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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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로즈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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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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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피트 로즈
Pete Rose

포지션
외야수
득표수
629,742


파일:신시내티 레즈 엠블럼(1972~1992).png파일:1980필리스우승로고.gif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1975
1976
1980

파일:1965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1967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68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1969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0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1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3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4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5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6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7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8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9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0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1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2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85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65
1967
1968
1969
1970
1971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5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7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스티브 가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신인왕
켄 헙스
(시카고 컵스)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딕 앨런
(필라델피아 필리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8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1루수 부문 실버 슬러거
키스 에르난데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피트 로즈
(필라델피아 필리스)


알 올리버
(몬트리올 엑스포스)


파일:MLB 로고.svg 1976년 메이저 리그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루 브록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로드 커류
(미네소타 트윈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8년 ~ 196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타격왕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리코 카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7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타격왕
빌리 윌리엄스
(시카고 컵스)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랄프 가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MLB 보유 기록
최다 안타
4,256개
최다 출장
3,562경기
최다 타석
15,861타석
최다 타수
14,053타수



신시내티 레즈 등번호 14번
돈 짐머
(1962)

피트 로즈
(1963~1978)


결번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14번
버드 해럴슨
(1978)

피트 로즈
(1979~1983)


잭 워켄퍼스
(1985)
몬트리올 엑스포스 등번호 14번
톰 허튼
(1979~1981)

피트 로즈
(1984)


네드 요스트
(1985)
신시내티 레즈 등번호 14번
결번

피트 로즈
(1984~1989)


피트 로즈
(1997)
피트 로즈
(1997)

영구결번






신시내티 레즈 No. 14
피트 로즈
Pete Rose

본명
피터 에드워드 로즈 시니어
Peter Edward Rose Sr.
출생
1941년 4월 14일 (82세)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웨스턴 힐스 고등학교
신체
180cm / 87kg
포지션
1루수[1], 2루수[2], 3루수[3], 좌익수[4], 중견수[5], 우익수[6]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1960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CIN)
소속팀
신시내티 레즈 (1963~1978)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9~1983)
몬트리올 엑스포스 (1984)
신시내티 레즈 (1984~1986)
지도자
신시내티 레즈 감독 (1984~1988, 1988~1989[7])
기록
통산 4,256 안타
통산 3,562 경기 출장
통산 14,053 타수
통산 15,890 타석

가족
아들 피트 로즈 주니어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
2. 그가 세운 주요 기록들
3. 유년기
4. 선수 경력
4.1. 신시내티 레즈: 빅 레드 머신의 일원
4.4. 다시 친정으로, 그리고 은퇴
5. 지도자 경력
5.1. 영구제명
6. 그 뒤
7. 여담
8. 연도별 기록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감독. 별명은 찰리 허슬(Charlie Hustle). 리그 역사상 최다안타 기록 보유자이다.[8] 1970년대 메이저리그를 폭격했던 신시내티 레즈의 일원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감독 시절 스포츠 도박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으며, 명예의 전당에도 당연히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되었고 이후 탈세에도 걸리는 등 야구장 밖의 개인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2. 그가 세운 주요 기록들[편집]


메이저리그 타자 역사상 최고의 금강불괴라고 할 수 있다.[9] 기록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데, 무려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안타, 최다 출장, 최다 타석, 최다 타수, 최다 아웃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가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최고 기록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
피트의 기록
2위의 기록
3위의 기록
2021년까지 현역 1위
안타
4,256
4,191개(타이 콥)
3,771개(행크 아론)
3,301개(알버트 푸홀스)
출장 횟수
3,562경기
3,308경기(칼 야스트렘스키)
3,298경기(행크 아론)
2971경기(알버트 푸홀스)
타석
15,861
13,991번(칼 야스트렘스키)
13,941번(행크 아론)
12,690번(알버트 푸홀스)
타수
14,053
12,364번(행크 애런)
11,988번(칼 야스트렘스키)
11,114번(알버트 푸홀스)
[10]

안타 수의 경우 2위인 타이 콥은 메이저리그 초창기 인물로 한참 전에 고인이 되었으며, 3,4위인 행크 애런, 스탠 뮤지얼은 각각 3,771, 3,630안타로 4,000안타도 채우지 못했다. 타이 콥과 이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4,000안타를 친 스즈키 이치로는 미일통산 기록이라는 걸 감안하면 저 기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사람은 이치로와 달리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 리그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다.

