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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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잭슨의 수상 이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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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72
1973
1974
1977
1978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Jackson%20Reggie%20Plaque_NBL_0.png
레지 잭슨
헌액 연도
1993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3.6% (1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7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딕 앨런
(시카고 화이트삭스)

레지 잭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제프 버로우스
(텍사스 레인저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지명타자 부문 실버 슬러거
1980년 첫 수상

레지 잭슨
(뉴욕 양키스)


알 올리버
(텍사스 레인저스)


보유 기록
통산 최다 삼진
2,597삼진[1]
단일 월드 시리즈 최다 홈런
5홈런[2]



파일:mr.oct.jpg

뉴욕 양키스 No. 44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No. 9

래지널드 마르티네즈 "레지" 잭슨
Reginald Martinez "Reggie" Jackson

출생
1946년 5월 18일 (77세)
펜실베이니아 주 윈코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조건
182cm / 90kg
포지션
우익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66년 드래프트 1라운드 2번 (KCA)
소속팀
캔자스시티-오클랜드 애슬래틱스 (1967~1975)
볼티모어 오리올스 (1976)
뉴욕 양키스 (1977~1981)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82~1986)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87)

1. 개요
2. 선수 생활
2.1. 프로로 가기까지
2.2. 캔자스시티/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
2.4. 말년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4. 플레이 스타일
5. 은퇴 이후의 삶
6. 연도별 기록




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한 좌타 거포로 정교한 타격보다는 힘을 바탕으로 홈런을 양산하였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하면서 얻은 별명이 그 유명한 Mr.October.[1][2]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통산 21시즌 2,820경기 11,418타석/9,864타수 2,584안타 463이루타 563홈런 228도루 1,551득점 1,702타점 1,375BB/2,597K .262/.356/.490 .846OPS/139OPS+ 74bWAR. 시즌 100삼진을 18번이나 기록했는데 2위는 14번밖에 기록하지 못했다.[3]

나이 차이는 있지만 배리 본즈의 이종사촌 형이며, 이모부 바비 본즈와 동갑이다.

2. 선수 생활[편집]



2.1. 프로로 가기까지[편집]


아버지는 니그로리그[4]에서 뛴 2루수였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그의 고향 윈코트는 유태인 마을로서 당시 팽배했던 인종주의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비록 운동 하다가 심한 부상도 여러번 당했지만, 무난하게 잘 성장할 수 있었다.

미식축구야구 두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고교 졸업 당시 야구는 아직 기량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입단이 거부되었고, 미식축구의 경우 남부지역의 대학들은 인종차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입단을 포기하고, 서부의 애리조나에 있는 애리조나 주립대학교로 가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미식축구도 같이 병행하다가 디펜스 백 생활 대신에 야구부의 강타자로 이름을 얻게 되었고, 급기야 1966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최대어로 부상했다.

그런데 이 당시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어메이징한 어느 뉴욕 팀은 레지 잭슨 대신에 스티브 칠콧이라는 백인 포수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역대 드래프트 역사상 최악의 선택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왜냐면 이 칠콧은 역대 1순위 지명자 가운데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하고 은퇴한 최초의 선수였기 때문. 왜 메츠가 이런 어매이징한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제기된다.

레지 잭슨 본인은 자신의 대학시절 감독인 바비 윙클스가 드래프트가 시작하기 전 '메츠는 네가 멕시칸 계 여자친구를[5] 사귀고 있는게 사회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여기기 때문에 널 지명 안하고 거를 수도 있다' 고 말했다 한다. 위에서 드래프트 역사상 최악의 선택이라고 말한데에서 알 수 있듯이 잭슨은 누가봐도 드래프트 최대어였고 당시 드래프트를 앞두고 일번 픽인 메츠가 잭슨을 당연히 데리고 갈 거라 모든 사람이 생각했다. 이런 마당에 코치가 저런 말을 하고 또 그게 그대로 이루어지니 잭슨은 여자친구가 문제라는 이 황당한 말을 안 믿을 수가 없고 아직도 잭슨은 이렇게 생각한다. 당시 메츠의 단장인 조지 와이스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하고.

