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콜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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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32대 대통령
페르난두 아폰수 콜로르 지멜루
Fernando Affonso Collor de Mello


파일:Fernando_collor.jpg

출생
1949년 8월 12일 (74세)
브라질 합중국 리우데자네이루 주 리우데자네이루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32대 대통령
1990년 3월 15일 ~ 1992년 12월 29일[1]
정당
경력
마세이오 시장 ,(1979~1983),
알라고아스주 연방 하원의원 ,(1983~1987),
알라고아스주 주지사 ,(1987~1989),
브라질 제32대 대통령 ,(1990~1992),
알라고아스주 연방 상원의원 ,(2007~2023),
종교
가톨릭[2]


알라고아스 주 상원의원 공식 사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정계 입문
2.4. 대통령 임기
2.5. 퇴임 이후
3. 소속 정당
4.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의 정치인으로 브라질의 제3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출신으로 독일계이다. 성씨인 Collor에서 그 흔적을 알 수 있는데 쾰러( Köhler ) 를 포르투갈어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외가가 독일계 이주민의 후손으로, 외조부가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부의 초대 노동부 장관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정치 활동으로 인해 알라고아스 주 마세이오에서 성장했다.

2.2. 정계 입문[편집]


1976년에 축구팀인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3]의 회장을 지냈고, 1979년 군사정권에 의해 브라질 북동부 알라고아스주의 주도이자 최대도시 마세이오의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는 국가개조동맹 소속이었다. 1983년 민주사회당 후보로 하원의원이 되었다. 1984년 브라질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이자 야권(브라질 민주운동당)의 단테 지 올리베이라 하원의원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지지하였다.

1986년 브라질 민주운동당에 입당하고 알라고아스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마하라자스(maharajas)라 불리는 고위급 공무원 엘리트 집단과의 싸움으로 유명해졌다. 이들은 출근을 하지도 않으면서 막대한 월급을 받았는데, 그들의 급여를 대거 삭감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고 빈민층의 지지도 얻게 되었다. 물론 공무원 임금 삭감이 얼마나 공공비용을 절약했는가는 예나 지금이나 논란이 되긴 했다.

조제 사르네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콜로르는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을 것 같자 브라질 민주운동당을 탈당하고 국가재건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쌓아올린 유명세로 1989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초반에는 그가 대통령직에 오를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는 콜로르의 정치경력이 별로 길지 않고, 민주화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군사정권 밑에서 정계생활을 시작했고, 브라질 민주운동당을 통해 지자체장이 되었음에도 임명되었음에도 당과 갈등을 빚다 탈당하였다.

그러나 콜로르에게는 운과 기회가 뒤따랐다. 당시 중도파와 보수파가 지지할만한 인물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브라질 민주운동당의 연방 하원의원이자 하원의장인 울리시스 기마랑이스[4]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브라질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이자 전직 상파울루 시장인 마리우 코바스는 확장성이 부족했다. 간선제 시절부터 여러번 출마했던 파울루 말루프는 극우파였고, 자유전선당 후보이자 전직 부통령 아우렐리아누 샤베스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전직 대통령이자 당시 상파울루 시장인 자니우 쿠아드루스는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군소정당의 후보였던 콜로르는 중도파와 보수파 모두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콜로르는 자신을 마하라자스 사냥꾼으로 칭하고, 기존의 정치인 및 경제 엘리트와는 다른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는 "셔츠도 없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브라질의 정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스스로를 기성체제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인 것처럼 연출했다. 특히 주지사 시절의 경력을 살려 부패척결을 전면으로 내세워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외국인 투자 증대,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지출삭감, 재정개혁을 통한 재정적자의 감축 등 보수적인 정책을 제안해 보수층의 지지까지 얻었다.

콜로르의 지지율 상승에는 언론재벌 주앙 호베르투 마리뉴의 전폭적인 지지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마리뉴는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방송사인 헤지 글로부의 소유주였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언론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당당하게 여겼고, 1987년 콜로르가 주지사였던 시절부터 그를 전국방송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콜로르는 매스 미디어에 잘 먹힐만하게 전략과 공약을 기막히게 잘짜냈고, 한때는 많은 선거전문가들이 콜로르가 과반을 넘겨 결선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될 것이라 예측했다.

다만 콜로르에게는 여러가지 비리 의혹도 있었다. 주지사 시절 비상지출예산의 5,000%(오타가 아니다!)를 지출해 정치적 협력자들에게 선물을 돌렸다거나, 주립은행을 파산시켜서 가족과 지지자의 부채를 갚아주었다는 의혹 등이다. 물론 글로부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이러한 의혹을 보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정당에서 이러한 부패 의혹과 군부독재와 콜로르와의 관계 등을 제기하면서 지지율이 어느정도 떨어졌다.


