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조선)/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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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개괄
2. 업적
2.1. 탕평책 - 준론탕평
2.2.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
2.3. 신해통공
2.5. 서체반정
3. 정조 시대의 한계


1. 생애[편집]



1.1. 개괄[편집]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된다. 또한 막장 드라마나 각종 작품들의 소재가 될 정도로 인생이 상당히 다이내믹한 왕이었기 때문에 후대에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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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유아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정조는 8세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므로, 자신을 원손이라 칭하는 이 편지는 세손 책봉 이전에 쓰인 것이다. 해독은 오른쪽 이미지인데, 해석되지 않은 '상풍의'는 현대어로 옮기면 '상풍(商風)에', 즉 '가을 바람에' 정도의 의미다. 의역하자면 '날씨가 쌀쌀한데' 정도 되겠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정한 정치판 위에서 끝내 할아버지의 손에 죽는 무서운 광경인 임오화변을 보고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영조의 서슬 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외갓집으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 생이별해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이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에게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 게다가 이 생이별은 오히려 홍씨의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다. 어린 정조가 생모와 떨어지기 싫어해서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정조를 떼어놓았다고. 선구안 영조의 그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과 그 결과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

왕세손 시절에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실록에선 단 한 번도 세손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참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찾지 않아도 원손인 정조는 영조가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하는 등 편애를 했고,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 능역을 조성하고 정조가 보이는 효심은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는데, 단순히 11세에 아버지의 충격적인 죽음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즉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흠을 잡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잘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이는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2]

하지만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긴 했어도 엄연히 죄인인 아버지[3]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영조에 의해 죽은 백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게 된다.[4]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은 어렸을 때 생모를 잃은 연산군과 비슷하기 때문에 비교되곤 한다. 다른 점은 연산군은 성종이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5]

세손 시절 궁료로서 주위에 둔 측근으로 홍국영[6], 김종수[7], 정민시[8], 홍대용[9], 서명선[10] 등이 있다. 이 중 홍대용은 50대 초반에 사망하며 재위 기간을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했고, 홍국영은 전횡을 부리다 정조가 주도적으로 판을 짜고 동료였던 김종수 등이 등을 돌리면서 숙청당한다.

즉위하면서 한 말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내용에서 참고 바람.

그 후 자신의 대리 청정을 반대하던 척신(홍인한, 정후겸)들에 대한 척결을 완료했다. 이후 대비의 오빠인 김귀주를 유배 보냈고, 정조 4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을 ''하였다.[11]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 효임 등이 강용휘와 전흥문을 포섭하여 정조가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남양 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었다. 홍계희 계열은 이미 홍인한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이에 반발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이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던 정조가 그 소리를 듣고 승지 등을 불렀는데, 승정원 일기에는 이매망량이나 쥐 따위로 취급하고 사건을 덮으려 할 때 홍국영이 전격적인 수색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이 사건이 밝혀진다.

다만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사히 탈출한 뒤 재차 암살 시도를 꾀하여 들어왔으나 홍국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암살을 포기하고 궐의 뜰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사건이 마무리가 된다. 이 사건으로 남양 홍씨홍계희 계열이 말끔하게 숙청된다. 이 사건으로 정조는 자신의 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직면했고. 며칠 간 신하들과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면서 사사했다고 한다.[12]

이외에도 이유백, 이택징, 권홍징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지 않고 나라고 하며 정조를 걸주와 같은 폭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탕무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홍국영이 추천했던 산림의 영수인 송덕상을 삭탈 관직하는 과정에서 호서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며 반발한 사건이 있었으며[13] 그 이후에도 많은 유생들이 노골적으로 정조의 뜻에 거스르는 행보를 밟다가 유배되었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 문인방이라는 자는 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박서집[14]의 고변으로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15]

거기서 끝이 아니라 홍국영에게 충성하던 훈련대장 구선복, 구이겸, 구명겸 등의 무장 일파가 문양해와 내통하여 상계군 이담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정순왕후에 의해 들통나기도 하는 등 정조 초반부는 거의 반란과 역모의 연속이었다. 구선복의 경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뒤주를 지킨 인물로 야사 등에서는 그가 사도세자를 조롱하기도 했다고 언급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론 음모론과 무관하게 자기 할아버지 영조때 역변을 일으킨건 소론 준소와 남인 탁남 세력이였는데 정조시절에 역변을 일으킨게 대부분 벽파시파의 세력을 제외한 비주류 노론[16]이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야사를 신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구선복 개인은 정조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새로운 울타리이자 정조와 최소한 교각의 역할을 해주던 홍국영의 축출은 구선복 등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상계군 이담은 홍국영이 축출된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다가 정조 10년에 구씨 가문의 반란이 들키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비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는 청이 정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17] 이후 은언군은 강화에 유배되어있으면서 정조가 몰래 불러 만나고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반대하는 등 정조가 살아있는 생전에는 목숨을 부지하나 결국 정순왕후에 의해 죽는다.

