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맥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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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맥과이어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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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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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크 맥과이어
Mark McGwire

포지션
1루수
득표수
517,181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89
2011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2년 아메리칸 리그 1루수 실버 슬러거
세실 필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마크 맥과이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6년 아메리칸 리그 1루수 실버 슬러거
모 본
(보스턴 레드삭스)

마크 맥과이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티노 마르티네스
(뉴욕 양키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98년 내셔널 리그 1루수 실버 슬러거
제프 배그웰
(휴스턴 애스트로스)

마크 맥과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제프 배그웰
(휴스턴 애스트로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0년 아메리칸 리그 1루수 골드 글러브
돈 매팅리
(뉴욕 양키스)

마크 맥과이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돈 매팅리
(뉴욕 양키스)


파일:MLB 로고.svg 1992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 홈런 더비 우승자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크 맥과이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후안 곤잘레스
(텍사스 레인저스)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새미 소사
(1998년, 66개)

마크 맥과이어
(1998년, 70개)


배리 본즈
(2001년, 73개)


파일:MLB 로고.svg 1998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역사적 공로상



마크 맥과이어
칼 립켄 주니어
새미 소사

토니 그윈
리키 헨더슨
배리 본즈
시애틀 매리너스
(2001)


보유 기록
타수당 홈런 1위
10.61타수[1]





파일:Mark McGwire.jpg

마크 데이비드 맥과이어
Mark David McGwire

생년월일
1963년 10월 1일 (60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지
캘리포니아 주 포모나
신체
196cm / 113kg
포지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0번 (OAK)
소속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86~1997)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7~2001)
지도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격코치 (2010~201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타격코치 (2013~201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벤치코치 (2016~2018)

1. 개요
2. 커리어
3. 은퇴 이후
3.1. 타격 코치
3.2. 그 이후
4. 이야기거리
5. 연도별 기록



1. 개요[편집]


미국의 前 야구선수.별명은 "빅맥(Big Mac)."

새미 소사와 더불어 파업 이후 추락하던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되살린 선수였지만, 이후 그의 재기가 약물로 인했던 것임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소사, 배리 본즈 등과 함께 스테로이드 시대의 어두운 면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1]

2. 커리어[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아마추어 시절에는 6피트 5인치의 큰 키에 투타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고교 졸업 후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투수로 지명 후 입단을 제안받는 등 투수로 더 이름이 알려진 유망주였다. 대학명문 USC가 몬트리올보다 더 많은 장학금과 대우를 제시한 덕분에 1학년 때부터 팀의 중심 구원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랜디 존슨이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5만불 계약금 제안을 거절하고 1년 후배로 들어온 뒤에도 팀의 에이스는 맥과이어였으며, 미완의 대기인 존슨보다 투수로서 더욱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자신의 파워를 살려 타격에만 전념하고 싶던 맥과이어는 코치와 상의 끝에 3학년때부터 투수를 그만두고 타격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2][3] 타자에 전념하면서 32홈런으로 슬러거로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고, 1984년 드래프트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1라운드 10순위로 지명되어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 미국 국가대표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선발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2.2. 오클랜드 애슬레틱스[편집]


맥과이어는 마이너리그에서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파워 히터로 엄청난 성장을 보였고, 1986년 메이저리그에 잠시 모습을 보였으나 본 포지션이 아닌 3루수로 데뷔한 부담감 때문인지 18경기 출장, 0.189, 3홈런으로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하였다. 루키 시절 본인 아버지의 환자이기도 했던[4] 토미 존에게 멀티히트를 때려낸 에피소드도 있다. 본격적인 풀타임 시즌인 1987년 5월초까지도 3루 수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여전히 타격 성적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3루 수비에 애를 먹는 그의 타격을 살리기 위한 결정으로 1루수로 기용하자마자 5월 한달간 15홈런의 엄청난 페이스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에 30홈런을 달성하는 등 루키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8월에 이미 프랭크 로빈슨이 기록한 신인 최다홈런 38개를 훌쩍 넘어버린 맥과이어는 전인미답의 신인 40홈런은 물론, 신인 50홈런까지도 기대할만한 상황이었다.

그가 49홈런을 기록한 후, 한동안 명맥이 끊어진 50홈런에 대한 기대가 엄청났던 상황이었으나, 마지막 경기를 남기고 구단의 양해를 구한 다음 경기 출장을 포기한 채 아내의 곁에서 첫 아이의 출산을 함께 지켜보는 것을 택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5] 결국 루키시즌부터 맥과이어는 MLB 역사상 신인 최다홈런인 49홈런[6], 홈런왕, 만장일치 신인왕에 오르는 등 화제를 몰고 다니며 슈퍼스타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후 맥과이어는 매년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4년 연속 30홈런과 홈런 레이스 순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3,40개를 날려대는 슬러거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1992년에도 42개의 홈런을 날려 단 1개 차이로 홈런 2위에 오르는 등,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호세 칸세코와 함께 '배시 브라더스(Bash Bros.)' 듀오로 당대 최강 오클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1993~1994년 2시즌은 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출장하지 못해 2년간 18홈런을 추가하는데 그쳤다. 1995년 절치부심하여 39홈런으로 재기의 신호를 알린 맥과이어는 1996년 부상으로 132경기만 뛰고도 커리어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무려 52홈런으로 개인 최다 기록과 함께 9년만에 다시 홈런왕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전반기에 맥과이어는 무시무시한 홈런페이스로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기록마저 넘을 페이스였다.

