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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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열 개
으뜸 원
갈 지
다스릴 치
1. 개요
2. 상세
3. 쓰임새


1. 개요[편집]


당현종 재위 시기 태평성대를 일컫는 성어. 연호가 개원(開元)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직역하면 개원의 치세. 개원성세(開元盛世)라고도 한다.


2. 상세[편집]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은 즉위 후 연이은 정변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빠르게 수습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해 측천무후 시기부터 전횡되어 왔던 폐단을 시정하며 태평성대를 열게 된다. 정작 당현종의 관료들은 측천무후 때 다 등용되었다는게 함정[1]

이 시기 당나라는 내적으로는 인구가 증가하고(5000만명 이상) 생산량이 늘어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으며, 외적으로는 절도사 직책 신설과 모병제 등으로 인해 군사력 강화와 이민족 지배력 강화라는 성과를 냈다. 이는 돌궐 같은 북서방 외세들의 권력 암투 등으로 인해 그들의 힘이 약해진 운도 한몫했다.

시기상으로는 개원이라는 연호를 썼던 713년~741년. 하지만 742년 당현종은 연호를 천보로 바꾸며 망했어요 기존의 청렴한 이미지와 매치되지 않는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하는데, 다만 개원지치 시기인 73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그 기미가 보이긴 했다.

하여튼 천보난치 시기 당현종은 그 유명한 양귀비에게 빠져 향락에 빠졌고, 재상 이임보는 전횡을 일삼았으며, 절도사는 너무 막강해져 폐단을 일으키고, 군대는 이슬람 세력과의 지속적 충돌로 약해지다 못해 나중에는 당나라 군대 그 자체가 되고 이후 몇차례 중흥기가 오지만 안사의 난 이전과 비교하기에는 매우 딴판으로 변해버린다. 근본적으론 현종의 직무태만이었으며 동시에 군사제도의 운영과 배치, 안록산양국충의 권력다툼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3. 쓰임새[편집]


태평성대의 대명사 중 하나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다만 다른 태평성대 시절과 달리 바로 뒤의 충격적인 몰락 때문인지 시망 테크트리 바로 직전(...)의 태평성대를 말할 때 개원지치가 많이 쓰인다.

다만 그럼에도 중국사에서 특히 당의 태평성대를 논할 땐 정관지치와 함께 꼭 언급되는 시기이긴 하다. 사실 현대의 평가로 치자면 개황성세문경지치 쪽이 더 나은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으나, 전자는 북방민족 냄새가 강하고, 후자는 도가적인 무위지치를 지향한 시대라,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완전히 굳어진 다음에는 이야기가 잘 안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근데 정작 당나라도 노자 숭상한건 함정 그 외 청의 강건성세도 있다. /임금의 치세나 주나라 지치 등도 언급이 되나 기록이 별로 없어 거의 전설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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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기존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능력인 만큼 현종이 그만큼 뛰어난 군주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