각설하고 군제 개혁을 하고 수원화성을 지은 것도 이러한 반대파들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는 희박하다. 장용영과 화성은 상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호위하고 머물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 까닭은 자신의 대에 성공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추숭을 완수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순조에게 몇 번이나 강조한 바가 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긍정적인 평으로는, 탕평책을 펼쳤고, 학문적이고 문화적인 통치를 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는 점이다. 또한 외국의 문물을 수입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유명한 실학자들은 대부분 영조, 정조 시기에 등장하였다.

또한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면서 홍문관의 기능을 분산한 학술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서얼 출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들을 등용하여 서학을 익히게 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종로 앞거리에 육의전이 차지하는 물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을 취급하는 '사전'을 열 수 있게 하여 조선의 상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천명월주인옹', 즉 '온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의 정조의 호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군주를 지향한 정조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규장각은 후에 너무도 비대한 권력 기구가 되어 홍문관을 비롯한 대간을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성균관마저 유명무실화 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장용영이라는 자신의 직속 부대를 만들었으며, 이조전랑 추천권을 완전히 폐지하여[18] 탕평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속대전을 보완한 법전인 《대전통편[19], 외교 문서집인 《동문휘고》를 편찬하기도 한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1.2. 엄친아[편집]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노력하는 천재.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20]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조선판 팩트폭력

실제로, 정조는 "내가 더 이상 경들에게는 배울 것이 없으니 내가 직접 교육을 해야겠다."라면서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켜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 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실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공부 좀 하시오."같은 엄마 같은 잔소리 멘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같으면 경연 폐지는 "그것만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해야 할 일이긴 한데, 그게 엄친아 정조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진짜 신하들로서는 주눅 드는 학문적 포스를 가진 정조 앞에서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무식하다고 갈굼 당할 테니까 말이다.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 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교차 확인할 겸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이런 사례는 서애 류성룡이나 율곡 이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조가 신하들과 다르게 군주로서 일하는 입장이라 다른 업무로도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바쁜 사람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 시대 왕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왕이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정조다. 이유는 후술 하겠지만 정조는 자신이 그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저서나 기타 저서에 자신이 새로 주석을 다는 등 자신의 집필서를 묶어서 홍재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미 동궁 시절 때부터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선집인 선통, 화선, 회영을 엮어내었고, 이후에는 주자가 평가한 두보육우의 시를 모아 두육분운, 두육천선을 엮었으며 말년에는 아송을 펴내는 등 시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주자의 저서에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당대의 네임드 유학자 윤휴, 박세당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설령 임금이라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아무런 이야기 없이 출판까지 제대로 거친 것은 당대에 정조의 학문적 성취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21].

경연 과정에서 정조가 밝히는 유학에 대한 소견에 있어서 당대의 학자들치고 제대로 받아치거나 혹은 반론을 제기한 경우가 없다. 근본적으로 정조가 시행한 초계문신제 자체를 봐도 전례가 없는 제도로써, 이러한 제도 자체에 신하들이 완전히 제동을 걸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조의 유학적 소양이나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서학에 대한 견해 자체도 정약용의 저서를 읽어보면, 문체반정을 일으킨 이유를 모를 정도로 개방적으로 나온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그런거다.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갑인데 갑으로서 다 해봤더니 별거없더라...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는 조선의 왕이며 초특급 유학자였던 거다.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 능력 자체는 후대 사람들보다 빠르고, 이해력도 높아 아주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문체반정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문체반정 자체는 유교 근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장파, 남인 계열에서 서학이 유행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강조하는 측면으로써의 문체반정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세워 사학을 물리친다는 정조의 기본 방법론은 주로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인 계열 그리고 후에 시파로 분류되는 파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이들은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다. 이러한 문체 반정과 정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방법을 통해 정조 연간에는 진산사건을 제외하면[22] 극렬한 서학 탄압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실질적으로 문체 반정 과정에서 이가환, 김조순 등이 사실상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홍재전서 중에서는 옥편도 있다. 즉, 훈고학이나 고증학에 있어서도 달인이었다. 임금이 쓴 책이라고 다 출판해주는 게 아닌 조선의 깐깐한 출판 구조와, 임금이 쓴 책이라도 엉망이면 신하들이 미친 듯이 깠던 성리학적 전통을 고려하면, 옥편까지 나온 시점에서 정조의 학문적 달성의 수준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신하들이 아 우리 임금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셨다라고 묘지문(墓誌文)을 적은 경우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정조 밖에 없다.[23][24] 심지어 20자로 휘호를 정해 오지 않았다고 신하들을 면박을 주고, 세조라는 시호가 왜 안 되냐고 신하들을 협박한 예종조차도 자신의 부친인 세조의 묘지문에 성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고[25], 그 이전에 세종도 그렇게 쓰지 못했다.[26] 정조가 유일무이한 셈.[27]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백성은 먹을 것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그러니 군주는 모름지기 군주의 하늘인 백성을 잘 섬기고, 백성의 하늘 또한 잘 섬겨야 한다.[28]


경연 신하가 백성이 상언하여 격고하는 것이 근래에 매우 외람되고 잡스럽다고 하자 하교하길 불쌍한 저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가슴에 깊이 원한을 품고도 스스로 현관에게 아뢸 수 없어 분주히 와서 호소하는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 저들은 실로 죄가 없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인이다.

