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 코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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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 코팩스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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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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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샌디 코팩스
Sandy Koufax

포지션
투수
득표수
970,434




파일:브루클린 다저스 엠블럼(1945~1957).png파일: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엠블럼(1958~2011).svg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1955
1959
1963
1965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Koufax_Sandy_Plaque_NBL.png
샌디 코팩스
헌액 연도
1972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6.87% (1회)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모리 윌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켄 보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파일:MLB 로고.svg 1963년 메이저 리그 사이 영 상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딘 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파일:MLB 로고.svg 1965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사이 영 상

딘 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짐 론보그[AL]
(보스턴 레드삭스)
마이크 맥코믹[NL]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할 뉴하우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1945년)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3년)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5년)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3년)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5년)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6년)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5년)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6년)


스티브 칼튼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2년)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후안 마리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래리 잭슨
(시카고 컵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5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래리 잭슨
(시카고 컵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마이크 맥코믹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2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왕
워렌 스판
(밀워키 브레이브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필 니크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밥 빌
(피츠버그 파이리츠)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5년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밥 빌
(피츠버그 파이리츠)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짐 버닝
(필라델피아 필리스)

파일:sportsillustrated_logo.png
196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파일:1965_Sportsman_of_the_Year.png
켄 벤츄리

샌디 코팩스

짐 라이언

브루클린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32번
빌 안토넬로
(1953)

샌디 코팩스
(1955~1966)


영구결번




파일:Sanford Koufax.png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32
샌포드 "샌디" 코팩스
Sanford "Sandy" Koufax

출생
1935년 12월 30일 (88세)
뉴욕 주 브루클린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라파엣 고등학교 - 컬럼비아 대학교 - 신시내티 대학교
신체
188cm / 95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좌투우타
프로입단
195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BRO)
소속팀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55~1966)
기록
퍼펙트 게임 (1965. 09. 09.)
4회 노히트 노런 (1962. 06. 30., 1963. 05. 11., 1964. 06. 04., 1965. 09. 09.)
3회 무결점 이닝 (1962. 06. 30.[1], 1963. 04. 19.[2], 1964. 04. 18.[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의 삶
2.2. 1955~1960시즌
2.3. 1961~1966시즌
2.4. 은퇴
2.5. 은퇴 후의 경력
3. 연도별 기록
5. 과대평가된 투수?
6. 플레이 스타일
7. 기타
8. 자료 출처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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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전 야구 선수. 최초의 사이 영 상 다회 수상자이기도 하다.[4]

통산 성적은 12시즌 397경기 2,324.1이닝 165승 87패 137완투 40완봉 ERA 2.76 ERA+ 131 2396삼진 817사사구[5] FIP 2.69 WHIP 1.106 fWAR 54.5 bWAR 53.1이다.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이 길지 못하여 누적은 그의 실력과 명성에 비해서 처참한 정도이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에 쌓아 올렸다는 점에서 정상참작이 가능하고 다저스의 전성기와 우승을 가져다준 에이스였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을 이뤄냈다.

이름을 주로 '쿠팩스'로 표기하는 경우가 잦으나 실제 발음은 /ˈkoʊfæks/로, '코우팩스' 내지 '코팩스'가 실제 발음에 더 가깝다. 당연히 외래어 표기법에 따를 경우 역시 '코팩스'가 된다. 이 문서 역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코팩스로 표기한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프로 데뷔 이전의 삶[편집]


샌디 코팩스는 1935년 12월 30일 뉴욕 브루클린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어머니 에블린(Evelyn, 결혼 전 성은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과 아버지 잭 브라운(Jack Braun) 사이에서 샌포드 브라운(Sanford Brau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는데, 세 살 당시 부모가 이혼했고, 아홉 살 무렵 어머니가 새 아버지 어빙 코팩스(Irving Koufax)와 재혼하면서 그 슬하에서 지금의 성을 갖게 됐다.

파일:Sandy_Koufax_batting_as_a_young_boy.jpg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샌디 코팩스.

야구를 시작한 것은 1951년 15세 시절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좌완 포수로 시작했고, 이후 1루수로 자리를 옮겨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투수를 시작한 건 재학 중이던 라파예트 고등학교의 야구팀 코치 밀트 로우리(Milt Laurie)가 투수를 해볼 것을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사실 고교 시절만 하더라도 코팩스에게 있어 야구는 그저 겸사로 하는 스포츠에 불과했고 오히려 농구 선수로서 더 유명했다.

하지만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 진학한 이후론 농구 선수로서보다 야구 선수로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제구력은 부족했지만 엄청난 구위[6]를 가진 좌완 투수였던 코팩스는 프로팀 스카우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결과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제시한 연봉 6,000달러, 계약금 14,000달러란 특급 대우에 합의하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됐다.


2.2. 1955~1960시즌[편집]


파일:Sandy Koufax of the Brooklyn Dodgers at the start of the 1955 season.jpg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의 샌디 코팩스.

계약금이 4,000달러를 넘었던 코팩스는 당시 규정인 보너스 룰에 의해 2년 동안 마이너 리그로 내려갈 수 없었고, 이 탓에 낮은 레벨에서부터 체계적으로 투구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메이저 경력을 시작해야만 했다.[7] 여담으로 당시 다저스가 로스터에 코팩스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마이너로 내려보낸 투수는 바로 훗날 감독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다저스의 명장 토미 라소다였다.