그러나 팀의 명실상부한 프랜차이즈였던 맥과이어는 투자에 인색하여 90년대 초반의 강팀과 거리가 멀어진 오클랜드 프런트에 전력 보강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는데,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트레이드를 요청하겠다는 등 팀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투자 규모를 더 줄일 생각이던 오클랜드는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맥과이어의 가치가 최고일 때 트레이드 방침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오클랜드는 본래 탐내고 있던 유망주 브라이언 자일스를 얻을 기회라 생각하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딜을 제시했으나, 당시 단장이던 짐 하트가 자일스는 절대 트레이드 불가로 못을 박으면서 결렬 되었고, 슬러거를 찾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1:3 트레이드 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세인트루이스에게 최고의 선물로 평가되었는데, 빅맥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세기의 홈런 레이스를 벌이는 등 유/무형의 엄청난 홍보 효과와 이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클랜드로 간 투수 3명은 맥과이어의 이름값과 가치를 생각하면 크게 손해 본 트레이드였으며 역시 별 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7][8]

게다가 빅맥이 이적 후에 보여준 세기의 홈런레이스로 인한 유무형의 이득은 물론, 전국방송에 매일 보도되는 홍보효과까지 감안한다면 당시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인기몰이중인 클리블랜드의 마케팅 효과는 더욱 증폭되었을 터였다. 어쨌건 시즌 중 아메리칸 리그에서 내셔널리그로 이적했기 때문에 이 시즌 맥과이어가 기록한 58개의 홈런은 각각 AL 34홈런, NL 24홈런으로 나뉘어 표기가 되었고 리그 홈런왕에 공식적으로 오를 수 없었지만[9], 1997 시즌의 실질적 홈런왕은 합계 58홈런을 날린 맥과이어로 인정을 받았다.


2.3.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편집]


파일:external/www.rivercitycoins.com/McGwire70SR.jpg
마크 맥과이어 70홈런 기념 메이저리그 공식 기념주화

그리고 역사적인 1998년, 전년도 58홈런을 올리고 혹시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던 맥과이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홈런 레이스를 펼쳐가기 시작한다. 파업 사태 이후 실망한 팬들의 외면으로 메이저리그는 미국인의 스포츠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과거 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과이어가 시즌 개막전부터 만루홈런을 때리고 4경기 연속홈런으로 불을 지피면서 사상 유례없는 페이스로 홈런을 날리자 대중들의 관심이 그의 홈런에 집중되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5월이 끝날때 이미 27홈런으로 경쟁자도 없이 홈런을 쏟아내는 맥과이어의 행보에 매스컴은 앞다투어 61홈런 기록 경신을 보도해댔는데, 여기에 불을 지피듯이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새미 소사가 뜬금없이 6월에 월간 최다홈런 기록 20개를 날리고 당당하게 도전자로 등장해 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소사와 맥과이어의 홈런 경쟁은 그야말로 하나 받고 하나 더 식으로 숨막힐 듯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대중들의 눈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전부 쏠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국방송 TV는 물론 타임지 등 시사 교양지까지 이들의 홈런 경쟁을 연일 기사로 내고, 서로의 인터뷰를 앞다투어 싣기 시작했으며, 한개 차까지 좁혀졌다가 다시 차이를 벌리는 일이 반복되자 전 세계가 이들의 홈런 레이스에 열광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백인 맥과이어는 늘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대중들의 호감을 극대화 했으며, 상대인 소사를 격려하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찬사를 받았는데, 소사 역시 맥과이어를 항상 칭찬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면서,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라이벌>, <당당한 홈런 승부>를 연출하여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서로 한 치의 양보없는 멋진 경쟁 덕분에 이미 전 미국은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레이스에 모두 열광하고 있었으며. 세인트루이스와 컵스의 경기는 매 경기가 지날때마다 월드시리즈 시청률을 훌쩍 넘어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58, 59, 60홈런이 되는 시점부터 경기 때마다 경기장은 물론이고 경기장 밖까지 구름같은 관중이 몰려들었는데, 야구팬은 물론, 야구에 크게 관심 없어도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게다가 그들의 홈런볼을 잡아 경매에서 대박을 노리는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되어갔다. 그리고 맥과이어가 경쟁자 새미 소사가 속한 컵스와의 경기에서 마침내 동률이 되는 61홈런을 날린 시점, 이런 열기는 극에 달했는데, 이전 기록 보유자 고 로저 매리스의 가족들 역시 연일 인터뷰 요청에 일상 생활이 불가능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9월 8일 마침내 세인트루이스와 컵스의 경기에서 맥과이어는 메이저리그의 홈런 기록을 새롭게 쓰는 62호 홈런을 날렸다. 이 순간 15분 가량 경기가 중단되고 모든 관중들이 기립해 박수를 치는 동안, 맥과이어는 전 세계인의 축복을 받는 그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관중석에서 로저 매리스의 가족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기도 하고, 선의의 라이벌 소사는 외야에서 달려와 그를 얼싸안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그의 홈런 신기록을 축하하는 등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두를 감동시키기도 했다.[10] 62호 홈런 소식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즉각 축전을 보내고, 이날 전 세계의 헤드라인은 맥과이어의 62호 홈런 신기록으로 도배되었으며, 한국에서도 스포츠뉴스가 아니라 MBC/KBS/SBS 지상 3사 9시 뉴스에 무려 5분이상 시간을 할애하는 등, 역사에 남을 위대한 순간이 되었다.