또한 일득록에서 정조의 독서광 성격이 잘 드러난다.

상이 말하길 요사이에 읽는 책이 어떠한 것이 있느냐? 라고 하자 신하들이 바빠서 읽는 책이 없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이는 하지 않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공무를 보느라 여가가 적기야 하겠지만,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과정을 세워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 나간다면 일 년이면 몇 질의 경적을 읽을 수 있고, 몇 년 간 쉬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면 칠서를 두루 읽을 수 있는 것이다.내가 할수 있다고 남에게도 할수 있다고 강변하기. 교과서 중심으로 잠은 충분히 같은 이야기다.

라든지

작년에 보지 못했으니 올해는 두 번 세 번 본다.

무릎을 치면서 책을 읽으면 악기 연주하는 것 못지않게 흥겹다.

등의 기록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체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책거리를 하는 것이 사실상 월례 행사가 되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 질을 읽었다고 하니 현대로써든, 당시로써든 희대의 독서광 문자 중독 이었던 셈.

하지만 비판이 업이었던 대간들에 의해 황당한 비판을 당하기도 했는데 유성한이란 자가 "아무리 신하가 못났다 해도 경연을 소홀히 함은 옳지 못하며, 요새 듣자 하니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하니 남부끄러워서 일 못해먹겠네요"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29] 정조는 이 상소를 읽고선 "첫 번째 건은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두 번째 건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정도다. 관둘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라고 소감을 밝혔고 신하들이 "저 미친놈이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입니다."라고 일제히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엔 상소도 올리지 말라 명한다. 허나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남인들이 일제히 유성한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사한 결과 유성한윤구종이란 자와 친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가 경종의 무덤 앞에서 예를 표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경종이 폐주도 아니고 엄연히 영조 자신도 황형이라 칭송한 어엿한 조선의 임금인데 자신이 악질 역적임을 자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30] 그러자 채제공이 "경종께선 4년간 조선의 임금이셨는데 경종께 충성하지 않는 놈이 영조께는 충성했겠고 사도세자께 충성하지 않은 놈이 전하께는 충성하겠습니까?"라고 곁다리로 사도세자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나중에 다른 이는 아예 본론으로 사도세자 얘기를 꺼낸다. 이에 호응하여 사도세자를 추숭할 것을 청하는 영남만인소가 올라와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두렵게 했다. 이에 정조는 큰 호응을 보였으나 5.22 하교란 하교를 내려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게 맞긴 하지만 시기 상조니까 그냥 덮어두자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후 채제공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도세자 추숭에 승부수를 걸었다가 정조 말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31]

여기까지만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추었다.[32][33] 덕분에 일부 야사에서는 초기 장용영정조가 각 지의 고수들을 직접 때려잡아서 모집한 부대란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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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자료는 고풍에 관한 것인데, '고풍'은 원래 조선시대 때 새로 부임한 관료가 하급자에게 공식적으로 선물을 내려준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34] 해당 자료는 활쏘기 이벤트 후 기분이 좋아진 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는 고풍 서류가 올라오면, 직접 수결을 하여 결재했고, 간단한 감상이나 신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거나, '누구 누구에게 이런 선물을 내린다'는 식으로 추가로 기록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고풍 자료에는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인데 이후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차례 10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이러한 정조의 고풍은 여러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같이 '20순 중에 98발 명중', '10순 중에 49발 명중' 이런 결과가 쓰여있다. 참고로 1순은 5발, 20순은 100발이다.

위 기록에서 보듯 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100발을 쏘면, 98발, 50발을 쏘면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두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 스스로도 이를 두고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조 때 실학자인 박제가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임금의 활쏘기 솜씨에서 50대 중 1대를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고 하더라'고 기록하며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며 칭송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조는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이성계의 현신'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로 문무겸비의 왕이었다. 참고로 이성계는 실전에 70명을 연속으로 머리를 맞혔다고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사실, 비단 정조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왕들은 이성계의 후손답게 명궁이 많았다.

성격은 자상하기보단 성질이 불같았다.[35][36][37] 이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따르면 욕도 매우 찰지게 잘해서 주위 신하가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다만 이러한 몇몇 일화로 단순히 욕쟁이, 키보드 워리어 정도의 이미지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자신의 뛰어난 자질과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말 그대로 욕먹을 짓을 한 경우에만 한해서 욕을 퍼부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속이 시원한 소위 사이다 발언인 셈. 즉위 직후 치러진 신하들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38]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주었다.[39] 이때가 정조의 춘추 스물넷이다.[40]