데뷔전은 1955년 6월 24일에 있었다. 그 날 밀워키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등판을 가져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동년 8월 27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2피안타 14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첫 승을 신고했다. 하지만 뛰어난 구위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즌 41과 2/3이닝 동안 볼넷을 28개나 허용했을 정도로 불안정한 제구력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이닝에서 알 수 있듯 중용되지 못했고, 소속팀 다저스가 그 해 월드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했음에도 코팩스는 시리즈 내내 단 한 차례도 등판할 수 없었다.

파일:Sandy Koufax with the drafting board at Columbia Univ on October 1955.jpg
1955년 10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당시 코팩스는 야간 건축학 과정에 등록해 수업을 받았다.

2년차 시즌인 1956시즌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뛰어난 구위를 제대로 활용할 제구력을 갖추지 못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알스튼(Walter Alston)은 그런 코팩스를 신뢰할 수 없었고, 코팩스는 시즌 동안 58과 2/3이닝만을 소화하는데 그쳤다. 그 해 자신의 마지막 시즌을 치르던 재키 로빈슨은 당시 알스튼 감독과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다퉜다고 하는데, 그 중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코팩스에게 많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고 한다.

1957시즌을 앞두고 다저스는 코팩스를 푸에르토리코의 윈터 리그에 보냈다. 그 경험 덕분인지 해당 시즌 코팩스는 9이닝 당 10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내며 구위를 결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제구력 개선이란 숙제는 여전했던 터라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할 수 없었다. 9월 29일 시즌 최종전에 마지막 투수로 등판함으로써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기 전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공을 던진 마지막 투수가 되기도 했다.

1958시즌은 부상이 겹치며 부진했다. 탈삼진율도 다시 예전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해당 시즌 내셔널 리그 최다 폭투를 기록했을 정도로 불안정한 투구를 했다.

1959시즌엔 1957시즌 동안 보여줬던 뛰어난 탈삼진 능력을 회복하며 바로 전 시즌에 비해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1959년 8월 31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등판한 경기에선 탈삼진을 무려 18개나 잡아냈는데, 이는 내셔널 리그 신기록이자, 밥 펠러의 메이저 리그 기록과 동률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래왔던대로 불안정한 제구력은 한결같았고, 여전히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파일:Sandy Koufax of the Dodgers pitching on route to 18K performance vs the Giants on August 31, 1959.jpg
1959년 8월 31일, 코팩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18탈삼진을 기록했다.

이후 오프시즌 중엔 다저스의 단장 버지 버베이시(Buzzie Bavasi)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자신이 충분한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1960시즌 역시 제구력 불안과 그로 인한 감독의 불신이 반복됐다. 이에 코팩스는 당시 야구를 그만둘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실망했다고 한다.


2.3. 1961~1966시즌[편집]


1961시즌을 앞두고서, 코팩스는 한 번 더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고, 그 어떤 때보다 뛰어난 컨디션으로 시즌에 임했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기간 다저스 스카우트 케니 마이어스(Kenny Myers)의 지적을 통해 투구 동작을 개선하는 일이 있었고, 올랜도 소재의 B팀 연습 경기에서 제구 난조를 보였을 때, 조금 힘을 빼고 던져보라는 포수 놈 셔리(Norm Sherry)의 조언이 계기가 되어 투구 감각을 잡아내는 일도 있었다. 뭔가 다를 것만 같았던 그 시즌은 실제로 달랐다. 코팩스의 제구력은 장족의 발전을 이뤘고, 덕분에 본격적으로 선발진에 합류해 빼어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시즌 동안 기록한 탈삼진은 무려 269개로, 이는 크리스티 매튜슨의 58년 된 내셔널 리그 기록 267개를 깨는 새로운 기록이었다.