여기에 월드 시리즈 3회 우승에 3번의 타격왕, MVP 1회, 골드글러브 2회, 신인왕, 17회 올스타 출장 경력, 10번의 200안타 시즌[11][12]까지 보유했다. 말 그대로 안타 만들어내는 기계였으며 세이버가 생각보다 낮긴 해도[13]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누적 기록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이었기에, 무조건 명전행, 그것도 첫 턴 확정이었으며 득표율이 얼마나 높게 나올지가 관심사였을 수준의 대선수였다.[14]

하지만, 그놈의 도박벽 때문에 모든 명예를 시궁창에 내던져버렸다.[15] 1989년 감독 시절 스포츠 도박 적발 이후 영구 제명 처리되며 명예의 전당 입후보 자격을 영원히 상실했다.[16]

거기다가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가 암페타민 복용을 했다는 옛 동료의 말까지 나오며 약쟁이 이미지도 추가되었다. 이 부분은 그 시대에는 암페타민이 금지약물이 아니었던 시절이라 마이크 슈미트행크 애런처럼 암페타민을 복용하고 뛴 선수들이 꽤 많았고 또 지금도 암페타민은 MLB의 약물 규정에서도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고[17] 또한 지금도 비교적 간단한 절차만 밟으면 허가를 받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감독으로써 도박을 한 문제에 비하면 약과 수준이다.

결국 야구 역사상 최고 수준의 누적 성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선 스테로이드 시대의 약물 복용 선수들을 잇는 메이저리그의 흑역사 중 하나로 남았다.[18]

통산 타출장은 .303/.375/.409. 160홈런, 198도루, wRC+ 121, bWAR 79.6, fWAR 80.1. 통산 WAR이 역대 최고의 안타기계치곤 낮아보일수 있는데, 24시즌이나 뛰어서 말년에 많이 까먹은데다 전성기때도 수비와 주루가 나빠서 공격으로 벌어온 WAR을 깎아먹었다.

3. 유년기[편집]


웨스턴 힐스 고등학교에서는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다.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로 인해 대학 풋볼 팀 진학에 실패하자 그는 1년을 꿇어 몸을 불렸다. 그 이후 아마추어 리그에서 포수, 2루수, 유격수를 병행하면서 .626의 타율을 기록하는 괴물같은 성적을 거두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와 7000달러의 계약금을 받는 자유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4. 선수 경력[편집]



4.1. 신시내티 레즈: 빅 레드 머신의 일원[편집]


파일:PRose.jpg
1960년 첫해 마이너리그에서는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이듬해부터는 타격에 눈을 떠 타격왕, 최다 안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우면서 자신의 진가를 알린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허슬 플레이를 서슴치 않는 적극적인 플레이를 했다. 뉴욕 양키즈와의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그는 볼넷을 얻었는데, 그 때 상대 투수는 화이티 포드. 포드는 볼넷을 얻고서도 전력질주하는 그에게 찰리 허슬이라는 별명을 붙혔다.

1963년 주전이었던 돈 블레이징게임[19]의 부상으로 비어있는 2루수의 자리를 꿰찼다. 1963년 4월 13일 그는 피츠버그의 밥 프렌드를 상대로 3루타를 때리면서 통산 첫 안타를 신고했고, 그 기세를 앞세워 .273 .334 .371 6홈런 13도루 41타점 170안타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에 오른다.

이후 신시내티에서 13번이나 3할을 기록했으며, 9번이나 200안타를 기록하면서 그의 진가를 알렸다. 1965년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한 이래로 1966년과 1972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올스타전에 출석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20]

데뷔는 2루수로 시작했지만 이후 그는 우익수와 좌익수를 번갈아가며 맡았으며, 75년부터는 3루수로 다시 포지션을 바꾸었다. 그러나 잦은 포지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했다.

그는 1970년대 최고의 타자였으며, 자니 벤치, 조 모건, 토니 페레즈와 함께 신시내티의 최전성기였던 빅 레드 머신을 이끌던 선봉장이었다. 그는 1975년과 1976년 월드시리즈 2연패에 기여했을 정도로 신시내티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선수였다.

