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셀리누 쿠비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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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21대 대통령
주셀리누 쿠비체크[1] 지올리베이라
Juscelino Kubitschek de Oliveira


파일:presidente JK.jpg

출생
1902년 9월 12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미나스제라이스지아만치나
사망
1976년 8월 22일 (향년 73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헤젠지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21대 대통령
1956년 1월 31일 ~ 1961년 1월 31일
경력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1951~1955),
브라질 제21대 대통령 ,(1956~1961),
고이아스 연방 상원의원,(1961-1964),
서명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이전
2.2. 대통령 임기
2.2.1. 메타스 계획
2.3. 대통령 이후
3.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 제21대 대통령이다. 이니셜인 JK로도 많이 쓰인다.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브라질 경제 개발을 위한 외국 자본 도입, 도로 교통과 석유 산업,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위한 인센티브 제공,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친미 정책 등을 펼쳤다. 12대 대통령인 아르투르 베르나르지스 이후 처음으로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친 민간인 대통령이기도 했다.[2]


2. 생애[편집]



2.1. 대통령 당선 이전[편집]


미나스제라이스지아만치나의 가난한 체코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미나스제라이스 연방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30년 프랑스 파리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3] 1931년 미나스제라이스주 헌병대에 군의관으로 입대했고 1932년 7월 헌법주의자 혁명이 발발하자 정부군으로 참전하며 바르가스의 신임을 얻었다. 1940년까지 복무했으며 중령으로 전역했다. 1934년 쿠비체크는 미나스제라이스주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고 1940년엔 벨루오리존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4] 1945년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1950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임기[편집]


1955년 10월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통령은 노동당의 주앙 굴라르였다. 그는 '50년을 5년 안에[5]'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발전과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노선을 국가주의에서 개발주의로 변화시켰다.[6]

취임한지 2주만에 아비우 벨로주 공군 소령이 파라주 자카레아캉가에 위치한 군부대에서 일명 자카레아캉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3주도 안되어 진압되었다.

쿠비체크 정부는 민주적 통치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며 브라질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는 전쟁 장관인 엔히키 로트 장군의 지지를 바탕으로 반정부 성향의 정당을 폐쇄하면서 강한 정치적 세력을 확보했기에 가능했다.

쿠비체크 정부 시기 브라질은 경제 성장과 가전제품의 대중화를 통한 삶의 질 향상, 보사노바브라질 영화의 유행, 신문, 잡지, 라디오를 바탕으로 한 문화생활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등 호시절을 구가하게 된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 시기 메타스 계획의 여파로 브라질의 소득성장률이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은 상승한 악재도 있었다.


2.2.1. 메타스 계획[편집]


메타스 계획은 크게 6개 분야(운송, 식품∙영양, 기간산업, 교육, 브라질리아 건설), 31개 목표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중엽, 쿠비체크 정부의 주도 하에 내구성 소비재(자동차, 가전제품 등)를 중심으로 수입대체산업화가 진행된다. 이때의 경제 정책을 ‘메타스 계획’이라고 한다. 본래 제2차 바르가스 정부에서 정부 주도의 수입대체산업화를 시행하려 했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시행하지 못했다. 바르가스에 반감을 가졌던 정치세력이 힘을 키워 예전처럼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가스의 자살 이후 여론이 뒤집혀 바르가스를 비판하던 세력이 영향력을 잃게 된다. 1년 반 후 집권한 쿠비체크 정부 때는 정치적 안정을 찾아 순조롭게 수입대체산업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정부는 세부부문별 위원회를 설치하고 국영기업 육성을 위해 저금리신용, 브라질 경제사회개발국립은행(BNDES)의 장기대출, 시장보호(환율, 관세), 외채정부보증을 제공했다. 또한 브라질 통화신용감독원(SUMOC)을 통해 외국자본에 특혜를 제공하면서 다국적 기업과 외국 자본의 브라질 진출을 이끌었다.