결국 시즌 끝까지 소사와의 홈런 경쟁을 벌인 끝에 또 다시 맥과이어는 전인미답의 고지 70홈런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역시 62호에 못지 않은 위대한 순간으로 엄청난 언론과 팬의 찬사들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더불어 66홈런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우고도 2위를 기록한 소사는 맥과이어와의 멋진 승부와 상대를 서로 배려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 위대한 2위라는 찬사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추가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맥과이어와 달리 팀을 이끈 공로와 가장 위대한 조연이자 홈런 2위에 대한 위로의 여론이 형성되어 MVP는 소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결국 1998년 스포츠계를 장식한 맥과이어는 그야말로 메이저리그를 구한 영웅이 되었으며, 그와 소사는 최고 권위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1998년의 위대한 스포츠인으로 공동 수상을 받는 영광까지 안게 되었다.[11] 덧붙여 이전 해부터 맥과이어의 별명 '빅맥'을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했던 맥도날드 역시 사상 초유의 대박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70호 홈런볼은 무려 300만 5,000달러[12]라는 고가에 낙찰되어 현재까지 가장 비싸게 팔린 야구공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13]

1998년을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 또 다시 여운을 주고 싶은 것처럼, 1999년 시즌도 마치 판박이처럼 흘러갔다. 맥과이어가 초반부터 치고나가면 소사 역시 치열하게 따라붙는 등, 1998년 홈런레이스의 2부가 펼쳐진 것이다. 맥과이어는 시즌 중 500홈런을 달성하여 팬들의 엄청난 축하를 받기도 했으며, 결국 마지막까지 추격하는 소사를 2개 차이로 뿌리치고 65홈런으로 다시 홈런왕이 되었다. 시즌 중 트레이드 되어 기록이 리그별로 집계된 97년까지 포함하면, 4년 연속 메이저리그 홈런왕을 차지한 것이며, 4년 연속 50홈런과 2년 연속 60홈런이라는 불세출의 기록은 덤. 더불어 소사는 2년 연속 60홈런을 때리고도 2년 연속 2위라는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2인자가 되었다.[14] 맥과이어는 사상 최고의 타수 당 홈런 비율을 자랑하고, 메이저리그에서 사라진 500피트짜리 홈런을 뻥뻥 날려대는 최고의 홈런왕이었으며 겸손하고 매너있는 언변으로 항상 품위를 유지하여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의 위치로 볼 때 사상 최고의 몸값이 당연하다는 평이었으나, 이어진 재계약 협상에서도 에이전트도 없이 예상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에 흔쾌히 싸인하여 팀에 남는 결단을 내린다. 몸값을 디스카운트 한 것 같다는 언론의 질문에도 "나는 과분할만큼 많은 돈을 받고 있으며, 나를 이렇게 아껴주는 팀과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전세계 최고다" 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태도로 인해, 그야말로 야구계의 수퍼스타를 넘어 전 미국에 모범이 되고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명사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15] 이제 남은 것은 그가 계속 페이스를 이어가 행크 애런의 홈런 통산기록을 경신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고,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망가뜨린 것은 심각한 무릎 부상이었다. 2000년도에도 타수 당 홈런 1위는 그의 몫이었으나, 87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해서 32홈런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더욱 부상이 심각해져서 29홈런을 기록하긴 했지만 1할대의 타율과 반복되는 결장은 홈런왕 맥과이어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결국 16시즌 통산 583홈런을 기록하며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 맥과이어는 아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바람에 더해, 팀에 더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은퇴를 발표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다음 시즌에 보장되어 있는 1,500만달러의 연봉을 포기하고 팀을 위해 은퇴를 선언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내가 은퇴하고 그 연봉으로 남는 돈을 써서 제이슨 지암비와 같은 훌륭한 선수를 영입하고 세인트루이스가 우승하길 바란다.'라는 그의 눈물섞인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물론 알다시피 지암비는 거액을 베팅한 뉴욕 양키스의 품으로 가게 되었고, 반대급부로 티노 마르티네스가 세인트루이스로 왔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고 메이저리그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맥과이어는 아쉽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퇴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2.4. 금지약물 복용 적발[편집]


파일:external/dbc49bc7b61c384da866b44613766ffaf248b04019522f0982b1f3281d2e1594.jpg
파일:attachment/mcsteroid.jpg
[16]
맥과이어는 호세 칸세코의 폭로 자서전과 스테로이드 파동이 벌어지기 한참 전에도, 시즌 홈런 기록을 경신한 1998년 시즌 중에 이미 남성호르몬의 일종인 '안드로스텐다이온(약칭 안드로)'을 복용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었다. '운동에 의한 부상에서 신속한 회복'을 목적으로 복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부수적인 효과가 근육의 힘과 스피드의 증가를 기대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맥과이어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도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안드로 복용은 큰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1997년부터 안드로를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같은 계열로 분류해 금지약물로 지정했고, 미국 내에서도 NFL와 NCAA(전미대학스포츠협회)에서 금지약물로 규제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MLB에서는 아무런 규제 조항이 없었으며, 맥과이어의 안드로 복용은 규정 내에서 합법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크 피아자, 제프 배그웰은 안드로 복용을 시인했음에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17] 전 동료이자 같은 약쟁이 호세 칸세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테로이드 투약을 숨기기 위해 합법적 근육강화제인 안드로를 일부러 갖다 놓았을 것이라며 맥과이어가 언론을 잘 이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2005년, 호세 칸세코는 자신의 자서전 Juiced(약물에 취해)에서 맥과이어를 스테로이드 복용자로 지목했다. 당초 주장했던 안드로가 아닌 스테로이드를 투약했다고 폭로했다. 처음에는 돈이 궁해진 칸세코가 하도 기행을 일삼고 다녀서 이번에도 흥미나 끌어 책을 팔려는 관심병 정도로 보았는데, 자서전에 거론된 선수들이 하나같이 MLB를 대표하는 거물급 선수들인데다가 평소 사생활이나 평판도 좋았기 때문이었다.[18] 거론된 선수들은 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말쟁이의 헛소리라며 일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 언론의 집요한 파헤치기가 진행됨에 따라, 사무국이 시행한 비공개 도핑테스트에 대한 정보 유출, 취재비용을 받은 주변인들과 트레이너 등의 폭로가 연달아 터져나오면서 점점 '책이 진실을 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커져갔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약물 복용자들로 지목된 스타선수들, 특히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맥과이어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s3-origin-images.politico.com/050317_mark_mcgwire_ap_605.jpg
맥과이어는 결국 이 해에 열린 의회청문회에 새미 소사, 라파엘 팔메이로와 함께 대표격으로 참석했는데, 강한 어조로 약물 복용을 일축하며 단호하게 부정한 팔메이로와 역시 약물 복용을 부인한 소사와 달리, "나는 과거에 대해 말하고자 이 자리에 온게 아니다"라는 모호한 회피성 발언을 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결백함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부정하길 바란 대중들은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솔직한 사과를 하거나 뻔뻔하게 오리발 내미는 것보다 더 대응 방법이 나쁘다는 여론이 많았는데, 맥과이어의 위상과 미국인들의 정서를 생각하면,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뒤로 숨는 모습이 더욱 더 비겁하게 비춰지기 때문이었다.[19] 미국의 영웅에서 뒤로 숨는 비겁한 약물복용자로 전락한 맥과이어는 한동안 야구계는 물론 언론에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2010년 경 결국 스스로 스테로이드 복용 사실을 시인하고야 말았다.[20]


