경기만을 뛰고도 11개의 홈런을 쳐내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등극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좌완 투수로서 투수로 뛴 기간 동안 승률 1위(.659), 피안타율 1위였다(9이닝 당 7.07개). 같은 기간 아메리칸 리그에서 이거랑 비슷한 성적을 낸 사람은 단 한 명, 월터 존슨뿐이었다. 심지어 1916년에는 그 월터 존슨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평균 자책점 1위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좌완 투수로서 10연속 완봉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후에 샌디 코팩스가 깨기 전까지 좌완 투수 최다 연속 완봉승 기록이었다. 아니 10승 - 10홈런 기록조차도 2022년 오타니 쇼헤이에 의해 깨지기 까지는 104년이 걸렸다.[11]
야구 기자 제이슨 스타크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좌완 투수 1위에 베이브 루스를 선정했다.[12] 레드삭스 시절 월드시리즈에서 1916년에는 14이닝 1실점 완투승, 1918년에는 9이닝 완봉승, 8이닝 2실점으로 3경기 선발 등판해 31이닝을 던지며 3승 평균자책점 0.87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월드시리즈 역사상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레너드 코페트는, 당시에 지명타자 제도가 있었다면 하루는 선발투수로 등판, 이후 휴식일에는 지명타자로 출장해 400승 800홈런이 가능했을 거라고 예측했다. 다만 루스의 통산 ERA+는 1221.1이닝 동안 122 정도이고, 130을 넘긴 것도 투수로서 최고의 해였던 1916년에 158을 찍은 한 번 뿐이라 루스가 월터 존슨급은 물론 명전급 투수가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장담할 수는 없다.
베이브 루스는 타자 전향 이후에도 투수로 1년에 1~2경기 정도 등판한 적이 있다. 특히 선수 말년인 1930년과 1933년에는, 등판하여 9이닝을 다 던지는 완투승을 거둔 적도 있다. 누구나 알듯 투타겸업을 한다는 거 자체가 체력이 엄청 드는 일인데 거기에 홈런왕도 해봤던 수준급 타격 실력에, 윌터 존슨도 이겨봤던 제구를 가진 투수였다.
2.2. 밤비노의 저주[편집]
루스의 양키즈 이적을 보도한 1920년 1월 6일자 보스턴의 대표 지역 신문 <보스턴 글로브> 기사. 제목은 'Babe Ruth sold to the Yankees(베이브 루스, 양키스에 팔리다)'. 관련 동영상, 마지막 1등 내용 참조
당시 보스턴의 새로운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를 짓느라 빌린 공사비를 변제하려고 루스를 팔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펜웨이 파크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65만 불이 들어가긴 했으나 1912년에 완공되어 있었고, 프레이지는 그 후인 1916년에 구단을 현금 박치기로 50만 달러에 전 구단주로부터 사들인 상태였다. 1918년 보스턴의 우승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지는 뮤지컬 쪽으로 한눈을 팔았다가 망하면서 단번에 파산 위기에 처해버렸고, 루스의 직접적인 트레이드 사유는 이 때문이었다.
이후 베이브 루스의 초인적인 홈런 행진으로 양키스는 20세기 최고의 명문 팀으로 거듭났지만, 보스턴은 1918년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로 2004년까지 86년 동안 월드 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루스의 애칭을 따서 지어낸 것이 그 유명한 '밤비노의 저주'이다. 밤비노는 이탈리아어로 '어린애, 애송이'에 해당하는데, 당시 양키스 외야 관중석의 다수를 이탈리아계들이 차지하고 있었고[13] , 그들이 루스의 애칭인 'Babe'를 이탈리아어 식으로 '밤비노'라고 부른 것이다. 베이브 루스가 이탈리아계라서 '밤비노'로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루스의 부모(George Herman Ruth, Sr., Katherine Schamberger) 둘 다 독일계고, 당연히 루스 역시 독일계다. 즉, 밤비노라는 그의 명칭은 혈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베이브 루스는 같은 독일계인 루 게릭과 함께 양키스 내 독일계 미국인의 상징적 존재였다.
처음부터 대중들이 루스가 레드삭스를 상대로 저주를 걸었다고 인식한 것은 아니고, 1986년 월드 시리즈에서 레드삭스가 빌 버크너의 믿을 수 없는 알까기 어메이징을 당하고 나서, 뉴욕의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가 '밤비노의 저주'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 전까지는 루스의 이적은 단순히 돈이 급했던 보스턴 구단주 개인의 오판 정도로 치부되었을 뿐이었다.
2.3. 양키스 이적: 신화가 되다[편집]
1920년대는 여러모로 근현대 미국의 절정기였고 21세기 현재에도 미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아이콘들이 많이 나왔다.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세계 금융의 중심과 주식의 활황[14] , 라디오의 보급, 잭 뎀프시와 타니의 세기의 대결(1927), 찰리 채플린 등 할리우드 영화의 1차 전성기, 포드 T로 상징되는 자가용 승용차의 시대, 그리고 양키스에서 뛰던 베이브 루스가 이런 아이콘으로 꼽힌다. 1920년대의 베이브 루스는 단지 MLB라는 특정 스포츠의 간판을 넘어서서 미국 스포츠 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였다.
루스를 처음 트레이드할 당시 보도한 뉴스에서 양키스가 루스를 투수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내세웠지만 타자로서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여줬던 터라 이내 타자로 완전히 전향시키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는 야구의 역사를 바꿨다.
1920년, 이적 첫 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타자로서 풀 타임 첫 해였던 이전 해에 자신이 기록했던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 29개를 재경신했다. 루스 이전까지 메이저 공식 기록은 네드 윌리엄슨의 27개, 아메리칸 리그 공식 기록은 가비 크라바스의 24개. 풀 타임 첫 해에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을 갱신하고 2년째에 25개를 추가해 2배 가까이 기록을 늘려놓은 것이다. 1920년의 홈런 순위를 보면 54개의 루스 다음 2위는 19개의 조지 시슬러다. 그 다음해엔 59개의 루스 다음 24개를 친 켄 윌리엄스와 밥 뮤젤이었다. 한마디로 루스는 혼자 다른 세상에 있었다.