1978년 5월 5일 몬트리올의 스티브 로저스에게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뽑아냈다. 그리고 6월 14일 컵스전으로 시작하여 7월 31일까지 44경기 연속 안타라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연속 안타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는 9회에 기습 번트를 통해 내야 안타를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근성있는 플레이가 부정적인 결과도 상당히 많이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1970년 올스타전에서 AL팀 포수 레이 포세와 홈에서 충돌하여 포세의 오른 어깨에 부상을 안겼다. 이로 인해 포세는 선수 생활 내내 부상을 안고 살았으며 불과 30살의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다. 비록 그의 플레이가 야구에서 정당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벤트전에서 과한 승부욕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4.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편집]


스티브 칼튼마이크 슈미트가 투타를 이끌던 필리스는 1976~1978 시즌 동안 NL 동부의 최강자로 군림했지만 번번히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그러한 필리스에게 로즈는 매력적인 선수였다. 결국 필라델피아와 로즈는 4년간 320만 달러라는 당시 최고 금액의 FA 협상에 합의한다. 당시 필리스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마이크 슈미트가 3루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1루에 자리를 새로 잡게 되었다.

그는 필리스가 바랬던 월드시리즈 우승을 1980년에 선사하는 데 기여했고,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건재한 활약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82년과 83년에 .271 .245의 저조한 타율로 하락세에 접어들었으며,1983년 후반기에는 아예 대타요원으로 전락하였다. 로즈는 지속적인 출장을 원했지만 구단은 그걸 내키지 않아했고, 결국 구단과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1983년 10월 방출당했다.


4.3.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편집]


방출당한 로즈는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1년계약을 맺었다. 1984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의 제리 쿠스먼에게 통산 4,000안타를 뽑아내면서 타이 콥에 이어서 역대 두번째(그후 현재까지 이 기록에 도달한 세번째 타자는 없다.) 4,000안타 타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그가 4,000안타를 기록하는데 정확히 22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로즈는 연평균 182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다. 그만큼 선수로서의 자기관리만은 철저했다.


4.4. 다시 친정으로, 그리고 은퇴[편집]


1984년 8월 15일 신시내티의 내야수 톰 로리스와 트레이드되어 다시 신시내티에 돌아온 로즈는 선수 겸 감독의 자리에서 활약했다. 몬트리올 시절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못냈지만 신시내티에서는 .365를 기록했고, 19승 22패라는 신인 감독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시즌을 마감했다.

1985년 9월 11일 샌디에이고의 에릭 쇼에게서 좌전 안타를 뽑아내면서[21] 타이 콥의 최대 안타 개수인 4,191안타를 경신하는 4,192번째 안타를 뽑아냈다. 그러나 타이 콥의 안타 가운데 2개가 중복으로 세어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제로는 9월 8일 컵스전에서의 안타(4,190개째)가 콥의 기록을 경신하는 안타로 정정되었다.

1986년 8월 17일 샌디에이고전에서 그는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고, 무안타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통산 4,256안타의 기록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공식적으로는 11월 11일 40인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은퇴했다. 물론 감독 자리는 계속 유지한 채로.


5. 지도자 경력[편집]


1984년 선수 겸 감독을 맡을 때부터 1989년까지 412승 373패로 신시내티 감독 통산 다승 5위를 기록했다. 다만 이 당시 내셔널 리그 서부는 토미 라소다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호령하던 시기여서 NL 서부 2위만 4번 했을 뿐, 우승에는 실패하면서 가을야구는 하지 못했다.

감독 시절 당시 로즈는 주심과 싸우던 도중 심판 얼굴에 상처를 입혀 30일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팀 성적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으며, 그 이전에 선수로서 쌓은 업적이 워낙 어마어마했기에 많은 야구팬들의 관심사는 그가 1992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과연 몇 퍼센트의 득표율로 입성하느냐였다.

하지만...