3. 은퇴 이후[편집]



3.1. 타격 코치[편집]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ark+McGwire+-+Flickr+Keith+Allison.jpg

그가 대체 뭘 가르칠 건가? 주사바늘 찌를때 참는 방법? 알약 목에 안걸리게 삼키는 방법? 크림 안뭉치게 바르는 방법?


위는 실제로 맥과이어가 카즈의 타격코치로 임명되었을 때 해외포럼의 반응이다. 2009년 말 전격적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의 타격 코치로 임명된다. 위에서 말한 스테로이드 고백도 결국 카디널즈의 타격 코치로 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백한 것이라 보는 시각이 많다.

처음 카즈의 타격 코치로 부임했을 때에는 카즈 골수 팬들을 제외하면 반응이 싸늘했다. 위에서 예시한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약물 복용하고 비겁하게 뒤로 숨으면서 아무 말도 못하던 사람이 뭘 가르치겠냐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타격 기술을 카즈 선수들에게 전수하고 팀의 타격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21]

그의 코칭은 간단하다면 간단한데, 첫 번째는 선구안과 참을성을 기르고 두 번째는 그를 통해 타자가 선호하는 영역에 공이 들어올 때 까지 기다리며, 세 번째는 무리해서 어퍼 스윙과 당겨치기를 하지 말고 레벨 스윙과 밀어치기를 통해 의식적으로 장타를 노리기 보다 출루에 집중하는 것이다. 출루를 우선시 하다보면 장타는 타자 본인들의 파워 포텐셜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플러스 알파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타자들을 다각도에서 면밀히 분석하여, 그의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맞춰 적절한 지도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맥과이어가 신인 때부터 보여주던 타격 자세였는데, 결과적으로 선구안과 출루율, 그리고 이를 통한 OPS의 가치가 중요해진 근래의 야구 흐름에 적합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덕분에 카디널스 타선의 타율과 출루율이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올라서 공포의 똑딱이 타선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지도를 받고, 타격면에서 약점이 지적되던 야디어 몰리나가 탁월한 수비형 포수에서 2011 시즌 3할 타율을 달성하는 등, 공수겸장의 최고 포수로 등극했으며, 알버트 푸홀스가 이탈한 2012년 카디널스의 타선이 불을 뿜도록 만든 원동력이 맥과이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의외의 결과는 아니다. 전성기 시절 홈런 머신이었기에 상대 투수들이 의도적으로 볼넷을 내 준 경우도 많았겠지만, 기본적으로 통산 .263 타율에 비해 통산 출루율이 .394로, 4할에 육박할 만큼 선구안이 좋고 인내심이 뛰어났던 OPS 히터의 교본과도 같은 타자가 맥과이어다. 거기에 본인이 약쟁이였기에 역설적으로 타자의 장타력이라는 게 단순히 코칭이나 스윙법을 바꾼다고해서 본인의 자연스러운 파워 포텐셜 이상을 뽑아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다.[22]

파일:external/a2.fssta.com/112415-MLB-Dodgers-Hitting-Coach-Mark-McGwire-PI-CH.vadapt.620.high.25.jpg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코치시절
2012년 시즌 종료 후, 고향팀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타격코치로 옮겼다. 카디널즈의 타격코치로써 인정을 받고 있었고 팀도 맥과이어를 잡으려 했으나, 캘리포니아에 있는 가족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하는 맥과이어가 고사했다. 한동안 다저스의 타격이 죽을 쑤며 약맥도 이 팀은 어쩌지 못하는 건가 싶었지만, 시즌 중반이 넘어가며 타자들을 대거 부활시켰다. 그냥 원래 이름값이 높고 잘하던 선수들이 많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나, 무리하게 큰 스윙을 하던 후안 유리베를 컨택형 히터로 변신시키며 참으로 오랜만에 몸값을 하게 만들었고, 야시엘 푸이그가 빠른 속도로 MLB에 적응할 수 있게 잘 지도하고 있다. 물론 그 짧은 기간 안에 지도를 흡수하고 따라가는 푸이그의 학습 능력도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거긴 하지만. 또 핸리 라미레즈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신나서 잘하는 심리를 일찌감찌 파악하고 별도의 지도를 하기보다 '넌 최고야. 네 스윙은 완벽해.' 등의 칭찬을 하며 그를 다시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되살려 놓았다. 다저스는 8월 29일 기준으로 팀 타율 4위, 팀 출루율 6위를 기록중이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 리그의 팀들을 제외하면 내셔널리그로 한정지으면 팀 타율 2위, 팀 출루율 2위다. 초반의 삽질을 생각하면 비약적인 반등인데, 1위는 맥과이어가 지도한 카디널즈이었다.