1921년에 우승 후 팀 동료들과 함께 친선경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5월까지 출장정지를 받은 루스는, 복귀후에도 관중석 난입 후 퇴장, 부진 등으로 주장 자리까지 뺏기며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당시 그는 110경기 출장 후 타율 3할 1푼 5리, 35개의 홈런과 99타점이란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전 시즌의 괴물같은 성적에 비하면 초라한 결과[15] 였고 월드시리즈에서도 17타석 2안타에 그치며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1923년은 그에게 설욕의 해였다. 루스는 데뷔 후 최고 기록인 3할 9푼3리의 어마어마한 타율과 함께 또다시 홈런왕(41개)이 되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이해 루스의 fWAR은 MLB 역사상 단일 시즌 1위이다. 무려 15.0. 이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자 시즌으로 꼽히는 해이다. 흔히 WAR이 3 이상이면 준수한 선수, 5 이상이면 올스타급으로 평가받는데, 루스는 무려 15였다. 쉽게 말해 올스타급 3명의 선수의 활약을 루스 혼자서 보여줬다는 얘기. 다만 이해에는 타율은 최고치였지만 홈런이 적었고, OPS와 wOBA도 다른 시즌보다 낮았는데도 수비 수치가 너무나도 높게 나와 fwar이 역대 최고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높은 타율도 당해 BABIP가 무려 4할 2푼 3리로 선수 시절 전체의 평균보다 크게 높아 운이 따랐던 시즌이라 과대평가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6] 물론 이 해의 성적에 운이 크게 따랐다고 해도 역사상 최고의 타자 시즌이라는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1924년에도 홈런왕 자리(46개)에 오르며 타율왕까지 석권하지만 줄부상으로 전반적인 선수층이 약화된 상태였던 양키스는 우승에 실패하고 만다.
1923년과 1924년에 몸 관리에 성공했던 루스지만 원래 음주와 문란한 성생활 등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재능을 믿고 연습을 게을리한 탓에 1925년에는 몸매 관리에 실패하며 체중이 무려 260파운드(120kg)가까이 나가게 된다. 이 시즌에 그는 실제로 병이 나서 팀 이동 중 기절해 입원했으며, 사망설까지 나온 터라 일부 신문은 그가 사망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결국 시즌 도중 호텔방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되는 등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던 25 시즌에 루스는 98경기만 출장하면서 .290과 25개 홈런이라는 양키스 선수 경력 최악의 기록을 남겼으며,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꼴찌에서 두 번째에 그친다.
절치부심한 그는 오프시즌에 작정하고 몸을 만들어 온다. 당시 양키스에 대한 기대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지만 제 컨디션을 되찾은 루스는 이런 예상을 비웃듯 홈런왕을 재탈환하며(47개) 타율 3할 7푼 2리, 146타점을 기록한다. 페넌트 레이스를 우승한 양키스는 당시 역대 최저 승률 내셔널 리그 우승자였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월드시리즈에서 쉽게 꺾고 우승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4차전 당시 홈런 세 개를 친 루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패배한다. 참고로 당시 월드시리즈는 지금 유명해진 소년과의 "약속 홈런"이 나온 시리즈이다. 그가 병상에 누워 있던 11살 조니 실베스터를 위해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지킨 것. 비록 아쉽게 우승에 실패했지만 루스가 건재했다는 것을 널리 알린 것만으로 26년은 대성공이었다. 또한 이 시즌 도중엔 1923년에 19세의 나이로 핀치 히터로 데뷔한 이후 두 시즌간 겨우 23경기 출장에 그친 유망주 루 게릭이 마침내 만개해 3할 1푼 3리에 16개 홈런, 112타점, 2루타 47개와 아메리칸 리그 1위인 20개의 3루타를 터뜨리며 든든한 조력자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도 컸다.