하지만, 바비 윙클스는 자신이 잭슨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왜 메츠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메츠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냥 포수가 필요해서. 어쨌거나 메츠의 이런 선택으로 인해 전체 2번을 가지고 있던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는 낼름 그를 입단시켰다. 그리고 마이너 생활을 단 1년으로 끝낸 후, 196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반면 메츠가 선택한 칠콧은 다다음해 마이너리그 경기중 오른쪽 어께에 시즌아웃급의 부상을 당했고, 결국 부상의 악령에 시달리다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해야 했다. 여담으로 그의 은퇴소감은 "이제 제 이름은 퀴즈쇼 프로그램의 단골 손님이 되겠네요."였다고.


2.2. 캔자스시티/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bolgernow.com/reggie-jackson-with-as.jpg

애슬레틱스에서 초년병 시절을 보내다가 1969년 47홈런을 쳐내면서 존재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한 번 치면 장거리로 쭉 뻗어나가는 홈런에 팬들은 열광했고[6], 마침 막 연고지를 오클랜드로 옮긴 애슬레틱스 프랜차이즈의 스타로서 군림했다. 다만, 이 때의 성적은 잠시 주춤하기 시작하는데, 구단주인 핀리와 연봉 싸움에 들어가면서 훈련 부족으로 성적이 곤두박질친 것. 다행히 연봉 싸움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후에는 다시 홈런 타자로서 위용을 과시했다.

이 때 애슬레틱스는 레지 잭슨 외에도 에이스 캣피시 헌터바이다 블루, 구원왕 롤리 핑거스, 포수 진 테니스 같은 좋은 선수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고, 이들과 함께 활약하면서 1971년부터 1975년까지 5년 연속 지구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비록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하면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진출에만 만족했지만, 이듬 해인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월드시리즈 3연패를 위업을 달성한다.

레지 잭슨은 1972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맹활약했는데, 다만 이 때 햄스트링을 다치면서 1972년 월드시리즈에는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듬 해인 1973년 월드시리즈에서는 7차전 승부를 결정짓는 2점 홈런을 치는 등, 시리즈 내내 맹활약하면서 그 해 월드시리즈 MVP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74년에도 역시 맹활약하면서 또 다시 팀의 우승에 한 몫 했다.

다만 팀 동료들과는 썩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자존심 강한 흑인 강타자이기도 했고, 워낙 성격이 자기 중심적인 양반이라 팀원들과 충돌한 것. 대표적으로 라커룸에서 팀원들과 한 판 떠서 본인도 부상을 입고, 말리던 팀 동료들도 역시 부상을 입었다. 상대 팀에 대해서도 독설을 거침없이 날리던 선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간단히 요약하면 "팬 아니면, 적." 이었다.

그런데 점차 야구 시장은 FA 제도의 등장으로 인해 점차 돈의 위력이 커지고 있었고, 팀의 에이스였던 캣피시 헌터가 바로 이 제도의 첫 적용자로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게 된다. 1975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패한 후, 커지는 재정 부담을 직감한 구단주 핀리는 주축 선수들을 트레이드시키기 시작하는데, 레지 잭슨은 그렇게 해서 1976년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7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2.3. 뉴욕 양키스 시절[편집]


파일:attachment/레지 잭슨/81.jpg

양키스 입단 이후에 레지 잭슨을 상징하는 단어는 미스터 옥토버다. 사실 이 말은 원래 양키스의 주장인 서먼 먼슨이 1977년 월드시리즈에서 먼저 2패를 당하고 분위기가 침체되었을 때, 부진한 레지 잭슨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다. 레지 잭슨이 입단할 당시 양키스의 리더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서먼 먼슨과 레지 잭슨의 사이가 나빠진 것. 레지 잭슨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쨌거나 이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이후, 거짓말처럼 레지 잭슨은 괴력을 선보였다. 남은 4경기에서 양키스가 모두 이기면서 14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하는데, 그 때 잭슨에 4경기에서 5홈런을 때려냈다. 이 중 6차전에서 3연타석 홈런이 들어있었다[7]. 당연히 이 해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 때의 활약 뿐만 아니라, 1978년에도 맹활약하면서 또 다시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비단 월드시리즈에서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정규시즌에서도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다. 본래 삼진이 많았던 레지 잭슨이 그나마 삼진을 줄여서 삼진과 볼넷 비율을 2:1로 만든 것이 바로 양키스 시절이었다. (오클랜드 시절에는 4:1!) 그리고 생애 유일한 3할 타율도 바로 양키스 시절에 기록했다. 양키스 시절에는 팀의 주포로서 암흑기를 거쳤던 양키스를 구원한 타자였다.