이렇게 타격코치로선 30개 구단 타격코치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평가를 받는다. 때문에 더더욱 안타까워지는 인물이기도 한데, 그가 단순히 약물 복용으로만 회자될 선수가 아니라 뛰어난 기술과 재능을 갖춘 타자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약물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위대한 영웅이자 존경받는 야구인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23] 지도자로 성공한 근래의 모습까지 더해 선수로 이룬 영웅적인 업적에 더해 지도력까지 갖춘 모범적인 야구인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고, 결국 경기력 향상 약물이라는 부정한 방법으로 이뤄낸 업적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세운 수많은 업적은 별표가 붙은 참고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것이고,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입회할 가능성은 없다. 무엇보다 MLB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1998년의 아름다웠던 홈런레이스는 약물을 복용한 부정한 자들의 별표 붙은 참고 기록으로만 기억될 것이다. 물론 자업자득이니 누굴 탓 할 수도 없다.

2013년에 일어난 약물 파동에 대해서 '나는 아마 명예의 전당에 못 갈 거고, 이해한다. 하지만 다시는 약물 파동 같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2015년 시즌이 끝나고 돈 매팅리 감독이 해임되면서 맥과이어도 코치직을 사임했다. 애초에 카디널스에서 다저스로 적을 옮긴 것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기 싫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근 지역에서 코치직을 알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맥과이어와 오랜 기간 함께했고 카디널스 시절 코치로 받아주었던 토니 라 루사가 CBO로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타격코치로 영입하려고 진지하게 접근했으나, 맥과이어가 선택한 것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벤치코치였다. 이 이유 역시 가족들과의 거리문제로 알려져 있다.

3.2. 그 이후[편집]


2018시즌 종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맥과이어의 타격 이론이 2010 년대 후반부터 유행하는 메이저리그의 주류 타격 이론과는 거리가 멀어진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맥과이어의 타격 이론은 '한물 간' 이론이다. 맥과이어의 이론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투수들의 구속 상승이 막 시작되던 2010년대 초중반까지로 보는 게 맞다. 구속 상승이 절정에 달한 2010년대 중반부터는 현실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이론이 되어 버렸다.

밀어치기당겨치기 항목에도 나오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평균 패스트볼 구속이 150km를 넘겨버린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밀어치기로 공략하려 드는 것은 소수의 예외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적절치 않은 방법이다. 타구를 컨트롤하여 높은 확률로 정확하게 외야로 보내고 안타로 만드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하기에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브먼트도 심해서 제대로 맞추는 것도 힘들다. 자신이 선수 시절을 보낸 90년대는 물론이고. 맥과이어가 은퇴한지 7 년이 지난 2007 년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포심 구속은 시속 150km를 넘지 못 했으며, 당연히 본인의 타격 철학도 그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

그래서 유행한 것이 극단적인 당겨치기와 이른 바 '플라이볼 레볼루션' 으로 불리는 어퍼 스윙 선호, 더 정확히 말하면 타구 발사각도 중시 타격이다. 2010년대 후반 이후 구단과 타격 코치들이 타자들에게 타석에서 요구하는 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공을 최대한 세게 쳐서 발사 속도를 높이고 (당겨치기)
2. 되도록 10~20 도 가량의 발사 각도를 만들어 공이 외야로 빠져나갈 수 있게, '플라이볼'을 만들어라. (미세한 어퍼스윙)

이렇게 함으로써 각 팀의 타격 코치들은 메이저리그의 강속구 투수들을 상대로 장타와 홈런을 양산해내고, 설령 땅볼을 치더라도 힘이 잔뜩 실린 총알탄 타구로 내야를 뚫고 나가 안타가 되는 것을 노리는 것이다. 현재 구속 평균이 1부 리그 기준으로 봐도 타자가 섬세하게 거르거나 컨트롤이 가능한 여지를 벗어난 이상, 일단 힘껏 때려서 위기를 모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 심지어 공인구의 항력도 줄어들었다는 정황이 공인된 이상 당겨치기를 대비한 수비 시프트에 맞서서 특별한 기교를 부리기 보다 오히려 당겨칠 것을 읽히고도 윽박질러서 뚫어버리는 쪽이 더욱 효과적이게 되었다. [24]

보면 알겠지만 최신 타격 이론 트렌드는 맥과이어가 지도했던 스타일과는 다소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는데다가 심지어 교타자와 장타자를 가리지 않는 효율도 겸비했다.[25]. 아무리 맥과이어가 전설적인 대타자여도 현대 야구의 환경에 대해 어떻게 자신의 해법이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득시킬 수 없다면 구단은 난색을 표하다가 결국 거절을 할 것이다.


4. 이야기거리[편집]


  •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한 시즌 60홈런을 쳐 본 내야수이다. 그것도 2번 달성했다.

  • 안드로 문제만 불거졌을 때에도 여러가지로 말이 많았다. 당시 지역 내 초등학생들이 과학탐구 과제로 안드로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 조사한 다음에 결론 부분에 빅맥은 안드로 안 끊으면 나중에 발기부전으로 고생할 듯이라고 적어냈다고 한다.

  • 은퇴 이후 골프 시즌에도 몇번 나가봤고, 대부분의 야구 선수들이 그렇듯 수준급의 골프 실력을 가지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홈런왕이니까 몇 년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버텨주리라 믿었었지만 실제로는 딱 버텼기만 했을 뿐 10회차에 떨어졌다.[26]


  • 아들내미바보로 상당히 유명하다. 선수생활 초기인 1988년에 이혼을 해 갈라섰는데, 이혼 당시 갓난쟁이었던 아들 매튜를 홀로 키워냈고, 새미 소사와 홈런레이스를 펼쳤던 1998년에 매튜를 카디널스의 배트보이로 동행시키며 미국 전역에 감동을 줬다. 선수생활 말년에 인터뷰에서 은퇴를 하면 아들의 양육을 위해 헌신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이후 2002년에 재혼을 했고, 2010년 느즈막한 나이에 세쌍둥이 딸을 낳았다. 재혼 후에 식구도 늘어서, 맥과이어의 아들 매튜, 새부인 쪽의 아들 둘과 상기한 세쌍둥이 딸까지 합쳐, 맥과이어는 여섯 아이의 아버지이다. 새부인 쪽의 아들인 메이슨이 가끔 빅 맥과 같이 선수단에 동행하고 있다.

