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당)/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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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즉위 이전
2.1. 출생
2.2. 젊은 날
2.3. 진양 거병: 태원기의
3. 천책상장(天策上將)[1]
3.1. 장안 함락
3.2. 설거의 위협
3.3. 유무주를 멸하다
3.4. 왕세충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
3.5. 이세민의 지휘 스타일
4. 황자들의 권력투쟁
5.1. 세력 흡수
5.2.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
5.3. 현명한 내조자 문덕황후
6. 고구려와의 악연
7. 후계문제



1. 개요[편집]


당태종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즉위 이전[편집]



2.1. 출생[편집]


이세민의 아버지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은 북주 팔주국(八柱國)에 속한 굉장한 명문가 출신이었고, 당국공은 세습되어 내려온 지위였으며, 수나라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과는 이종사촌 사이였다.[2] 그야말로 금수저로열패밀리. 이연의 부인이 되는 두씨도 가문 빨이 좋았는데, 두씨의 아버지 두의(竇毅)는 신무공(神武公)에 봉해졌던 사람이었고, 황실과 결혼 관계를 맺어 인척이기도 했다.

두의의 딸 두씨는 북주의 명군 무제(武帝)에게 어린 나이에 조언을 할 정도로 똑똑했고, 궁궐을 드나들며 귀족 사회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대립이나 문제에 있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북주의 정권을 찬탈했을 때는 울면서 자신이 남자였다면 외삼촌의 나라를 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여장부와 이연이 결혼하게 된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어느 날 두의는 딸이 혼기가 차자 독특한 방법으로 사내를 찾으려고 했다. 그 영감은 대문 앞에 두 마리의 공작 그림을 걸어놓고는, 100보 앞에서 화살을 쏘아 보라고 했는데 개중에 공작의 눈을 맞히는 사람이 있으면 딸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 물만 먹고 있을 때 이연이 나섰다. 활을 쏜 그는 백발백중했고, 결국 현명한 미인을 얻을 수 있었다.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았는데, 여기에서 나온 아이들은 4남 1녀였다.


598년(개황(開皇) 18년) 1월 28일섬서(陝西)의 무공(武功) 지역에서 이세민이 태어났는데, "용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라거나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점쟁이가 이세민의 얼굴을 보고 "귀인이다"라고 했다는 등, 이런 인물이면 거의 당연히 따라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특이한 것은 보통 이런 이야기는 개국군주의 일대기에서 나오는 법인데, 당태종의 이야기에 이런 소리들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즉 그만큼 이세민이 당나라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2.2. 젊은 날[편집]


어린 시절 이세민의 행적에 대해선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훗날 당태종이 된 이세민은 위징(魏徵)에게

"내가 공부를 안 하고 싸우는 기술만 익혀서 황제 노릇하기가 힘들다."

라는 말을 했다. 도박이나 무리 지어 다니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책보다는 칼을 많이 다루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도움이 되었는데, 거리를 다니면서 익혀둔 얼굴들은 거병에 도움이 되었고, 칼을 잡으며 익힌 무예와 기술들은 전장을 휩쓰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2.3. 진양 거병: 태원기의[편집]


616년 이연은 태원유수로 임명되어 부임했다. 여행과 토목을 즐기는 수양제는 여기저기 대규모 궁전을 지었는데, 태원에도 진양궁이라는 궁전을 세웠다. 궁전에는 거의 황제가 있었지만 없을 때에 황제의 대리를 맡아보는 것이 "유수"의 임무였다.

진양궁 부감 배적(裴寂)과 진양현령 유문정(劉文靜)은 뛰어난 인물을 발견해 그 인물에게 깃발을 올리게 하고, 자기들은 그 밑에서 공로를 세우려 하던 참에, 새로 부임한 이연과 특히 그 둘째 아들 이세민에게 꽂혀 접근했다. 유문정의 설득에 이세민이 넘어가,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에게로 가 거사를 촉구했다. 이연은

"부자지간이지만 너를 잡아 고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는 둥 블러핑을 하며 아들을 단념시키려 했지만, 이세민의 뜻은 요지부동으로

"마음대로 하세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라는 둥 아버지 속을 썩였다. 아버지가 결기가 없다고 이세민이 배적과 유문정에게 토로하자 배적이 공작을 벌였다. 여색에 약한 이연에게 미녀를 소개시켜주고, 범하게 했는데 알고 보니 진양궁의 궁녀였다. 결국 황제의 소유인 궁녀를 범해 사형을 당하느니 차라리 거사를 하자고 이연을 설득해 성공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과는 달리 현재 학자들은 이연이 거사를 스스로 결정해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구당서》에서는 이세민이 결단을 촉구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허경종[3]의 실록을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당태종이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이연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전공을 드높이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고조 이연의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서 문서를 담당했던 온대아(温大雅)[4]라는 인물이 쓴 《대당창업기거주》(大唐創業起居注)라는 문헌은 이연의 태원 거병으로부터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1년간의 일기이다. 이연의 기록 담당으로서 중요한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이연이 20세인 아들 세민의 계책에 따라 거병한 이야기는 한 줄도 쓰여져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연은 태원유수로 임명되었을때 오히려 아들 이세민을 향해,

"당은 본시 우리나라이고, 태원은 즉 그 땅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하늘이 내린 것이다. 준 것을 받지 않는다면, 장차 화가 이것에 미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연에게 거병할 의사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더군다나 이 문헌에 태종 이세민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

당시 태원유수 소관인 분양성에서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역시 태원유수 소관인 마읍에는 돌궐(突厥)이 침공해왔다. 이연은 마침내 이를 핑계로 병사를 모으려고 했다. 변경에서 농민 반란과 돌궐 침공을 맞아 병사를 모으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이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부유수인 왕위(王威)와 고군아(高君雅)였다. 부유수의 임무 중 하나는 유수에 대한 감시였으니, 이들이 왜 의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세민쪽에서 역으로 이들의 의심을 눈치채고 제거하려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데, 돌궐을 방어하던 양곡(陽曲)의 수비대를 후퇴시켜 돌궐군이 남하토록 하고, 돌궐을 끌어들였다는 누명을 왕위와 고군아에게 씌워 참형에 처해 버렸다.

돌궐을 물러가게 한 후, 천하쟁취를 위한 대전략을 세우는데, 낙양으로 진공하는가 장안으로 진공하는가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다가 장안으로 진공하자는 이세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당시 수양제 및 그를 따라간 장군들과 대신들은 강도(江都)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장안을 함락시키면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강도수나라 수뇌부를 동요시킬 수 있다는 논리가 먹힌 것이었다. 당면 문제가 장안을 어떻게 함락시키는가로 이어지게 되었고, 유문정의 제안에 따라 돌궐을 장안 공격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어 이연은 대장군을 칭하고, 대장군부를 설치하여 대장군부의 장사(長史; 속관)에 배적, 군정 최고 책임자인 사마(司馬)에 유문정 등을 임명했다. 격문을 써 발표하고 617년 7월에 30,000명의 군사로 장안을 향해 출발했다.


3. 천책상장(天策上將)[5][편집]



3.1. 장안 함락[편집]


이연은 거병 후에 뜻밖의 선택을 했는데, 근거지인 태원을 버리고 관중 지방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판단이 가능했던 것은 수양제수나라의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관중이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수도 장안이 있는 수제국의 중심지인데다 마땅한 적수도 없었기에, 이연의 세력은 곧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이밀이었다. 당시 최강의 세력을 가진 반란군이며 낙양을 공격하고 있었던 이밀의 세력은 이연에게 부담이 되었고, 관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연은 이밀에게 "대제" 운운하면서, 자신은 용의 비늘을 잡고 봉황의 날개를 붙잡을 뿐이라는 식으로 공손하게 굴어 이밀에게 호의를 사 무사히 관중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연은 막내 이원길을 태원에 남기고, 장남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 세력들이 합류하여, 30,000명이던 군세는 무려 200,000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617년 11월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13살의 양유(공제)를 수나라의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우며 스스로 당왕(唐王)을 자처했다. 또한 그해 퇴위당한 양제가 친위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기반을 잡고 있던 무렵, 첫 번째 난관이 닥쳐오게 된다.