1927년, 루스의 기록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성적이었던 시즌 60홈런을 기록했고, 타율 3할 5푼 6리, 164타점에 장타율 7할 7푼 2리를 기록했다. 홈런 60개는 리그 전체 홈런의 15%에 해당했다. 90년대 이후 새미 소사, 마크 맥과이어, 배리 본즈 등의 기록 행진이 이어지며 그보다 높은 기록이 무려 7개나 나왔으나, 이후 저 셋은 모두 약쟁이란 게 밝혀졌다. 약쟁이들을 뺄 경우 27년 당시 루스의 60개 홈런을 넘은 선수는 단 2명, 1961년의 로저 매리스와 2022년의 애런 저지뿐이다. 또한 이 당시에는 그라운드에 떨어져도 튕겨 담장 밖으로 넘어가면 홈런으로 인정되었지만, 루스의 홈런 중 바운드 홈런은 없었다. 오히려 당시엔 끝내기 홈런을 안타로 처리했는데, 이 때문에 홈런 1개를 손해 봤다. 더 놀라운 것은 위에 언급됐듯이 루스는 21년에 59개를 때려낸 기록도 있다. 그리고 장타율 0.772는, 70여 년이 지난 2001년에야 나온 약즈의 괴물 같은 기록 경신 이전까지 최고 수준의 기록이었다.[17]
내셔널리그 홈런왕은 루스의 딱 절반인 30개를 때려낸 핵 윌슨이었다.[18]
사실 홈런이나 성적 면에서는 1927년이 최고일지 몰라도, 단순 스탯상으로는 오히려 1920, 21년이나 1923년이 루스에게는 최고의 시즌이다. 그러나 루 게릭과 함께 당시 기준으로 상식 밖의 수치를 만들어낸 최강의 클린업을 이뤄 당시 기준 최다 승 기록, 월드 시리즈 스윕을 만들어낸 팀 기록은 1927년이 최고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홈런왕 루스의 위대함 때문에 루 게릭의 괴물 같은 기록이 묻히는 경향도 있는데, 루 게릭은 당시 무려 47개를 때려내면서 3위 기록(30개)보다 아득히 많은 홈런을 쳐냈다. 루스를 제외하면, 당시 게릭이 기록한 47개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1930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즉, 1920년대까지 역대 최고의 홈런 퍼포먼스를 보여준 타자 2명이 한 시즌에 나온 괴물 같은 해였던 것이다.[19] 더 무서운 것은 양키스엔 공동 8위로 18개를 쳐낸 토니 라제리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1, 2위인 루스와 게릭이 쳐낸 홈런만 합하더라도 107개로 전체 팀 홈런 2위인 뉴욕 자이언츠와 2개밖에 차이나지 않았고, 양키스 전체가 쳐낸 홈런은 그 자이언츠조차 압살하는 158개로, 자이언츠의 1.5배에 가깝다.[20] 당시 팀당 평균 홈런 개수는 58개였으므로 다른 팀 평균보다는 약 3배 많다. 오늘날의 팀당 평균 홈런(2018 시즌 기준 186개) 기준으로 보면 한 팀이 한 시즌에 186개의 3배인 500~600개의 홈런을 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만약 체감이 잘 안 온다면, 저 수치를 메이저리그 현 경기 수인 162경기로 나눠 봤을 때 한 팀이 시즌 내내 경기당 홈런을 3~4개씩 친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 상식 밖의 수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당시 팀에 명예의 전당 선수가 루스와 게릭 말고도 꽤 많았다. 홈런 공동 8위인 토니 라제리와 22승에 빛나는 웨이트 호이트, 메이저리그 안타 1위의 얼 콤스 모두 명예의 전당 헌액자였다. 이들을 앞세운 27년의 양키스는 이른바 살인 타선(murderers' row)이라 불렸으며, 별명대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스포츠 팀 중 하나로 회자된다. 창작물 등지에서도 '27년 양키스'는 전설적인 강팀의 대명사로 언급된다.
엄청난 홈런 퍼레이드를 앞세운 이 강력한 팀은 당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었던 110승을 거뒀고, 2위를 19경기 차이로 손쉽게 제치고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했다. 월드 시리즈에서도 이들은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4 대 0으로 스윕해 버리고 손쉬운 우승을 차지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파이리츠 선수들은 양키스 선수들이 1차전을 앞두고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공이 계속 장외로 나가는 광경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체 능력과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감독이었던 조 맥카시와 대립이 불거지기 시작, 1934년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자, 양키스는 루스를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시킨다. 다만 당해 올스타전에는 참가했다.
마지막 시즌은 35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뛰었지만 당시 풀 타임 선수가 아니라 팀 운영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간지라 28경기에만 나왔다. 당시 타율은 1할 8푼 1리, 장타율은 4할 3푼 1리에 그쳤다. 비록 리그 22년차에 만40세, 몸이 완전히 망가진 이후였지만 워낙 클래스가 있는지라 안타 13개 중 절반에 가까운 6개가 홈런이었다. 하지만 전성기에 비하면 명백히 떨어지는 성적이었다. 결국 루스는 시즌 도중 은퇴했다.
전성기 때에는 도루 시도도 자주 했었다. 단, 호타준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도루가 많았던 시즌도 도루자(盜壘刺)가 더 많았다. 1923년이 도루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17도루를 했지만 도루자가 21번이었다. 그가 도루 시도를 했던 것도 상대 투수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지, 클러치 상황의 득점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통산 도루 성공률도 50%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현대의 야구 연구자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 성공률이 아니었다. 신체 조건과 주력은 문제가 없었으나 주루 센스가 형편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최악의 부진을 겪은 1925년 이후 화려하게 부활했던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 업셋을 허용하게 된 결정적인 플레이도 7차전에서 루스의 도루자였다. 다만 당시 양키스는 1점차로 지고 있었고 9회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모험을 할 필요는 있었다.
루스의 등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안타와 도루가 중심이 되었던 스몰 볼 야구가 홈런 등 장타 중심의 빅 볼 야구로 바뀌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등장 이후로 로저스 혼스비, 핵 윌슨, 지미 폭스, 루 게릭 같은 20~30년대를 풍미한 슬러거들이 등장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30년대부터 리그 홈런 개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1929년까지는 홈런 45개를 넘긴 타자가 역사상 루스와 루 게릭뿐이었으나, 당장 1930년부터 핵 윌슨이 무려 56개를 치며 루스를 제치고 홈런왕에 오른다. 그 다음 시즌 게릭과 루스가 46개로 공동 홈런왕에 올랐으나, 32 시즌엔 지미 폭스(1907~1967)가 무려 58개로 루스의 기록을 턱밑까지 쫓는 기록을 내고, 32, 33년 2년 연속으로 루스를 2위로 몰아내고 홈런왕에 오른다. 물론 루스는 32년 당시 37세이자 무려 리그 20년차였기 때문에 2위만 해도 엄청난 것. 루스는 양키스에서 마지막이었던 34 시즌엔 22개 홈런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4. 은퇴[편집]
은퇴 후 감독을 하려 했으나, "스스로를 컨트롤하지도 못하는 인간이 팀을 감독한다고?"라는 평이 대다수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선수 시절에 개인 관리가 잘 안 되어 술도 자주 마시고, 경기 중 심판한테 대들다가 퇴장당했으며 이를 찍던 기자 멱살을 잡고 내던지는 일도 벌였다. 당연히 기자들이 신나게 기자 폭행이라고 1면으로 까면서 언론과 사이가 한동안 나빴다. 그나마 나중에는 그 기자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사과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기자들을 배려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그가 열심히 운동하는 것에 기자들이 루스가 최선을 다한다고 긍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아무튼 여러모로 말이 많았고, 말년에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때도 성적이 안 좋았다. 은퇴 후에는 잠시 브루클린 다저스 코치를 했지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후 명예의 전당에 최초의 5인 중 한 명으로 입성했다.