  • 한편, 마크 맥과이어의 형제 중 4살 어린 동생 댄 맥과이어는 미식축구 쿼터백으로 1991년 NFL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6번으로 시애틀 시호크스에 지명이 됐다.[28] 그러나 1라운더라는 기대와는 달리 '1라운더 먹튀(first round bust)'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백업 쿼터백으로 활동하여 5시즌만 뛰고 은퇴했다(시애틀 시호크스 1991~1994, 마이애미 돌핀스 1995). 그래도 댄 맥과이어는 나름 NFL에 족적을 남기긴 했는데, 2012년 드래프트 전까지 쿼터백으로서는 가장 큰 키인 6피트 8인치(203cm)인 선수이기도 했다.

  • 전성기 시절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과 함께 나이키 CF를 찍었고, 이 두 사람이 부러워하는 만인의 스타 역할을 하였지만 이 둘은 청정 투수였기에 현재는 평가가 역전되었다.

  • 2014년 5월 28일 다저스의 코리안 데이를 맞아 박찬호가 다저 스타디움에서 시구를 했는데 15년전 있었던 당시 맥과이어의 소속팀 카디널스와 다저스의 경기에 있던 역사적인 사건을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저 당시 마크 맥과이어는 전성기(1999년)였으며, 저 사건을 몸소 경험한 인물이었고 타석에 들어서서 안타를 치는 등 전설적 사건에 기여했다. 저 당시 맥과이어는 우익수 뜬공을 당하고 나서 다음 타자인 타티스두번째 만루홈런을 치자 기립박수를 치는 등 축하해주었다.


  • '비디오 기록이 남아있는 선수' 중에서 가장 비거리가 큰 홈런(538피트, 164m, 시애틀 킹돔)을 날렸다. 상대 투수는 대학교 후배였던 랜디 존슨. 영상 자료로 남아있지 않는 기록으로는 180미터가 넘는 홈런을 날렸다고 하던 미키 맨틀이 한 수 위라 하겠지만, 이 쪽은 기록 측정 방법과 정확한 기록의 부족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맨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대형 홈런으로 유명한 윌리 스타젤도 내셔널리그의 절반 이상 구장에서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550피트 이상의 장외 홈런도 심심할만 하면 때렸다고 한다. 다만 스타젤이 활동할 당시 기록을 가진 초대형 구장들은 현재 대부분 철거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는데, 철거되기 전 베테랑 스타디움의 최장거리홈런 기념 깃발(550피트 추정), 다저 스타디움 주차장으로 직격한 홈런(560피트 이상 추정), 스타드 올랭피크 드 몽레알의 상단을 때린 홈런(535피트 추정) 등 전설적인 기록들이 많다. 다만 비디오로 남아있는 기록은 스타드 올랭피크의 영상 일부 밖에 없는 듯하다.

5.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MLB 로고.svg 마크 맥과이어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6
OAK
18
58
10
1
0
3
10
8
0
4
18
.189
.259
.377
.636
-0.3
-0.2
1987
151
641
161
28
4
49
97
118
1
71
131
.289
.370
.618
.987
5.1
5.1
1988
155
635
143
22
1
32
87
99
0
76
117
.260
.352
.478
.830
3.5
2.7
1989
143
587
113
17
0
33
74
95
1
83
94
.231
.339
.467
.806
4.3
3.6
1990
156
650
123
16
0
39
87
108
2
110
116
.235
.370
.489
.859
5.7
5.7
1991
154
585
97
22
0
22
62
75
2
93
116
.201
.330
.383
.714
1.4
1.6
1992
139
571
125
22
0
42
87
104
0
90
105
.268
.385
.585
.970
6.3
6.5
1993
27
107
28
6
0
9
16
24
0
21
19
.333
.467
.726
1.193
1.5
1.5
1994
47
172
22
3
0
9
26
25
0
37
40
.252
.413
.474
.887
1.2
1.5
1995
104
422
87
13
0
39
75
90
1
88
77
.274
.441
.685
1.125
5.0
5.5
1996
130
548
132
21
0
52
104
113
0
101
159
.312
.467
.730
1.198
7.3
6.4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97
OAK/STL
156
657
148
27
0
58
86
123
3
101
159
.274
.393
.646
1.039
5.4
5.1
1998
STL
155
681
152
21
0
70
130
147
1
162
155
.299
.470
.752
1.222
8.5
7.5
1999
153
661
145
21
1
65
118
147
0
133
141
.278
.424
.697
1.120
6.0
5.2
2000
89
321
72
8
0
32
60
73
1
76
78
.305
.483
.746
1.229
4.6
4.2
2001
97
364
56
4
0
29
48
64
0
56
118
.187
.316
.492
.808
0.6
0.3
MLB 통산
(16시즌)