3.2. 설거의 위협[편집]


천수 일대를 장악한 군웅 설거수나라의 신하로 돌궐을 막다가, 전국이 난리가 나자 재빨리 자신을 '패왕'으로 일컬었다. 그리고 남들이 감히 황제 칭호를 쓰지도 못할 때 "서진패왕"이라고 자처하며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다.

설거는 우선 자신의 아들 설인고(薛仁皐)를 파견했다. 그런데 당나라는 이세민을 보내어 이를 무찔렀다. 그러자 설거는 기병을 이끌고 직접 출정했다. 그런데 이세민이 학질에 걸리는 바람에 지휘를 은개산(殷開山)이 맡게 되었다.[6] 그런데 설거가 기병전의 전문가라 은개산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살아났고, 이세민도 줄행랑을 놓는 굴욕을 맛보았다. 안시성에서 퇴각할 때를 빼곤, 이세민이 이렇게까지 몰린 적은 이때가 유일하다.

설거의 기세는 엄청났고, 아예 장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시도를 했기에 당나라로서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되려는지, 618년 설거는 정말 어이없게 급사해버리고 만다. 후계자는 설인고가 되었지만, 이 정도는 아버지에 비해 그다지 대수로운 상대도 아니었다.

12월 설인고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세민은 우선 버티면서 교전을 벌이지 않았고, 적의 보급선을 괴롭혀 주다가 한방에 밀고 나가서 승리하여 설인고를 항복시켰다.


3.3. 유무주를 멸하다[편집]


산서 일대의 군웅은 유무주(劉武周)로, 돌궐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당초에 유무주는 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송금강(宋金剛)이라는 장수가 자기 부하를 이끌고 항복한 이후에는 송금강의 말을 듣고 상당히 귀가 솔깃해져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송금강에게는 울지경덕(尉遲敬德)[7]이라고 하는 맹장까지 있었던 것이다.

유무주와 송금강은 산서성의 완전 병합을 노리며 남하했고, 최종적인 목표는 진양(태원)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당나라 내부에서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진양 기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진양령 유문정이었다. 그런데 이연은 친구인 배적을 편애했고, 둘이 다툴 때마다 배적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유문정은 술을 먹고 불평하다가 반역죄로 잡혀오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세민은 유문정의 편을 들어주는 말을 했고, 이연은 그 사실에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유문정은 결국 죽었고, 이때부터 조정─그리고 이연─과 이세민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불만이 일어난 가장 큰 문제는 배적이 공이 적다는 것이었기에[8], 이연은 배적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적을 사령관으로 삼아 유무주를 상대하게 했지만 당연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배적은 탈탈 털렸고, 심지어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패배를 겪었다. 결국 이연의 4남 이원길이 철수를 주장해서 당나라 군대는 태원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유무주와 송금강이 산서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배적은 처형은 커녕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산서를 손에 넣은 유무주와 송금강은 미친듯이 하동으로 몰려들어왔고, 이연은 하동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이세민이 나섰다.

"30,000명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619년 11월, 그야말로 당나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세민은 송금강을 막기 위해 출동했다. 이때도 이세민은 설인고를 물리쳤을 때의 전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직접적인 교전을 피한 채 송금강의 보급로만 지독하게 공격했는데, 사실 파죽지세로 진격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길어진 보급로 때문에 송금강의 상황은 영 좋지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6개월을 버티자 결국 송금강은 후퇴하고 마는데, 이 기회에 이세민은 곧바로 역공을 취해 파도와 같이 몰고 나아갔고, 결국 송금강과 유무주는 돌궐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이용가치가 없었고, 돌궐에서는 이 둘을 살해했다.

거기다 이세민에게는 기쁜 일이 있었는데, 울지경덕이라는 의 명수를 부하로 얻게 된 것이었다. 이세민의 부하들 중에는 울지경덕을 못 믿겠으니 죽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울지경덕을 거두어서 썼다. 서북 지역의 위협은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본래 하동을 지키는 임무에서 역으로 산서를 되찾고, 하북의 유무주까지 박살낸 이세민의 엄청난 무공에 당나라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곧바로 이연은 이세민을 익주의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으로 임명했다. 기세를 탄 이세민은 쉴 틈도 없이 620년 7월, 하남으로 남하했다. 하남에는 왕세충이 있었다.


3.4. 왕세충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편집]


이 무렵 이밀왕세충에게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낙양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낙양의 주인이 왕세충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밀과의 싸움에서의 피해가 커서 세력이 좋지는 않았는데, 이세민은 바로 그런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왕세충과의 전투는 혈전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세민이 승기를 잡고 왕세충을 낙양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승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두건덕이 군사를 몰고 왕세충을 도우러 온 것이었다.

하북의 두건덕은 농민 봉기군 출신이었다. 이전까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그는 이세민이 왕세충을 몰아넣는 모습을 보자 위기를 느꼈다. 본래 두건덕과 왕세충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왕세충이 패배한다면 당나라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 자명했기에, 대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이에 이세민의 진영은 엄청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왕세충과의 혈전도 쉽지가 않아 군사들이 많이 상했는데, 이 와중에 두건덕을 이기는 것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퇴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단호한 방법을 취했다. 이세민은 동생 이원길에게 낙양의 포위를 맡겨 두고, 가뜩이나 완전치 않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재빨리 무뢰관으로 입성했다. 이런 요충지의 관문을 빼앗겨 정면 대결로 간다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 무뢰관에 들어간 이세민은 두건덕이 싸움을 걸어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두건덕의 병력은 1개월 동안 꼼짝도 못했고, 이때 두건덕의 책사 능경(凌敬)이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닙니다. 이세민에게는 무뢰관을 계속 지키라고 하지요! 차라리 하북으로 북상해서 당나라산서를 바로 칩시다. 그리하면 낙양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도 돌아갈 테니, 왕세충은 그러면 자연히 구원되겠지요"


이른바 전국시대 제나라의 군사 손빈이 위나라의 방연을 물리친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계책이었는데, 두건덕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두건덕의 부인마저 나섰다.

"대왕께서 당을 공격하고, 다시 돌궐이 관중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포위가 풀어질 터인데, 어찌 여기서 군비를 소모하고만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두건덕은 "아녀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오!"라면서 그 충언을 무시했다.[9][10]

한편 적진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을 때, 이세민은 다시 폭풍처럼 몰아칠 준비를 끝내놓았다. 정오가 되어 두건덕군의 전의가 많이 떨어졌을 때, 이세민은 기병을 동원해서 적군을 휘몰아쳤다. 두건덕도 기병으로 적의 기병을 막으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이라 재빨리 대처를 못했고, 이때 이세민은 직접 나서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적의 사방을 헤집어 버렸다고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건덕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두건덕은 생포되었다. 낙양까지 끌려온 두건덕을 본 왕세충은 일이 다 끝장났다고 생각해서 항복하고 만다. 그 후 두건덕은 장안으로 끌려와 처형당했고, 왕세충은 고조 이연에 의해서 목숨만은 구하지만, 결국 자기가 처형했던 독고기(獨孤機)의 아들 독고수덕(獨孤修德)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유무주를 쳐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때려잡은 이세민의 무공은 어마어마했다. 620년 10월, 당나라 조정은 이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이 막대한 공 때문에 갈등이 벌어지고 말았다.


3.5. 이세민의 지휘 스타일[편집]


전술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기동력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군대는 무거운 철갑을 입은 중기병보다 최소한의 철갑에 가죽을 덧댄 갑주를 입은 경기병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그와 휘하 장군들의 전술은 대체적으로 일단 수비를 굳건히 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으며, 꿋꿋이 버티다가 날랜 경기병을 이용해 상대의 보급로를 무력화시키는 와중 한순간에 승기를 잡아내어 이기는 형태였다. 적이 후퇴할 시에는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남은 적의 전력을 포위 섬멸했다.[11]

이것은 유목민의 빠른 기동력과 전술을 모방한 것으로, 이연과 이세민 세력이 기본적으로 돌궐과의 투쟁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온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전술로 이세민의 군대는 연전연승하게 되었고, 이런 무공을 바탕으로 이세민은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세민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정예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여 통일전쟁 때는 물론 이후 돌궐, 서역 그리고 고구려 원정에서도 효과를 보았다.


