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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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27대 대통령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
Artur da Costa e Silva[1]


파일:Costa_e_Silva 고화질.jpg

출생
1899년 10월 3일
브라질 합중 공화국 히우그란지두술주 타콰리
사망
1969년 12월 17일 (향년 70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과나바라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27대 대통령
1967년 3월 15일 ~ 1969년 10월 14일
경력
광물에너지부 장관,(1964),[2]
전쟁 장관 ,(1964~1966),
브라질 제27대 대통령 ,(1967~1969),
복무
브라질 육군
1921년 ~ 1969년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
2.2. 대통령 임기
3. 브라질의 기적



1. 개요[편집]


브라질 제27대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2.1. 대통령 취임 전[편집]


코스타 이 시우바는 포르투 알레그리 군사대학에 입학하면서 군 경력을 시작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8년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위로 졸업했다. 1922년 테넨치의 반란에 가담한 죄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아르헨티나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제3군구를, 페르남부쿠의 제4군 사령부를 지휘하던 중인 1961년 11월엔 대장으로 진급했고 1962년 9월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1964년 군부 쿠데타로 굴라르 정권을 실각시키고 코스타 이 시우바는 1964년 4월 1일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움베르투 카스텔루 브랑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 직위에 머물렀다. 군부 내 강경파였던 그는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여겨졌고 온건파였던 에르네스투 가이제우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2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2. 대통령 임기[편집]


당시 브라질 대통령은 의회의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다. 코스타 이 시우바는 군부가 지지하는 국가개조동맹(ARENA)의 후보로 지명되었고, 대선에 출마한 유일한 후보였다. 1966년 10월 3일 295 찬성 0 반대 41기권 136 미참여로 제2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6년 7월 25일 헤시피의 과라라페스 국제공항에서 좌익 게릴라에 의한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8년 대학교 2학년생인 에드슨 루이스 지 리마 수토가 시위 중 사망하면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3,000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마르시우 모레이라 알베스 하원의원이 공개적으로 군부를 비난하자 대통령은 의회에 그를 기소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의회는 이를 거절했고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하고 제도법 제5조를 제정했다. 대통령은 연방 의회나 주 의회 폐쇄, 주지사 해임,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강력한 검열을 시행하고, 정치적 범죄에 대한 인신보호법을 폐지했으며, 연방 정부가 주 정부에 거의 무제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은 이 법령에 서명하자마자 연방 의회와 상파울루를 제외한 모든 주 의회를 폐쇄시켰고 입법부을 완전히 장악했다.

1968년 6월 26일엔 상파울루의 2군 사령부에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것으로 1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자 정부는 더 강하게 억압정책을 펼쳤다.

1969년 8월 31일 갑작스런 뇌혈전증으로 코스타 이 시우바는 정상적인 업무를 볼 수 없었다. 임시로 세 명의 군부 장관이 정국을 이끌었고 같은 해 10월 14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같은 해 12월 17일, 코스타 이 시우바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브라질의 기적[편집]


코스타 이 시우바 정권은 브라질 경제 호황과 겹친, 소위 '브라질의 기적'이라 불리는 시기였다. 정부는 당시 만연했던 20~30% 정도의 인플레이션이 있음을 용인하며 점진적인 인플레이션 조절 정책을 펼쳤다. 전 정부에선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수요에 있다고 보고 수요를 억제하자 유휴시설이 발생하며 경제를 악화시켰다. 따라서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은 이자를 낮추는 등의 수요완화정책을 통해 투자를 끌어올리며 비용 견인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런 정책이 맞아떨어지며 인플레율은 15-20% 대를 유지하며 경제성장률은 10%를 유지했다.

당시 성장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미국의 경제정책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달러 가치를 낮추며 교역을 활발히 했다. 미국의 통화공급을 통한 적자정책[3]이 국제유동성을 확대함으로서 교역을 확대시켰다. 하지만 브라질은 수출을 하기위해선 생산을 늘려야 했고 이를 위해 자본를 수입해야 했다. 이는 은행과 기업이 기업이 해외에서 직접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법령를 통과시켜 수출 증대를 추구했다. 또한 수출대금으로 외채를 상환하는 구조로 경제 순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 호황은 1974년 1차 오일쇼크의 발생 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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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ʁˈtuʁ dɐ ˈkɔstɐ i ˈsiwvɐ[2] 임기는 13일에 불과했다.[3]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통화를 발행하여 유동성을 확대시키는 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