1962시즌은 다저스가 타자 친화적인 로스앤젤레스 콜리세움을 떠나, 투수 친화적인 다저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긴 첫 시즌이었다. 해당 시즌 코팩스는 지난해 달라진 모습에서 더욱 발전하여 타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 뉴욕 메츠를 상대로 데뷔 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무서울 게 없던 코팩스였지만 부상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즌 초 4월에 얼 프랜시스(Earl Francis)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다가 공을 던지는 왼손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당시 검지의 감각에 문제가 생겼지만 최초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좋은 기량을 가지게 된만큼 이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악재 속에서도 출장을 강행해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7월 중순이 되자 결국 부상은 왼손 전체로 퍼졌고, 도저히 공을 던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전문의에게 손바닥 동맥 부상을 진단받은 코팩스는 9월이 돼서야 다시 공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잘 던지긴 커녕 제대로 이닝을 소화하기도 버거운 모습을 보였고, 결국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추격을 허용하며 플레이오프 승부 끝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파일:Sandy Koufax pitching vs the Mets on route to no-hitter at Dodger Stadium on June 30, 1962.jpg
1962년 6월 30일, 코팩스는 뉴욕 메츠를 상대로 통산 첫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아쉬움이 남았던 시즌으로부터 이어지는 1963시즌, 그 해 메이저 리그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혔고, 이로 인해 본격적인 투고타저의 시대가 열렸다. 이런 환경에서 코팩스를 비롯한 메이저 리그의 에이스들은 이전보다 더욱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코팩스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동년 5월 11일엔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후안 마리샬을 내세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통산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만들어냈다. 거칠 것 없던 코팩스는 그 해 25승, 1.88ERA, 그리고 306탈삼진을 거두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생애 최초의 사이 영 상이자 역대 최초의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차지했다. 내셔널 리그 MLB MVP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해 코팩스의 활약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그치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에서 화이티 포드를 앞세운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1차전에 등판해,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2실점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칼 어스킨(Carl Erskine)의 14탈삼진을 깨는 새로운 기록이었다. 당시 은퇴를 앞두고 있던 뉴욕 양키스의 불세출의 리더이자 명언제조기 요기 베라는, 처음 코팩스를 만났을 때는 "저런 애송이에게 25승을 헌납한 내셔널 리그 타자들은 모두 바보냐?"라고 코팩스를 무시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1차전의 환상적인 투구를 상대하고 난 후 "코팩스가 어떻게 25승을 했는지는 알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대체 어떻게 5번을 진 거냐는 거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경기를 포함 파죽의 3연승으로 시리즈 우승을 목전에 둔 다저스는 4차전에 다시 에이스 코팩스를 내보냈다. 그는 여기서 또 한 번 1실점 완투승으로 양키스를 압도했고, 다저스는 4연승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시리즈 MVP도 코팩스가 차지했다.

파일:Sandy Koufax pitching vs the Yankees in G1 of the 1963 WS on October 2, 1963.jpg
1963년 10월 2일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투구 중인 샌디 코팩스.

이 해 쿠팩스가 올린 성적은 40경기 311이닝 트리플 크라운, 역대최초 만장일치 사이영, 내셔널리그 MVP, 월드시리즈 MVP[8]로서 문자 그대로 투수로서 받아갈 수 있는 상을 모두 다 받아갔고, 코팩스는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자 지금도 투수의 가장 완벽한 1년을 꼽으라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설적인 시즌.

1963년의 놀라운 활약으로 명실상부한 메이저 리그 최고 투수에 등극한 코팩스는 1964시즌에도 명성에 걸맞는 투구를 했다. 하지만 그건 부상과의 처절한 사투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 해 4월 22일 왼쪽 팔꿈치에 통증을 느낀 코팩스는 시즌 중 코티즌 주사를 세 번이나 맞으며 투구를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6월 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19승을 거둔 등판의 다음날 아침, 왼팔을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지만 전날 경기의 결과는 13탈삼진 완봉승이었다. 하지만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팀닥터 로버트 컬랜(Robert Kerlan)은 코팩스에게 심각한 관절염을 진단했고, 에이스에게 제동이 걸린 다저스 역시 그 해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실패했다.

1965년 3월 31일 스프링캠프 경기를 소화한 코팩스는 그 다음날 아침 왼팔 전체가 검푸르게 된 것을 발견했다. 이에 팀닥터는 코팩스에게 로테이션을 꼬박꼬박 소화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고, 또 이대로 선수 생활을 강행한다면 일상 생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장애를 갖게 될 거란 이야기를 했다. 코팩스는 경기 외의 불필요한 투구수를 최대한 줄였으며 온전히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 시즌 내내 독한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필드 위에서는 부상을 참고 던지고 있단 걸 잊게 만들 정도로 완벽했다. 코팩스는 해당 시즌 동안 335 2/3이닝[9]을 소화하며 또 한 번 팀을 페넌트레이스 우승으로 이끌었고,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두 번째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9월 9일엔 메이저 리그 역사상 8번째 퍼펙트 게임이자 자신의 통산 네 번째 무안타 경기를 기록하는 위업을 이뤄냈다.[10] [11]


그리고 그 해 월드 시리즈에선 경기 전부터 전국적인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일이 있었다. 유대교의 속죄일(욤 키푸르)과 등판일이 겹친다는 이유로 1차전 등판을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개인의 신념과 사회적 지위가 충돌한 예로서 아직까지도 코팩스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일화로 남아있다. 훗날 코팩스 본인은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인 메세지를 던질 의도는 없었고, 그저 존중에 관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당시 다저스에는 코팩스와 당대 최고를 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원투펀치를 구성한 돈 드라이스데일이 있던만큼, 코팩스가 2차전에 등판하는 것이 팀의 입장에서 아주 대수로운 일까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편하게만 흘러가진 않았다. 1차전에 등판한 드라이스데일이 패퇴했고, 2차전에 나선 코팩스마저 6이닝 2실점 패전을 기록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초반 열세에 무너지지 않고 침착하게 반격에 나섰고, 코팩스는 5차전과 7차전에 등판해 두 경기 연속 완봉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7차전은 이틀 휴식 후의 등판으로, 통증 탓에 커브볼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초반 이후엔 거의 패스트볼만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리즈 MVP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코팩스의 몫이었다.