1874
7660
1626
252
6
583
1167
1414
12
1317
1596
.263
.394
.588
.982
66.3
62.2

[1] 다만 본즈나 소사와 달리 이후 성공적인 타격코치 활동을 통해 이미지 쇄신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2] 결코 투수로서의 성적이 부진해서 전향하거나 한 게 아닌데, 존슨 입단 이후에도 팀의 최고 투수는 맥과이어였고, 2학년때도 팀의 선발경기, 이닝을 가장 많이 책임졌으며 방어율도 2.78로 팀 1위였다. 존슨은 마이너리그 시절이나 그때나 엄청난 장신에 무시무시한 강속구만 있었을 뿐, 투수로서 완성도는 맥과이어보다 한참 떨어졌고 투구폼도 현재 이미지와는 다른 오버 스로우였다.[3] 하지만 훗날 인터뷰한 바로는 존슨이 던지는 걸 보고 "아 저 정도는 되어야 투수를 할 수 있는 거구나"하고 타자로 전향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존슨을 위한 립서비스성 발언일 확률이 높으므로 가려들어야 한다.[4] 맥과이어의 아버지는 치과의사였다.[5] 1988년 이혼했지만 맥과이어는 재혼할 때까지 아들 매튜를 혼자서 키웠다.[6] 해당 기록은 2017년 애런 저지가 52개로 경신하며 깨졌고, 2023년 현재 최고 기록은 피트 알론소가 2019시즌 친 53개.[7] 그리고 트레이드 과정에서 오클랜드보다 클리블랜드가 최악의 삽질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브라이언 자일스는 살인타선으로 유명했던 클리블랜드에서 막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선구안과 장타력, 주루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평을 들었긴 했다. 1997년 기준으로 그 전해 악동 알버트 벨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으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맷 윌리엄스, 애틀란타에 케니 로프턴을 주고 데이비드 저스티스, 마퀴스 그리솜을, 토론토에서 토니 페르난데스를 데려왔고, 기존의 매니 라미레즈-짐 토미-샌디 알로마 주니어-오마 비즈켈이 상하위에 버티는 클리블랜드 타선은 역대 최강 소리를 들을만 했는데, 여기에 맥과이어까지 가세했다면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타선이자 벨이 빠진 자리를 우타 빅뱃으로 다시 채워넣을 수 있는 황금 기회였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건 하트는 이렇게 애지중지 여기던 자일스를 리치 섹슨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겨우 피츠버그의 좌완 셋업맨 리카르도 링콘 딱 1명과 바꿔먹는 어이없는 무브를 보여준다.[8] 자일스는 피츠버그로 이적 후 무시무시한 출루율과 4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슬러거로 자리잡으면서 빅맥과도 안 바꾼 하트의 안목을 입증케는 했지만, 링컨은 별볼일 없는 모습으로 일관하다 미네소타에 트레이드 되고 나서야 잠깐 불펜 셋업맨으로 반짝했을 뿐 이었다.[9] 그 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은 56홈런을 날린 켄 그리피 주니어였다. 내셔널리그에서는 49홈런을 친 래리 워커가 홈런왕을 차지했다.[10] 그리고 마이크를 든 맥과이어는 "모든 팬들, 로저 매리스, 그리고 새미 소사에게 이 영광을 바친다."라는 멋들어진 코멘트로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야말로 전 세계가 열광하는 순간이었다.[11] 덕분에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메이저리그의 아이콘이었던 켄 그리피 주니어는 2년 연속 56홈런을 날리고도 완전히 묻히는 비운을 맞았고,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 자리도 맥과이어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사실 그리피의 위상이 떨어진 건 아니고, 맥과이어가 야구를 넘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스포츠 스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12] 270만달러+경매수수료 30만 5,000달러[13] 행크 아론을 넘어선 배리 본즈의 756호 홈런볼의 경우, 맥과이어 홈런볼의 4분의 1도 채 미치지 못하는 75만달러에 낙찰되었다.[14] 게다가 소사는 2001년에 사상 최초로 60홈런을 3번이나 날린 선수가 되었지만, 배리 본즈의 73홈런으로 인해 3번째 60홈런 2위라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15] 90년대 말부터 미국 프로스포츠의 연봉 인플레가 심화되어 한 때 상상도 못하던 1억불 이상 계약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어린 나이에 거액 계약이 트렌드처럼 되어버린 NBA 선수들을 필두로 계약 이후 방탕한 사생활과 사건사고를 일으키면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많아지자, 프로 선수들의 미성숙한 태도와 돈을 조장하는 흐름을 크게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그런데 야구계의 영웅인 빅맥이 돈보다 가치를 중요시하는 모습을 솔선수범해서 보여줬으니, 미국의 주류층은 물론 대중들이 그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약물과는 거리가 멀었던 프랭크 토마스 역시 뛰어난 야구 실력에도 불구하고 계약에 대한 불만, 몰지각한 발언의 연속으로 비난을 많이 받았다.[16] 마크 맥과이어의 우유 섭취 캠페인 'got milk?' 광고 포스터(좌)와 이를 패러디한 약물 포스터(우). 오른쪽의 패러디 포스터에는 떴어요, 떴어요, 갔어요(Going, going, gone)가 약물을 먹은 기억과 불알이 (붕) 떴어요, 떴어요, 갔어요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의 'got milk?'는 'got memory loss?'(기억은 싹 지우셨죠?)가 되었다. 불알이 떴다는 말은 배리 본즈의 약물 적발 당시 배리 본즈의 전 여자친구였던 킴벌리 벨(Kimberly Bell)이 본즈의 정낭에 대해 '작고, 비정상적인 형태'였다는 말을 한 후 아래의 맥과이어의 겁쟁이 같은 증언이 겹치면서 사실 맥과이어의 그것도 그런 상태 아니냐는 반쯤 악의적이고 반쯤 추측선상인 소문을 말한다. #[17] 사실 맥과이어가 벌이는 홈런 레이스에 열광하는 팬들은 물론이고, 대중 매체와 MLB 사무국 역시 굳이 불법도 아닌 안드로를 가지고 일을 크게 만들 이유가 없기도 했다.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잔치에 억지로 재를 뿌릴 이유가 없던 것이다. 