다만 정조만이 유난히 뛰어난 키배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고 늘어지면서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는 태종이 조선 시대 최강급이었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종 역시 말년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거침없이 상대방을 갈구는 것으로 유명했다.[41] 거기에 영조는 실록에 '신하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라는 말이 여러 번 적힌 임금이다. 특히 숙종, 경종, 영조 모두 화술에 능했다. 이쯤 되면 유전.[42][43]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네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라고 조롱했다.[44]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에게서 잘(?) 물려받은 듯. 안타깝게도 정조의 아들 순조는 세도 정치에 휘둘렸다.[45]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질병에 처방을 했을 정도에다가, 동의보감이 부실하다고 직접 보강을 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한의사들 간 의견이 갈린다. 일부에선 처방이 과격하지만 효과는 볼 수 있는 극약 처방을 자주 했지, 크게 틀린 게 아니라고 하는 편과 반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술을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게 잦은 정조에게 그러한 처방은 위험하다 정도로 나뉘는데, 이는 최후의 순간에 내린 처방과 연훈방 논란으로 이어진다. 헌데 이러한 과격한 처방은 허목에 연관된 일화에서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사약에 들어갈 만큼 극한 재료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당대에 유행이 아니었을까?'라는 의견도 존재한다.[46]

때문에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입장에선 연훈방 처방이 처음에 효과를 봐 두 번째로 시도할 때 누군가가 독을 넣어 연기에 독성을 띠게 했다는 것. 아무튼 정조가 의학을 공부한 것은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어의에 의한 독살의 위협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으나 정작 정조 본인은 일득록에서 "대저 의학서라는 것은 옛 경서와 큰 차이가 없어 누구나 공부하고 익히면 쉽게 배울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한마디로 정조 본인은 단순히 잡기를 익히는 수준에서 공부하다 보니 의서에 정통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 시대판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정조의 책을 읽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일단 정조는 책을 초록한 다음 다시 초록본을 읽으면서 원본과 대조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의견을 수렴한 다음 다시 재록을 하고 이걸 가지고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위 작업을 반복한다.

또한 자신의 무예 실력과 장용영의 특수성이 있었는지 몰라도 《무예도보통지》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즘도 조선 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


2. 업적[편집]


즉위하자마자 문화 정치의 표방을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작성지화의 명분으로 초계 문신제를 실시하는 등 인재를 죽이기도 하였다.


2.1. 탕평책 - 준론탕평[편집]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는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 때는 혼인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완론 탕평이 사실상 무너지고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가 되었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는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준엄한 의리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탕평을 펼치게 된다.

사실 정조 재위 초반에는 자신의 궁료 출신들이 좀 더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서명선이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이후 숙위대장과 도승지를 겸직하면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여러 정파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세도를 부렸다. 서명선은 소론 출신으로 정조의 대리 청정을 적극 추천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인한을 실각시키는 상소를 올리며 역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홍국영이나 서명선 모두 정조가 꿈꾸던 탕평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세도를 부리고 왕위 후계에 욕심을 내다가 결국 실각당했고, 서명선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남인을 견제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을 때 보호 세력이 없어서 결국 실각당했다.

이후 정조는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47]을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영조의 탕평책보다는 좀 더 진전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 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계열 즉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 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와 채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 정치가 다 소용 없어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2.2.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편집]


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1785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1788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친위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바로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이 이상 도시의 건설을 통해 당시 한양에서는 펼치지 못할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화성 건설도 장용영과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이 강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정조는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화성에 설치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2.3. 신해통공[편집]


조선 전기 때만해도 상업이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이 국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특권이 적어지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독점적 상권을 인정해주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금난전권은 결국 도시의 상업을 폐쇄적으로 바꿔놨고, 물가의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 상인과 수공업자 및 도시 빈민층들에게 위협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시전 상인들은 중앙의 고관들과 연계가 되면서 역시 폐단을 낳게 되었다.

중앙의 고관 특히 노론들과의 연계는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켜 탕평책을 펼치려는 정조의 정책에 이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개가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는 통공 발매 정책이었다.

사실 통공 발매 정책은 영조 시기인 1764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1787년 일부 통공 발매 정책을 시행하였고 1791년에 이르러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 의해 통공 발매 정책이 제기가 되었고 결국 시행을 하기에 이른다.

통공 발매 정책은 그동안 독점권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던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공 발매 정책을 통해서 그동안 경화되어있던 상업 구조의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전 상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면서 준론 탕평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조선이 한 단계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앙 정부에 의한 특권이 없어지면서 상업이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2.4. 문체반정[편집]


정조 시대를 얘기하는데 있어선 문체반정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조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체반정은 북학이나 청나라 문물,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새롭고 신선한 문체에 관심을 보이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을 탄압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중에서 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옥에 대한 탄압은 너무나 심했다. 이옥은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하고도 문체 때문에 정조에 의해 꼴찌로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다. 후에도 이옥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자 정조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옥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옥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게 되면 그 또한 문제가 된다는 맹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박지원이나 김조순 같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타협을 하지 않은 이옥 본인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는 셈.

애초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조는 문체반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신해통공으로 왕이 노론을 타격 →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노론이 정조 측근 남인 시파들을 공격 → 이걸 다시 문체반정으로 박지원[48]이 포함된 노론에 재반격한 형국.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에 이에 대한 벽파의 반격이 신유박해라고도 하는 신유사옥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이해한다면, 박지원의 실학적 측면이나 문체반정이라는 명분은 의미가 약해지고, 대신 정치적 의미만 더 강해진다. 애초에 문체반정 자체가 청나라에서 유행한 문체와 유사한 박지원의 그것과 기존 노론의 대의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적 사상 간의 괴리를 찔렀기 때문에 성공한 측면이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애초에 반동적이냐 아니냐도 아리송하긴 하다.