2.3. 1989년 대선[편집]


콜로르는 1차 투표에서 30%를 득표해 결선 투표에 진출한다. 이 때 결선 투표에서의 경쟁자는 자신과 같이 훗날 브라질 대통령이 되는 룰라였다. 브라질 노동자당 후보였던 룰라는 한 때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6%가 나올 정도로 부진했고,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의 레오넬 브리졸라가 2등이 되리라 예측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선거운동 덕분에 1차 투표에서 룰라가 17.2%를 얻어, 16.5%를 얻은 브리졸라를 아슬아슬하게 제치고 결선 투표에 진출하는 이변을 이룩한다.[5]

결선 투표에서는 콜로르의 우세가 확실해보였는데, 룰라의 이미지가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았고[6] 언론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큰 차이를 보였는데, 콜로르가 선거 운동을 위해 14대의 전용 비행기를 굴리는 반면 룰라는 일반 여객기를 타고 다니며 선거 운동을 했다. 심지어 1차 투표 시기에 브라질 노동자당 선거 자금의 절반 가량은 소속 국회의원이 운좋게 당첨된 복권(...)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브라질 진보 진영(브라질 민주노동당, 브라질 공산당, 브라질 사회당, 브라질 사회민주당 등)이 룰라로 결집하고 진보적 어젠다가 힘을 얻으면서 지지율 차이가 급격하게 좁혀졌다. 토론회에서 룰라가 콜로르를 제압한 점도 컸다. 12월 13일 오차범위 3%의 여론조사에서는 룰라 45%, 콜로르 46%가 나와 박빙이 될 정도였다.

콜로르는 브라질 노동자당이 폭력과 유혈 사태로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라고 내놓은 물건은 훗날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룰라의 인터뷰를 왜곡해 그가 직접 선거를 부정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막판에는 사회민주주의 코스프레를 그만두고 TV에 나와 원색적인 색깔론을 퍼붓었다. 룰라가 낙태를 시킨 부도덕한 후보라는 광고를 찍으면서 네거티브 공세를 하다가, 오히려 콜로르 측에서 룰라의 전처에게 돈을 주었다는 폭로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헤지 글로부에서 2차 대선 토론회의 생중계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편향적인 편집을 통해 콜로르에게 유리하게 방영했다. 또한 헤지 글로부는 콜로르가 압도적인 차이로 토론에서 승리했다는 여론조사를 인용했는데, 그것은 콜로르가 소유한 여론조사 회사에서 낸 편협한 결과였다. 그리고 대선 직전 브라질의 기업가 아블리우 디니즈가 칠레의 극좌 집단에게 납치당한 일도 콜로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7] 결과적으로 콜로르는 룰라에게 지지율을 추월당하는 일을 피하고 약 6%의 차이로 당선될 수 있었다.


2.4. 대통령 임기[편집]


콜로르는 1990년 3월 겨우 40살의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한다.[8] 재임 초기에는 대대적인 부패추방 캠페인을 펼치며 여러 비리 관료들을 내쫓았고, 뛰어난 패션센스와 입담, 쇼맨쉽을 발휘해서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신문에다가 직접 축구칼럼을 쓸 정도였는데 이것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집권 초기에는 브라질의 케네디라는 별칭을 달았다.

그러나 대대적인 민영화 및 보조금 지급 정지, 공공요금 인상, 예금동결[9]이라는 극약처방을 썼음에도 당시 브라질 경제 최대의 문제점으로 손꼽히던 초인플레이션과 외채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해버리고 말았고 은행고객들이 큰 손해를 보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은 지속해서 이어졌다.[10] 두 차례 시행된 경제정책의 실패에 설상가상으로 선거운동 기간 동안 2800만 달러 가량을 부정축재를 한 의혹이 나오면서 지지율이 급락해버렸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250만 달러 가량이 자택에 공원을 짓고, 여러개의 인공폭포와 100여 마리의 일본 비단잉어를 풀어둔 인공호수 조성에 쓰였다고 한다. 이후 회계 담당자는 태국으로 도주했다가 붙잡혔고, 2년 뒤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하지만 1996년 애인과 함께 총맞아 죽은 채로 발견되면서 수많은 음모론을 낳았고 이 이야기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결국 1992년 9월 29일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어 10월 2일부터 직무정지 상태가 되었고[11] , 브라질 최초의 탄핵된 대통령[12]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13]

2.5. 퇴임 이후[편집]


일부 혐의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8년간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2000년대에 와서 정계복귀를 시도하였고 처음에는 실패하는 듯하다가 2006년 알라고아스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0년 들어서 위기에 처하기는 했지만[14] 브라질의 관대한 선거 제도에 힘입어 2023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다만 콜로르가 유난히 부패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많다. 사실 카르도주테메르든 심지어 보우소나루도 부패혐의에서 썩 자유로운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우마 호세프가 개인적으로 깨끗한 축에 드는 인물이라는 것이 주평이다.