그런데 양키스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앞서 언급한 서먼 몬슨과의 갈등 뿐만 아니라 팀의 감독이었던 빌리 마틴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빌리 마틴과는 펜웨이 파크 원정에서 수비 실책을 한 그를 교체하는 문제를 두고 한 판 제대로 맞짱을 뜬 적이 있었다. 서로 멱살잡고 대판 싸웠는데, 문제는 이게 전국 라이브 방송이라는 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대놓고 인증했고, 이 때의 갈등은 뒷날 빌리 마틴이 감독직에서 짤린 후, "이 빌어먹을 팀에는 거짓말쟁이가 하나 있고, 범죄자가 하나 있다!"고 독설을 퍼붓는 계기가 되었다. 거짓말쟁이는 레지 잭슨, 범죄자는 당시 선거자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던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였다.

또 스타인브레너와도 갈등을 빚게 되는데, 1981 시즌을 앞두고 내심 연장 계약을 원했던 레지 잭슨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타인브레너는 더 젊은 강타자 데이브 윈필드를 영입했다. 그런데 정작 1981년 월드시리즈에서 레지 잭슨은 맹활약했고, 야심차게 영입한 윈필드는 부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란듯이 레지 잭슨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이적했다. 뒷날 스타인브레너와 레지 잭슨은 서로 화해했는데, 스타인브레너 자신은 뒷날 레지 잭슨을 잡지 않은 것을 엄청 후회했다고 한다. 덕분에 엉뚱하게 불똥이 튄 것은 1981년 월드시리즈에서 20타수 1안타로 부진했던 데이브 윈필드. 윈필드와 스타인브레너는 이 때부터 8년간 서로 싸우게 된다(...)


2.4. 말년[편집]




에인절스로 건너가게 된 이유는 구단주 진 오트리가 이제 노장 축에 들어간 그에게 5년 계약을 선사해줬기 때문. 다행히 노쇠같은 것은 없이 맹활약하면서 통산 500호 홈런 고지도 돌파하고, 팀의 리더로서 활약했다. 약체였던 에인절스는 레지 잭슨의 합류이후, 점차 전력이 강해져서 1982년과 1986년 PO를 밟는데 성공한다. 다만, 잭슨 자신은 활약해도 팀은 가을 야구에서 울렁증을 보이는데, 1982년에는 먼저 2승하고 내리 3연패해서 밀워키 브루어스에게 탈락, 그리고 1986년에는 3승 1패로 앞선 상황에서 5차전 9회에 4점을 내주면서 대역전패 이후 내리 3연패로 탈락하여 월드시리즈에 다시 올라갈 기회를 놓쳤다.

이후 에인절스에서 활약하면서 500호 홈런 고지도 밟고, 코미디 영화 총알탄 사나이에 까메오 출연도 하는 등(...) 충실하게 활약한 후, 오클랜드로 돌아가 여기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레지 잭슨
35
175
170
54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Right Field (8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레지 잭슨
73.8
46.8
60.3
우익수 HOF 입성자 평균
73.2
43.0
58.1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체격이 182cm에 90kg으로 아주 크지는 않지만 놀라운 배팅 파워를 가졌던 선수. 미국 버전 이성열이나 1970년대판 지안카를로 스탠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8] 통산 삼진이 통산 볼넷보다 두 배 가까이 많고 역대 통산 삼진 1위를 차지할 만큼 많은 삼진을 당했으나 이를 많은 홈런으로 만회했다. 그것도 꾸준하게 말이다. 시원한 선풍기 스윙과 헛스윙 삼진으로 팬들을 열받게 만들다가 고비에서 터뜨리는 홈런 한 방으로 영웅이 되는 유형의 선수였다. 2010년대인 현재까지 많은 선수들이 약의 힘을 빌기도 하면서 그의 563홈런 고지를 넘겼지만, 은퇴 시점에는 역대 6위에 해당되는 훌륭한 기록이었다.

