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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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환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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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20.postimg.org/doosan200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4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4 KBO 리그 탈삼진왕
-
보유 기록
통산 최다 폭투
119개

OB 베어스 등번호 51번
황용승
(1993~1995)

박명환
(1996~1997)


이경원
(1998~1999)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27번

박상현
(1997.6.30.~1997)

박명환
(1998~2006)


리오스
(2007)
LG 트윈스 등번호 27번
장준관
(2004~2006)

박명환
(2007~2012)


김기표
(2013~2014)
NC 다이노스 등번호 41번
이형범
(2013)

박명환
(2014)


김성계
(2015)
NC 다이노스 등번호 22번
임정호
(2014)

박명환
(2015)


이준평
(2016~2018)
NC 다이노스 등번호 89번
이찬우
(2014~2015)

박명환
(2016)


김영중
(2017~2018)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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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명환 두산 시절.jpg

박명환
朴明桓 | Park Myung-Hwan

출생
1977년 6월 7일 (46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제3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약수동)[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청구초[2] - 충암중 - 충암고[3] - (대불대)[4]
신체
186cm, 92kg[5]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고졸우선지명 (OB)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6~2006)
LG 트윈스 (2007~2012)
NC 다이노스 (2014~2015)
지도자
고양 다이노스 투수보조코치 (2016)
성남 블루팬더스 투수코치 (2017~2018)
경남대학교 야구부 코치 (2023~)
병역
병역면제[6]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7] 파일:아프리카TV 아이콘.svg[8]

1. 개요
3. 피칭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1. 방송에서 밝힌 이야기들
6. 사건사고/논란
6.1. 병역 비리 사건
6.2. 금지 약물 복용
6.3. 방송 중 논란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OB/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NC 다이노스투수.

2000년대 두산을 대표하는 우완 에이스로 전성기 시절 팀 에이스를 넘어 손민한, 배영수와 리그를 대표하는 우완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꼽혔다. 한편으로는 진필중, 차명주와 함께 두산 시절 김인식 감독의 혹사 피해자이자 FA 이적 후 LG에서는 먹튀 산맥의 한 축(홍현우, 진필중, 마해영, 박명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선수 생활 마무리는 NC에서 하게 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박명환의 선수 경력



3. 피칭 스타일[편집]





압도적인 스터프와 슬라이더만으로 리그를 씹어먹었던 완성형 투피치 투수. 평균 140 초중반 최고 153km/h까지 나오는 빠른 공으로 승부를 하다 큰 폭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9]에 대부분의 타자들은 알면서도 헛스윙 삼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먹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은퇴 당시 기록을 보면 통산 100승 투수에 통산 탈삼진 5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의 위에 있는 4명은 송진우, 이강철, 선동열, 정민철 뿐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 양현종, 임창용, 배영수, 김광현이 통산 탈삼진 순위표에서 박명환의 위에 올랐다.[10]

하지만 정점을 찍었던 2004년 이후 스터프가 점점 하락하였고 2008년 부상과 수술 이후에는 구속, 구위 모두 수준 이하의 투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2010년 시즌엔 아직 쓸 만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맞춰 잡는 피칭 스타일로 변신을 시도하였고 2010년 6월 10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6회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는 등의 호조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슬라이더 하나에 의존하는 투구 패턴의 약점을 드러나고 난타당하기 시작하며 평균자책점 6점대를 기록하고 그나마도 부상으로 시즌을 접고 말았다. 선수 생활 20년 중에서 1군에서 활동한 시간이 17년인데[11] 그 동안 투구한 이닝이 1600이닝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100승, 1400탈삼진이란 성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건강한 박명환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양상문이 굉장히 좋아하는 투수로, 투수코치를 맡은 팀마다 패스트볼이 빠른 투수들에게 슬라이더를 장착시킨 박명환 스타일의 투수를 만들어 냈으나[12] 좋은 결과를 내진 못하였다.[13] 아이러니한 것은 박명환은 양상문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 부상으로 신음하던 2008 시즌에 투수코치였던 양상문은 박명환이 시즌아웃을 하고 수술을 하고 싶다고 하자, 계속 등판 스케줄을 잡아놓아서 여러모로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결국 5경기 나와서 시원하게 말아먹고 그대로 수술대에 오르고 말았으니 여러모로 악연이라면 악연인 셈.


