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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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延陀
Syr-Tardush
Tardus

1. 개요
2. 역사
3. 역대 가한


1. 개요[편집]


튀르크 계열 부족인 철륵의 한 갈래로 당나라때 알타이 산맥을 장악한 (薛)과 연타(延陀)의 합병으로 이루어진 종족이었다. 현대 표준중국어 병음으로는 Xueyantuo(쉐옌퉈).


2. 역사[편집]


철륵 중에서는 세력이 가장 강성했고, 서돌궐에서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는 등의 가혹한 통치를 일삼자 철륵의 다른 부족들과 함께 독립했다가 서돌궐에서 새로운 가한이 나타나 세력을 떨치게 되자 글필부와 함께 다시 서돌궐에 복속했는데, 서돌궐이 다시 약화된 틈을 타서 동돌궐에게 복속했다.

627년 초원에 자연재해가 닥쳐 많은 가축이 폐사하고, 기근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동돌궐의 초원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기근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부족에 대한 동돌궐 중앙의 과다한 세금 징수에 불만이 폭발한 피지배부족들이 세력이 가장 강한 설연타를 중심으로 뭉쳐 반란을 일으켰다.

힐리가한은 조카 돌리에게 명령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돌리의 10만 대군은 설연타의 이남 추장에게 대패하여 설연타와 설연타를 따르는 피지배부족의 독립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분노한 동돌권의 군주 힐리가한이 돌리를 학대했고, 이 때문에 돌리가 삼촌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증오는 힐리가한과 돌리 간의 내전으로 번졌다.

이러한 동돌궐의 혼란으로 인한 빈틈을 당 태종 이세민은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당 태종은 이러한 상황을 더더욱 부추기며 초원의 유목부족끼리 피를 흘리도록 유도해 그들을 약화시켰다.[1]

629년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은 당 태종이 이정을 총사령관으로 한 10만 대군을 동돌궐로 파병했다. 또한, 태종은 설연타의 진주가한과 동맹을 맺었다.

630년 당군에 의해 동돌궐이 멸망하고, 당나라가 추가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설연타의 세력을 외교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설연타가 일시적으로 몽골 고원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645년 설연타가 초원에서 강성한 세력을 일궜기에 제1차 고구려-당 전쟁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사신을 보내 설연타를 움직이려고 공작을 벌였으며, 이 때문에 당나라가 안시성 전투의 패배로 인한 전선의 고착화 및 보급 부족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에게 회유된 설연타의 빈집털이로 인해 당군은 패전하고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된다.

645년, 안시성 전투가 진행되던 중 설연타의 진주비가가한이 죽은 후부터는 진주비가가한의 적장자였던 진주가한의 아들 발작과 이복형 예망 간에 가한의 자리를 놓고 내전이 일어나는 듯 했으나 진주가한의 장례식[2]에서 발작이 예망을 급습하여 죽임에 따라 내전없이 발작이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이라는 이름으로 가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초원의 유목제국들도 중원제국의 분열책(이이제이)을 알고 있었고 이에 신물이 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발작은 분열과 내전없이 설연타를 통합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646년, 안시성 전투의 패전 후 본국으로 돌아간 당 태종은 태원[3][4]에 머물며 설연타 토벌을 지휘했고, 당군의 공격을 받은 설연타는 멸망했다.

설연타가 멸망하자 설연타 동쪽에 있던 거란도 고구려를 버리고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설연타와 거란이라는 우군을 동시에 잃은 고구려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는 668년 고구려의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경주 설씨와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3. 역대 가한[편집]




대수
왕호

재위 기간
1대
야질가한
을실발
미상
2대
진주비가가한
을실이남 혹은 설이남
? ~ 645년
3대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
설발작
645년 ~ 646년
4대
이특물실가한
설돌마지
6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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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태종은 설연타의 이남 추장에게 '가한'의 칭호을 하사(진주가한)하여 동돌궐과 설연타를 대등한 관계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설연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막대한 원조를 했다.[2] 장례식은 적장자인 발작이 자신의 영역에서 주관했다.[3] 태원시는 북으로 몽골 고원, 남으로는 장안-낙양으로 이어지는 군사적 요충지이다.[4] 수나라 시대에 당 고조 이연이 이 지역에서 태원유수를 지냈으며 이연의 차남 이세민은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당나라를 건국했다. 즉, 태원시는 당황실의 본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