이후 오프시즌 동안엔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 마찰이 빚는 일이 있었는데, 이 탓에 스프링캠프 합류가 다소 늦어졌다. 그러나 성적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323이닝을 소화하며 27승 9패를 거뒀고, 평균자책점에서 커리어하이인 1.73을 기록하며 자신의 세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페넌트레이스 우승이 걸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맞대결이 더블헤더로 치러졌는데, 그 두 번째 경기에 이틀 휴식하고 등판해 짐 버닝을 상대로 완투승을 기록했다. 당연하게도 해당 시즌 사이 영 상 또한 코팩스의 만장일치 수상이었다. 이어지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선 2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하지만 연이은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고, 여기에 야수의 실책까지 겹치며 짐 파머의 완봉승을 지켜봐야 했다. 이날 경기에서 5차전 등판을 염두에 두고 6회까지만 던진 코팩스였지만, 그가 5차전에 등판하는 일은 없었다. 시리즈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다저스는 4연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2.4. 은퇴[편집]


월드 시리즈가 끝나고 1966년 11월 18일, 자신의 팔에 한계가 왔음을 느낀 코팩스는 30세의 나이로 은퇴를 발표,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선수 경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은 그의 기자회견:

기자: "왜 은퇴하는 겁니까?"

코팩스: "왜 은퇴를 하는 것이냐... 코르티솔이 몸에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경기마다 이 주사를 맞는 삶은 원하지 않았고, 항상 진통제를 먹고 다니느라 늘 배가 불편하고, 골프를 칠때마저 몽롱한 상태로 있는 것,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자: "이제 은퇴해서 수입이 없어지는 거에 대한 생각은요?"

코팩스: "돈을 더 이상 못버는 것...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한쪽 팔이 불구인 남자에게 팔을 고쳐줄 수는 있지만, 돈이 많이 들거라고 제시해봐요.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마지막 10센트 하나까지 줄 거에요. 제 경우가 이 예시에 맞다고 생각되네요. 야구를 끝내고 살 날이 많아요. 남은 여생을 사용할 수 있는 몸으로 살고 싶습니다. 지난 12년의 선수생활을 단 1분도 후회하지 않지만, 마지막 1년은 오히려 후회로 남을 것 같습니다."#

파일:Sandy Koufax icing arm after facing the Mets on September 6, 1966.jpg
1966년 9월 6일 뉴욕 메츠를 상대로 등판을 마친 이후 아이싱을 하고 있는 샌디 코팩스.


2.5. 은퇴 후의 경력[편집]


  • 은퇴 이후 코팩스는 NBC 방송국과 계약해 6년간 토요일 경기의 해설위원을 맡았다. 10년 짜리 계약이었지만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코팩스와 방송일은 맞지 않았다.
  • 1970년 1월 29일, 통신사 AP에 의해 실시된 스포츠 라이터 및 방송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야구 선수(Baseball Athlete of the Decade)로 선정됐다. (2위 미키 맨틀, 3위 윌리 메이스)Koufax - Ed Gruver. 222-223p.Jet - Feb. 19, 1970#
  • 1972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 대상자가 되자마자 그 해 최고 득표율 86.87%로 헌액됐다. 당시 코팩스의 나이 36세 20일은 1939년 루 게릭의 36세 172일을 경신하는 새로운 최연소 기록이었다. 그리고 동년 6월 4일엔 그의 유니폼 번호 32번이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다저스의 마이너 리그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 1979년 월드 시리즈 MVP들의 모임에서 '팀을 구성할 때 누굴 가장 먼저 데려올 것인가?'란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코팩스가 전체 18표 중 8표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 1997년 36명의 BBWAA 기자들의 선정한 MLB 올타임 팀에 선정됐다.#
  • 1998년 스포팅 뉴스 선정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에 26위로 포함됐다.#
  • 1999년 선정된 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30명의 일원이 됐다. 놀란 라이언에 이은 투수 부문 최다 득표 2위였다.
  •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거론된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은 운동 선수 20인(Our 20 Favorite Athletes Of The Century)에 포함됐다.#
  • 2011년에 LA 타임스에서 진행된 인터넷 팬 투표에서 로스앤젤레스 역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선정됐다. (2위 매직 존슨, 3위 빈 스컬리)#
  • 2013년 1월 23일, 다저스 회장 마크 월터(Mark Walter)의 특별 고문 역할로 다저스에 합류했다.
  • 2015년 메이저 리그 팬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생존 선수 4인에 포함됐다. 나머지 세 명은 윌리 메이스, 행크 애런, 쟈니 벤치였다.[12][13]
  • 2016년 ESPN 패널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좌완투수로 선정됐다.#
  • 2022년 스포팅 뉴스 선정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운동 선수로 4인에 포함됐다.#

3.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MLB 로고.svg 샌디 코팩스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55
BRO
-
LAD