4. 지도자 경력[편집]


2016년에 NC 다이노스 육성군 투수코치를 맡아오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종료 이후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았다. 그리하여 코치 선임 후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났다.

그 이후에는 스포츠한국 야구 칼럼니스트·해설위원이 되었는데, 최근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의 사실상의 경질 소식과 관련해서 김성근을 옹호하고 박종훈 한화 단장을 디스하는 칼럼을 썼다. 끝내 감독 내친 박종훈 한화 단장의 전횡, 이대로 괜찮은가[14][15]

스포츠투아이 야구학교가 운영하는 독립야구단 성남 블루팬더스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가 팀을 떠났다.

2023년 신경현이 새로 감독을 맡은 경남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합류했다.


5. 인터넷 방송[편집]


2018년 월드컵부터 김병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꽁병지TV에서 활동하다가 먼저 떠난 송종국에 이어 꽁병지TV를 떠났다. 그리고 수원시 세류동에서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야구를 기반으로 하는 2019년 4월 '박명환야구TV'라는 아프리카 채널유튜브 채널을 열며 본격적인 인터넷 방송인으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양배추를 머리에 올리는 개그를 하기도 한다.

주로 사회인 야구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나 류현진 선발경기 중계를 주 콘텐트로 삼고 있으며, 예전 팀 동료였던 정수근이 2번이나 출연하여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푼 적도 있다. 정수근과는 1년 선후배 사이고[16] 의외로 둘의 케미가 잘 맞아 반응이 좋았다. 특히 김혁 PD의 영상편집과 둘의 입담 그리고 시청자들의 수준 높은 질문이 잘 어우러져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한 편만 보면 나머지를 다 볼 수밖에 없는 마술같은 영상. 박명환야구TV의 아이덴티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5.1. 방송에서 밝힌 이야기들[편집]


  • 1996~1999년 사이에 교육리그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마이너리그에서 '투수가 원하는대로 던져라.'라고 배워왔고 그래서 포수의 사인을 거부하며 경기에서 이를 적용해 보았는데, 당시 주전포수이자 주장이었던 김태형이 1회에 박명환이 사인거부하는 걸 보고 수비 시간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끌고가서 "어딜 선배가 내는 싸인을 무시해?”라는 말과 함께 뺨을 때렸다고 한다. 그런데 박명환은 이후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몇 이닝 뒤에 또 사인거부를 하고 자기가 원하는 공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자 김태형이 5회 끝나고 자포자기 하고서 다시 박명환을 으슥한데로 데려가서 "야 그래. 그냥 네가 던지고 싶은대로 던져라."라고 허락했다고 한다. 당시 김태형이 두산 선수들에게 공포의 두목[17]이었던걸 생각하면 엄청난 용기.

  • 2011년쯤에 LG 트윈스에서 투수 조장을 하고 있었다.외국인 투수 레다메스 리즈가 못 던지자 불러서 혼낸 적이 있었는데, 리즈가 "형, 괜찮아요. 열심히 던질게요."라고 했다고 한다.

  • LG 시절 같이 뛰었던 선배 오상민과의 합방에서는 박종훈 감독이 부산 원정 경기를 마치고 버스로 장시간 이동 후 홈 구장에 도착한 직후 당시 투수조 조장이었던 박명환을 불러 피로에 지쳐있는 선수에게 야간 훈련을 통보했다는 후일담을 공개했다.


6. 사건사고/논란[편집]



6.1. 병역 비리 사건[편집]


박명환은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때 병역 브로커를 통해 병역 면제를 시도했고[18], 거기다 브로커를 동료 선수에게 소개해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병역 비리는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었고, 브로커를 동료 선수에게 소개해준 혐의인 ‘병역 방조죄’로만 불구속 기소되었다.

결국 병역 면제는 취소 처분 되었고 재검을 받아 군대에 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근데 재검에서 갑상선 항진증이 있다고 밝혀지면서 완전히 병역 면제 처분을 받았다.

병역 방조죄도 금품 등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났다.