문체반정을 보는 시각 중, 철저하게 보수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정조의 성향이 문체반정의 중요한 요소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일기에 "나는 본래 책을 읽어도 성현의 말씀만 읽었으며, 패관 잡기에 대해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 쓸데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대목을 보면 정조는 진심으로 유학 경전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던 유교 근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들어 삼국지연의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49] 실제로 당시 사상계에서는 중국의 양명학, 고증학 등이 들어와서 성리학의 한계를 공격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원칙주의자 성리학자였던 정조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가 오늘날의 소설 격인 패관 문학을 무척 싫어하여, 당시 소설 중독(…)에 빠진 관료를 징계한 사례가 있고, 김조순도 숙직 중 연애 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어 가는 길에 반성문을 써야 했다. 심지어 정조가 파발까지 보내 '반성문 내놔!'라고 독촉했을 정도. 하지만 그 반성문이 명문이라 왕을 감동시켰고 왕과 사돈지간이 된다. 유교 문화권에서 글이라는 것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옥의 경우, 문체 교정 안 하면 평생 과거 금지라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50] 그래서 그는 온건한 분서갱유라 할 수 있는 문체반정을 한 것 같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정조는 문체 면에서는 노론, 그 가운데서도 벽파였다. 세손에서 즉위하여 척신과 홍국영을 물리칠 때까지 김종수를 위시한 노론 벽파와 정조는 사실상 동맹 관계였으며,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는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노론 정체성을 강조했다. 송시열에게 송자라는 호칭을 내리고 《송자대전》을 편집하게 한 사람도 정조다.

물론 그렇게 징계한 관료들이 자기 뜻에 맞게 반성하면 나중에 중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조순이 반성문 잘 써서 정조의 용서를 받고 정조의 사돈으로까지 정해진 게 그 예. 실제로 정조는 문체가 난잡해진 원흉으로 지목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게도, 옛 고문 문체로 '반성문' 쓰면 크게 중용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과거를 보지 않은 음서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종2품 벼슬인 문임직을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연히 박지원 주위 문인들은 기뻐하며 그들이 나서서 글 쓸 자료를 모아주겠다고까지 했으나, 박지원은 '나 같은 못난 놈의 못난 글에 전하가 관심 보이시다니, 더 이상 못난 글로 반성문 써서 전하의 눈을 썩게 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어염. 전하께서 반성문 쓰면 중용해준다는 말은 사실 나보고 반성하라는 이야기일 뿐인데, 눈치 없이 반성문 써내서 벼슬 달라는 눈치 없는 짓은 할 수 없잖아염? 그래도 혹 모르니 그나마 볼만한 글 몇 편 모아놓고 있다가, 전하께서 또 반성문 내라고 제출하시면 그때 그거 낼 거임.'이라는 반응으로 반성문 작성조차 회피하는 기염을 토한다.(…) 사실 계속 회피하기만 한 건 아니고, <과농소초>라는 농서도 지어 올리는 등 나름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바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학에 관해 정조와 채제공 이하 신하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채제공"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51]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52]라고 하자 정조가 "이게 다 패관 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따위 황당무계한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제부턴 순정 고금체만 쓰라!!"고 했다.[53]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1773년(영조 49년) 봄,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이며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2.5. 서체반정[편집]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개혁 정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즈음 되면 그 당시의 남성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양난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3. 정조 시대의 한계[편집]


군주로서 사명감이 투철했던 정조는 진정한 위민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높은 이상도 가지고 있었다. 제2의 세종이라 할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군왕. 그래서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안타깝지만, 과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 군주였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권 中


정조의 통치 행태는 권모와 술수였다. 연전에 발굴된 영의정 심환지와의 비밀편지 속에서 그의 마키아벨리적 면모가 잘 드러났다. 정조가 죽자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기의 경직된 반동 정치는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 처지로 몰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영조·정조 대의 짧은 황금기를 내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짧은 막간은 정조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지시하는 '헤드십', 이른바 카리스마 콤플렉스가 잉태한 추락이었다.[54]

배병삼 교수[55]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조 정치와 19세기 세도정치 사이에는 급격한 단절이 있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주체와 정치 운영의 결과가 아니라 세도정치가 빚어진 정치구조 등을 검토한다면 그 둘 사이에 단절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19세기 전반 정치는 붕당정치-환국-탕평정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산물이다"라는 명제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먼저 세도정치기 권세가의 권력 기반을 살펴보자. 왕실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정도는 17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높아져왔는데, 정조 또한 그러한 추세를 억제하지 않았다. 또한 외척 권세가들의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한 정조 연간과 19세기 세도정치기 정치구조의 연관성은 훨씬 복잡하고긴밀하다. 세도정치기 권세가들은 실제 권력관계가 어떻든 왕실의 권위를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왕실의 권위는 적어도 외형상 세도정치기에도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세실(世室)의 의례는 공적이 큰 국왕의 신위를 후대국왕 4대가 끝나도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종묘에서 제향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로 들어와 그 결정이 시기적으로 일러지고 남발되었는데, 19세기 들어서는 그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세도정치의 권세가들은 세실 의례를 주도하면서 국왕의 높아진 위상을 자기 권력의 정당화와 분식에 활용하였다. 김조순이 규장각 검교제학이라는 지위를 오래 누린 것도 정조가 한껏 높여놓은 국왕의 권위를 규장각이라는 상징을 통해 자기 권력강화에 활용한 것이다.