12
2
2
0
0
41⅔
3.02
33
2
28
1
30
1.464
136
0.7
0.9
1956
16
2
4
0
0
58⅔
4.91
66
10
29
0
30
1.619
82
0.0
-0.3
1957
34
5
4
0
1
104⅓
3.88
83
14
51
2
122
1.284
106
1.7
1.3
1958
40
11
11
1
0
158⅔
4.48
132
19
105
1
131
1.494
93
1.3
1.2
1959
35
8
6
2
2
153⅓
4.05
136
23
92
0
173
1.487
105
1.8
2.2
1960
37
8
13
1
0
175
3.91
133
20
100
1
197
1.331
101
2.7
1.5
1961
42
18
13
1
0
255⅔
3.52
212
27
96
3
269
1.205
122
6.3
5.7
1962
28
14
7
1
0
184⅓
2.54
134
13
57
2
216
1.036
143
5.7
4.4
1963
40
25
5
0
0
311
1.88
214
18
58
3
306
0.875
159
9.2
10.7
1964
29
19
5
1
0
223
1.74
154
13
53
0
223
0.928
186
6.1
7.3
1965
43
26
8
2
0
335⅔
2.04
216
26
71
5
382
0.855
160
10.0
8.1
1966
41
27
9
0
0
323
1.73
241
19
77
0
317
0.985
190
9.1
10.3
MLB 통산
(12시즌)

397
165
87
9
3
2324⅓
2.76
1754
204
817
18
2396
1.106
131
54.5
53.1


4. 명예의 전당 통계[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샌디 코팩스
78
151
227
46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88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샌디 코팩스
48.9
46.1
47.5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5. 과대평가된 투수?[편집]


한편, 샌디 코팩스를 가장 과대평가된 좌투수로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통계 자료에 근거해 레프티 그로브를 과소평가된, 실제로는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였던 선수로 꼽으며, 코팩스를 '시대'와 '홈 구장'이란 요소에 의해 과대평가된 선수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시대에 대해 살펴볼 경우, 그가 처음 사이 영 상을 수상했던 1963년, MLB는 스트라이크 존을 확장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중후반까지 메이저 리그의 득점 빈도는 20세기 초의 데드볼 시대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었다.

그리고 코팩스가 황금의 5년을 시작한 1962년은 다저스의 새로운 홈 구장인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했던 때다. 그 시절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다. 구장 효과(Park Factor)에 따르면, 당시 다저스 투수들은 홈구장의 이점을 통해 실점을 10% 가량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14]

실제 코팩스는 다저스 투수들 중에서도 유독 홈에서 강했던 투수였는데, 전성기였던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월드 시리즈 등판을 포함해 코팩스가 기록한 9이닝당 실점[15]은 원정에선 2.81점, 홈에선 무려 1.67점이었다. 무려 40%가 감소한 셈인데, 구장과 관계없이 누리는 선수들의 홈 어드밴티지를 고려하더라도 이는 매우 큰 차이다.[16] 단, 오해할까봐 첨언하자면 당연히 전성기 시절 코팩스는 원정 경기에서도 당대 최고의 투수였다.[17]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 할 수 있는 화려한 5년 동안 코팩스는 1.9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여기에 구장으로 인한 효과를 보정해 리그 평균(100)과 비교한 조정평균자책점(ERA+) 167을 기준 삼을 경우, 코팩스의 평균자책점은 리그 평균의 투수와 비교했을 때 40% 정도 더 실점을 억제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기록이긴 하지만 후대의 위대한 좌완 랜디 존슨은 자신의 첫 번째 사이 영 상을 차지한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코팩스의 두 배의 이르는 10년 동안 171이라는 조정평균자책점을 기록, 리그 평균의 투수에 비해 실점을 42% 가량 억제해냈다.[18]

하지만, 투수 분업화가 보다 철저해진 후대의 투수와 단순히 실점율을 비교하는 건 코팩스에 있어 불공평한 처사로 볼 수 있다. 그가 활동하던 196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빡빡한 일정 속에서 더 많은 이닝, 더 많은 투구수를 소화해야 했다. 특히, 에이스라는 이유로 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터무니 없이 느껴질만한 무리한 기용도 자주 행해지던 시대였다. 실제 코팩스는 자신의 전성기의 상당 부분을 치명적 팔꿈치 부상을 참으며 던져야 했고, 최고의 자리에서 이른 은퇴를 해야 했다.[19]

또한, 코팩스의 경력이 높게 평가받는 것은 월드 시리즈에서 맹활약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월드 시리즈 MVP 2회에 빛나는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설적인 우투수 밥 깁슨과 함께 큰 경기에서 가장 강했던 선발투수로 꼽힌다. 많은 선수들이 부담감과 추위에 압도돼 실력 발휘를 못하곤 하는 포스트시즌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인 것. 코팩스는 월드 시리즈에 8차례, 선발론 7차례 나와 0.9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세 차례 우승에 기여했다.[20]후배와 제대로 비교된다.[21]

이런저런 내용을 종합해보면 결국, 코팩스가 단순한 기록 이상의 가치, 즉 '스타성'을 지닌 선수였기에 이런 상반된 평가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인내 끝에 찬란히 만개한 전성기, 화려한 수상 경력과 프렌차이즈의 영광, 노히터와 퍼펙트 게임, 월드 시리즈에서의 활약와 우승, 부상 투혼, 정상에서의 미련없는 은퇴 등 마치 영웅의 서사시 같았던 그의 경력을 대중들은 특별한 것으로 보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이런 요소들은 통계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선 고려할 수도 없고 딱히 고려하고 싶지도 않은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포츠 자체가 감성을 파는 오락의 일종이기 때문에, 주류 청중의 평가가 항상 객관적 통계와 일치하진 않는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는 놀란 라이언이 존재한다.[22][23][24]