은퇴 후 후두암으로 고통받았는데 왼쪽 눈과 목이 심한 통증에 시달린 데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며 체중도 급격하게 감소했고 걷기가 힘들어 지팡이를 짚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1948년 8월, 병원에서 후두암 투병 중 타계했다. 장례는 관 뚜껑이 열린 상태로[21] 성 패트릭 성당에서 진행되었고 시신은 그곳에 묻혔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조문객들이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위의 사진은 루스가 타계하기 불과 2개월 전인 그해 6월, 양키 스타디움 개장 25주년을 기념하는 초청 행사에서 찍힌 것인데, 이것이 루스가 마지막으로 팬들 앞에 모습을 보인 자리였다. 루스의 뒤쪽에서 촬영하여 그의 상징과도 같은 등번호 3번과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중 수만 명을 함께 보여준 것이 포인트. 이듬해인 1949년, 퓰리처상 보도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당시에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어서(루스는 1946년경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야구 배트를 지팡이 삼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22] 는 명언을 반영하는 사진으로, 시대를 뒤흔든 한 인간의 말년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3. 명예의 전당 통계[편집]
- JAWS - Right Field (1st)
4. 위상과 영향력[편집]
하술할 무시무시한 통산 성적과 위에서 언급했듯 투수/타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는 임팩트[24] 이외에도 단타 위주의 타격 접근법이 유행했던 데드볼 시대에서 장타 위주의 타격 접근법이 유행하기 시작한 라이브볼 시대를 연 장본인으로서, 야구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이자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다.[25][26] 특히 그의 180을 상회하는 그의 fWAR 누적은 너무나도 초월적인 수치여서, 이론적으로는 그를 셋으로 갈라도 셋 모두 명예의 전당에 입성이 가능하다.
또한 단순히 야구를 넘어서 분야 불문 미국 사회가 최전성기를 보내던 당시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북미 스포츠 사상 유이한 선수이기에[27] 자연스레 북미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루스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최고였지만, 특히나 홈런을 치는 능력은 역대 최고였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홈런 생산력을 보여주었는데, 매년 기록한 홈런 개수가 다른 선수들이 아니라 다른 웬만한 구단보다 많았을 정도이다. 단타 위주의 시대였던[28] 데드볼 시대를 끝내고 '홈런의 시대'인 라이브볼 시대를 열었으며, 소속 팀 뉴욕 양키스도 그의 활약과 관중 동원력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1920년부터 도입된 라이브볼 때문에 루스가 아니더라도 홈런의 시대가 왔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들도 루스가 그 시작을 훨씬 앞당겼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데드볼 시대 말기인 1919년에 29홈런을 쳤는데, 그 전까지 다른 선수들은 기껏해야 두 자릿수 홈런을 겨우 쳐내는 수준이었다.
4.1. MLB에 미친 영향[편집]
그가 MLB에 남긴 영향은 엄청났다.
- 먼저 그는 MLB를 미국 최고의 스포츠로 만들었다. 1910년대 MLB는 블랙삭스 스캔들과 레이 채프먼 빈볼 사망 사건으로 분위기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그리고 당시 슈퍼 스타인 타이 콥 역시 선수로서 말년이었는데 루스가 타자로서 등장하면서 홈런을 뻥뻥 때려내더니 급기야 50홈런을 돌파하자 사람들은 루스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이는 MLB의 인기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야구는 미국 최고의 스포츠가 되었다.
- 그리고 홈런을 대중화시켰다. 루스를 인기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 MLB는 데드볼 시대로 극단적인 투고타저 시대였고 그 만큼 유명 투수들은 많았으나[29] 타격 쪽으로는 상당히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타자들은 배트를 짧게 잡으며 단타와 도루 위주의 야구를 펼쳤고, 홈런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투수들이 타자들을 상대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1점을 내기 위해선 여러명의 선수가 안타를 치면서 협력하는 것이 야구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루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루스는 배트를 길게 잡고 풀파워로 휘두르며 1점을 내기 위해 연속 안타나 상대의 실수가 필요했던 야구에서 마치 일발역전의 필살기처럼 단 한번의 스윙으로 점수를 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루스는 이렇게 홈런를 위시한 장타 위주의 타격을 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재미와 흥분을 더했으며 타구 하나에 최대 4점을 내는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홈런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루 게릭, 지미 폭스, 행크 그린버그, 테드 윌리엄스, 미키 맨틀, 행크 애런, 윌리 메이스, 배리 본즈, 켄 그리피 주니어, 알버트 푸홀스 등의 홈런 타자들이 대거 등장해 홈런과 장타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거기에다 최근 세이버메트릭스의 발전으로 장타의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며 루스는 시대를 앞서간 타격을 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루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토니 그윈 같은 타자들만 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30]
- 세 번째로는 선수들의 연봉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퍼스타 루스의 연봉은 천정부지로 올라갔으며 이는 동시에 같은 팀, 같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 인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아래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명예의 전당 투수이자 동료였던 웨이트 호이트는 "루스에게 행운이 있기를"이라면서 기도 했을 정도로 루스의 성적은 다른 선수들의 연봉과도 직결됐다. 1920년대부터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만큼 프로 야구 선수들의 연봉은 동시대 그 어느 스포츠 선수들보다 비교적으로 높았으며 현재까지도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곳이 MLB이다.