5.1. 영구제명[편집]


1989년 2월 커미셔너 피터 위버로스가 피트 로즈의 베팅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고, 로즈는 당연히 부인했다. 그러나 후임 커미셔너였던 바트 지어마티가 로즈의 베팅을 적발했다. 'Sports Illustrated'에서는 로즈의 도박설에 대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다루었고, 결국 그가 1987년 레즈의 52게임에 경기당 수천달러에 달하는 베팅을 했다고 밝혀졌다. 이는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보다 더 심각했던 문제였던 것이, 선수들이 조작하는 것보다 감독이 승부를 조작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22]

굳이 로즈를 변호하자면 조사 과정에서도 로즈가 레즈가 지는 쪽에 돈을 걸거나 레즈가 시합에서 불리하게 상황을 만든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즉 베팅을 하되 자기 팀이 이길 거라는 쪽에 돈을 걸었다는 이야기. 일부 야구 팬들은 이를 언급하며 로즈의 베팅이 과한 승부욕에 나온 기행이었고 승부조작을 한 것은 아니라며 그를 변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도 나와있듯 감독이라는 직책은 승부조작을 하기가 선수보다 쉽고, 그렇기 때문에 도박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설령 로즈가 승부조작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금지된 도박을 알고 한 이상 그에 따른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1989년 8월 24일, 그는 MLB 야구계에서 영구제명되었다.[23]

완벽한 증거 앞에 그는 감독직을 즉시 사임했고, 도박 중독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당연히 1991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영구 제명 명단에 올랐고, 현재까지 그가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명단에서 삭제되지 않는 이상 없다.[24]

게다가 그가 자신의 팀을 도박 베팅 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1990년 탈세혐의로 5만달러의 벌금을 냈다.

2015년 6월 ESPN에서 그가 선수 시절에도 도박을 했다는 증거자료를 제시했다. 기사


6. 그 뒤[편집]


그 이후 번번이 복귀를 꿈꿨으나, 보수적인 미국 야구 사회에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다. 제명 뒤 10여년이 지난 2004년 자서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승부조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그는 "비록 맨날 내가 도박하긴 했지만 내 팀이 진다고 도박은 안했어요. 저는 제 팀을 믿었거든요 ㅠㅠ"로 지속적인 언플을 통해 명예를 복권하고자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나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스포츠 도박, 거짓말, 탈세의 쓰리런을 친 순간 그의 이미지는 오늘날 논란시되고 있는 로켓의 약물복용-위증-사생활 문제의 쓰리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추락했고, 팬들도 더 이상 그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그의 위상이 워낙 대단해서 도박 추문 이후로도 신시내티에서 그의 등번호 14번은 비공식 영구결번 상태였으며, 2016년에는 공식적으로 영구결번 처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레즈가 로즈에게 행하는 대우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한 예로 2003년 그레이트 아메리칸 파크 개장 경기 때 레즈 프런트는 빅 레드 머신 레전드들을 초청해 성대하게 새 구장 개장행사를 펼쳤지만 로즈한테는 그 흔한 초청장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피트 로즈는 역시 야구선수 출신인 그의 아들[25]과 함께 자비로 티켓을 사서 그 장면을 구경했다고 한다.



그래도 2010년 9월 12일 최다안타를 기념하여 구장에 초대하여 같이 활동한 빅 레드 머신의 레전드들에게 환영을 받기도 했다.

야구 외에는 WWE에 가끔씩 출연했다. WWF 레슬매니아 14에서는 그가 "내 팀니네 팀한테 이겼지롱! 너넨 월드 시리즈에서 못 이겼잖아?" 라고 팩트폭력으로 조롱하기 시작하자, 보스턴 관중들이 야유를 퍼붓는다. 이내 등장한 케인[26]에게 툼스톤 파일드라이버를 맞으며 장렬히 떡실신했다. 다음해 WWF 레슬매니아 15에서는 복수하겠다고 샌디에이고 치킨 복장을 하면서 나왔지만 또 툼스톤 맞고 떡실신. 그리고 다음 WWF 레슬매니아 16에서 다시 등장했다가 이번엔 초크슬램, 그리고 리키쉬에게 스팅크 페이스까지 맞고 3년 연속 떡실신했다. WWF 노 머시(2000) PPV 광고때는 과자달라는 애들을 피트가 쫒아냈는데 그 다음 초인종이 울리자 또 과자달라는 애들인줄 알고 "꺼져! 꼬맹이들!" 하고 화내며 문을 열였는데 거기에 있는건 바로 케인! "안녕, 피트" 하고 인사말을 건네는 케인에게 목을 잡히고 이윽고 들리는 피트의 절규로 광고는 끝난다. 광고 끝에 나오는 문구인 할로윈이라고 함부로 문을 열어주면 안됩니다는 그야말로 금언이 아닐수가 없다. 그래도 WWE가 피트 로즈의 이 기믹을 (상업적으로) 쏠쏠히 잘 써먹은 덕택에 2004년 WWE 명예의 전당에 그를 헌액시키기도 했다. 당연히 그동네에서도 뜬금없는 일이기에 야유를 받았다.