흔히 현대의 최강 투수로 평가 받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전성기와의 비교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전성기 문서의 샌디 코팩스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참고 기록] 주요 투수들의 최전성기 4년 - 일반 기록
투수
시즌
승리
승률
ERA
탈삼진
이닝
블랙잉크
수상
샌디 코팩스
1963-1966
97
0.782
1.86
1228
1192.2
66
AS×4,CYA×3,MLB MVP×1,WSMVP×2
그렉 매덕스
1992-1995
75
0.721
1.98
733
946.2
53
AS×4,CYA×4
페드로 마르티네즈
1997-2000
77
0.755
2.16
1153
905.1
36
AS×4,CYA×3
랜디 존슨
1999-2002
81
0.750
2.48
1417
1030.0
55
AS×4,CYA×4,WSMVP×1

[참고 기록] 주요 투수들의 최전성기 4년 - 승리 기여도
투수
시즌
fWAR
RA9-WAR
bWAR
WPA
cWPA[25]
샌디 코팩스
1963-1966
34.3
42.4
36.5
31.1
1.715
그렉 매덕스
1992-1995
29.9
39.3
33.2
25.6
0.339
페드로 마르티네즈
1997-2000
35.3
40.1
37.6
26.1
0.357
랜디 존슨
1999-2002
37.6
38.5
38.3
25.2
0.550


6. 플레이 스타일[편집]


파일:Sandy Koufax whose curveball vs fastball comparison circa 1955-1966.gif
샌디 코팩스의 커브볼과 패스트볼.

"내 평생 팔에 난 털이 곤두설 정도의 경험이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봤을 때였고, 두 번째는 코팩스의 패스트볼을 봤을 때였다."

―알 캠퍼니스(Al Campanis), 다저스의 트라이아웃에서 코팩스의 투구를 타석에서 직접 본 날을 회상하면서.


"코팩스에게 안타를 빼앗는다는 것은 마치 포크로 커피를 마시려는 것과 같다."

윌리 스타젤

하이 키킹, 긴 스트라이드, 확연한 오버핸드, 긴 팔을 이용한 팔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패스트볼과 낙차 큰 커브볼의 조합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위에 있는 흑백 움짤이 그의 구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코팩스의 커브볼은 지금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커브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였지만 선수 경력이 길어지며 체인지업과 포크볼을 가끔씩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코팩스가 무슨 공을 던질지 알았지만 칠 수 없었다."

윌리 메이스[26]


"제가 코팩스를 타석에서 처음 만난 건 22살때였죠. 그때부터 57번만나서 겨우 열번밖에 못 쳤는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타율이 고작 0.175이죠. 엄청난 패스트볼에다가, 위에서 아래로 갑자기 뚝 떨어지는 커브볼을 던지는데... 그걸 어떻게 칩니까? 그는 제가 메이저에서 데뷔한 해부터 3년동안 1,000번이나 삼진을 잡았죠. 1965년엔 382삼진을 잡았다고요, 382삼진! 신시내티 대학생 시절 농구선수를 했을 정도로 손가락이 엄청나게 길었는데 커브볼 그립 잡는데 용이했죠. 그를 타석에서 만나지 않은 걸 기쁘게 생각하세요."

피트 로즈#


코팩스는 폼의 변화를 통해 무슨 공을 던질지 예측하기 쉬운 투수였다.[27] 이런 경향은 왼쪽 팔꿈치 통증이 심해져감에 따라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눈썰미가 있다 싶은 타자들은 대부분 코팩스가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공을 칠 수 없었다고 한다.

강한 자존심과 마초적인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에이스 타입의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례적일 정도로 유순하고 친절한 성격이었다고. 동료인 돈 드라이스데일이 헤드헌터로 타자들에게 악명 높았던 반면 코팩스는 보복구조차 던지기 꺼렸다. 실제로 코팩스는 12년 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며 몸에 맞는 공을 던진 적이 18번 밖에 없고, 이닝당 비율로 따지면 같은 시기에 1,00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들 중 세 번째로 적은 빈도다.[28]

코팩스는 키(188cm)도 컸지만 그보다도 손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두툼했다. 자신의 위업을 계승한 다저스의 193cm 좌완 투수와 손을 맞댄 사진을 보면 손크기의 위압감을 느낄 수 있다. 굵고 긴 손가락으로 야구공을 골프공처럼 쉽게 던지고 남들보다 월등히 더 많은 회전을 걸 수 있었다. 코팩스의 위력적인 패스트볼과 커브볼은 오직 그의 손끝에서만 던져질 수 있는 공이었던 것이다.([인사이드MLB] 칼럼)


7. 기타[편집]