4. 황자들의 권력투쟁[편집]



4.1. 이건성의 공격[편집]


당나라가 건국되고 안정되는 데 이세민의 공훈이 그야말로 막대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이는 이건성이 건국 과정에서 당고조의 본거지인 태원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건성이 손 놓고 앉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역시 군사적으로 활동하여 당나라의 건국에 공적이 적지 않았다. 이세민이 왕세충을 공격하고 있을 때 이건성은 돌궐을 막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세민의 공적이 크다고 하나, 이건성 역시 공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따로 심각한 결격 사유도 없었다.

문제는 이건성에게 결격 사유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세민의 공이 너무 컸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의 건국에 있어서, 아무리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이세민이 세운 공은 절대적이었다. 또, 아무리 결격 사유가 없었지만 군공이 적다는 건 경쟁자가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이세민이 야망이 없었다든가 한고조혜제처럼 확실히 후계를 천명하여 경쟁자가 없었다면 또 모를까.[12][13] 사실 이건 아버지인 당고조 이연이 교통정리를 해야 했지만 실제로 기록 왜곡이 있었다고 한들 설인고,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을 죄다 물리친 게 이세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강력한 경쟁 군벌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사실상 이세민은 단순히 이연의 아들이 아닌 동업자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14] 이는 현무문의 변 당시 이세민의 대처를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당장 동아시아사에서 부왕의 명령에 거역하고 군주가 된 다른 인물들을 생각하면 쉽다.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4남인 성조 영락제 주체만 봐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는 임지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15] 부황이 하라는 대로 짱박혀 지내다가 형인 황태자 주표가 죽어 조카인 태손 주윤문이 황제가 되고, 거기다 젊은 황제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반격에 나섰으며, 그것도 자기가 불리하다는 걸 뻔히 알고서도 살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16]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조금 상황이 낫긴 했지만[17] 그런 그도 아버지 이성계가 병석에 누운 그 한 순간을 잘 포착해서 모험에 나섰던 것이었고, 만약 일이 잘못 돼서 이성계가 나섰다면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다. 거기에 이방원은 이세민과 달리 바로 정변 후에 왕이 되지 못하고, 사실상의 적장자인 형 정종 이방과한테 일단 왕위가 돌아가게 하는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세민은 주체처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찌그러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방원처럼 부왕이 병에 걸려 자리보전을 한 게 아닌데도 태극궁의 현무문에서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을 대놓고 죽였으며 그러자 고조 이연은 바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조 이연의 신생 정권 내에서 진왕 이세민이 차지했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18]

이세민이 황태자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만, 지금 황태자가 이건성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이건성은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왕 이세민에게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세민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세민 역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형을 공격해야만 하는 안 좋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막장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갈등이 아직 표면화되기 이전, 뒷날의 대결을 짐작한 이세민의 진왕부와 이건성의 동궁 진영은 경쟁적으로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문학관(文學館)을 장악한 이세민은 18학사[19](十八學士)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일종의 참모 양성소 비슷하게 꾸몄다. 또한 수하인 굴돌통(屈突通)을 동도 낙양에 남기고, 장량(张亮)을 시켜 낙양의 호걸들을 알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한 방현령(房玄龄) 등도 꾸준히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세민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정복 전쟁을 하면서 그의 세력이 일치감을 가졌다는 것과 이세민이 지나간 사방에 자기 세력을 심을 수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성도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고, 자기 편을 끌어모았다. 양 진영의 인재 풀(pool)은 대략 이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왕(齊王) 이원길, 위징, 왕규, 위정, 나예, 배적, 설만철

  • 진왕 이세민의 진영

이건성에게는 매우 막강한 카드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친동생인 제왕 이원길이었다. 고조 이연의 4남으로 이건성과 이세민의 친동생이 되었는데, 승자가 된 이세민 측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몹시 잔혹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생긴 것도 추하게 생겼다고 하고, 부하들을 두 패로 갈라 진검을 주고 막싸움을 시키는가 하면, 자기에게 충고하는 유모를 부하를 시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는 참혹한 일화도 있다.

아무튼 이건성 휘하의 신하들이 이세민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워낙 이세민이 공도 큰 데다 무엇보다 황제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신하인 그들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성 자신이 나서는 것도 좋지 않았는데, 태자가 진왕을 견제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문제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0] 하지만 제왕 이원길은 달랐는데, 제3자의 입장에 있는 데다가 단 셋뿐인 정실 소생 황자 중 한 명인 이원길은 언제든지 아버지 이연 앞에서 이세민을 공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의 연합은 이세민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태자의 책사 위징도 위협적인 인물로, 깐깐한데다 영리한 그는 뛰어난 참모였기에 진왕부의 가장 큰 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황제가 된 이연과 이세민이 사사건건 충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연은 여러 번 측근에게

"둘째는 사람이 달라졌다."

"이제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마음이 많이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두건덕의 부하인 유흑달(劉黑闥)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초 조정에서는 이세민을 파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유흑달의 세력이 막강하여,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이세적이 패배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이세민을 파견하여 진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세민이 철수한 후, 유흑달은 다시 돌궐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이건성이 움직였다. 바로 위징과 왕규의 간언 때문이었다.

"진왕의 공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태자께서는 동궁에 계시느라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흑달의 난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어마어마하니, 태자께서는 이를 무찌르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산동 호걸들이 지지해줄 것입니다."

이에 이건성은 고조에게 말해 출정했고, 반란을 진압하여, 산동에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었다. 물론 이세민의 대공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세상에 당나라에 진왕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할 순 있었다.

거기다가 이세민은 아버지인 황제 이연의 비빈들에게 전혀 평판이 좋지도 않았고, 평판을 키울 생각도 없었던 것에 비해, 이건성은 어느 정도 그쪽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비빈들은 계속해서 이연에게 이세민에 대한 험담을 해댔다. 이건성이 가지고 있는 이 힘이 여실 없이 들어간 것이 양문간(楊文幹) 사건이었다. 양문간 사건으로 이건성은 큰 피해를 입을 뻔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결과가 나왔다.

길긴 하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면, 양문간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건성이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이건성의 소행인지, 진왕부 쪽의 책략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태자가 기를 쓰고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아무튼 이 일로 이건성은 큰 공격을 받았고, 결국 이연은 이세민을 태자로, 이건성을 촉왕으로 봉하겠다는 말을 했으며, 이세민은 양문간의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다.

한참 이세민이 싸우고 있었을 때, 갑자기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 일 없다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일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제왕 이원길, 그리고 황제의 비빈들이었다. 이연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연은 동궁의 위징과 왕규, 그리고 진왕부의 두엄을 처벌하는 것으로 이 일을 끝내버렸다. 처음에는 이세민의 대공에 기가 눌리던 이건성이었지만, 점점 정치적인 투쟁에서 유리한 쪽을 점해가고 있었다.

태자 일파에서는 끊임없이 이세민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이연에게 했고, 이연은 그럴수록 치를 떨었다. 반대로 진왕부 쪽의 공격은 어느 정도 대처하면서 막아내고 있었다. 또한 진왕부의 인물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으면서 분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대 전환점이 다가왔다.


4.2. 현무문의 변[편집]


626년, 돌궐이 당나라의 변방을 공격했다. 이건성은 이 기회를 이세민 일파를 일망타진할 기회로 여기고, 제왕 이원길을 통병원사(統兵元師)로 추천하여 돌궐군을 막는 병사들을 지원하라고 권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실제 목적은 이 지위를 이용해서 울지경덕, 진경 등 진왕부의 사람들을 참전시키는 것이었다. 전시의 사령관이면, 구실을 붙여 아랫사람을 즉결 처분히는 거야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계획이 이세민 일파에게로 흘러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진왕부는 격렬하게 들끓으면서 반발했다. 당시 방현령과 두여회는 조정의 신하라는 신분이었기에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신 이세민의 처남인 장손무기가 중심이 되어 무력을 써서 단호하게 일어나자고 설득했고, 고심하던 이세민을 향해 울지경덕이

"대왕께서 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저도 대왕 곁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대왕께선 지켜보기나 하십시오!"

