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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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9월 17일 태조에 의해 책록
정사일등공신 (1등)
김사형
이거이
이무
이방간
이방원
이방의
이애
이화
조박
조영무
조준
하륜

정사이등공신 (2등)
김로
민무구
민무질
박포
신극례
심종
이복근
이숙번
이양우
이지란
이천우
장담
장사길
장사정
장철
정탁
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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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번
李叔蕃

출생
1373년(공민왕 22년)
사망
1440년(세종 22년)
봉호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1416년(태종 16) 삭탈
본관
안성 이씨

운정(芸亭)불명

백응(伯應)불명
부모
부친 - 이경(李坰)
모친 - 영양 남씨 남휘주(南輝珠)의 딸
부인
서원부부인 청주 정씨
(西原府夫人 淸州 鄭氏)[1]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관료.

태종 이방원의 측근으로 이방원을 왕위에 올린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1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고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했다는 점, 또한 정치적 변란이 많았던 여말선초 사극에서 갑주를 입고 무인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숙번을 무관#武官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문과 급제자로 엄연히 문관이다. 태종도 왕자의 난을 일으킨 점 때문에 무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문과 과거에 급제한 문인이었다.


2. 생애[편집]


1373년 아버지 이경(李坰)과 어머니 영양 남씨 남휘주(南輝珠)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이중번(李仲蕃)이 있었다. 이경과 결혼하기 전 윤공의 아내였던 남씨는 윤공이 죽은 후 두 아들 윤자량과 윤자당을 데리고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는데 윤자량과 윤자당은 이숙번의 이부형이다.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 따르면 이런 전설이 있다. 이숙번이 태어나기 전 이숙번의 이부형 윤자당이 7살 때 어머니 남씨를 따라 무당집에 가서 운명을 물어보았더니 무당은 윤자당이 귀한 상인데 반드시 동생의 힘 때문에 귀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남씨가 과부의 아들이 어찌 동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무당은 남씨가 재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정말로 남씨는 이경에게 재가하여 이숙번을 낳았다. 이숙번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1393년(태조 2) 생원(生員)으로 조선 최초의 식년시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했으며#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맨 처음에 이방원을 만났을 때 자신을 돕겠냐는 이방원에게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라면서 패기있는 대답을 하여 이방원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이후 지안산군사[2]를 지내는 중에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방원을 도와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시켰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의 성격을 띠며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숙번을 승정원에 배치한 것은 정종을 감시하려는 태종의 계산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에도 이방원의 충실한 수족으로서 2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여 좌명공신이 되었다. 조사의의 난에서도 진압군을 지휘해 반란군 잔당을 격파했다.

태종이 왕이 된 이후 이숙번은 태종과 각별한 사이로서 거의 안하무인의 권세를 누렸고 그 사례들이 실록에 남아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풍수가 최양선의 상소로 한양도성의 기존 동-서 통행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서문을 새로 만들게 되었는데, 새 문 후보지가 이숙번 집 앞 길을 지나가게 되자 이숙번이 압력을 행사하여 새 문의 위치를 상왕 정종의 궁궐인 인덕궁 앞으로 옮겨버렸다. 이 문은 서전문(西箭門)이라고 한다.《태종실록》 권25 13년 6월 19일 병인 2번째 기사, 《세종실록》 권40 10년 윤4월 24일 을사 3번째 기사 아무리 정종이 바지사장이라지만 이성계의 사실상의 장남이자 상왕이자 현 국왕의 형이었다. 하지만 내 집 앞이 조용할 수 있다면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다는 자세를 유지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집 앞에 문 놓기 싫다고 상왕 집 문 앞으로 바꿀 정도로 힘이 셌다는 것이다. 결국 이숙번 추방 이후 1422년(세종 4) 진행된 새 도성 공사에서 서전문은 없어지고 이숙번의 옛 집 길 앞으로 새 돈의문이 세워졌다.