- 뉴욕 양키스를 강팀으로 만들었다. 루스가 영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키스는 현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약팀이었다. 그런데 루스가 들어오자 엄청난 돈을 거둬들였고 미국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가치가 높은 팀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야구 팬이 아닌데도 NY 마크가 있는 모자를 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우승을 27번이나 한 초강팀으로 매 시즌 우승 후보로 등극할 수 있게 기틀을 다진 것 역시 루스가 양키스에 입단한 1920년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31]
4.2. 루스빠[편집]
워낙 남긴 기록이 엄청난데다, 광란의 시기라 불리던 대호황의 1920년대를 대표하던 미국만의 스포츠에서[32] 황제의 자리에 오른 백인 선수다보니 미국 내 보수적인 백인들, 특히 북부의 중산층 백인들 중심으로 자연스레 루스 빠돌이들이 형성 되었고, 그게 미국의 자존심처럼 변질되어서 한때 루스의 홈런 기록을 넘어서려는 선수들에게는 온갖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로저 매리스. 매리스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61개로 홈런 신기록을 세웠을 때, 다른 곳도 아닌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루스는 151게임 만에 60개 쳤는데, 매리스는 161게임 만에 61개 쳤으니까 신기록이 아니다"라고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으며, 그해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음에도 상처와 비난만 잔뜩 받은 채 시즌을 끝냈다. 오죽하면 매리스는 나중에 "내가 61홈런을 치고 얻은 게 뭔지 아는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매리스의 61홈런 기록에 별표(*)를 붙여 역대 기록에서 루스와 차별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33] "별표를 각주 위치를 표시하는 데 사용하는 야구 기록 분야의 관행상, 오히려 신기록이라는 뜻으로 붙였던 게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의 모든 기록에는 별표가 붙어 있었고 매리스 자신도 인정했으니 굳이 얼버무릴 것 없다. 매리스와 미키 맨틀, M&M 듀오의 활약을 그린 HBO의 드라마 '61'도 정식 제목은 별표를 붙인 61*이다. 결국 매리스 사후인 1994년에야 당시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가 별표를 떼어 주었다. 매리스의 홈런 기록을 둘러싼 이 루머는 의미가 확장되어, 현대 야구에서도 비공식적인 기록이나 약물 복용 등 불명예스러운 방법을 통해 달성한 기록에 별표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974년에 행크 애런이 통산 714홈런 기록을 넘어설 땐 마침 행크 애런이 흑인이기도 해서, 인종 문제까지 들어가면서 루스 빠돌이들이 하루에도 수천 통에 달하는 살해 협박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대략 "깜둥이 주제에 감히 베이브 루스 님의 기록을 넘는다면 죽을 줄 알아라" 따위의 협박을 한 것. 베이브 루스의 아내인 클레어 매릿 루스(1900~1976)는 남편 기록이 깨지는 걸 남편이 가장 기대할 것이라면서 이런 협박은 그만두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리고 실제로 애런이 715번째 홈런을 쳤을 때 베이스를 돌던 중 백인 관중 2명이 난입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는데, 당시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애런의 아버지는 그 관중이 애런을 칼로 찌를까 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물론 난입한 백인 관중 2명은 다행히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애런의 홈런 기록에 기쁨을 이기지 못해 난입한 팬일 뿐이었고, 애런이 베이스를 돌 때 같이 방방 뛰며 크게 기뻐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루스는 백인이었지만 두툼한 입술에 흑인 같은 모습이라서 상대 선수들이 "검둥이가 흰 칠하면 저놈이다"라며 야유했었다는 것. 선수 시절에 루스와 사이가 나빴던 타이 콥 같은 경우는[34] "너 정말 백인 맞냐?" 하고 비꼬는 바람에, 루스가 "나를 개나 돼지라고 하면 모를까 검둥이라고 하면 죽여버린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그를 포함한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초청하여 일본 올스타 팀과 함께 친선 경기를 열기도 했다. 이때 루스는 대학생 선수에게 두 번이나 삼진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일본군에 "천황 폐하께 저주를"이라고 도발하자, 일본군이 이에 대응하여 "베이브 루스에게 저주를"이라고 맞받아친 일화도 유명하다. 지금도 도쿄돔 지하에 있는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는 베이브 루스의 몇 안되는 친필 사인 볼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친선 경기를 가졌던 일본 올스타 팀은 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체가 되며, 일본 측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선수가 바로 일본 사와무라상에 이름이 붙여진 사와무라 에이지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오타니 쇼헤이의 인기도 루스의 후광을 무시할 수 없다. 오타니의 투타겸업을 미국의 매체들은 'Japanese Babe Ruth'로 포장했고 실제로 루스 이후 100년 만에 다시 시도하는 도전이다 보니 루스의 재림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이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덕에 리그 전체가 상당한 흥행을 맛보고 있다.
4.3. 루스의 그늘에 가려진 스타[편집]
이렇게 루스가 엄청난 활약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활약상이 덜 부각되거나 부당하게 폄하된 이들도 있었다. 그것도 같은 양키스 팀 출신으로서.
- 루 게릭: 3번 루스와 함께 4번 타자로서 4~5년 동안 양키스의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다. 1927년에는 47홈런에 단일 시즌 역대 5위에 해당하는 173타점, OPS 1.240 등으로 MVP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루스가 그 유명한 단일 시즌 60홈런을 기록해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다. 이후 루스가 하향세에 들어선 1933년부터는 게릭이 팀의 간판을 차지하기 시작해 1934년 트리플 크라운, 1936년에는 MVP를 수상했다.
- 로저 매리스: 위 문단 참조.