세도정치기 권세가들은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을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김조순은 오랫동안 직접 훈련대장을 맡았으며, 권력이 안정된 후에는 자기 측근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은 원래 특정 정치세력이 군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는 원칙을 지켰으나 붕당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는 와중에 정치세력 사이에 군영을 장악하려는 경쟁도 심해졌다. 정조는 결국 막대한 예산과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친위부대 장용영을 직접 설치하고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건국 이후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사례이다. 비록 장용영은 정조 사후 철폐되었지만 세도정치기에 권력자가 정예군 부대를 직접 거느리는 현상은 정조가 시작한 군영정책에 그대로 연결된것이다.

앞에서 정조가 대신권-왕권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권력구조를 수립하였다는 연구 성과를 소개하였다. 정조가 일관되게 추진한 재상권의 강화는 그 시기에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겠지만, 높고 낮은 관인들이 서로 견제한다는 조선 정치체제의 전통을 변화시켜 고위 관원들에게 권한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19세기 권세가들이 측근인 고위 관원들과함께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정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재상권 강화정책에 연결된다. 그러한 정조의 정책 속에서 당하관이 공론을 조정에반영하던 구조와 삼사의 언론 활동은 매우 침체되었다. 19세기에도 외척가문들이 권력을 집중시킨 배경에는 공론과 언론의 현저한 퇴조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세도정치를 가능하게 한 언론의 퇴조 역시 정조의 본래 의도에 관계없이 그의 정책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오수창,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및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대화」


현재의 요구가 빚어낸 정조의 상종가는 19세기 전반기를 희생양 삼아버린 듯하다. 그리고 19세기의 부정적 현상들에 직간접으로 기여(?)한 정조혹은 그 시대의 책임은 실종되어버린다. 예컨대 세도정치는 정조의 제반개혁을 무산시킨 대표적 사례로 인식된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최대 설계자는 정조였다. 정조는 재위 전반기에 척신을 숙청하고 사대부 청류를 보합하는 탕평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하지는 않았다.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그는 올바른 척신의 육성을 암시했고, 서울 명문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 김조순의 딸(순조순원왕후)의 재간택까지 끝내고 승하했다. 훗날 김조순은 타계 직전의 정조로부터 세자의 보좌와 세도(世道)책임을 부탁받았노라고 증언했다. 김조순의 증언은 과장일 수 있지만,정조가 세도가문을 선택하고 세도를 위임했다는 논리는 이후 세도정치 정당화의 가장 큰 명분으로 작용했다.

많이 지적되진 않았지만, 보다 큰 책임은 정조가 공공의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는 데 두어져야 할 듯하다. 정조의 언론 정책이 공론정치의 실종을 불렀다는 지적은 이미 있었다. 그러나 큰 충격은 2009년에 공개된, 정조가 대신 심환지에게 보냈던 어찰이었다. 매스컴의 관심은 ‘정조 독살’이나 ‘시파 지지인가, 벽파 지지인가’와 같은 데 쏠렸지만, 연구자들은 '모범군주 정조'가 대신과 미리 말을 맞추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맨얼굴을 새삼확인했고, 일부는 연구 방향까지 조정했다. 정조의 행위를 조금 가혹하게 평한다면, 공공의 논의를 무력화시켰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의 붓을 속였으며 결과적으로 역사를 기만했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고, 탕평군주로서 조정자의 이득을 톡톡히 누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서의 은밀한 편지 관계란 얼마나 허약하고 일회적인가. 정조가 ‘읽고 나서 불태우라’고 했던 몇몇 편지들마저 고스란히 남게 된 것은,'불태우라'는 명령에 제약받지 않았던 심환지의 판단 때문이 아니었던가. 정조의 최후 선택은 스스로 내걸었던 의리의 공정성을 스스로 허약하게 만들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 유산은 19세기 중앙정치에서 되풀이되었다. 순조 초반 정순왕후 중심의 벽파 정권은 정조의 의리를 내세워 숙청과 천주교 박해를 자행했다.그들을 몰락시킨 시파 정권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시파계 가문들은 벽파계 인물 일부가 정조를 부정하는 흉언을 했다하여 그들을 궤멸시켰다. 그런데 이 흉언은 수십 년 전에 사석에서 행한몇 마디 말에 불과하였으므로, 작위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처럼 합리성을상실한 정쟁은 의리를 타인이 관여할 수 없는 사적인 차원으로 귀결시켰던 정조에게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

이경구, 「총론: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


정조의 정치에는 비판도 존재하는데,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가버린 세도정치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 바로 정조라는 점이다.