많은 홈런과 엄청난 장타력으로 명전에 첫 턴 입성한 선수 치고 삼진이 많고 OPS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9] 한동안 이 선수를 공갈포로 서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의 전성기 1960~70년대는 라이브볼 시대 최악의 투고타저 시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10][11] 그리고 OPS가 낮은 것 치고는 통산 타출갭이 약 9푼 정도로 충분히 OPS히터 소리 들을 선수였다. 잭슨은 게다가 전성기의 대부분을 투수 구장에서 보낸 타자이다. 잭슨의 통산 wRC+는 139이며, 전성기에는 150대를 기본으로 찍던 타자였다. 코너 외야수이고 수비가 딱히 좋다는 평을 받는 선수가 아닌데도 통산 WAR는 70이 넘는다. 또한 타율 대비 출루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에 공갈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타격 클래스가 한참 떨어지는 애덤 던도 OPS히터 소리를 듣는데 레지 잭슨이 공갈포 소리를 들을 이유가 전혀 없다.[12][13]

무엇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PO에 강했다. 월드시리즈 1경기 3홈런의 임팩트나, 오클랜드 시절에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팀이 필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홈런을 쳐내면서 고비에 강하고, 찬스에 강한 남자의 이미지를 심었다. 수비력은 그냥저냥 봐주는 정도였기 때문에 오직 공격력으로 먹고 살았던 선수였다. 선구안도 그리 좋지 못했고, 통산 타율도 고작 0.262에 불과했지만[14], 막강한 장타를 앞세워서 그런 약점은 다 잊게 만들었다.


5. 은퇴 이후의 삶[편집]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90%가 넘는 득표율로 한 번에 입성했다. 사실 말년에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와 은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오클랜드 모자를 쓰고 갈 생각이었음이 분명했지만, 은퇴 후 재직하고 있던 오클랜드의 타격 코치직에서 이유없이 짤리자 화가 나서 계획을 바꿔 뉴욕 양키스의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양키스에서도 1960년대의 암흑기를 종식시키고, 1970년대 후반의 짧은 중흥기를 이끈 선수로서 높이 평가해 그의 등번호 44번을 영구결번시켰다. 그리고 오클랜드에서도 비록 명예의 전당에는 자기 모자를 쓰고 가지는 않았지만, 가장 빼어났던 타자에 대한 예우로 그가 오클랜드 시절에 달았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시켰다.

스타인브레너와 화해한 후, 양키스의 소수인종 문제에 대한 자문역을 맡아 어린 흑인, 히스패닉 계열 선수들의 상담과 자문을 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활동으로 인해 현재는 양키스 쪽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중.

은퇴 후 선수시절 모은 돈으로 중고차 사업을 시작해 중고차딜러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다. 한 때 투자자를 모아 선수 시절 몸담았던 에인절스 구단이나 어슬래틱스 구단을 인수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불발되었다. 덕분에 돈 걱정은 안 하고 풍족하게 사는 편이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좌타자 송일섭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밝히기로 본인의 별명인'잭슨'이 레지 잭슨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같은 좌타자, 같은 포지션, 같은 배번호(44)를 가지고 있어서다. 그 외 일본 국민 야구만화 도카벤에서 주인공 야마다가 존경하는 선수로 등장하는 등, 메이저리그 중계를 볼 수도 없던 그 7~80년대 시절 바다건너 한국과 일본에서까지 이름이 알려진 슈퍼스타였다.

6.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MLB 로고.svg 레지 잭슨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7
KCA
-
OAK

35
135
21
4
4
1
13
6
1
10
46
.178
.269
.305
.574
-0.4
-0.5
1968
154
614
138
13
6
29
82
74
14
50
171
.250
.316
.452
.768
4.7
5.2
1969
152
678
151
36
3
47
123
118
13
114
142
.275
.410
.608
1.018
8.9
9.2
1970
149
514
101
21
2
23
57
66
26
75
135
.237
.359
.458
.817
2.7
2.2
1971
150
642
157
29
3
32
87
80
16
63
161
.277
.352
.508
.860
6.2
6.4
1972
135
573
132
25
2
25
72
75
9
59
125
.265
.350
.473
.823
4.8
5.6
1973
151
629
158
28
2
32
99
117
22
76
111
.293
.383
.531
.914
7.1
7.8
1974
148
604
146
25
1
29
90
93
25
86
105
.289
.391
.514
.905
5.7
5.7
1975
157
669
150
39
3
36
91
104
17
67
133
.253
.329
.511
.840
6.1
6.7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6
BAL
134
558
138
27
2
27
84
91
28
54
108
.277
.351
.502
.853
4.8
5.3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7
NYY
146
606
150
39
6
32
93
110
17
74
129
.286
.375
.550
.925
4.9
4.5
1978
139
581
140
13
5
27
82
97
14
58
133
.274
.356
.477
.834
3.3
3.5
1979
131
537
138
24
2
29
78
89
9
65
137
.297
.382
.544
.926
3.9
3.5
1980
143
601
154
22
4
41
94
111
1
83
122
.300
.398
.597
.995
5.0
4.8
1981
94
382
79
17
1
15
79
54
0
46
82
.237
.330
.428
.758
1.2
1.0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2
CAL
153
621
146
22
4
39
92
101
4
85
126
.275
.375
.532
.907
3.0
3.1
1983
116
458
77
14
1
14
43
49
0
52
140
.194
.290
.340
.630
-1.5
-1.8
1984
143
584
117
17
2
25
67
81
8
55
141
.223
.300
.406
.706
0.0
-0.2
1985
143
541
116
27
0
27
64
85
1
78
138
.252
.360
.487
.847
1.5
1.1
1986
132
517
101
12
2
18
65
58
1
92
115
.241
.379
.408
.787
1.5
1.2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7
OAK
115
374
74
14
1
15
42
43
2
33
97
.220
.297
.402
.699
-0.6
-0.4
MLB 통산
(21시즌)