라는 충언을 했다. 그때서야 이세민은 움직이며 자신의 칼을 울지경덕에게 주면서 오지 않을 경우, 베어버리라는 말과 함께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626년 6월 3일, 이세민은 황제 앞에 나서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연의 후궁들을 강제로 희롱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면서

''저는 죽습니다만은, 그보다 죽어서 왕세충두건덕을 보는 것이 더 수치스럽습니다!"

라는 몹시 격렬한 언사를 취했다. 이세민의 깜짝 발언에 조정에서는 다음날 황당해하면서도 대질 심문을 해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세민의 목적은 이건성을 불러들이는 데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원길은 이건성에게 차라리 병력을 모으고 핑계를 대어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충고했지만, 이건성은 이미 준비는 철저하단 이유로 거절했다. 6월 4일 새벽, 이건성과 이원길은 밖에서 만난 후 태극궁의 현무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 이건성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갑자기 진왕 이세민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이건성을 불렀다.

"대형"(大兄)!

이세민이 완전무장한 채로 등장하자 깜짝 놀란 이원길은 세 번 화살을 쏘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모두 맞히지를 못했다. 반면에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이세민은 단 한 발에 이건성을 쏘아 맞혔다. 자신의 친형을 직접 죽여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건성이 데려온 수하들과 이세민의 부하들 간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숫자에서부터 이미 차이가 확연하게 나버렸기에, 싸움은 일방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형을 죽인 일이 이세민 본인도 워낙 놀랍고 떨리는 일이었던 것 때문이었는지 이세민은 나무에 걸려 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원길은 이때 이세민의 화살을 빼앗아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울지경덕이 이원길에게 달려들어 그를 살해했다.

상황이 종료된 후 혈전을 벌였던 울지경덕은 몸에 피칠갑을 한 그대로 고조 이연에게 달려갔다. 마침 연못에 배를 띄우고 구경하고 있었던 이연은 깜짝 놀라 울지경덕이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누가 반란을 일으켰냐고 질문했는데, 울지경덕은 태자와 제왕(이원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왕(이세민)이 진압했으며, 이연이 놀라지 않기 위해서 진왕이 자신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겁에 질린 이연은 이세민에게 병권을 넘겨주었다.

후에 이세민은 황태자가 되었고, 2개월 후에는 제2대 황제가 되었다. 동생 이원길의 처도 자신의 후궁으로 들인 것은 덤인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역사의 명군이 되지만 스스로 패륜 문제를 만든 제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5. 정관지치[편집]



5.1. 세력 흡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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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은 형과 동생은 물론, 그 가솔들까지 학살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 일파의 죄는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당태종의 일파가 기회를 잡아 눈엣가시이던 이건성 쪽 사람을 처리해버리는가 하면, 태종을 따라 왕세충 등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장수 왕군곽(王君廓)은 이연의 사촌이자 이건성의 일파인 유주 대도독 이원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는, 왕군곽 스스로가 이원의 반란을 진압하고 조정에 보고해서 유주자사가 되었다.

거기다가 양위를 거쳐 태종이 즉위한 것은 무덕 9년(626년) 8월 계해일인데, 같은 달 을해일에 돌궐의 돌리가한과 힐리가한이 장안 근처 무공까지 진격해 왔다. 태종이 즉위하고 겨우 12일 뒤였으며, 그 군사는 무려 100,000여 명이나 되었다. 무공은 수도 장안에서 70km 정도밖에 떨어지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태종이 기마병 6기를 거느리고 와서 협정 위반이라고 따졌고, 태종 뒤로 제군들이 따라왔다. 이에 힐리가한은 황송해했으며 8월 을유일에 백마를 참해 맹약을 맺었다.(위수의맹약 (渭水之盟))

그러나 이는 당나라에게는 굴욕적인 일로 훗날 당태종이 이정을 총사령관으로 한 원정군을 보내 돌궐을 격파했을 때를 기록한 《구당서》 <이정전>에서는 태종이 이정의 전공을 치하하며,

"위세가 북적에 떨치기는 고금에 없던 일로, 왕년의 위수의 싸움을 갚기에 족하다."

고 했는데 '위수의 싸움'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패전이거나 아니면 굴욕적인 강화였거나 둘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신당서》에서도

"우리 위수의 치욕을 씻기에 족하다."

며 한층 더 분명하게 적혀 있다. 위수에서의 맹약은 당나라에게, 그리고 즉위한지 얼마 안 된 태종에게 굴욕적인 강화였으며 '치욕' 이었다. 다만 3년 뒤인 정관 3년(629년)에 당군은 이미 돌리가한을 항복시켜 그 치욕을 씻었으니 저력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이런 혼란 속에 이세민이 해야 하는 것은 물론 민심을 얻는 일이었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이세민은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 맨 처음 취한 조치는 환속 중지였다. 그 당시 당나라는 정부 정책으로 불교와 도교의 절, 사원들 대부분을 밀어버리고 도사와 승려를 환속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사회에 부정 부패가 심해지면 이런 쪽에서 땡중들이나 사이비 도사가 설치는 등 폐단도 있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는 나쁘다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려도사가 각각 200,000명을 훌쩍 넘는 엄청난 인원인데,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신자들에게 새로 즉위한 황제 태종의 이름으로 다시 제 집을 찾아주게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좋지 않았지만, 일단 당태종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릴 수 있는 묘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삼무일종법난의 세 번째인 당무종 때 반복된다.)

  • 두 번째는 계급이나 서열을 크게 따지지 않고, 의견이 있는 신하들은 모두 상소로 정책을 올리도록 했다. 이건 모든 관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황제의 눈에 들 기회가 생긴 관료들의 여론을 단기간이지만 좋게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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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
  • 마지막 세 번째로 3,000명이나 되는 궁녀들에게 자유를 주고 풀어주었다.

이렇듯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당태종은 노력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과거 태자 이건성의 일파였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건성과 이원길 일파에 대해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 그 일파들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설만철, 그리고 위징 등이 대표적인데, 위징이건성의 책사로서, 적극적으로 당태종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태종은 위징을 불러서 말했다.

태종: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의 사이를 어지럽혔는가?"

위징: "모시는 사람이 주군을 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 말을 따랐다면 이전의 태자께선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징의 말을 들은 태종은 그를 벌주지 않고 중용했다. 태종이 이건성 일파에 대해 포용과 화합을 목적으로 내세운다면, 위징만큼 적절한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이건성 일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위징이었으니 말이다. 위징을 끌어안으면 이건성 일파를 거의 다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기다. 태종은 위징을 하북으로 보냈고, 위징은 그곳에서 별 무리 없이 이전 이건성의 사람들을 통제하여 현재 태종의 체제에 복속되도록 도왔다. 물론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라서, 이건성의 측근이었던 이예의 반란이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틈을 메꾸고 통합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다.


5.2.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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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2개월째, 위징과 봉덕이를 부른 태종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현재의 세상이 아직 어지럽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강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봉덕이의 주장이었고, 부드럽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위징의 주장이었다. 위징은 여기서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는데, 꽤 유명한 말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다스리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으면 금방 배 부르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 쉽기도 하지요."

일단 정책이 이렇게 결정되자 그에 따라서 많은 일들이 처리되었다. 우선 너무 많은 관리들을 정리하고, 조직을 간소화했다. 그리고 많은 현과 주를 간략하게 합쳤는데, 너무 세부적으로 분할되면 백성들이 받는 고통이 많아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의창 제도를 실시해 식량을 비축해두고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 흉년이 들면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사형을 극단적으로 줄였다. 5부주(五復奏)와 3부주(三復奏) 제도를 실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소를 5번, 혹은 지역에 따라 3번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으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는데, 동시에 사형 집행을 할 수 있는 날짜도 극단적으로 줄여버렸다.

보통 2월 4일입춘부터 대략 9월 23일추분까지 사형을 금지시켰는데, 그 외의 날도 제사가 있다, 초하루다, 상하현이다, 휴일이다, 밤이다, 해서 사형을 금지시키니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날짜가 엄청나게 줄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밀리고 밀리다 보면 다시 대사면이다 해서 사형수가 형이 감형되거나 풀려나기도 했다. 결국 정관 4년, 중국 전역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29명이었다.[21]

또한 소소하게 곤장을 때릴 때도 등 대신 허벅지를 때리도록 조치하는가 하면, 사형 대신 오른발을 잘라버리는 제도도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바꾸었다.