2014년 2월 10일에는 "금지약물이 도박보다 나쁘다"는 말을 했다. 한국내 반응은 "당신이 할 말은 아닐텐데?"로 통일되었다. 정작 자신의 아들이 도핑으로 걸렸다. 한때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선수가 이렇게 비참하게 추락한 걸 보면, 그만큼 사생활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하겠다.

2016년 1월 20일, 신시내티 레즈 구단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선수와 감독 시절 도박도 문제가 크지만 여전히 도박에 빠져 살기 때문에 복권이 힘들다는 커미너셔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신시내티 레즈 구단 측에서도 조심스러웠으나, 팬들의 지지로 [27] '프랜차이즈 포'[28]에 뽑히는 등 지역 여론의 영향으로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된 것으로 명예의 전당 주간인 6월 말에 이름을 올릴 것이고 구장 앞에 그의 기념 동상이 설치되었다.

2016년 지금은 스즈키 이치로가 새로운 안타 기록을 작성할 때마다 인터뷰를 하여 야구 관련 기사에 가끔씩 등장하고 있다.

2017년 7월 31일, 자신이 선수시절에 겪은 미성년자와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고, 여기에 관련된 여성이 단순한 성관계가 아닌 강간이었다고 증언하면서 명예는 더더욱 추해지고 있다. 당연히 연초부터 두고두고 욕 먹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티즌스 뱅크 파크 명예의 벽 헌액식은 무산. 이 기사 참조.

사족이지만 대다수 백인 야구선수들이 그렇듯이[29] 열성 공화당 지지자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 주셈" 이라면서 싸인볼을 건네기도 했다.

2017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 휴스턴이 사인 훔치기 스캔들을 했다고 확정되자 자신은 내가 이기는 쪽에만 돈을 걸었지 사인 훔치기는 안 했다며 복권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팬들의 입장은 개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나쁜 짓을 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영구 제명을 당할 죄는 맞다.

2022년 찰리 블랙몬이 스포츠도박 업체와 계약하자 자신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며 복권 기회를 달라는 등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7. 여담[편집]


  • 입담과 기억력이 굉장히 좋다. 최근 영상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여타 60년대 레전드들과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인터뷰에 초청되어 옛 썰들을 풀어 놓는데,[30] 고령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억력을 보여준다. 수십 년전 야구카드를 개봉하는 영상에서는 자신과 단 한 번이라도 상대한 선수라면 그 선수의 포지션, 주손, 구종, 체형, 습관, 약점, 수상경력, 또는 시시콜콜한 여담까지 회상하며 팬들을 뜨악하게 한다.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야구 백과사전. 말도 굉장히 재미있게 해서 코멘트 섹션의 반응은 찬양 일색이다. 놀란 라이언까지 초청한 토크쇼에서는 거의 스탠드업 코미디언급 입담을 보여주는데, 그 점잖은 라이언까지도 그야말로 쉴세없이 파안대소를 한다.
  • 1981년 6월 1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14번)때 휴스턴의 놀란 라이언(34번)을 상대로 친 라인 드라브이성 볼을 중견수가 우측으로 뛰어가서 잡다가 놓치면서 스탠 뮤지얼과의 타이인 3630번째 안타가 됨.