야사에서는 아예 이숙번의 집이 처음부터 돈의문 안에 있었는데 한양의 큰 성문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오가고 우마 소리가 들리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이숙번은 시끄럽다고 하며 서대문을 틀어막아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성문을 막아버렸다고 하여 "색문가"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성에 조정에서 새로 성문을 만들어서 불편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계획을 짰는지 하필이면 그 문으로 가는 길도 이숙번의 집 앞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숙번은 친절하게도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가 길을 내고 문을 세우기에 적합하다"라고 하자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기록을 따라가면 도성의 기존 동-서 통행로가 바뀌면서 기존의 서문 대신 정종의 궁 앞 길 경로를 따라 새 문이 세워졌다가 다시 세종 때 기존 후보지였던 이숙번 집 앞 경로로 이전된 것이므로 태조 때의 옛 돈의문, 태종 때의 서전문, 세종 때의 새 돈의문은 모두 위치가 달랐다. 그런데 태조 때와 세종 때 서문의 이름이 똑같고 새 돈의문이 이숙번의 옛 집 앞 길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마치 원래부터 돈의문이 이숙번의 집 앞에 있었던 것처럼 되어 기존의 문을 막아버린 장본인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러나 앞뒤 정황이 약간 다를 뿐 이숙번이 상왕 정종을 대놓고 무시하는 데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한 것은 실록과 일치한다.

좌찬성으로 있을 때 태종이 형이자 상왕인 정종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배웅하러 갔는데 이숙번이 하륜과 함께 의정부 관리들과 풍악을 울리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하자, 사간들은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이숙번과 하륜에게 벌을 주라 간청했고 태종은 이를 만류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이숙번은 하륜과 함께 자신들을 탄핵한 사간들을 벌주라고 임금께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숙번의 이 행동은 임금의 잘못을 직언하는 것은 올바르고 자신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것에 대해 벌하라는 어이없는 이중잣대나 다름없어서 정승이었던 성석린남재는 동참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숙번은 그 날 밤 성석린의 집과 남재의 집에 방문하여 상소에 이름을 쓸 것을 반협박조로 재촉하였다. 오늘날로 보면 부총리급이 총리급을 호령할 정도의 권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한두 가지가 아닌 이숙번의 행패는 태종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공신이어서 그런지 태종은 그때마다 이숙번을 비호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숙번을 매번 감싸준 건 아직 두고 보자는 것이었지, 태종도 자신의 형이자 상왕인 정종에게 오만불손한 이숙번을 좋게 봤을 리 없다. 훗날 이숙번을 숙청하고 난 후 세종에게 절대 이숙번을 복귀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면 왕권 강화에 열을 올린 태종으로서는 이숙번에 대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아래에서 보았듯 근본적으로는 이숙번이 미래권력을 쥐지 못하기 위함이겠지만 말이다.