5. 예고 홈런(Called Shot)[편집]
일명 '예고 홈런(Called Shot)'이라는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1932년 10월 1일,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4 대 4로 동점인 상황에서, 상대 투수 찰리 루트를 상대로 홈런을 친다. 당시 상황은 투 스트라이크에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킨 후 컵스 포수 개비 하트넷에게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면 충분하다"라는 말을 한 후 149m 홈런을 쳤다고 한다. 이때 홈런을 맞은 투수는 다음날 선발로 나와 루스를 빈볼로 맞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가장 신빙성 있는 말은, 경기 전에 그런 내용의 장담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키거나 한 적은 없었다는 것. 기자가 별 생각 없이 끼워 넣은 일화였다는 설이 대세다. 한편 루스의 뒤에서 타격을 준비 중이던 게릭은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상대 선수가 루스를 약 올리는 말을 해서 홧김에, "네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라는 말과 함께 배트로 상대 선수를 가리킨 것뿐인데, 우연히 타구가 그 선수 뒤쪽으로 날아가 홈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건 병상에 있던 어린 팬과의 만남 후 예고 홈런을 날렸다는 설은 만들어냈다는 의혹이 짙으며, 주변인들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베이브 루스 본인이 남긴 말이 별로 없었기에 홈런왕의 신화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도 어린애들에게는 관대했던 만큼,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야구계의 전설적인 일화다.
여담으로 저 시즌에 사용한 방망이는 대한민국에 있다. 소장품 수집으로 유명한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이 낙찰받은 것.
6. 베이브 루스와 삼진[편집]
후배 테드 윌리엄스가 '베이브 루스도 홈런보다 삼진을 훨씬 많이 당했으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발언을 했던 것, 베이브 루스 자신이 했던 '스트라이크를 당할수록 나는 홈런에 가까워진다'는 발언, 그리고 기타 야구인들의 발언 때문에 그가 삼진을 무척 많이 당한 단순한 공갈포였던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유명 영화배우 박중훈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많이 쳤지만 그 3배에 가까운 삼진을 당했다고 하더라. 아마 그는 (삼진이라는) 그런 실패에서 성공을 배운 것 같다.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선 박중훈의 말 자체는 테드의 발언 의도와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루스는 700개가 넘는 홈런을 치는 동안 삼진은 그 2배도 안 되는 1,330개 당했으므로 세 배에 가까운 삼진 수라는 말은 틀렸다고 볼 수는 있다.
이에 대해 좀 더 파고들면, 당대의 삼진율이 전체 타석 대비 6.9%인데 반해 루스는 12.5%였으므로 루스가 객관적으로 삼진을 많이 당한 것은 맞다. 당대에는 삼진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같은 아웃을 당하더라도 삼진보다는 차라리 택도 없는 공일지라도 건드리기라도 해서 땅볼 아웃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에 저렇게 삼진율이 낮았던 것이다. 리그 평균의 두배 가까운 양의 삼진을 기록했으니, 루스 본인을 포함한 당대 사람들에게 루스는 전체 삼진율이 20%를 넘어가는 요즘 시대의 시각으로 볼 때 피삼진율 30%를 넘어가는 조이 갈로 그 이상으로 삼진을 많이 당하는 이미지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홈런에 비해 삼진을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이 당했으므로 홈런에 비해 삼진이 훨씬 많았던 것 자체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삼진이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파생되는 공갈포 이미지다. 베이브 루스는 역대 홈런 3위-타점 2위-장타율 1위를 마크하고 있는 역대 최고의 거포지만 이와 동시에 수많은 데드볼 시대의 레전드들을 제치고 통산 타율 10위를 기록한 정교한 타자였으며 여기에 역대 3위에 해당하는 볼넷을 얻어냄으로서 통산 출루율 2위에 올라 있기도 하다. 루스가 삼진으로 당한 아웃 카운트들을 데드볼 시대의 다른 타자들은 땅볼 아웃으로 당했으니, 겉으로 보이는 삼진 숫자만 적었을 뿐 결국 생산성 자체로는 루스를 이기지 못했던 것. 즉 비율 스탯으로 테드 윌리엄스, 누적 스탯으로 행크 애런과 모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대 최고의 완성형 타자인 것이다.
7. 후일담[편집]
2000년대 들어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 등의 홈런 쇼로 루스도 점점 묻혀가나 했으나, 이들의 기록이 약물 복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짙어지면서, 다시 '진정한 홈런왕은 루스와 애런이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애런 역시 자서전에서 암페타민 복용을 시인했고, 루스에게도 약물 복용 루머가 있다.
어느 시대나 시대적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 차이를 무시하고 기록을 1 대 1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루스의 60홈런은 현대 기준으로도 물론 그 위엔 약쟁이들밖에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록이지만, 당시 기준으론 그야말로 불멸의 기록이었다. 현대 기준으로 초라한 기록을 낸 데드볼 시대의 타자들이 다 쓰레기였다고 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동일한 기준에서 경쟁을 홈런왕, 타격왕을 했다면 위대한 업적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뛰어난 기록을 남긴 사이 영은 추앙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4년 연속 홈런왕을 기록한 존 프랭클린 베이커를 통산 96홈런이란 이유로 허접 취급한다면 그야말로 코미디다.