8.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MLB 로고.svg 피트 로즈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3
CIN
157
696
170
25
9
6
101
41
13
55
72
.273
.334
.371
.705
2.1
2.4
1964
136
558
139
12
2
4
64
34
4
36
51
.269
.319
.326
.645
0.7
1.3
1965
162
757
209
35
11
11
117
81
8
69
76
.312
.382
.446
.828
5.2
5.6
1966
156
701
205
38
5
16
97
70
4
37
61
.313
.351
.460
.811
3.7
4.1
1967
148
650
176
32
8
12
86
76
11
56
66
.301
.364
.444
.808
3.9
4.8
1968
149
692
210
42
6
10
94
49
3
56
76
.335
.391
.470
.861
5.5
5.5
1969
156
731
218
33
11
16
120
82
7
88
65
.348
.428
.512
.940
6.1
6.6
1970
159
730
205
37
9
15
120
52
12
73
64
.316
.385
.470
.855
5.0
4.8
1971
160
709
192
27
4
13
86
44
13
68
50
.304
.373
.421
.793
4.5
5.1
1972
154
731
198
31
11
6
107
57
10
73
46
.307
.382
.417
.799
6.2
6.1
1973
160
752
230
36
8
5
115
64
10
65
42
.338
.401
.437
.838
7.3
8.3
1974
163
771
185
45
7
3
110
51
2
106
54
.284
.385
.388
.773
5.6
5.9
1975
162
764
210
47
4
7
112
74
0
89
50
.317
.406
.432
.838
5.3
4.1
1976
162
759
215
42
6
10
130
63
9
86
54
.323
.404
.450
.854
7.4
7.0
1977
162
732
204
38
7
9
95
64
16
66
42
.311
.377
.432
.809
3.6
2.9
1978
159
731
198
51
3
7
103
52
13
62
30
.302
.362
.421
.783
3.5
3.4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9
PHI
163
732
208
40
5
4
90
59
20
95
32
.331
.418
.430
.848
3.4
3.1
1980
162
739
185
42
1
1
95
64
12
66
33
.282
.352
.354
.706
0.3
-0.4
1981
107
486
140
18
5
0
73
33
4
46
26
.325
.391
.390
.781
1.9
1.7
1982
162
720
172
25
4
3
80
54
8
66
32
.271
.345
.354
.683
0.1
-1.1
1983
151
555
121
14
3
0
52
45
7
52
28
.245
.316
.286
.602
-1.9
-2.1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4
MON/CIN
121
421
107
15
2
0
43
34
1
40
27
.286
.337
.371
.696
0.8
1.0
1985
CIN
119
501
107
12
2
2
60
46
8
86
35
.264
.395
.319
.713
0.8
0.6
1986
72
272
52
8
2
0
15
25
3
30
31
.219
.316
.270
.586
-0.8
-0.9
MLB 통산
(24시즌)
3562
15890
4256
746
135
160
2165
1314
198
1566
1143
.303
.375
.409
.784
80.1
79.6
  • 볼드체는 당해 시즌 리그 1위[31]
  • 청색 글씨는 당해 시즌 MLB 전체 1위
  • 적색 글씨는 MLB 통산 1위


9. 관련 문서[편집]



