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싱톤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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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제13대 대통령
와싱톤 루이스 페레이라 지수자[1]
Washington Luís Pereira de Sousa


파일:Washington_Luís.jpg

출생
1869년 10월 26일
브라질 제국 리우데자네이루주 마카에
사망
1957년 8월 4일 (향년 87세)
브라질 합중국 상파울루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13대 대통령
1926년 11월 15일 ~ 1930년 10월 24일
경력
상파울루 시장 ,(1914~1919),
상파울루주 주지사 ,(1920~1924),
상파울루주 연방 상원의원 ,(1925-1926),
브라질 제13대 대통령 ,(1926~1930),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대통령 시절
3. 현대예술 주간



1. 개요[편집]


브라질 제13대 대통령.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포르투갈과 루마니아 혈통이다. 어린시절 상파울루로 이주하여 1891년 상파울루 대학교 법학과를 전공했다. 1892년 리우데자네이루 주의 바라만사 시에서 검사로 임명되었다. 1897년 연방공화당 소속으로 상파울루주 바타타이스 시의회 의장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타타이스 시장으로 재직했다. 1900년 농민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는 상파울루 공화당의 주 대표로 상파울루 제헌의회에 참가했다. 1906년부터 1912년까지 상파울루주 법무·공안부 장관을 역임했다.

2.2. 대통령 시절[편집]


1926년 11월 15일, 루이스는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임명되었다. 1920년대 내내, 브라질 제1공화국은 도시 중산층의 반대 시위, 초급장교[2]와 노동자들의 운동, 반체제 과두 정치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1927년 셀레라다법을 통해 언론 검열을 가하고 집회의 권리를 제한하였다.

1929년 10월 24일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브라질은 1차 상품을 수출하고 제조품을 수입하는 농업 중심 국가였다. 미국이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커피 수요가 줄어 브라질의 커피 수출량이 감소했다. 수출이 줄자 정부가 커피정책[3]을 시행하기 위해선 해외차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해외차관이 어려웠다.

브라질의 수입 제조품에 대한 수요는 그대로였으나 살 돈이 없었다. 국제수지 적자가 국내수요공급 불균형을 야기했다. 브라질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외화가 부족해지자 환율이 올라 수입품 가격이 올랐고 국내 소비가 위축되었다. 따라서 수입제조품의 대체재로 국내제조품의 수요가 오르지만 공급량은 그대로였고 기존 국내제품의 가격이 오르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는 루이스 정부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당시 브라질의 상파울루주미나스제라이스주는 정계에 미치는 그들의 우월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Cafe com Leite[4]라는 협의를 맺은 상태였다. 상파울루 공화당 출신의 루이스가 대통령을 했으니 차기 대통령은 미나스 제라이스 공화당 출신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1930년 그의 친구이자 같은 상파울루 출신인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그렇게 1930년 3월 1일 대통령 선거에서 프레스치스가 승리했다. 하지만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이 결과에 불복했고 마침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주앙 페소아[5]가 암살[6]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를 중심으로 1930년 10월 3일 쿠데타가 발발했다. 결국 워싱턴 루이스 대통령은 10월 24일 군 수뇌부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27일간 투옥되었다가 국외로 추방되었다.[7][8]

3. 현대예술 주간[편집]


1922년 2월 11일부터 18일 동안 상파울루의 시립 극장에서 열린 예술 행사이다. 당시 상파울루 주지사였던 와싱톤 루이스는 상파울루 공화당 의원이자 예술가였던 메노치 피시아와 플리니우 살가두의 후원으로 이 행사를 개최했다. 회화, 조각, 소설, 시,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약 400명의 예술가가 참여했으며 브라질의 모더니즘 예술의 시작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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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포르투갈어로 테넨치라고 한다.[3] 지나치게 많은 커피 생산량으로 인해 가격방어가 어렵자 정부가 커피를 사들이며 가격을 조절했다.[4] 우유 커피라는 뜻으로 커피가 주 산업인 상파울루와 목축업이 주 산업인 미나스제라이스를 빗댄 이름이다.[5] 11대 대통령인 에피타시우 페소아의 조카이기도 했다.[6] 추후 밝혀지기론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이었다[7] 바르가스가 실각한 이후인 1947년에 다시 귀국할 수 있었다.[8] 이 사건은 브라질 제1공화국의 종말을 뜻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