물론 사이 영이 더 위대한 레전드란 차이는 있겠지만 포인트는 당시의 업적은 당시의 기준으로 봐야지, 후대의 기준을 갖대다는 건 말이 안된다. 설령 애런이 엠페타민을 복용하고 루스가 양의 고환 추출물을 주사했다고 해도 당시 선수들에겐 이게 부정행위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한국 선수들 중에는 보약을 먹는 선수들도 있고 안 먹는 선수들도 있다. 실제로 허재도 건강을 위해 보약을 먹었으며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이들은 보약을 먹는 게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당당히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 보약이 불법 약물 취급된다면, 갑자기 허재가 소급해서 약쟁이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의 기록은 보약을 실제로 먹었던 안 먹었던 먹을 수 있는 동일한 자격을 갖춘 선수들 사이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며 이뤄낸 것이기 때문이다. 애런과 루스도 마찬가지다. 이 선수들이 활동할 당시 이런 약품들은 불법이나 부정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다. 불법도 전혀 아니며, 이 때문에 그들이 남긴 기록에 수상한 눈초리를 보낼 이유도 없다. 추가로 애런이나 루스가 "시대를 잘 타고나서" 경기력 향상 약물을 해서 기록에 이득을 봤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들은 현대에 제공되는 체계적인 영양 관리와 체력 관리 시스템을 전혀 받지 못했다. 고작 암페타민과 양의 고환 추출물 몇 번 받는 것과 경기 전후에 철저하게 단백질 보충과 영양사가 관리한 식단+마사지와 사우나 찜질로 피로 풀기+최고급 전용기+최고급 호텔+전문 트레이너의 운동 지도 및 관리+최첨단 과학이 적용된 운동 장비+전문가들의 비디오, 세이버메트릭스 분석+건강검진 등을 받는 것 중 무엇이 더 도움이 되겠는가? 물론 이렇게 해서 이득을 보는 것은 상대 투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당시 타자들이 경기력 면에서 딱히 손해를 봤다고 보긴 힘들겠지만, 저렇게 관리를 받으면 선수 생활을 더 길게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통산기록에서는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루스는 20년차였던 37세에 완연히 하락세를 보이며 그대로 은퇴했는데, 현대 야구 선수들도 이 정도면 대부분 은퇴할 나이라는 점에서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일반적인 선수가 아니라 역대 최고의 슈퍼스타이며, 그만큼 강한 몸을 타고났다. 예를 들어 21세기 최고의 슈퍼스타인 알버트 푸홀스는 3-4살 정도 나이를 속였다는 의혹을 꾸준히 받아왔는데도 불구하고 22년차이자 공식 나이로 만 42세 시즌인 2022년에 시즌 20홈런을 넘기며 통산 700홈런까지 달성하였다. 스포츠 과학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대인데다가 술 먹고 사고 쳐서 기자들과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던 베이브 루스가 육체와 멘탈 양면에서 현대적인 관리를 잘 받았으면 40대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은 1948년의 이듬해인 1949년부터 월드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2007년부터는 월드시리즈뿐만이 아니라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가장 활약한 선수에게 베이브 루스 상(Babe Ruth Award)을 수여하고 있다. 베이브 루스는 월드시리즈 통산 투수로서 3경기 31이닝을 던지며 3승 평균 자책점 0.87, 타자로서 타/출/장 326/467/744, 15홈런 33타점을 기록하였으므로 투타 통틀어 최고의 선수였던 것을 기리는 점이다. 월드시리즈 MVP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월드시리즈 MVP는 MLB 사무국에서 주는 거고, 베이브 루스 상은 미국 야구 기자 협회(BBWAA)에서 수여한다는 것이 차이점. 또한 1947년 4월 27일은 후두암으로 고생하던 베이브의 쾌유를 위해 베이브 루스의 날로 제정되었다.
참고 자료
8. 어록[편집]
앞서 언급했듯이 험하게 자란 베이브 루스인지라 어록 역시도 험한 것이 많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벌어들인 이득의 일부를 받아야 합니다. 야구가 은행이나 보드빌 쇼랑 다르다고 하지 말라고요. 말하건대 이건 비즈니스입니다. 고상한 감정 따위 없어요. 잡소리 그만합시다."
ㅡ 1922년, 5만 2천 달러를 요구했을 때.
"What the hell has 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내가 요구한 연봉이) 허버트 후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게다가, 내 올해 성적은 그 자보다 낫지 않소."
ㅡ 1930년, 연봉 8만 달러가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연봉이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모든 메이저리거의 아내와 아이들은 식사하기 전에 '루스에게 행운이 있기를'이라고 기도해야 한다"
"콥은 재수 없는 인간이야. 하지만 공 한번 잘 치지. 하느님 맙소사, 진짜 끝내주게 잘 쳐!"[36]
"야구가 아니었다면 저는 교도소나 공동묘지에 있었을 겁니다. (후략)"
ㅡ 1996에 프레드 리브(Fred Lieb)가 쓴 《내가 알고 있는 야구(Baseball as I Have Known It)》에서 발췌된 말. 당연하지만 거기서 일한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말이다.
"애송이, 충고 하나만 해줄까. 놈들(기자들)이 너에 대해 좋게 쓰든 나쁘게 쓰든 아무것도 믿지 마. 두 번째, 벌이가 좋을 때 벌어놔. 하지만 그걸 억지로 벌려고 고생하지는 말고. 그리고 너무 많이 쏘지 말고!"
ㅡ 레드 그레인지에게 충고를 했을 때.[38]
"저는 최대한 휘두르고, 최대한 공을 맞히려고 합니다. 권투에서 당신의 주먹이 사람을 때릴 때는 대개 멈추게 되지만,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렵게나마 맞힐 수 있습니다. 저는 같은 식으로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배트를 단단히 잡을수록 공을 잘 맞힐 수 있으며 멀리 날아가게 합니다. 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세게 휘둘렀습니다. 전 세게 치거나 크게 놓쳤습니다. 전 가능한 한 크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스트라이크를 먹을 수록 나는 다음번 홈런에 가까워진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러분 들으시기에 제 목소리가 영 좋지 않지요. 뭐 저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랍니다.[39]
우리네들의 야구 경기는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되지요.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말이에요. 그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야구 경기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고, 또 이렇게 선수가 되어 팀들을 대표해서 뛰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관람하러 경기장을 찾기도 하지요.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진정한 운동경기란 야구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들에게 풋볼 공이나 야구공 같은 것을 던져 주고, 금세 자연스레 운동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지요. 하지만 야구에서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야구는 예닐곱 살 시절부터 저 아래 바닥에서 시작해야만 합니다. 열네다섯 살이 되기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지요. 어렸을 때부터 야구와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만약 정말 열심히 한다면, 여기 함께한 이들처럼 마침내 꼭대기의 자리에까지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 저에게 정말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이렇게 모두에게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Thank you very much, ladies and gentlemen. You know how bad my voice sounds. Well, it feels just as bad. You know, this baseball game of ours comes up from the youth. That means the boys. And after you're a boy and grow up to play ball, then you come to the boys you see representing clubs today in your national pastime. The only real game in the world, I think, is baseball. As a rule, people think that if you give boys a football or a baseball or something like that, they naturally become athletes right away. But you can't do that in baseball. You got to start from way down, at the bottom, when the boys are six or seven years of age. You can't wait until they're 14 or 15. You got to let it grow up with you, if you're the boy. And if you try hard enough, you're bound to come out on top, just as these boys here have come to the top now. There have been so many lovely things said about me today that I'm glad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thank everybody.)"ㅡ 1947년 4월 27일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고별사 중.