본래 세도정치란 "어진 임금이 임명한 어진 재상이 바른 세상의 도(世道)를 일깨워주는 것"을 뜻하나, 정조는 집권 초반 측근인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세도 정치의 폐단을 만들었으며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혔다. 이는 국왕 - 집권 붕당 - 비집권 붕당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조선의 합리적 통치 체계를 망가뜨리는 행위였다. 이미 숙종 대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는 정조 대에 들어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했다. 결국 정조가 죽고 난 후 잠시 동안은 평안한 듯했으나, 정순 왕후의 수렴 청정이 시작되고 뒤이어 정조의 사돈 집안인 안동 김씨세도(勢道)정치가 시작되었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으면서 세도 정치, 더 나아가 조선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에 대해 정조 입장에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당시 정조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을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사도세자 추숭과 탕평책을 반대하는 벽파는 강경파에 속했던 심환지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더욱 강경한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사도세자 추숭과 탕평책을 찬성하는 시파는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뒤 시파 전체를 규합하고 이끌만한 마땅할 인물을 찾지 못해 흔들리고 있었다.

정조가 평생에 걸쳐 억지로 맞춰놓은 두 당파의 균형이 붕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정조가 나서서 당파 간 세력을 조율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했지만, 당시 정조는 건강이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 잦은 밤샘과 격무, 과도한 흡연과 음주로 인해 노화가 남들보다 빠르게 찾아와, 스스로가 "내 또래의 신하들은 전부 머리도 검고 눈도 초롱초롱한데, 나는 벌써 백발의 머리에 눈도 침침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자조할 정도였다.

자신이 평생 동안 세심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며 억지로 맞춰왔던 벽파와 시파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건강은 점점 심각해지는데, 당시 세자(훗날의 순조)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했고, 왕실의 제일 큰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는 벽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벽파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으니, 정조로서는 불안했을 것이다. 이대로 자신이 죽는다면 어린 세자를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될 테니, 벽파와 시파의 균형 붕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결국엔 벽파의 일당 독재가 펼쳐져 탕평도, 사도세자 추숭도 완전히 물 건너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정조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벽파와 시파의 세력 균형을 최대한 맞출 필요가 있었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시파에 속했던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는 것이었다.

영조 말년에 정국을 어지럽히고 자신을 위협한 외척들을 보며 척신 정치를 부정하고 혐오했던 정조였지만, 시파에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그것 뿐이었다. 정순왕후 김씨라는 든든한 외척을 뒷배로 두고 있는 벽파처럼, 시파도 그녀 못지 않은 든든한 외척을 뒷배로 둘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이 그 당시 정조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책이었기에,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정조는 훗날 세자가 장성하면 척신 정치를 척결하고 탕평책을 펼쳐 붕당 간의 세력을 조율하고 관리하며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리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세자, 즉 순조는 그러지 못했지만. 세도 정치는 어디까지나 순조가 정국 관리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영조, 정조와는 달리 조정 일에 거의 손을 놔버리면서 초래된 것이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 차기 정국을 대비하기 위해 애썼던 정조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순조 대에 세도 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시파였던 데다가 곧은 성격이여서 오히려 정조의 유지를 충실히 따랐으나 권력을 크게 가진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세도정치는 순조가 권력이 너무나도 커져 버린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 못하면서 생긴 문제다.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다. 표면적으로 탕평이라는 이름 아래 정조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말빨으로 싸움이 벌어지지 않게 억눌렀을 뿐이고 흥선대원군 때까지도 노론, 소론, 극소수의 남인 등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당파의 뿌리를 뽑을 시스템까지는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이 당파의 뿌리가 무지막지하게 깊었으니 정조가 어떻게 할 수 있던 게 아니며, 남은 당파의 뿌리도 어떠한 의리를 가지고 뭉친 것은 아니었다. 정조의 정치는 당파들을 고루 등용하면서도 영조 때처럼 표면적인 구색 맞추기 탕평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56]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영조 말기에 척신 정치에 노론 1당으로 귀결된 정치에서 척신들을 척결하고 건전한 붕당 정치를 다시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소론 서명선, 이시수, 이병모 등을 등용하고 채제공, 이가환을 비롯한 남인 세력도 대거 끌어들여 당파 다운 당파를 만들었다.

동시에 정조의 정치 방식에 맞는 사람들은 조정에서 힘을 얻었지만, 이에 반대파도 생겨나 찬성파와 대립하면서 시파(노론 온건파 + 남인, 소론 잔당)와 벽파(노론 강경파)로서 제 2의 당파 싸움을 벌였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렇기에 노론 벽파를 제외하고는 당파의 의리 자체를 붕괴시켜 이후의 세도 정국을 낳은 측면도 있다.