한 번은 맹인 사대부 가의 과부와 간통한 일이 있었다. 온 조정의 여론은 중과 과부 모두 참수하자는 쪽으로 몰렸지만, 이숙번은 법에 따르면 곤장을 쳐야 한다며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실록》 권31 16년 2월 25일 무자 2번째 기사. 의외로 이땐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사안이 워낙 충격적이다보니 여론에 밀려 결국 둘 다 참수형에 처해진다. 이에 불만이 쌓인 이숙번은 궁궐에 나오지 않고 태종의 부름조차 무시하여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후 세자 이제를 찾아가서 "여론에 밀려서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으니 이런 미친 짓이 어디있겠냐"며 국정을 비판하다 태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고 이게 태종의 귀에 들어갔다. 《태종실록》 권33 17년 3월 30일 병진 4번째 기사. 한때 자기 밑에 있었던 박은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은근히 불만을 표시했고 이것 역시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태종실록》 권31 16년 6월 4일 갑자 5번째 기사. 이 사건을 보면 많은 행패와 패악질을 부린 이숙번이 의외로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겨 2명의 처형에 반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고작 간통 가지고 사람을 처형하기까지 하는 조선의 법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숙번이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정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숙번은 중과 간통한 과부를 보고 아들 2명 딸린 몸으로 아버지와 재혼해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사정이 어찌됐든 태종과 조정의 눈밖에 난 이숙번의 정치 인생도 점점 저물고 만다. 1416년은 가뭄을 비롯한 재해 때문에 분주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이숙번은 병을 핑계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이 그 동안 쌓여온 불충, 불경죄를 끄집어내서 이숙번을 연안부의 농장으로 보내고 공신 녹권과 직첩을 회수했다. 이 때 정승대간#臺諫이 한 몸이 되어 이숙번을 탄핵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태종은 이숙번은 천성이 거칠어 가끔 무례한 짓을 할 뿐이지 나쁜 놈은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뒤 1417년 세자 이제가 사고를 치고 근신하던 중에 선공감의 비리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구종수 형제가 후일을 도모하려고 세자궁의 담을 넘어서 들어가면서까지 세자에게 주색을 제공했고 비단을 뇌물로 바치기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세자가 사고를 쳐서 골치가 아프던 태종에게 이 사건은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고, 구종수 형제는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태종이 이렇게 격노했던 이유는 세자에게 뇌물을 주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발상 자체였다. 구종수 형제는 유배를 가서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세자께 말과 활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이숙번에게 보냈다가 그대로 이숙번의 발목을 잡아버린다. 매번 이숙번을 감싸줬던 태종도 이번에는 이숙번을 지방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간은 과거 민씨 형제들과 이거이 부자의 전례를 생각했는지 이숙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이숙번을 함양으로 유배 보낸 뒤 죽을 때까지 찾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태종이 자신의 최측근인 이숙번을 유배 보낸 것은 최측근까지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시 말썽이 많았지만 세자와 엮이지 않았고 나이도 많았던 하륜과는 달리, 이숙번은 40대의 창창한 나이였고 태종이 죽은 이후 세자를 가지고 놀 소지가 있었기에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였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승하했다고 하는데 세종 역시 이 말을 따라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주지 않았다.

1438년(세종 20) 헌릉 비문 중에서 왕자의 난을 언급한 내용이 문제가 되자 이숙번이 태종의 최측근이라 태종의 예전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세종은 자료 수집 차 잠시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서 이숙번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다. 왕자의 난 당시의 기록이 부정확하고 세종 자신이 아는 일도 많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 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 모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 이방원 본인이나 하륜, 이거이와 이저 부자, 조영무, 민무구민무질 형제 등 다른 핵심 인물들은 모두 죽은 뒤였기 때문에 이 때 살아있던 사람 중 그 때 상황을 직접 겪은 사람은 이숙번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경연청으로 출근해서 당시 일을 구술하는 것이었는데, 이숙번은 그 때도 전혀 예전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굴었다고 한다. 이숙번은 은근히 세종이 자신을 다시 등용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지만 딱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튼 청취 조사가 끝난 뒤 세종은 이숙번의 함양 유배 조치를 풀어 이숙번을 한양 근처인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해줬으나, 끝내 그를 정계로 복귀시켜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숙번이 죽기 전까지 함양 유배지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던만큼 유배지로 안 돌려보낸 게 이숙번 입장에선 감사할 따름. 이후 이숙번은 2년 후인 1440년(세종 22) 67세의 나이에 병사했다.[3] 세종도 상소가 하도 올라오자 첨엔 '아픈 사람 또 유배 보내면 안된다'고 상소를 물리치다 결국에는 '병이 나으면 돌려보내겠다'라고 무마했으나, 이숙번이 끝내 병을 못 이기고 사망했기에 돌려보내는 일은 없었다.


3. 평가[편집]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문과에 급제하고 군사에도 밝은 문무 겸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최측근으로서 언행을 절제하지 못하고 설치다 결국 상기한 몇몇 사건이 얽혀 남은 생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만다. 정종에게 무례했을 당시만 해도 이숙번이 눈밖엔 났지만 정종의 권위를 굳이 드높일 것도 아닌 태종이었기에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세자 양녕은 태종의 역린이었다. 그런데 이숙번이 양녕 곁에서 자기를 간접 디스했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태종 입장에선 아직 한창 나이인 이숙번이 후에 경험이 부족한 새 임금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신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덕분에 부패했지만 나이도 많고 왕실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하륜과 달리 이숙번은 유배를 가고 만다.