[1] 939경기(905경기 선발 출전)[2] 628경기(601경기 선발 출전)[3] 634경기(627경기 선발 출전), 빅 레드 머신 전성기 때는 3루수를 소화했다.[4] 673경기(652경기 선발 출전). 베이스볼 레퍼런스 포지션별 JAWS로 검색하면 좌익수 포지션에서 랭크되어있다.[5] 73경기(70경기 선발 출전)[6] 590경기(582경기 선발 출전)[7] 스포츠 도박 및 승부조작 논란으로 인한 사퇴 및 영구 제명[8] 다만 통산 타율은 0.303으로 아주 높지는 않은 편인데, 이는 투고타저 시대를 관통한 선수인데다, 마이너 포함 27시즌, 메이저 24시즌을 현역으로 뛰는 터무니없는 꾸준함 탓에 역설적으로 운동능력이 떨어진 말년에 비율스탯을 많이 까먹은 탓이 크다.[9] 주로 리드오프로 출장해서 중심타자였던 야즈, 애런보다 타석, 타수 누적 쌓기 유리한 조건이었긴 하나 출장 경기수도 꽤 넉넉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크게 논란은 없다.[10] 다만 피트 로즈가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 것은 아니다. MLB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 물론 상술하였듯 말살되지 않았다고 하여, 어떤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11] 더 놀라운 것은 좌익수, 우익수, 1루수, 2루수, 3루수로 모두 출장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중견수로도 출장한 적 있으며, 포수와 유격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 출장을 달성했다. 가장 많이 소화한 포지션은 1루수.[12] 10번의 200안타 시즌은 2001~2010 10년 연속으로 달성한 스즈키 이치로와 타이.[13] 그럼에도 불구하고 80 언저리로, 이 정도면 명전에 가고도 남는다.[14] 다만 이상적인 리드오프는 아니었는데, 통산 198도루에 149도루자였을 정도로 주루 능력은 나빴기 때문이다. 허나 선구안 및 타격 능력이 주루 능력을 완벽히 커버해냈다.[15] 금지약물 복용을 한 선수들의 기록도 야구팬 사이에서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쓰레기 기록 취급을 하긴 하지만, 영구제명은 되지 않았으므로 피트 로즈보다는 사정이 다소 나은 편이다. 반대로 말하면, 피트 로즈는 개인의 죄는 더 클 수 있어도 기록의 순수성 자체는 약쟁이들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16] 그래도 성적이 성적인지라 도박으로 인해 언급이 꺼려지긴 하지만 순수 실력으로써는 여전히 인정받는다.[17] 경기력 향상 약물(PED) 카테고리엔 스테로이드 계통만 포함되고, 암페타민 등의 약물은 각성제(Stimulants)로 따로 분류된다.[18] 그래도 신시내티 레즈 구단 내에서는 레전드로 인정받으며 영구결번까지 되었다.[19] 아시아 야구 팬들에게는 '돈 블레이저'라는 별명이 더 잘 알려졌을 것이다. 나중에 일본에서 그 별명을 등록명으로 난카이 호크스에서 1967~1969시즌까지 뛰었고, 이후 난카이에서 코치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979~80년 한신 타이거즈, 81~82년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을 맡는 등 동양 야구에서 오래 지도자 생활을 했다. 노무라 카츠야, 히로오카 타츠로 등에게 당시의 메이저리그식 훈련이나 작전 등 '선진 야구' 문물을 전수해주었다고.[20] 1973년부터 1982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21] 당시 파드리스의 포수는 훗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으로 세차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브루스 보치였다.[22] 일단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하려고 해도 그러기 위해선 기본적인 실력도 탄탄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러나 감독은 선수단을 자유롭게 구성,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대신 그에 맞먹는 성적을 내야 할 책임도 있지만) 그에 따라 승부조작을 하는 것도 더 쉽다. 만약 감독이 실력 좋은 선수들은 전부 백업으로만 쓰거나, 아예 써먹질 않거나 그냥 마이너리그(KBO 리그, NPB의 경우는 2군)에 강등시켜버리고 실력 나쁜 선수들을 성적이 엉망이어도 무조건 주전으로 쓴다면?[23] 그리고 커미셔너 바트 지어마티는 로즈의 영구제명 처분이 내려진 후 열흘도 채 안 지난 그해 9월 1일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타계했다.[24] 우선 기자단 투표에 의한 기간은 2006년을 끝으로 15년이 지났으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베테랑 투표밖에 없는데 이미지가 이미지라 거의 불가능하다.[25] 피트 로즈 주니어. 1988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지명되었으나 마이너를 전전하다 1997년 신시내티 레즈에서 11경기 16타석에 들어선게 메이저 경력의 전부이다. 이후에도 레즈 산하 마이너 구단에서 뛰다 2002년에야 방출. 그러나 이후에도 끈질기게 타 마이너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2009년 후 은퇴. 2006년엔 약물빨다 걸려 출장정지까지 먹은 바 있다.[26] 참고로 케인의 별명인 빅 레드 머신은 바로 신시내티 레즈의 별명에서 온 것이다.[27] 그래도 현역시절부터 은퇴 이후에도 팬서비스는 대단히 좋았다.[28] 파일:external/media2.wcpo.com/Franchise_Four_Pete_Rose_Barry_Larkin_Joe_Morgan_Johnny_Bench_1436921780540_21413472_ver1.0_640_480.jpg
좌측부터 피트 로즈, 배리 라킨, 조 모건, 조니 벤치.
[29] 가장 좋은 예 둘을 들자면 토니 라 루사는 대표적인 보수단체인 티 파티의 회원이고, 커트 실링 같은 경우는 굳이 더 말 할 필요가 없다.[30] 유튜브에 "Pete Rose talks"만 검색해도 굉장히 많이 나온다.[31] 여담으로, 피트 로즈내셔널 리그에서만 선수 생활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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