6.2. 금지 약물 복용[편집]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회가 진행 중에 국제야구연맹(IBAF)이 주관해 실시한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 중 하나인 노르안드로스텐디아올이 검출되었다.# 역대 KBO 선수 도핑 적발 2호이다.[19] 그래서 박명환은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은 물론, 국제 경기 2년간 참가 금지라는 징계가 내려졌다. 도핑을 한 선수를 국제 경기에 내보냈다고 해외에서 대서 특필된 것은 덤이다. 하지만 대표팀 승선 전부터 이미 어깨 부상 때문에 경기에 한경기 밖에 나오지 못했고 대표팀 전력에 큰 이상은 없었다.

박명환은 ‘지난해 어깨통증 때문에 먹은 진통제 탓에 도핑에 걸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어깨 부상 때문에 이미 두산 베어스 시절부터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다고한다


6.3. 방송 중 논란[편집]


오지환을 비난하면서 후폭풍이 있었다. 박명환 TV 5만기념 영상의 47분30초경 한 명의 오지환 안티 팬이 채팅으로 "오지환 실력도 X도 없고 선수로써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질문이 올라왔는데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박명환 : 개똥 멋들은거죠. 건방을 떠는거죠. 저는 선수 까지 않는데요, 일단 야구를 잘하기전에 사람이 되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야구 잘하는건 두번째 문제고 팬들이 볼때 저정도 문제면 선수가 문제가 있는거죠. 솔직히 여기서 썰풀면 이것도 내가 자중하겠습니다.


49분 경 LG 팬이 안준모도 아니고 오지환을 너무 깐다고 채팅하니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20]

박명환: 내가 여기서 오지환 썰을 풀면 팬들도 공감할걸.


궁금하면 2019년 7월 26일 오후 10시의 라이브 방송에서 썰 푼다고 하였으나... 사건이 커지자 오지환 인간이 덜 됐다 라고 발언한 것에는 해명은 하지 않고 간단하게 사과만 하고 방송을 종료하더니, 오지환을 욕한 편이 들어있는 동영상과 사과 영상이 있는 동영상을 삭제하였다. 지금은 동영상이 비공개로 되어 있어 볼 수가 없다.

여기서 킬링파트는 게스트 정수근이 채팅창이 빨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묻자 오지환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지환이 착한데 왜?" 라는 말과 그 말을 들은 박명환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것. 오히려 정수근은 오지환과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적도 있었다는데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하고 자기 부탁도 다 들어줬다면서 오지환을 옹호했다. 다만 박명환이 이 정도까지 디스하고 썰까지 있다 하면 오지환 쪽에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팬들의 의견도 있다. 물론 당사자들만의 문제이니 확신을 하지는 말 것.[21]


7. 기타[편집]


  • 충암고 17년 선배인 장호연이 은퇴하고 바로 다음 해에 입단했다. 1983년부터 2006년까지 베어스는 충암고등학교 투수들이 에이스를 했던 것이다.


  • 이혜천과 더불어 OB 베어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중 최후의 2인이었다. OB 출신 타자는 진갑용이 은퇴하면서 전멸.[22] 그리고 박명환이 은퇴한 후 이혜천도 호주리그로 떠나면서 OB 출신 선수들은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자신이 LG 트윈스에서 뛰던 시절 동안 2007 시즌을 제외하고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LG 구단과 팬들에게 지금도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23]

  • 선수 시절 때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인터넷 방송을 보면 약간 사시가 있다.

  • LG에 있을 때 FA로 40억[24]을 쓴게 있어서, 부상을 당해 경기에 나오지 못했을 때 구단에서 몇년간 재활을 지원해 줬지만 그동안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어깨 수술은 못받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사비 6천만원을 들여서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 LG 구단과 팬들에 대한 개인적인 미안함을 드러낸 것과 달리 그가 LG에 있을 때 감독으로 왔었던 박종훈과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쁜지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25]

  • 선수 시절 동안에 30억 이상을 벌었음에도 이후 사업 실패 등으로 인해서 전재산을 날리다시피 했다. FA 계약을 했음에도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던 그를 아는 팬들은 충격에 빠졌을 정도.[26] 개인회생 절차를 밟으면서 야구교실+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억대의 채무를 상환하고 있다.[27]


  • 가족 관계로는 아내와 두 딸이 있다.