  • 투수 출신임을 감안해도 타격 성적이 매우 부진했다. 주전으로 활동한 시기도 명성에 비해 길지 못했고, 통산 타격 bWAR이 무려 -4.2. 마찬가지로 시원찮은 타격으로 지적받지만, 선수 활동은 2배 가까이 오래 한 게일로드 페리의 -2.7보다 훨씬 낮다.
뿐만 아니라 12연타석 삼진으로 MLB 최다 연속 타석 삼진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55년 7월 6일 부터 9월 15일까지 12타석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고 다음 시즌 6월 3일이 되어서야 첫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내 기록이 끝이 났다. #
그의 고교시절 동창 曰: "졸업반 시즌에 안타를 한개 쳤었나? 공이 아니라 소가 지나가도 치지 못했을거야."[29][30][31]
  • 1969년엔 영화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Richard Widmark)의 딸 앤 위드마크(Anne Widmark)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후 1982년에 이혼했다. 1985년에 킴벌리 프랜시스(Kimberly Francis)와 재혼했지만 1998년에 또 한 번 이혼했다.
  • 뉴욕 메츠의 前 구단주 프레드 윌폰과는 고등학교 시절 팀메이트였다. 둘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막역지우다.
  • 프레드 윌폰의 소개로, 버나드 메이도프의 대규모 폰지 사기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던 바 있다. 하지만 코팩스가 투자했던 돈은 미국 국세청의 피해자 구제안에 의해 상당 부분 돌려받을 수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진 않았다고 한다.
  • 코팩스는 최초의 5인, 밥 펠러, 재키 로빈슨,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에 이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입성한 10번째 선수이다.[32] 최초의 5인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전설들이며, 나머지 4명 또한 명전 기준으로도 뛰어났던 퍼포먼스에 더해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최후의 4할타자, HOF 모니터 역대 1위와 같은 굵직한 상징성까지 겸비한 선수들이다. 당대의 야구 기자와 팬들 대다수가 코팩스를 저런 전설적인 선수들과 동급으로 놓았다는 점을 봐도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입담 좋기로 유명한 요기 베라와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요기 베라의 양키스와 코팩스의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그 해 코팩스의 성적은 25승 5패. 이를 들은 요기 베라는 "저런 허접한 놈에게 25승이나 헌납하다니, 내셔널리그 애들은 뭐하냐?"라고 핀잔을 주었다가, 샌디 코팩스의 활약으로 다저스가 우승을 거머쥔다. 이를 지켜본 베라는 "25승을 어떻게 따냈는지 잘 알았다. 그런데 5패는 어떻게 당한 거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당시 다저스 타자 모리 윌슨은 '우리가 못 쳐서 그랬다' 라고 대답했다고... 정작 요기 베라는 코팩스를 상대하지 못했는데, 이때 그는 38세라서 벤치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의 월드 시리즈 마지막 타석은 3차전 9회초 대타로 나와 돈 드라이스데일을 상대로 기록한 우익수 뜬공이다.
  • 1965년 월드 시리즈 7차전 승리 후 라커룸에서 인터뷰:
빈 스컬리: "다저스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가져다 준 친구입니다. 샌디, 5차전에서 7대0 완봉승을 거두었을 때 (너무 지쳐서) "100살이 된 것 같다"라고 했죠, 지금은 어떤가요?"
코팩스: "101살이 된 것 같네요 (빈, 샌디 둘 다 웃는다). 기분 좋아요, 비니.[33] 앞으로 4개월이나 던지지 않아도 된다니 너무 기쁘네요 (웃는다)."#
  • 미남으로 유명했다. 고령인 지금의 나이에도 미노년이라는 평가를 받는중. 게다가 동안이다.
  • 토미 라소다 감독과 함께 생존중인 다저스의 올드 인사들 중 핵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둘다 2019 월드시리즈 직관했지만 결과는 또 준우승... 그러나 2020년 마침내 우승해서 이제 각각 90과 80을 넘은 라소다 감독과 코팩스가 죽기 전에 드디어 다저스의 우승을 봤다! 그리고 라소다 감독이 사망하며 다저스의 올드 인사들 중에서도 최고참이 되었다. 현재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현존 최고령 투수이다.
  • 5툴 플레이어를 중요시하는 듯하다. 윌리 메이스와 베이브 루스를 비교할 때 윌리 메이스의 수비력과 주루 능력을 높게 사서 윌리 메이스를 더 고평가했다.[34][35]
  • 2018년 10월 4일 다저스와 애틀란타의 디비전 1차전에 모습을 보였다. 이날 경기는 류현진이 선발이었으며 류현진이 7이닝 4피안타 8k 무실점을 기록하고 더그아웃으로 내려갈때 류현진에게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잡혔다.


8. 자료 출처[편집]


Sandy Koufax - MLB.com
Sandy Koufax - Baseball Reference
Sandy Koufax - Wikipedia


9. 관련 문서[편집]



10. 둘러보기[편집]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2년 6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밥 퍼키
(신시내티 레즈)