5.3. 현명한 내조자 문덕황후[편집]


당태종은 언제든지 신하들이 자신에게 직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거의 괴롭힘 수준으로 당 태종에게 간언했는데, 물론 그 중 제일 심했던 사람이 위징이었다. 위징은

"감히 간언했고 능히 간언했으며 훌륭히 간언했다."

위징은 태종 앞에서 목이 달아날 법한 소리를 하고도 면색 한번 바꾸지 않았고, 무슨 정책을 내려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3번이고 4번이고 통과시키지 않으며 저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종을 쪼아대었고, 태종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항상 대신들은 수나라를 예로 들어 말렸다.

참다 못한 당태종이

"내가 수양제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래. 하나라 걸왕이나 상나라 주왕하고 비교하면 어떤가?"[22]

라든가

"국가에서 단 한 사람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고, 단 한 푼의 세금도 거둬들이지 않아야 만족을 하겠군!"

이라며 폭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물론 사람이 그렇게 욕을 먹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당연하지만, 이렇게 되도록 만든 것도 태종 본인이었다.

가끔 참다 참다 못해 꼭지가 완전히 돌아서 맛이 갈 때도 있었는데, 이럴 때마다 태종을 제어한 것이 장손 황후(長孫皇后)였다. 황후는 후궁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악랄하고 질투심이 넘치는 방법이 아니라 감싸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후궁들이 아프면 약을 주고, 그들이 낳은 아이는 자기 아이처럼 예뻐하면서 길러주었는데, 이에 후궁들이 감격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23] 이렇게 치열한 궁중 암투가 사라지자, 태종은 비교적 정치 업무에 주력할 수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태종을 제어하기도 했다. 어느 날 위징과 대화하다가 엄청나게 화가 난[24] 태종은 아예 그 자리를 빠져나와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돌아와서도 씩씩거리는 태종을 보고 황후가 묻자 태종은 매우 화를 내며

"그 시골뜨기 촌놈 위징 말이오. 내가 하려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해대니, 언젠가는 그 늙은이를 죽여 버려야지!"

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후는 축하하는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을 입고 나와 태종에게 절을 한 후 나눈 대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전부터 위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충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폐하와 나라를 위해 정말 기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껄껄 웃으면서 화를 풀었고, 황후는 위징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실질적으로 황후는 외척의 개입을 막아버렸다. 장손무기는 태종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황후가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거의 차단해버림으로써 뭔가 수를 쓸 수가 없었다. 황후가 죽고 나서야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소 황후는 태종이 화를 내면, 덩달아서

"그렇군요.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같은 식으로 태종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가 조금 화가 가라앉는 것 같으면 천천히 변호하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리도 훌륭한 아내인 황후는 40세가 되기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는데, 유언은 이러했다고 한다.

방현령은 뛰어난 신하입니다. 중용하시지요. 그리고 외척을 중용하지 마세요. 제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주십시오.

그녀의 사후 태종의 일화에서 위징의 성격과 그녀의 현명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져 오는데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도 어이가 없어 애석해했다. 그런 그에게 궁녀들이 하나의 책을 가져다주었다.

"무엇이냐?"

"평소에 황후께서 아녀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하지 않는 일에 관한 득과 실을 모아 책을 쓰셨습니다. 글재주에 자신이 없다고 하시어 보여드리지 못했지요."

형제를 죽인 냉혹한 태종도 그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는 울먹이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은 궁궐 내에 탑을 하나 짓고는, 틈만 나면 그 자리에 올라가 황후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징이 말했다.

"어느 쪽을 바라보십니까?"

태종은 황후의 무덤인 소릉을 가리켰다.

"저기외다."

"아, 그러십니까? 전 폐하께서 (선제의 무덤인)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지요."

이 와중에도 위징은 황제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고 죽은 여인만을 그리워한다고 비판을 한 것이었다. 말을 듣자 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한바탕 대성통곡하고는, 눈물이 멈추자마자 탑을 때려부쉈다고 한다. 이렇게 위징은 간언하고, 황후가 태종의 심기를 헤아릴 때, 실무에서는 방현령과 두여회가 많은 관료들을 줄이는 어려운 일을 맡아 완벽하게 해내었고, 국고를 풍족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5.4. 동돌궐고창국 정벌[편집]


대외 전쟁에서도 순조롭게 일이 풀려나갔다.

태종의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이정은 철륵의 설연타 등과 손을 잡고,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굴복시키며(630년, 정관 4년), 몽골 고원을 제압했다. 이에 당나라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 = 텡그리 카간)으로 추대했고,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었던 철륵, 거란, , (飁) 등 몽골과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서 태종은 일전에 힐리가한이 장안으로 군대를 몰고 왔을 때 철군을 애걸한 원한을 갚고, 중원(천자)과 초원(가한) 양쪽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다.[25]

또한 640년 후군집과 소정방이 서돌궐에 복종했던 국씨 왕조 고창국(투르판)을 멸망시켰다. 당태종은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안서도호부)으로 편제하여 당나라의 중앙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의 멸망은 곧 당나라의 북부와 서부에 있었던 세력들이 모두 당나라에 복속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당나라는 서쪽의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게다가 이정의 당군은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었던 모용선비족의 토욕혼을 격파했고, 그 후 635년에 신흥 강국 토번(티베트)이 토욕혼을 정복했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 방면에 대해서도, 당나라는 641년 공주를 하가(下嫁)[26]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했다.

이제 동으로 황해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대당제국의 주•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제 당태종은 무릇 동서 9, 510리, 남북 10,919리에 달하는 대제국을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당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당태종에게 대적할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6. 고구려와의 악연[편집]



6.1. 전쟁의 원인[편집]


太宗顧謂侍臣曰, "莫離支賊弑其主, 盡殺大臣, 用刑有同坑穽, 百姓轉動輒死, 怨痛在心, 道路以目. 夫出師弔伐, 須有其名, 因其弑君虐下, 敗之甚易也."

이에 태종은 시신(侍臣)들을 돌아보며 "막리지(연개소문)는 그의 군주를 시해하고 대신을 다 죽였으며, 형법을 쓰는 게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 대로 죽이므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치어 길가에서도 눈짓을 한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라고 했다.

《구당서》 <동이 열전> - 고려- 조 정관 17년 기사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상당히 많았으나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신라를 괴롭히는 것을 전쟁의 이유로 삼았다.[27] 사실 집권 과정에서도 똑같이 쿠데타를 한 주제에, 고구려 정벌의 명분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였다고 하니 조금 당혹스럽다. 어찌됐건 실제로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고구려 정벌의 핑계일 뿐이었다. 태종 자신도 단순히 핑계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핑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연개소문이 집권하고도 두 나라 간의 사이는 바로 나빠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 전파를 위해 경전과 도사들을 보내줄 것을 청했고 이에 태종도 8명의 도사와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당나라의 농서 이씨 황실은 노자 이이의 후손을 자처했고, 때문에 도교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도교 전파를 위해서 도사와 경전을 보내달라고 하는데 안 들어줄 이유는 없다. 송나라의 주희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교만한 전쟁, 탐욕스러운 전쟁

이라 일컬었다.

이런 빈약한 명분은 당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논란이 있었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 자체는 중론으로 자리잡았지만, 명분이 워낙 빈약하고 수나라의 전례도 있다 보니 굳이 당장 전쟁까지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론도 등장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 원정은 곤란하다는 중신들의 간언이 올라왔다. 아래에 언급할 위징의 반대도 그 중 하나이다.

또한 고구려 정벌은 단순히 연개소문이 괘씸해서라는 이유뿐 아니라, 내부적인 갈등을 외부로 돌리려는 태종의 정치적인 의도도 담겨있었다. 전쟁 직전인 643년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위왕 이태진왕 이치간의 갈등이 터졌는데 장손무기를 비롯한 외척들이 개입하면서 당시 정치적인 입지가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부의 갈등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고구려 정벌이라는 카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6.2. 고구려-당 전쟁[편집]


태종 이세민은 건국 시절의 공헌은 물론이고, 고구려 원정 이전까지 연전연승하며 주위의 이민족들을 평정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신성, 건안성[28], 특히 안시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공략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결국 당군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때문에 제1차 고구려-당 전쟁에 관한 야사나 설화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는 큰 인상을 남겼다.