그 결과로 상당한 산업화 진전을 통해 생산기반에서 구조적 변화 발생 및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특히 중점적으로 시행한 분야에 한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내구성 소비재산업의 성장률이 비내구성 소비재를 크게 넘어섰다. 다만 농업부문 및 사회문제가 도외시되어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긴 했다. 게다가 재원조달을 위해 외자 유치와 국내 화폐발행을 실시하여 시장에 화폐가 많아져 수요가 늘어났지만 공급이 따라가지를 못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7] 또한 브라질의 대외 부채는 1955년 8700만 달러에서 1959년 2억 9700만 달러로 증가했다. 덕분에 쿠비체크 정부 시절에는 증가하는 인플레이션을 감당하지 못한 재무장관이 세 차례나 사임하였으며, 이후 대통령직에 당선된 자니우 쿠아드루스는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짧은 임기 내내 긴축정책에만 매달려야 했다.


2.2.2. 브라질리아 천도[편집]


쿠비체크는 선거 공약으로 수도 이전을 명시했다. 1891년 헌법에 수도 이전이 명시되어는 있었지만 실행에 옮긴 것은 쿠비체크 정부때였다. 당시 수도인 리우데자네이루가 남동쪽 해안가에 치우쳐져 있어 국토의 균등한 개발을 위해 브라질 중서부 고원지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를 위해 1957년 2월부터 도시 설계자 루시우 코스타,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조경 디자이너 호베르투 마르크스 등과 약 3만명의 노동자가 투입되었다. 1960년 4월 21일, 공사는 마무리되었다.[8]

수도 이전을 통해 벨렝-브라질리아 고속도로[9]의 건설 등 남부와 북부가 도로로 연결되게 되었다. 또한 세하두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며 브라질의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유발하기도 했다.


2.3. 대통령 이후[편집]


1964년 브라질 쿠데타로 인해 쿠비체크는 10년간 정치적 권리 행사를 금지당한다. 이에 그는 자진해서 망명길에 올랐다가 1967년 귀국했다. 1968년 12월엔 제도법 제5호 위반으로 인해 9일 동안 체포되었다가 이후 한달 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1976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00년 4월, 전 주지사인 레오네우 브리졸라는 쿠비체크가 군부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2014년 3월 27일,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임명한 공식 조사단은 암살이 아닌 단순 사고라고 결론지었다.


3. 여담[편집]


1931년 사라 고메스 지 레무스와 결혼하여 슬하 2녀를 뒀다. 큰 딸인 마르시아는 하원의원과 연방직할구 부주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임기 중에 개최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당시 펠레를 앞세운 브라질이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리아 국제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 주셀리누 쿠비체크 국제 공항으로 명명되었다.

집시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조상이 체코에서 살던 집시였다. 그러나 브라질 자체가 메스티소물라토 인구가 많기 때문에 딱히 피부색으로 공격받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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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투갈어 발음으로 /kubiˈtʃɛk(i)/이기 때문에 쿠비체크와 쿠비체키 둘 다 맞는 표현이다.[2] 해당 기간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 중 와싱톤 루이스는 쿠데타로 실각,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사임과 자살, 에우리쿠 가스파 두트라는 군인이었다.[3] 브라질 대통령 중 유일하게 의사 출신이다. 주 전공은 비뇨기과.[4] 인프라에 대한 적극적이고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허리케인 시장이라는 별명이 생겼다.[5] 원어로 Cinquenta anos em cinco 라고 한다.[6] 바르가스 정부때는 국가주의를 강조하며 외국 자본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쿠비체크 정부는 바르가스 정부의 정책 노선을 계승했지만 개방을 실시해 외국 자본을 받아들였다. 수입대체산업화를 위해선 더 많은 자본과 기술이 요구됐기 때문이다.[7] 인플레이션율이 1956년 19.2%에서 1960년 30.9%로 증가했다.[8] 당시 인구는 141,742명이었다.[9] BR-010 고속도로이다.
파일:BR-01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