2820
11418
2584
463
49
563
1551
1702
228
1375
2597
.262
.356
.490
.846
72.7
73.9
[1] 사실 좋은 의미로 지어진 별명이 아니었다. 정규시즌에서는 잠잠하다가 포스트시즌이 돼서야 펄펄난다고 당시 팀 주장이었던 서먼 먼슨이 붙여준 일종의 비아냥조의 별명이었다. 메이저 리그의 포스트시즌이 10월에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2] 참고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같은 별명이 붙었던 박정권은 한때 이 별명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가을에만 몰아치는 타자 소리 듣는 게 싫었다고.[3] 짐 토미, 바비 아브레유, 알렉스 로드리게스.[4] 인종차별로 인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들어가지 못한 흑인 선수들이 모여서 뛰던 리그였다.[5] 이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인 제나 캄포스와는 훗날 결혼까지 하지만 파경을 맞는다.[6] 그 중에서 백미를 뽑자면 1971년 올스타 게임에서 지금은 없어진 타이거 스타디움의 3층 지붕의 변압기를 맞추는 올스타 게임 최장거리 홈런을 친 것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C7kS5pwH0hM [7] 게다가 모두 초구홈런. 4회 2점, 5회 2점, 8회 1점.[8] 그러나 레지 잭슨의 경우 체격이 이성열이나 스탠튼처럼 거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엄청 셌다. 이성규의 엄청난 극상위호환이라고 보면 될 듯.[9] 563홈런, 0.846[10] 너무나도 저조한 타격 탓에 100년 전통을 깨고 지명타자를 도입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마운드 높이를 낮추고 지명타자를 도입했음에도 기본적으로 그 당시 지어지던 구장들이 미식축구 같은 다른 경기 사용을 전제로 한. 쿠키커터 형의 대규모 다목적 스타디움이 많아서 1980년대까지도 어느 정도 투고타저가 유지되었다. 그 시절의 유산 중 하나인 오클랜드 콜리시엄을 보면 당시 구장들의 트렌드를 짐작할 수 있다.[11] 특히 1968년이 가장 심했는데 밥 깁슨이 평균자책점 1.12, 데니 매클레인시즌 30승이라는 라이브볼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아메리칸 리그의 칼 야스트렘스키가 꼴랑 0.301의 타율을 기록하고 타격왕이 됐을 정도였으니 투고타저가 엄청 심했다. 오죽하면 야스트렘스키의 0.301를 세이버매트리션에서 1930년 빌 테리의 0.401와 같다고 했을까. 요즘 같으면 0.301의 타율로는 타격왕에 명함도 못 낸다.[12] 던의 커리어 하이 wRC+가 142이고 잭슨의 통산 wRC+가 139이다.[13] 참고로 스테로이드 시대의 강타자였던 알버트 벨의 wRC+가 139, 데이비드 오티즈, 제이슨 지암비, 마이크 피아자가 140,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141로 잭슨은 스테로이드 시대의 강타자와 비교해도 비슷한 수준의 통산 wRC+를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주에 언급된 타자들 전부 통산 OPS .900 이상으로 잭슨이 타고투저 시대에서 뛰었다면 저 정도 OPS를 올릴 수 있었을 거라는 소리이다.[14] 이것도 명예의 전당 선수들에 비해 불과하다는 것이지 하먼 킬러브루는 통산 타율이 0.256 밖에 되지 않는데도 홈런은 잭슨보다 10개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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