다만 당시에도 배리 본즈는 안드로 복용 사실에 대해 냉랭한 반응으로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오히려 본즈에 대해 괜히 초를 치고 시기한다는 뉘앙스의 여론이 있을 정도였다.[18] 칸세코가 거론한 라파엘 팔메이로, 이반 로드리게스, 제이슨 지암비, 후안 곤잘레스, 미구엘 테하다 등은 하나같이 MVP급 대스타들이며 평소 팬서비스 좋고 사생활의 잡음도 없었다. 그런데 칸세코는 직접 주사까지 서로 놔줬다고 말했고, 이들 중 이반 로드리게스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미첼 리포트와 도핑 테스트 등에서 실제로 약물 복용자로 밝혀졌다. 당대 최고의 포수였던 로드리게스도 약물 복용 의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며, 선수 시절의 훌륭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득표율 76%로 명예의 전당에 턱걸이 입성했다.[19] 물론 당당하게 결백을 주장한 팔메이로는 즉시 도핑테스트에 현행범으로 걸리는 것도 모자라, 테하다가 준 연고를 발라서 그렇다는 발뺌에다 물귀신 짓까지 벌여서 개망신 당하고 완전히 사회적으로 매장당해 버렸다. 소사 역시 코르크 배트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한데다, 어린애처럼 독불장군같은 행동들이 밝혀지고 커브스 선수단에게 쫒겨난 상황이라 결백을 주장해도 외면을 당했고, 결국 2003년 비공개 약물검사 적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비웃음만 크게 샀다.[20] 다만 자신은 오클랜드 시절의 성적은 약빨이 아니라고 말했긴 했는데......차라리 2005년 청문회에서 즉각 시인하고 사과한 다음 그런 말을 했었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그런말 한다고 믿어줄 사람도 없고, 믿기도 어렵게 되었다.[21] 사실 맥과이어는 대학 시절부터 엄청난 파워는 물론, 뛰어난 선구안과 볼을 거르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투고타저이던 1987년 신인 시절에 이미 49홈런을 날린 초일류 타자였다. 500피트짜리 홈런과 낮은 타율 때문에 그의 타격을 보지 못한 사람은 선입견이 생길 수 있지만, 타율이 낮은 대신 볼넷을 많이 얻어내고 자신이 좋아하는 존을 철저하게 설정하는 타입이었지, 냅다 휘두르는 배팅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홈런왕 경쟁자였고 공을 쪼개버릴 듯 칠 만한 공이 들어오면 여지없이 휘두르는 소사와 큰 차이가 있다.[22] 타격폼의 교정으로 장타력이 크게 상승한 경우를 보면, 폼의 교정을 통해 본인이 지닌 능력 이상의 파워를 뿜어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타격폼 때문에 선천적인 힘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폼의 교정을 통해 본인의 힘을 자연스럽게 실을 수 있도록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폼 교정을 통한 MLB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크리스 데이비스, 호세 바티스타.[23] 물론 약물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시기는 1993~94년 심각한 부상 이후 재기에 성공한 1995년이다. 사실 부상의 심각성과 신체의 노화를 고려해 본다면, 한 시즌 정도는 반짝 예년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매년 홈런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70홈런을 때려낸다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야만없이긴 하지만, 약물복용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80년대 말~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슬러거 중 하나' 정도의 위치를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400홈런을 달성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물론 수십 년 후 애런 저지, 피트 알론소가 깨게 되는 신인 최다 49홈런 기록은 비약물 기록일 확률이 매우 높고, 금지 약물 규정이 제정되기도 전이므로 수십 년 동안 지킬 수 있었을 듯하다.[24] 다만 이 작전에 제대로 카운터를 먹이는 게 바로 '수비 시프트' 인데, 당겨치기로 인해 타구가 필드의 한쪽에 집중되므로 거기에 수비를 집중해 배치하면 높은 확률로 안타가 될 타구도 잡아내고 장타도 단타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극단적인 당겨치기 타자들의 경우 아예 한쪽 수비수들을 비워놔서 번트만 제대로 되도 장타가 나올 수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타격 코치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수비 시프트가 이런 전략에 제대로 빅엿을 먹인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치기보다는 이 쪽이 일단은 더 생산력있기에 1부 리그 기준으로 누구나 노력만 하면 빠른 공을 느리게 볼 수 있게 되는 혁신적 훈련방법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이런 방법을 고집할 것이다.[25] 일단 쓸데없이 극단적인 어퍼스윙을 교정하는 것 자체는 내야뜬공 억제를 위해서라도 타당하다. 밀어치기 자체도 뻔한 볼배합에 너무 쉽게 아웃을 당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끌어올려야 한다. 장타력에 무리한 욕심을 내다가 몸을 망치지 않는 것도 현명하다. 여지 없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150이 넘어갈 정도로 극단적인 투구에도 밀어치기을 강조하는 자세. 그 정도 구속과 구위 앞에서는 눈야구와 주력을 앞세운 교타자라 할지라도 차라리 배드볼 히팅을 감수하고 힘껏 당겨치는 편이 일부러 수비 시프트 반대쪽을 노리는 방망이 기교를 부리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안정적인 선택지라는 것이 기록으로 증명되고 있는 마당에, 예측한 변화구를 공략하는 게 아니라면 밀어치기를 일부러 강조할 필요가 없다. [26] 2014년 11%, 2015년 10%, 2016년 12.3%.[27] 참고로 홀리데이는 약물 문제에 대해 강경하기로 유명한 선수이다.[28] 참고로 댄 맥과이어는 이 드래프트에서 맨 처음 뽑혔던 쿼터백이었다. 그 다음에 뽑힌 쿼터백이 2라운드 전체 33번이었던 레전드 브렛 파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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