  • 학생 시절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부친이 경영하던 양복점은 두 차례나 망했고, 모친은 가사도우미와 장례식장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모친은 본인이 벌어온 돈 중 5,000원을 박명환에게 주면 박명환은 라면 4~5개와 고향만두를 사서 배를 채우고 운동했다. 누나도 암울한 가정사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볼링장 사환으로 일했고, 박명환이 받은 계약금 3억원 덕분에 그제야 집안에 다소 숨통이 트였다고 한다.

  • 어렸을 때부터 옥수동에서 가족들과 살았고, 선수 생활을 하면서 번 돈으로 옥수동에 33평 아파트를 사 드렸고, 본인은 아내, 딸과 함께 18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살기도 했다.

  • 프로 첫 해부터 용돈을 받으며 생활했다. 결혼 뒤에는 집에서 생활비로 300만원을, 첫 애를 낳은 뒤에는 500만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 LG 트윈스 팬으로 유명한 만화가 최훈이 그린 프로야구 카툰의 박명환 캐릭터를 싫어한다고 한다. 자신을 무슨 이상한 뚱보로 그려놨다고...[28]

  • 2020년 11월 20일 김어준다스뵈이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영상 역대 최고의 투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류현진과 김광현을, 최동원과 선동열 중 누가 더 낫냐는 질문에는 최동원을 선택했다.

  • 2021년 1월 25일 인터넷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라왔다. 이유는 한 전직 야구선수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단 뉴스의 당사자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사로 알려진 조건에 따르면 투수, 서울과 지방 구단에서 선수 생활, 지방 구단에서 1년간 코치 생활, 유부남이란 것이었다.[29] 이에 박명환 본인은 자신의 유튜브에 자신은 사건과 무관하다 밝히며 라이브 방송까지 하였다. 또한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댓글로 욕설을 한 사람들에 대한 법적 대응도 예고하였다. 후속 기사에서 박명환보다 젊고 나중에 은퇴했다며 박명환이 아님을 밝혔다.