태종이 안시성에서 양만춘의 화살에 한 눈을 잃어 애꾸가 되었다는 야사라든지, 안시성 전투 이후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역으로 침공하여 추격하자, 태종이 우물에 숨었는데, 그 사이 거미가 입구에 거미줄을 쳤고 우물에 쳐진 거미줄을 본 고구려군이 우물을 살피지 않아 태종이 살았다는 등의 전승이 강소성, 산동성, 북경 일대에 전해지고 더러 중국 경극에 공연될 정도이며, 한국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유명하다. 이후 태종이 거미에게 보답하기 위해 우물 위에 탑을 만들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탑[29]이 아직까지 남아있으나 야사 이외의 기록이 없어서 탑과 전설의 진위 여부는 불투명하다.

수나라와는 다르게 초창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10개의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는 등 고구려에게 타격을 입혔으나 결국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함락한 성도 건사하지 못한 채 빈 손으로 귀환하다시피했다.[30][31]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끌고 온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때, 수나라 군대는 요하요동 반도를 가로지르는 천산 산맥을 넘어 오골성압록강을 지나 평양 인근까지 침공하기도 했다. 반면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경우,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을 넘지도 못했다. 당나라는 돌파구를 찾으려 계속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만다. 수나라보다 전공이 낫다고 단언하기 힘들정도이다.[32][33][34]

특히, 전쟁 초기 요동으로 가는 길목인 요하 남쪽의 늪지대인 요택을 도하하면서 고구려 정복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도하 장비를 태워버렸던 것이 큰 악재로 남았다. 안시성에서 이민족을 함께 정벌했던 정예 병사들을 많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퇴군을 하려면 또 다시 요택을 건너야 하는 데, 태워버린 도하 장비를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보급이 끊어져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하거나 굶어 죽었고, 태종 이세민 본인도 한겨울에 흙으로 길을 다시 메우고 수레를 손수 밀다가 등창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기록도 있다. 살아 돌아온 이는 극히 소수였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천책상장 태종의 개인적 입장에선 비참하기 그지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던 위징의 주장을 회고하면서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

라며 크게 후회하기도 했다.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죽은 병사들을 위한 제사를 올릴 때 곡을 하니 신하들도 슬피 울었고, 백성들은 자신의 죽은 자식을 위해 울어주는 황제에게 원망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요동성을 공격할 때 직접 흙을 퍼나른 것은 그를 미화하는 수사였지만 요택에서 직접 몸소 풀을 베고 흙을 나르는 행위에서는 당군의 위급한 퇴각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연개소문이 당나라 후방의 설연타를 움직여 수도권인 관중을 노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긴급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나라는 수나라 시절에 비해서 침착하고 유연하게 고구려 공략을 시도한다는 것을 기록에 어필하려고 무단히도 애를 썼지만 사실 당나라 입장에서 아군의 용맹과 분전을 유리하게 과장하는 성향과 수사를 제외하고 보면 그냥 요동 외곽의 거점 4~5개를 점령하다가 실패한 수준이었다.[35] 즉, 요동 방어선을 와해시키는 데는 실패했으며 이후로는 대규모로 꾸려진 원정에 전면적인 수정을 가한다.

당태종은 요서와 요동을 일거에 제압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10,000명 단위의 군대를 보낸 국지전, 요동 방어선 우회, 대규모 수군 상륙 등의 시도를 하며 고구려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술로 바꾸었고, 고구려의 후방에 위치한 신라와의 연계에도 이전보다 공을 들였다.

다만 고구려도 내몽골 일대로 전장을 옮겨 당나라를 견제함으로써 당군의 소모전에 대응했고, 당고종 이치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수십만 명의 대군을 동원한 제2차 고구려 침공 역시 연개소문이 괴력을 발휘하여 사수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런 만전의 전략으로도 해내지 못한 고구려의 문을 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세민의 아들 이치, 그리고 그 연개소문의 의 내분이었다.

어쨌거나 태종은 황태자 이승건을 폐위한 후 정신적으로 힘든 와중에 먼 원정으로 체력을 많이 소비하고, 거기에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라는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면서 건강을 급속도로 해치게 되어 결국 단약[36]에 의존하다가 단약 중독으로 붕어하게 되었다.


6.3. 결과[편집]


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안시성주[37]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사가 있는데,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태종 애꾸설>은 거의 600년 뒤인 고려 말기의 목은 이색의 시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지만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줄기차게 애용되어 <삼국기>, <대조영>, <연개소문>, <안시성(영화)> 등의 드라마에서 태종은 눈을 잃는다. 게다가 <대조영>과 <안시성>을 빼면 《삼국지연의》의 하후돈 마냥 그 뽑힌 눈알을 먹는 것까지 표현했다. 사실 시신경이 직통으로 맞으면 즉사할 가능성이 높지만 <대조영>에서는 양만춘이 당나라의 깃발을 활로 쏴서 부러뜨리자, 거기에 맞아서 눈을 잃은 것으로 그나마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최초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은 당나라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 자체는 당시 기준 분명한 사실이었고, 명확한 신념으로 행한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원정 실패 이후 계속해서 준비하는 재침공은 그 가치가 의심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도 당태종 본인조차도 자신이 정말 당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리는지, 아니면 역사에 길이 남을 군사적 천재임이 분명한 자신의 유일한 오점을 지우려는 자존심 충족에 불과한 행위인지 계속 의심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태종은

"다시는 요하를 넘지 말라."

또는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어라"

라고 유언했다고 한다.[38][39]

하지만 《구당서》와《신당서》의 기록에선 태종은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 재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40] 또한, 당태종의 유지를 받든 당고종은 이러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라는 뜻보다는 천책상장이라 불릴 정도로 군재가 뛰어난 당태종 자신에게 맞춘 원정 계획을 물리고, 당고종의 상황에 맞춘 계획을 다시 짜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당태종 자신조차 실패했는데 너희가 해서 되겠냐는 걱정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죽기 직전에서야 그 흠집 난 명예도 죽고 나면 무의미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르는 등등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뒤를 이은 고종은 즉위 6년부터 고구려 정벌을 다시 시작해서,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던 명군인 아버지가 실패한 그 고구려 정벌을 달성하고 만다. 대만일본 역사 소설가인 진순신은 이것을 최대의 아이러니로 꼽았다.[41]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로 요동 방어선의 건재를 확인한 것이 역설적으로 다음 침공의 교훈이 되었다. 제1차의 대대적인 전쟁의 교훈으로 국지적인 소모전과 요동을 우회한 상륙전 등으로 고구려의 국력 고갈을 시도했으며, 신라와의 연계에도 더욱 힘을 썼다.

7. 후계문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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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문덕황후 장손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대부분 막장인 것도 유명하다. 태종 사후의 제위 계승권은 문덕황후에게서 난 세 아들에게 있었는데, 자식들이 지닌 결함 때문에 태종은 매우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뭐 수양제처럼 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장남인 이승건은 어렸을 적에는 머리가 총명했지만, 어느 날 열병을 앓은 이후로 몸이 불편해지고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돌궐족의 복장을 즐겨 입고 무엇보다

"내가 천하를 가지게 되면 기병들을 이끌고 돌궐 가한에게 몸을 맡겨 한 부락의 우두머리로 살 것이다"

라는 망발을 하여 태종의 눈 밖에 났다고 전해진다. 건국 초에 태종이 돌궐과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 나라를 지켰는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가 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외모의 미소년 악사인 칭심(稱心)을 곁에 두고 남색을 즐기는 등 워낙 당태종의 성질을 건드리는 짓을 많이 해서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자리 근처에도 못갔다.[42]

둘째 아들인 이태는 체격이 건장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도 뛰어나서, 태종이 가장 아끼던 자식이었다. 그러나 이태는 점차 몸이 비대해지고 게을러져서, 나중에는 황궁 내에서도 가마를 타고 이동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졌을 뿐 아니라(고도비만이었던 모양), 지나치게 태자의 위를 탐내는 모습이 아버지인 태종의 눈에 밉보이고 말았다. 태종은 나이를 먹으면서 형제들을 주살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어져만 갔는데, 욕심 많은 성격의 이태가 황제가 된다면 틀림없이 다른 형제들을 해치고 말 것이라 걱정했던 것이다.[43]

때문에 태종은 이승건과 이태를 모두 제치고 비교적 온화한 성격이었던 이치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후계자를 결정지었다. 그 외에도 이승건과 이태는 아버지인 태종에게 대드는 일이 잦아져서 차츰 관계가 악화되었고, 특히 이승건은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영영 폐태자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로 얼마 가지 않아 죽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암살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본래 병약했던 몸이라 요절해도 이상할 게 없다.