샌디 코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프랭크 하워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 리치 애시번, 로드 카넬, 펠릭스 만티야[2] 밥 아스프로모트, 짐 캠벨, 터크 패럴[3] 레오 카데나스, 자니 에드워즈, 짐 말로니[4] 1963, 1965, 1966. 이 3번은 모두 만장일치였다.[5] K/9 9.27 BB/9 3.16, K/BB 2.93[6] 1954년 31이닝 동안 51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볼넷도 30개나 허용했다.[7] 이 제도는 당시 과열되는 유망주 계약금 규모를 낮추고, 몇몇 팀이 자본빨로 재능있는 유망주들을 마구 사들여 자기들 팜에 짱박아 놓는 행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제도로 인해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루키들은 보너스 베이비(Bonus Baby)라고 불렸다. 이 제도는 1965년부터 메이저리그에 아마추어 드래프트 제도가 도입되며 폐지되었다.[8] 이 때는 양대리그 1위만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기에 DS와 CS가 없어서 월드시리즈 MVP가 포스트시즌에 받을 수 있는 타이틀의 전부였다.[9] 이 기록이 얼마나 대기록이냐하면 19세기와 데드볼 시대를 제외한 1920년대 이후의 기록으로만 보면 다저스 역사에서 1년에 샌디 코팩스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록.[10] 이때 상대투수였던 컵스의 헨들리는 "최고의 투수에게 패한 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라는 소감을 남겼다.[11] 이날 다저스는 단 1안타만을 치고 승리했다.[12] 해당 시점 생존해 있던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13] 이 중 행크 애런은 2021년에 사망했다. 애런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2023년 현재 살아 있다.[14] 반면 그 이전에 사용하던 에벳츠 필드(브루클린 시절), LA 콜리세움은 투수에게 매우 불리한 구장이었다. 때문에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의하면, 커리어 전체가 기준이라면 코팩스는 구장으로 인해 크게 득을 본 게 아니라고 한다. 2% 정도 실점을 더 억제할 수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15] 평균자책점이 아니다. 평균자책점은 말그대로 9이닝당 자책점이며 여기는 비자책점도 포함하는 것.[16] 다저스의 높은 마운드와 코팩스의 투구 스타일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17] 5년 연속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한 기간 동안 원정 경기에서의 평균자책점과 승률 모두 같은 기간 50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들 중 1위다.[18] 페드로 마르티네스 역시 동 기간대에 173을 기록했다.[19] 우승엔 실패했지만, 정규시즌 성적만 놓고 본다면 은퇴 시즌이야말로 코팩스의 선수 시절 최고의 해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해당 시즌에 개인최다승(27)과 개인최저평균자책점(1.73)을 기록했다.[20] 포스트시즌 등판 기록이 없는 데뷔 시즌까지 포함하여 우승 경력은 4회다.[21] 단조로운 투구 패턴 때문에 매번 털리는 3피치의 커쇼보다도 더 단조로운 2피치 투수였지만, 구위가 너무 압도적이여서 상대 타자들이 무슨 공을 던지는지 알고도 치지 못했다. [22] 라이언과 코팩스는 1999년 올센추리 팀 선정 팬투표에서 투수 부문 1, 2위를 차지했다. 그 밖에도 Ranker.com 등에서 보이는 인터넷 팬 폴을 보면 둘의 대중적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23] 2016년 ESPN에선 샌디 코팩스를 역대 16위에 선정했는데, 독자들이 다시 정렬한 TOP20에선 10위 안에 들고 있다. #[24] 다만 흥미롭게도, 코팩스와 라이언은 약점과 강점이 서로 정반대다. 사이 영 상이 생긴 이래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드는 임팩트를 가졌으나 누적의 부족이 발목을 잡는 코팩스와는 다르게, 라이언은 누적 성적은 라이브볼 시대의 투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난히 들지만 사이 영 상이 없고 세이버메트릭스 상으로도 정점에 있던 시즌이 없었다. 라이브볼 시대에 코팩스 이상의 임팩트를 보여주고 라이언 이상의 누적을 쌓은 건 그렉 매덕스랜디 존슨뿐이다.[25] 포스트시즌 포함[26] 실제로는 잘 쳤다. 메이스는 코팩스를 상대로 122타석 .278/.426/.536으로 OPS가 무려 .962나 됐다. 25볼넷/20삼진으로 삼진보다 볼넷이 많았고 27안타 중에 14개가 장타였다.[27] 비교적 최근에는 랜디 존슨이 이와 같은 경우였다.[28] 그렇다고 전혀 승부욕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전설적인 대도 루 브록이 신인 시절 겁없이 기습번트로 출루해 수차례 도루를 기록하자 등에 야구공 찜질을 놔준 적이 있었다.[29] Sandy Koufax - Lefty's Legacy, Jane Leavy 저 [30] 다저스의 좌-우완 에이스로 활약한 팀동료 드라이스데일이 당대 최고의 타격능력을 가진 투수였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 드라이스데일은 타석에서 통산 29홈런 113타점 WAR 6.3을 기록했다.[31] 그런데 코팩스에게는 선발투수로 등판한 경기에 끝내기 안타를 쳤다는 독특한 기록도 있다. Whit Wyatt과 함께 다저스 선수로서는 둘뿐만이 달성한 기록. #[32] 루 게릭을 첫 투표 입성으로 칠 경우 11번째.[33] Vin의 애칭[34] 보통 베이브 루스는 라이브볼 시대를 개막시킨 상징성과 투수 시절의 대활약을, 윌리 메이스는 엄청난 다재다능함을 고평가받아 두 명이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논쟁에 끼어든다. 보통은 베이브 루스가 압도적 우세이지만, 코팩스처럼 메이스를 더 높게 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35] 사실 윌리 메이스와 샌디 코팩스는 동시대 선수로, 코팩스는 베이브 루스가 선수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은 반면 메이스의 전성기를 그대로 두 눈으로 본 것을 넘어서 직접 상대해본 선수이기에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샌디 코팩스의 발언을 보면 5툴 플레이어를 중시하는 것이 맞기는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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