8.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19:35:36에 나무위키 박명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태어날 당시 신당동 일대가 성동구에 소속 되었을때였고 그 때 약수동이 가난했던 동네였다.[2] 옥정초에서 전학[3] 25회 졸업생[4] 프로 입단 후 진학하였다.[5] KBO 공식 프로필[6] 갑상선 질환(갑상샘 기능 항진증)으로 인한 면제.[7] 채널 - 박명환의 캐비지TV[8] 아프리카TV - 박명환야구TV[9] 다만 일부 국내야구 게임에서는 이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대부분 스플리터 혹은 포크볼로 대체하여 구질을 설정하고 있다.[10] 이들은 박명환보다 1군에서 더 많은 경기를 뛰었고 승수 역시 더 많이 올렸다.[11] 물론 1999~2000년과 2008~2009년은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한 시즌을 뛰지 못했고 2군과 재활군에서만 던졌다. 실질적인 1군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한 것은 13시즌에 불과하다.[12] LG 이범준, 정찬헌, 롯데 진명호[13] 항목을 참조하면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감독으로서의 양상문은 입담으로 호불호가 갈릴지는 몰라도 리빌딩과 성적 모두를 잡는 편이었으나 투수코치로서는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14] 다만 훗날 개인방송에서 푼 썰을 종합했을 때 박명환은 김성근을 좋아한다기보다는 박종훈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 더 가깝다. LG 감독 시절에 박종훈이 스프링캠프 도중 휴식일에 쇼핑 금지를 외쳐놓고 막상 자기가 쇼핑을 하다가 걸렸던 내로남불스러운 면모를 비롯해서 여러 선수들과의 불화, 30승 선착 후 가을야구 진출 실패등 부정적인 면을 봐서 썩 좋게 보지 않는 듯 하다. 당장 해당 칼럼도 내려달라는 외압을 받았다고 했다.[15] 물론 한화 입장에선 누가 되었든 투수 혹사를 했음에도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뒤 구단에 전권을 빼앗긴 후 구단과의 갈등이 깊어지던 김성근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고, 트레이드나 외국인 선수 선발, 노장과의 FA 등에서 호구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장'으로서의 박종훈은 높게 평가하는 편이었으나 이후 한화의 성적이 다시 하위권을 전전한 뒤부터는 그리 좋은 평가는 듣지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심수창 유튜브에서 심수창을 비롯해 안영명 등 당시 뛰었던 고참선수들이 박종훈 단장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자세한 것은 김성근/2017년, 박종훈 문서 참조.[16] 정수근은 빠른 77년생, 박명환은 77년생[17] 정수근의 표현에 의하면 진짜 엄청 무섭기도 한데, 후배들을 잘 엄청 잘 다뤘다고 한다. 기합 줄때 통솔력이 군대 수준이었다고 한다. 커튼 치고 혼낼때도 김태형이 "얘 빼고 다 나가있어"라고 말하고 가만히 있으면 나머지 후배들이 알아서 커텐을 칼같이 쳐버리고 순식간에 후다닥하고 나갔다고 한다. [18] 이영우와 마찬가지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 예술체육요원 자격을 얻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19] 1호는 진갑용이다.[20] 안준모는 LG팬이면서도 LG 선수들을 과도하게 까는 걸로 비판받는다.[21] 오지환은 2009년 1차지명으로 입단해 박명환과 3년 가량 있었는데, 이때 박명환은 부진 탓에 거의 2군에만 있었고 오지환은 2010년부터 1군에 있는 비율이 높아져 둘이 실질적으로 함께한 시간은 길면 1~2년 정도인데, 1~2년이면 사람 사이 틀어지는 일이 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긴 하다. 예를 들어 군복무 기간이 그 쯤 되는데 군대에서 같았던 사람 한두명쯤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정수근이야 같은 동네에 살았다지만 그냥 동네 형님이랑 같은 직장에서 부대끼는 선후임은 관계가 다르니 보이는 면도 다를 수밖에 없고.[22] 이재우정재훈 등이 있긴 하지만 이쪽은 OB에 지명된 마지막 선수들이고 실제 선수생활은 두산에서 시작했다. 또한 이재우는 17시즌 중 한화에서 웨이버 공시되며 은퇴, 정재훈 역시 17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23] 그런데 인터넷 방송에서 선수들끼리 노가리 깔 때 본인이 원하던 팀이 아니라 태업했다는 뉘앙스로 얘기한 적도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24] 부상으로 인한 부진 때문에 옵션 조건을 채우지 못하며 연봉 일부를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이 발동되었고, 고액 연봉자가 2군에 내려갈 시 1군에서 빠진 일수만큼 계산해 연봉을 삭감하는 규정이 있었기에 이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30억 남짓밖에 받지 못했다. 여기서 세금을 제하면 실수령액은 20억대로 더 떨어진다.[25] 사실 그 당시 LG 선수들의 대부분이 박종훈 감독을 안 좋아했다. 왜냐면 독불장군식의 태도에다가 원정경기를 마치고 온 선수들을 피곤한 상태에서 새벽에 잠실에서 훈련시킨다던가 자꾸 1-3선발만 로테이션으로 돌린다던가, 이 외에도 경기 외적으로 트러블이 많아서 이에 항명하는 선수들까지 꽤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종훈 감독이 경질됐을때도 선수들이 아쉬워하기는 커녕 다들 레다메스 리즈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파티에서 즐기고 있었다. 선수들 사이에서 박종훈 감독의 신뢰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26] 2005년 연봉이 3억 7천만원으로 팀 내 고연봉자였는데 그때까지도 11년 된 쏘나타 2를 자가용으로 몰았다고 한다. 2006년에 차를 바꿨다고 한다.[27] 다만 2019년 1월에 야구장 2개를 인수하고 독립구단 창단을 준비한다는 기사가 나온 점을 보면, 이쪽 분야에서 일이 꼬였거나,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서 회생신청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28] 최훈 특유의 파오후 체형의 그림체에 배추잎 하나 올린 게 박명환 캐릭터였다.[29] 실제로 박명환은 서울 연고 구단들인 두산과 LG, 지방 구단인 NC에서 뛰었으며, 지방 구단인 NC에서 지도자 생활을 1년 하긴 했다. 또한 두 딸이 있는 유부남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