결국 태종과 문덕황후의 아들 중에서 3남으로 전체 아들로 치면 9남에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인 이치가 제위를 물려받아, 훗날의 고종이 되었다.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데다가 마이페이스 기질이 강한 이승건이나, 총명하면서도 욕심이 많은 이태보다는 비교적 유약한 성격인 이치가 다루기 쉬워서 대신들이 태종에게 이치를 후계자로 삼도록 권했다고 보기도 한다.

고종의 군주로서의 평가는 괜찮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인 태종이 워낙 먼치킨이다 보니 비교 당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아내인 측천무후가 그의 사후 정권을 장악하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마누라 단속 못했다고 후세 사람들에게 제대로 까였다. 덕분에 이 후계자 문제는 고구려 원정과 더불어 태종의 실책들 중 하나로 꼽힌다.[44][45]

확인되는 태종의 유언을 보면,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과연 얘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품고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변변찮은 데다가 2대 만에 나라를 말아드신 수양제라는 예시까지 있으니,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짐은 공들에게 대사를 맡기노라.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은 공들도 아는 바이니 그를 잘 보좌해 달라."

- 장손무기와 저수량에게, 《신당서》 <장손무기전>, 《자치통감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에 관하여 걱정하지 말라."

- 고종에게, 《신당서》 <장손무기전>, 《자치통감》


"장손무기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니, 내가 천하를 갖게 된 것은 대부분 그의 힘이었다. 내가 죽으면 참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이간시키게 하지 마라."

- 저수량에게, 《구당서》 <저수량전>, 《자치통감》


사실 3남이었던 오왕 이각이 문무에 출중하여 태종은 그를 총애했고, 이승건과 이태가 문제를 일으킨 후에는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었다고도 한다. (후궁에게서 본 아들들까지 포함하면 이승건은 장남, 이태는 4남, 이치는 7남 혹은 9남이었다.) 이 얘기는 이각의 어머니가 수양제의 딸, 즉 수나라의 황녀이기 때문에 어불성설이 아닌가도 싶지만, 어차피 황실이나 황실이나 다 같이 관롱 귀족 중에서도 무천진 출신 관롱집단의 일원이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무천진 집단은 오랫동안 서로 통혼하던 사이라, 태종도 따지고 보면 수 황실과 인척 관계로 오히려 전왕조의 혈통으로 정통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문제는 장손무기가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46] 장손무기의 위상이 갈수록 강화되어 가던 것이 당태종 말년이니만큼, 장손무기의 반대는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결국 장손무기의 의향에 따라, 그가 찬성한 진왕 이치가 후계자가 되고, 그가 반대한 오왕 이각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으며, 얼마 안 가 역모죄로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47][48] 그의 친동생이었던 촉왕 이음은 연좌되어서 유배되었다.[49] 그리고 태종 사후 진왕 이치는 고종으로 즉위했고, 장손무기는 권력의 핵심으로 한동안 잘 나갔으나 결국 측천무후와의 갈등 끝에 실각하여 모함을 받고 자살했다.[50]

한편 5남 제왕 이우는 아예 아버지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금방 진압되고 폐서인되었다.