의원으로 돌아온 후에는 노동자당 정권을 지원했지만 2016년에는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다.

남북, 북미간 화해무드가 돌던 2018년 6월에는 북한에 방문하기도 했다.

2022년 선거에서는 알라고아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며,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를 앞두고는 전직 대통령 중에는 유일하게 현직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지지했다.# 다만 정작 본인은 주지사 선거에서 3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하면서[15] 머쓱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결선 투표에서도 보우소나루 대통령 역시 룰라 당선인에게 패해 낙선하고 말았다.

2023년 5월, 세차 작전 당시 기소된 부패와 돈세탁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8년 10개월을 선고받았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국가개조동맹

1965 - 1979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79
해산

민주사회당

1979 - 1985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5 - 1986
탈당

1986 - 1989
입당

국가재건당

1989 - 1992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92 - 1999
탈당

브라질 노동개혁당

1999 - 2006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06 - 2007
탈당

2007 - 2016
입당

기독교노동당

2016 - 2022
복당

2022 - 현재
복당

4. 여담[편집]


  • 일본이라크의 축구 대표팀 감독을 지낸 지쿠가 콜로르 정부에서 체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40대 시절엔 꽃중년 이미지의 미남이었어서# 이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 1989년의 브라질을 분석한 KBS 다큐에 나온적이 있다. 여기서 KBS 기자와 짧게 즉석문답을 했다.(5분 1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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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핵 절차로 인한 직무 정지 1992년 10월 2일 ~ 1992년 12월 29일[2] 포르투갈어 위키백과 참고[3] 현재 세리 B소속이다.[4] 1916년생으로 연방 하원의원으로만 40년을 재직했다.[5] 여담으로 룰라와 브리졸라는 이후 1998년 대선에서 러닝메이트가 된다.[6] 룰라는 외채를 갚지 않겠다는 과감한 공약을 내걸기도 하였다. 무책임한 소리처럼 보이겠지만 1980년대 당시 외채이자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외채를 꼬박꼬박 잘 갚다가 패망한 사례가 바로 루마니아에 있었고 동유럽권 공산주의 체제 붕괴 원인 중 하나가 외채난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물론 브라질 내부에서 큰 반발을 산 것은 토지 개혁과 군부 권력 규제 등이었다.[7] 일부 언론은 브라질 노동자당이 기업가를 납치했다고(...) 왜곡해 보도하기도 했다.[8] 역대 최연소 대통령 취임 기록[9] 당시 예금동결 때문에 한 사람이 자살하고 한 사람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은행에서 줄을 서던 사람이 분노해 콜로르를 죽이려 갔다가, 대통령궁에 줄 선 사람이 은행에 줄 선 사람보다 많아서(...) 그냥 돌아갔다는 농담이 나돌았을 정도였다.[10] 브라질의 초인플레이션이 어느정도 진정되게 된건 헤알 계획이 시행되면서 였다. 물론 IMF 외환위기로 크게 흔들리나 싶었지만 어쨌거나 현재까지도 브라질의 연 물가상승률은 10%를 넘지는 않는다.[11] 이날부로 이타마르 프랑쿠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12] 엄밀히 말하자면 탄핵소추안이 최종적으로 파면되기 직전인 12월 29일 사임했다. 그러나 상원은 사임을 무시하고 다음날인 12월 30일 새벽 그를 파면하였다.[13] 그런데 탄핵 당시 브라질에서는 한 인기 여배우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여배우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가득했고, 언론에서도 대통령 탄핵보다 이 사건을 더 중점으로 다뤘다.[14] 이때 룰라 다 시우바지우마 호세프의 지지를 받는다고 주장했다가 상대 후보에게 소송을 당해 법원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그래놓고 국민들은 누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다 안다고 우겼다(...). 그리고 콜로르를 지지하는 조직과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충돌하면서 헌병이 출동하기도 했다.[15] 포르투갈어 위키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