훗날 세종은 이숙번이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어도 '반역'이나 '불충'을 꾀한 적은 없으니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부친인 태종이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위에 언급된 것처럼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사실 세종의 치세에선 이숙번 같은 안하무인 타입의 신하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법. 다음은 세종이 이숙번을 평가한 말이다.

"숙번이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례하여 선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지, 불충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 황희 등을 용서하실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숙번의 공이 매우 크다. 내가 다시 등용하고자 하나, 그러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겠다' 하시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功)과 죄가 서로 비긴다.', '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준다.' 하였다. 한(漢)나라 양혼(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하여서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자 죽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써 이것을 본다면 양혼의 죽음이 진실로 옳은 것이나, 선유(先儒)들은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하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2월 7일

그런데 세종은 하륜에 대해서는 이숙번에 비해 평가를 매우 짜게 주었다. 하륜의 말년을 보면 늙어서 판단력이 떨어졌는지 말실수를 여러 번 해서 태종에게서 경고를 여러 번 받았고 탐욕이 매우 컸는데, 세종은 전성기의 하륜은 본 적 없고 이런 삽질+탐욕꾼 모습의 하륜 밖에 모르기에 세종이 느끼는 인상에서는 평가가 박해진 걸지도 모른다.


4. 기타[편집]


  • 이숙번의 아내는 서원부부인 청주 정씨이다. 한편 이숙번의 자식들과 자손들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그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 흑역사가 있다. 이숙번에게는 소비(小非)라는 이름의 여노비가 있었는데, 이숙번이 당시 15세 되는 소비와 간통하려 하자 소비가 이를 거부하다 이숙번의 이마를 칼로 찌른 일이 있었다. 같이 보고된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황희, 맹사성, 허조, 노한, 안순, 신상, 최사강, 조계생, 김익정, 권도, 김맹성, 정연, 박신생, 황보인 등의 관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만장일치로 소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간통이라고 된 이유는 소비가 노비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소비의 죄를 다른 관료들이 용서할 수 있다고 한 이유도 비록 노비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가 정절을 지키기위해 상전인 이숙번에게 저항하다가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 결국 소비는 무죄로 방면되고, 이숙번에게 부부가 해코지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다른 관료의 사노비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 묘는 옛 안산군의 영역인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있다. 버스로 간다면 32번, 5602번, 11-3번을 타고 물왕교 정류장에 내려서 산현2동 경로당 방면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곳에서 2km 남쪽에는 성종의 서녀인 정숙옹주의 묘가 있다.