[1] '하늘이 낸 장군'을 뜻한다.[2] 이연의 어머니와 양광의 어머니인 독고황후는 자매지간이었다.[3] 허경종의 아버지는 수나라의 예부시랑으로서, 수양제가 살해될 때 반역파에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허선심(許善心)이었다. 허선심이 죽을 때, 아들 허경종은 자기의 목숨만을 생각해서 추태를 부렸다. 그때 봉덕이(封德彝)라는 인물이 그 현장을 소상히 목격하고, 그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허경종은 그것에 앙심을 품고, 실록 편찬시 봉덕이의 전기를 쓸 때 좋지 않는 이야기를 보태 썼다고 한다. 허경종은 호색한데다가 탐욕스러운 인물로, 뇌물을 받으면 그 사람을 잘 써 주었다. 고구려 원정 때 방효태라는 장군은 전투에서 번번히 지기만 했었는데, 허경종에게 뇌물을 준 덕분에 용장으로 기록되었다. 또 허경종의 아들은 울지(尉遲) 집안에서 아내를 맞았는데, 이 인척관계로 울지경덕의 과실을 모두 숨겨 주었고, 태종이 <위봉부>(威鳳賦)를 지어 장손무기에게 준 것을 울지경덕에게 주었다고 바꿔치기까지 했다. 《구당서》는 이런 허경종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실록을 인용했기 때문에 당나라 초기 기사는 상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4] 온대아는 당나라때 공부시랑과 예부상서을 역임했고, 태종이 중히 썼던 인물이었다.[5] '하늘이 낸 장군'을 뜻한다.[6] 이 사람은 능연각 공신들 중에 한 명이다. 그리고 이세민이 학질에 걸렸다는 것도, 대놓고 싸우다 패했다는 것을 가리기 위한 거짓 포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7] 尉遲는 '위지'가 아니라 '울지'로 읽는다.[8] 사실 엄밀히 말하면 배적의 공이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배적이 무능한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9] 다만 농민 봉기군이라는 특성상 만약 당나라 본토를 공격했다가 뒤에서 이세민에게 협공이라도 당한다면 모랄빵이 나서 뿔뿔히 흩어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애시당초 이런 농민군은 사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10] 사실 당나라를 직접 공격한다는 것은 보급선이 그만큼 늘어지는 것이므로 난이도도 그만큼 높다. 그나마 정규군이라면 보급선이 늘어나도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농민군인 두건덕군으로서는 하기 힘든 재주이다. 거기다 돌궐이 관중을 공격해줄지도 미지수이며, 또한 이세민의 군대는 당나라의 정예군일 수는 있어도 주력군이라고 하기는 어렵기에 두건덕으로서도 판단이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손빈이 방연을 쳤을 때도 병사는 손빈이 기른 제나라의 강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11] 쉽게 말해 ‘일단 우주방어로 버티면서 적의 보급을 끊어 힘을 뺀 뒤, 없애버린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비전의 바이블격인 전술이다.[12] 혜제는 이미 초한전쟁 이전부터 태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어서 나중에 고제가 여후 견제를 위해 유여의로 태자를 바꿀 것을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공신들의 반대로 실패했다.[13] 물론 고제의 자식들 중에서도 군공을 세운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세운 군공은 철저히 고제의 휘하에서 세운 공이었고, 당연히 아버지처럼 압도적이지도 못했으며 무엇보다 이들은 전부 서자였다. 반면 이세민은 적자였고 독자적으로 군을 이끌어서 공을 세웠으며 그 군공이 너무 압도적이라 감히 다른 사람이 범접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정도였다.[14] 이건성이 이세민과 싸워볼 만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도 어느 정도 고조 이연의 이세민 견제 때문일 수도 있는데 당장 이건성은 이연의 후궁에서 평판이 좋았고, 반면 이세민은 아주 나빴다.[15] 당연하지만 주체 역시 야망이 있었고 주원장이 자신을 황태자로 삼기를 바랐다.[16] 당연히 명나라 남경 중앙정부의 세력이나 군사력은 아무리 가장 크다고는 해도 일개 번국인 나라를 훨씬 능가했다. 그런데도 주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건문제 주윤문이 너무 젊어서 전쟁 경험이 없었고, 우유부단했던 데다가 그를 받쳐줄 중신들을 전부 태조 주원장이 숙청해 버려서 유능하고 경험많은 숙장들이 사라졌던 반면, 연왕 주체 본인은 능력도 뛰어났던 데다가 아버지를 돕느라 군무에도 밝았고 전쟁경험도 많이 쌓았던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단력만큼은 건문제 주윤문에 비해 훨씬 뛰어났다.[17] 가장 중요한 것이 주체처럼 변경에 박혀 있지 않아서 일단 뭐든 할 수 있었고, 신덕왕후의 친척들도 이방원을 지지했을 정도니 여론 자체도 이방원에게 나쁘지 않았다. 또, 하륜, 이숙번 등이 있어서 군사를 끌어 오기도 쉬웠다.[18] 이것만 봐도 왜 고조 이연이 이건성을 내세워 이세민을 견제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만하면 이세민을 치려다가 반격당해 죽거나 유폐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19] 이세민이 초치한 문학관 18학사는 그의 즉위를 돕고, 정관의 치세를 이끈 인재군으로 방·두(방현령과 두여회)로 대표되는 정관명신들도 모두 18학사 집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화가 염입본에게 명령하여 24명의 공신상을 그려 그들을 칭송한 것처럼, 당태종은 군주와 신하간의 아름다운 관계 정립에 매우 신경썼었다.[20] 원래 격하인 진왕을 태자가 직접 견제했다가는 자칫 태자와 진왕이 동격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21] 이후 태종처럼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도 이러한 조치를 취한 바 있다.[22] 이 둘은 폭군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인간말종인 인물들이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으로 평가받는 당태종과 같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23] 황후의 행동은 현명했는데, 후궁 암투의 근간은 후궁들이 자신들의 신변을 보장받을 수 없을 때 벌어지기 때문이었다.[24] 당대의 소설인(문학적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야사 형식) 《수당가화》(隋唐嘉話)라는 문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당 태종이 산남으로 놀러가려 했다가 위징이 성낼까 싶어 그만두었는데, 마침 성묘를 갔다 돌아온 위징이 "사람들은 폐하께서 산남으로 간다는 소문을 들어서 채비를 했다고 하는데, 소문일 뿐이었고 실제로 가지는 않으셨다지만 애초에 이런 소문이 왜 났을까 모르겠습니다"라고 기어이 한소리를 했고, 태종은 "그때 실은 마음은 있었지만 경이 성낼까봐 그만둔 것이다"라고 둘러대기 바빴다. 이 일로 태종은 (너무 노한 나머지) 그날 조회도 일찍 파했다.[25]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인 중국을 정복하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이것은 거의 유일하게 농경민족이 유목민족을 정복한 경우이다.[26] 중국식 표현이다. 실제론 논란이 되고 있다. 티베트, 송첸감포, 화번공주 문서 참조[27] 황당하게도 태종은 정작 피해를 입은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사신을 통해 '너희는 여자가 다스려서 도적이 들끓고 사방이 우습게 보는 것이다. 내 사촌 중 하나를 보내줄 테니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는 게 어떻냐'는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를 보냈다.[28] 장검이 이끄는 군대는 건안성에서 고구려군 수천 명을 죽이는 등 승전했으나 그 이후 전투 기록이 사라지는데, 이는 건안성에서 장검의 당군이 고구려군에 의해 치명적인 대패를 당했음을 시사한다.[29] 중국 장쑤성 바오타현에 있는 몽롱탑.[30] 고구려 침공에 동원된 태종의 병력은 수나라에 비해 적었지만 수십만 명 이상의 대병력이 동원되었으며(수나라가 워낙 비교 불가한 물량을 보여줘서 비교적 적게 보이는 것이지 당나라가 고구려-당 전쟁에 투입한 병력의 규모도 나라를 쥐어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나라 역사에서 고구려 원정처럼 화려한 진용으로 대외원정을 나간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고구려-당 전쟁 당시 동원된 당군은 많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아온 정예 병력이었고, 지휘관들의 역량도 높아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1] 전초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사학계나 중국 등 외국 역사학자들 역시 하나같이 명백한 태종 이세민의 패배로 보는데, 그 이유는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커녕 천산산맥을 넘는 것에도 실패하며 요동 방어선 표피에 있는 성 몇 개를 점령하다가 탈환당한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32]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1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에서 피해를 입어 퇴각했음에도 불구하고 2,000명밖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기록이 남아있어 동아시아 역사학자들은 태종 이세민이 이 기록을 고쳤을 것이라고 본다.[33] 이세민이 고구려에게 패배한 뒤 그 사실 여러가지를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세민뿐만이 아니라 역대 중국 황제들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에 관한 기사는 아예 기록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34] 원래 당군의 대전략 역시 요동 일대의 거점을 제압하고, 수도 평양으로 진공하는 것이었지만 요동에 배치된 전력을 압도하지 못하고 요하를 건너자마자 돈좌해버리는 바람에 수나라 때와 같은 과감한 공격이 불가능했다. 이후 복귀 직후 이정과의 복기에서 수양제와 같이 평양을 직접 들이치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35] 물론 요동성은 고구려에 있어 중요한 대성으로 추정되지만 역시 탈환된다.[36] 도교의 영향으로 연단술이 유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단약의 주 재료가 바로 수은.[37] 흔히들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 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38] 《자치통감》 권199, <당기>5, - 태종문무대성대효대광효황제하지하 -, 정관 23년 4월 임인조, 6,268쪽, "罷遼東之役及諸 土木之功. 四夷之人入仕於朝及來朝貢者數百人,聞喪皆慟哭,翦髮、剺面、割耳,流血灑 地."[39] 고구려 원정을 한 것이 무진장 후회되었는지 위징이 그 당시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말렸을 텐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40] 사천 일대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41] 정확히 말하자면 당 고종의 제1차 침공(661년) 역시 연개소문이 완벽하게 방어해냈다. 연개소문 사후, 아들 연남생이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 측에 투항한 것이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고종은 수양제나 당태종은 시도하지 않았던, 백제를 먼저 공략하는 카드를 성공시키면서 고구려는 그 전보다 남쪽 신라 전선의 부담까지 더 커진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애초에 수•당은 만주 및 한반도가 본인들의 영향력 밖에 있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기에 고구려를 손봐줘야 한다는건 당태종의 개인 생각이 아닌 당시 중화제국의 전반적인 국가정책이었다. 오늘날 중국이 북한을 온갖 욕 먹어가면서도 붙들고 있는걸 보면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구한 국가전략이다. 수도가 중국 대륙 서부인 시안 일대에서 동부인 베이징으로 옮겨진 명나라 이후,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 대전략의 가치는 더 올라가버렸다.[42] 결국 분노한 태종이 칭심을 처형시키자, 이승건은 그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곡을 하며 슬퍼했을 뿐 아니라, 동궁의 궁녀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참배하게 하고, 자신은 병을 칭하며 아버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태종과 이승건의 관계는 극히 악화되었고, 결국 이승건은 모반까지 꾀하게 된다.[43] 훗날의 또 다른 태종 이방원도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에는 개의치 않았지만 자식들끼리 그러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신경을 많이 써서 양녕대군세종은 피를 보지 않고 끝났다.[44] 하지만 정작 측천무후 때문에 당나라가 혼란에 빠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측천무후의 치세인 무주의 치는 후에 손자인 현종개원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여는 데 발판으로 작용했다. 개원의 치는 수문제가 일궈놓았던 태평성대인 개황성세를 따라잡은 시기이기도 했다.(역으로 그만큼 수양제가 말아먹은 거였다.) 뭐 고문과 밀고가 판치는 공포정치 시대라 국가의 혼란과 다른 의미로 비판받을 만했다.[45] 그리고 사실 후계문제가 실패했다기보다는 자식 농사가 실패한 것으로 어쨌거나 후계자인 당고종은 비교적 무난한 치세를 보냈다. 대외정책은 태종보다도 나았고 또, 측천무후의 치세도 길게 보면 당고종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만약 이치가 아니라 이승건이나 이태를 후계자로 삼았다면 정말로 후계문제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46] 장손무기는 당고종의 외삼촌이다.[47] 당시 장손무기가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일려고 했다는 야사들이 존재한다.[48] 마오쩌둥일생을 영명하게 살았는데 욕심 많은 처남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면서 당태종의 대실책으로 이것을 뽑았다.[49] 사실 이음은 형 이각과 다르게 매우 탐학스러웠기에 만인이 싫어했고, 당태종도 그를 버리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이각이 황제가 되지 못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이각의 친동생이 이음이라는 것이었을까.[50] 당대에는 오왕 이각을 쫓아낸 업보를 받았다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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