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오도루 다 폰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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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초대 대통령
마누에우 데오도루 다폰세카[1]
Manuel Deodoro da Fonseca


파일:Deodoro_da_Fonseca_(1889).jpg

출생
1827년 8월 5일
브라질 제국 알라고아스주 알라고아스다라고아두술
사망
1892년 8월 23일 (향년 65세)
브라질 제1공화국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889년 11월 15일 ~ 1891년 11월 23일
서명
파일:데오도루 다 폰세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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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프라이아베르메냐 군사학교
종교
가톨릭
소속 정당

군사 경력
복무
브라질 제국 육군
1843년 ~ 1889년
브라질 제1공화국 육군
1889년 ~ 1892년
최종 계급
대원수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정치 생활
2.3. 사망
3.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의 초대 대통령.


2. 생애[편집]



2.1. 생애 초기[편집]


1827년 8월 5일, 브라질 북동쪽 알라고아스다라고아두술에서 멘디스 다 폰세카와 로사 데 폰세카의 3남으로 태어났다. 1848년 페르남부쿠에서 일어난 프라에이라 반란을 진압했고, 3국 동맹 전쟁에 참전해 186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884년 육군 원수로 진급했고 이후 해군 원수까지 겸했다.


2.2. 정치 생활[편집]


1886년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를 역임할 당시, 상파울루의 커피 사회[2]에서 베자민 콩스탄치와 후이 바르보사와 같은 공화당 지식인들의 구애를 받았다. 이들 편에 선 데 폰세카는 황제로부터 주요 공화당원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고 경고하며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군대 파벌의 지도자를 맡았다.

이때 브라질 제국 정부가 저명한 공화주의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다 폰세카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군의 지도자가 되었다.[3]

1889년 11월 15일에 페드루 2세를 폐위시켜 임시 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곧 민간 공화당 지지자들과 갈등이 생겨 선거로 다시 선출하기로 결정했고, 다시 다 폰세카가 선출되어 대통령직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91년에는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고 그해 2월에 초대 브라질 부통령으로 플로리아누 페이쇼투를 선임했다. 토레스항을 민간기업에 양도하고, 아프리카인을 제외한 이민을 더 많이 허용하는 대통령령 제528호를 말미암아 남부 지역의 공화당까지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다 폰세카는 1891년 11월 3일 의회를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의회는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해군 고위 장교들은 폰세카를 지지하는 등 내전 발발까지 정국이 치닫게 됐다. 결국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1891년 11월 23일, 부통령 플로리아누 페이쇼투에게 대통령직을 이임하고 물러났다.


2.3. 사망[편집]


1892년 8월 23일에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건강 악화로 인한 호흡 곤란으로 사망해 카주 묘지에 묻혔다. 1937년에는 유해가 발굴되어 프라사 파리스 기념비로 이장되었다.


3. 여담[편집]



파일:Brazil 25 Centavos.jpg
  • 현 브라질 25센타부 주화의 도안이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당시 상파울루주의 주 산업이던 커피 산업을 통해 성장하여 정계를 이끄는 엘리트 계급을 뜻한다.[3] 사실 페드루 2세는 1840년부터 노예제 폐지를 옹호했지만, 국가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으려면 노예제를 서서히 폐지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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