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타시우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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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브라질 제11대 대통령
2. 생애[편집]
2.1. 대통령 이전[편집]
7살이었을 때 천연두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이후 페르남부쿠 주지사였던 외삼촌 엔히키 지 루세나의 밑에서 성장했다. 페르남부쿠 연방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저명한 법학자이자 교수였던 페소아는 1890년 제헌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898년 캄푸스 살리스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교통부 장관, 연방 대법관, 연방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까지 고위직을 역임하고 1912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페소아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브라질 대표단장을 맡았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에 있던 1919년 4월 대선[2] 에서 페소아는 71%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임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기 수요가 크게 늘자 브라질은 원자재를 수출하여 경제 상황을 개선시켰다. 하지만 종전 후 수출이 감소하여 다시 어려워졌고 노동자의 파업이 빈번히 일어났다. 항구에 커피 원두를 보관하기 위한 비용 900만 파운드를 차관했다.1922년 대선에서 아르투르 베르나르지스가 당선되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가 강하게 비판했다. 페소아는 폰세카를 감옥에 가두고 군사 클럽을 해체시켰다. 이에 반발하여 1922년 7월 5일, 코파카바나 요새의 반란이 발발했으나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8년간 지속된 테넨치의 반란의 시작이었다. 그의 임기말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페소아는 임기 동안 북동부 지역에 200개의 댐을 건설했고 가뭄 방지를 위한 공공사업을 착수했다. 브라질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었다.[3] 1920년 브라질 황실을 브라질에서 추방시기는 법을 폐지했다.[4] 국가 화폐 본위를 영국 파운드에서 미국 달러로 바꿨다.
2.3. 대통령 이후[편집]
1923년, 페소아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판사로 재직했다. 같은 기간, 파라이바주 연방 상원의원도 겸했다. 하지만 1930년 7월 외조카이자 정치인인 주앙 페소아가 암살당하자 충격을 받고 정계에서 은퇴했다.[5]
3. 여담[편집]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921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브라질의 흑인 축구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데우핑 모레이라가 페소아 정부의 부통령으로도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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