9. 통산 성적[편집]
9.1. 투수 기록[편집]
9.2. 타자 기록[편집]
파란색은 팀 내 역대 1위. 빨간색은 MLB 역대 1위. 참고로 투수 WAR는 제외한 스탯이다.[40]
9.3. 통산 1위 기록[편집]
- 통산 장타율(.690)
- 통산 OPS(1.164)
- 시즌 총루타(1921, 457루타)
- 통산 WAR(팬그래프 180.8, 레퍼런스 183.7)
- 팬그래프 기준 타자 WAR 168.4/투수 WAR 12.4, 레퍼런스 기준 타자 WAR 163.1/투수 WAR 20.6
- 시즌 WAR(1923, 팬그래프 15.0, 레퍼런스 14.1)
- 통산 wOBA(.513)
- 시즌 wOBA(1920, .598)
- 통산 wRC+(197)
10. 이모저모[편집]
10.1. 선수시절 관련[편집]
- 현시대 MLB 슈퍼스타들에 비하면 루스가 받던 고액 연봉은 오늘날 환율로 환산해도 적은 액수지만, 당시에는 그의 실력 못지않게 상식을 초월하는 연봉 인플레였다. 그가 1922년에 양키스로 이적하면서 받은 연봉은 5만 2천불이었는데, 바로 전년도 최고 연봉자 타이 콥의 2만불을 아득히 넘는 액수였다.[41] 이후 루스는 13년이나 최고연봉자였고 절정때는 8만불이라는 연봉을 받으며 세간을 놀라게 했다. 그가 은퇴한 후 물가는 상승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8만불을 뛰어넘는 고액연봉자가[42] 나오는데까지는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MLB의 연도별 최고 연봉자 목록
- 미국 ESPN에서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결과를 내놓았는데, 베이브 루스가 현역으로 뛴다면 13년 계약 시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10억 6천만 달러를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WAR 1당 600만 달러로 쳐서 계산했으며, 최근 다년 계약의 일반적인 현상인 연간 연봉 5% 상승 등을 고려해 산출했다. 이 계산법으로 치면, 메이저리그 통산 660홈런을 친 윌리 메이스는 13년 총 9억 3천 100만 달러, 배리 본즈는 13년 총 9억 1천 600만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 베이브 루스가 기록적인 홈런을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추측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라이브볼 도입, 당시의 타격 기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배터 박스 앞에서 무게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당기는 파워 스윙,[43] 놉(knob)을 감싸는 타격을 한 것 등이 지목되고 있다. 베이브 루스가 최초로 놉이 있는 배트를 사용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데, 배트의 놉은 검의 폼멜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별다른 규칙이 없던 야구 초창기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하지만, 루스 시대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놉이 만들어졌고, 루스가 새끼손가락으로 이를 감싸는 그립을 최초로 사용했다.
- 한 대학에서 루스의 신체 능력에 대해 조사했는데, 세분화된 거의 모든 항목에서 500명 중 1등인 수준이었다고 한다.
- 흔히 베이브 루스가 게으른 천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것 또한 위인전 못지않게 편향된 평가다. 그는 축복받은 신체를 가졌지만 그것만 믿고 몇 년 반짝이다가 사라진 선수들과는 비교를 불허하게 꾸준하게 노력했다. 물론 선수 생활 내내 어마어마한 성생활, 폭식, 폭음을 하긴 했지만 그게 선수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선을 넘은 것은 1925년 시즌뿐이었고,[44] 그때부터 PT를 고용해 달리기, 복싱, 핸드볼, 줄넘기, 스프린트, 메디신 볼 등으로 신체를 단련하며 스윙 연습 이외에도 몸 관리에 신경을 썼다.[45] 다시 하락세가 오던 34세부터는 그해에 결혼한 두 번째 부인 클레어가 철저하게 그의 식단과 운동 시간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잘 따른 루스는 마지막으로 두 번의 몬스터 시즌을 기록한다. 그 결과, 에이징 커브가 오는 30대의 나이부터 40 가까이 되는 시기까지 절정의 기량을 유지했고, 그의 전설적인 60홈런 시즌도 이때 있었다. 그의 양키스 시절 149.9라는 괴물같은 fWAR 누적의 절반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30대에 fWAR 10 이상의 시즌을 다섯 번이나 기록한 것도 그가 유일할 뿐만 아니라 그에 범접하는 기록조차도 없다. 그를 야구의 신이라고 부르게 해준, 무려 20여 년을 아우르는 압도적인 누적과 비율 스탯은 결코 타고난 재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46]
- 양키 스타디움이 좌타자이던 그를 위해 우측 펜스도 짧게 지어주고, 우익수 쪽에 차양막도 쳐줬다. 하지만 원정 경기에서 우익수 쪽에 햇빛이 비치면, 좌익수였던 밥 뮤젤이랑 자리를 바꿔서 루스가 좌익수로 뛰었다.
- 안타를 치고 1루를 향해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비둘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비둘기 걸음'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