5. 대중매체[편집]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1부 추동궁마마에서는 배우 김희라가 연기했다. 거침없고 괄괄한 성격으로 나왔는데 태종(이정길 분) 등극 이후 그간의 공으로 태종에게 "살인만 아니면 를 묻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정말 사람을 죽이지만 않을 뿐 이외의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다가 양위를 앞둔 태종에게 유배를 명받았다. 이 때도 열받쳐서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렸다. 후속작 《조선왕조 오백년》 - 2부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김희라가 연기했으며 저 작품에서는 2번 정도 단역으로 나왔다. 제1회에서 태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이제 누가 귀양을 풀어주냐"며 흥분하고 마지막회(제28회)에서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 자료 수집을 위해 잠시 상경했는데 이 때도 신하들 앞에서 마치 자기가 윗사람인 것마냥 예의없이 굴었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김주영[4]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공신 버프+왕의 신임을 받아 안하무인의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충녕대군(김상경 분) 문제로 고민하는 태종(김영철 분)을 찾아가 대놓고 "어사주나 1잔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신하라는 놈이 말법 한 번 공손하다?"하면서도 다음 컷에서는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태종의 반응을 보면 영락없는 형님/아우 사이이다. 술상에서도 "강상인(정흥채 분)을 호위로 보내는 대신 충녕대군을 원지로 보내라"고 직언한다. 《용의 눈물》에서 지략가적인 이미지도 두드러졌던 것에 비하면 다혈질적인 면모만 부각되었다. 이후 세자양녕대군(박상민 분)과 너무 가깝게 지낸 나머지 세자의 소원인 요동정벌을 위해 병력까지 제공하다가 제대로 열받은 황희(김갑수 분)에게 멱살을 잡혀 "군사 수 천을 네 마음대로 움직여? 그게 병판이란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라는 폭언을 듣고 이후 태종에게 숙청당한다. 이 때 태종과 마지막으로 술자리를 한 후 쫒겨나는 장면이 나름대로 명장면이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해석하기를 탐욕스럽기는 이숙번에 밀리지 않았던 하륜은 끝까지 남고 이숙번만 쫓겨난 이유는 "하륜이야 이미 늙어서 다음 이 즉위할 때쯤이면 이미 죽어있을테니 걱정없는데 이숙번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세자를 갖고 놀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앞서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의 을 빌려 이미 등장했던 해석이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조순창이 연기했다. 문서 참고. 배우 인터뷰에 의하면 작중 이지란으로 등장하는 선동혁에게 이숙번 연기에 대해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 보답인지 배우개그가 나왔는데 이지란과 이숙번이 만나는 장면에서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을 연기했던 선동혁이 "숙번, 숙번이? 많이 듣던 이름인데?"라고 한다. 배우 조순창은 같은 시대를 다룬 2021년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방간을 연기했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차용학이 연기했다. 주인공 육룡에 맞춰져서인지 조연급으로 역할이 작은데 무인정사 장면을 제외하면 적게 나온다. 하륜을 수행하는 심복으로 등장했으며, 원래는 유생이었지만 하륜의 꼬임에 넘어가 칼을 잡게 되는데, 검술은 초보라서 그런지 실력은 상당히 형편없게 나온다. 대신 조선 건국 이후 하륜이 이방원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함께 이방원을 주군으로 모시게 되고, 무인정사 때 안산의 병력을 미리 준비하여 거사에 일조한다. 마지막에 나온 장면은 태종(유아인 분)이 민씨 형제들을 죽이고 원경왕후가 태종의 집무실로 들어올 때 잠깐 비춘다. 원경왕후(공승연 분)가 신하들을 다 나가라고 해서 하륜(조희봉 분)과 같이 나가고 이후에는 안 나온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정태우가 연기했다. 왕, 왕자, 문신 역할을 주로 맡아온 동안 배우가 선굵은 배우들이 맡아 무장에 가깝게 묘사해온 권신 캐릭터를 연기하여서 신선한 캐스팅이라는 반응이 많다. 실록에 기록된대로 거만하고 안하무인의 이숙번을 잘 그려냈으며 그가 태종 집권 후 막 나가다가 태종에게 숙청 당하는 결말까지도 잘 묘사해냈다. 여담으로 정태우는 <용의 눈물>에서 무안대군 이방번으로 나왔는데 이숙번은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번을 죽이게 도와준 인물이다. 그런데 정태우가 이숙번을 연기함으로서 이방번을 죽이게 도와주는 재미있는 배우개그가 탄생하게 된다. 한 가지 더 재밌는 배우개그는 태종 이방원에서 정태우가 맡은 이숙번이 심효생을 직접 암살하는데 이 심효생을 맡은 배우 이경영용의 눈물에서 이방번과 세트로 죽임을 당한 이제 역할을 담당했었다. 결국 이숙번이 되어 자신과 함께 죽은 매형을 죽인 셈. 이 드라마에서는 그 외에도 이숙번을 연기한 배우가 2명이나 더 등장한다. <용의 눈물>의 선동혁(태종 이방원에서는 이지란), <정도전>의 조순창(여기서는 이방간). 이숙번(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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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총(鄭摠)의 딸.[2] 안산군의 지사[3] 67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나이다.[4]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간 역. 2차 왕자의 난에서 이숙번이 자기 군사들을 상대로 무쌍을 펼치자 놀랐던 모습이 나온 걸 생각하면 실로 재밌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