정조의 정치가 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이건 정조 자신이 너무 먼치킨이라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초계 문신제라는 인재 등용 제도를 보면, 하급 관리들에게 1차 필기 시험을 치르게 하고 2차 필기 시험을 치르게 하고 그중 유력한 사람을 골라 면접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왕 자신도 여기에 참여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렇게 발굴해 낸 인재 중 한 명이 바로 정약용.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적인' 군주였는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 반정을 일으켜 고문을 따르라고 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개혁적인 군주라고 볼 수 없는 면도 분명 있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서양 문물의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자의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문체반정의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조가 추구한 궁극적 목표는 후대의 흥선대원군이 지향한 목표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정조의 정책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런데 세도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 정치를 척결한 흥선대원군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참고로 정조도 이양선이 오면 물, 식량만 제공하고 쫓아냈다.

또한 정조 15년부터는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다. 그리고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왕이 공부하는 면도 있지만, 신하들과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조는 보통 신하들과 소통하는 장인 경연은 폐지하고 임금이 권신들과 막후 정치에만 몰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말기에 와서 특히 심해진 그의 마키아벨리적 사고관으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건강의 악화, 어린 세자, 자신의 불같은 성격에 비해 진전되지 않는 정치 상황,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신하들, 거기에 더해 시파 세력의 구심점이 채제공 사후 없어진 점 등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57]

다시 말해 정조 시대의 한계는 정조 자신이었다. 박시백이 지적한 것처럼 자질, 실천력 모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로 작용한 것이다. 정조가 구축한 운영 체제는 정조만이 가능했다. 그리고 말년에 급격히 나빠진 건강과 믿었던 신하들의 죽음은 정조를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결국 정조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는 선택을 강요하였다.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사실 영빈 이씨의 역할에 대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쩌면 영조가 시켰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다.[2] 다만 이는 임오화변 이후 출궁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온 직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출궁 당시의 정조는 11세였다.[3] 거기다 사후에 세자로 추봉 되기는 했지만 폐서인 되기까지 했었다.[4]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했다. 친부는 끝내 추증하지 못했는데 양부는 거의 즉위하자마자 추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로 추존되었다.[5] 그런데 사실 연산군도 생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게 현대의 중론이다. 연산군과 갑자사화 문서 참고.[6] 이쪽은 정조의 경호실장 격의 역할을 했다.[7] 이쪽은 세손 시절 사부[8] 이쪽은 정조의 충신[9] 실학자로 유명한 사람이다.[10] 홍인한 탄핵소를 올려 대리 청정 저지 기도를 막았다. 때문에 서명선이 상소한 12월 3일 정조는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모아 동덕회라 이름 짓고 모임을 가졌다.[11] 그러나 사실 홍국영이 까놓고 팽 당할 짓을 했다. 왕이 자신을 믿고 의지했다는 것과 즉위 후에도 최측근으로 두어서 기고만장해서는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개판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정조가 자신과 관계없는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게 보기 싫다고 자신의 누이인 원빈이 일찍 죽자 정조의 섭생을 대놓고 반대하는 미친 짓을 했고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데려와서 완풍군으로 삼고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했다. 이러니 박살 안날 수가 있나... 게다가 완풍군으로 삼은건 자신의 누이의 양자로 만든 건데 누이의 남편이 정조임을 감안하면...[12] 이 사건 이후 은언군이 비슷한 처지에 처하자 사사하자는 신하들과 싸워 은언군은 유배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조가 날치기(...)를 저질러서 제주로 보낼 것을 강화로 보낸다. 이에 신하들이 반발하자 "제주나 강화나 똑같은 섬인데 뭐가 문제냐. 논하지 마라."라고 찍어누른다.(...)[13] 왜냐하면 송덕상송시열의 후손인데 송시열은 서인 - 노론의 영수였음을 감안하면 호서의 유생들이 반발할 이유가 된다.[14] 당시 송덕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올렸다는 죄로 유배된 평산 유생 신형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인물이다.[15] 김귀주 쪽 사람인 이율은 서울에서 내응키로 했고 홍국영의 사촌인 홍복영은 백 칸짜리 집과 소금 천 포를 내놨다.[16] 대부분 척신당(탕평당)들이다.[17] 여담으로 은언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사되기 직전까지 가는데, 정조가 단식 끝에 유배로 타협한다. 이미 은전군이 죽었는데 또 동생을 죽일 수 없다는 논리에 제주로 유배하는 것으로 타협했으나. 다음날 아침 정조가 귀신같이 일찍 일어나 제주로 유배보내는 것을 강화로 날치기해버린다(...). 이에 신하들이 항의하자 제주나 강화나 똑같은 섬이다. 무슨 문제냐? 더 이상 논하지 하라![18] 영조 때 완전히 혁파한 것을 부활하려고 했지만, 또다시 폐단이 일어나자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19] 이름이 비슷한 《대전회통》은 흥선대원군 시절에 만들어졌다. 시험에 낚시 문제로 나올 수도 있다.[20] 세종대왕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반박할 때 이렇게 응수한 적이 있었다.[21] 본인 스스로가 조선의 학통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할 정도면 이단이라 욕할 수도 없다.[22] 그나마 보면 이건 정조로서는 처벌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는 일이었다.[23] 정조의 묘지문의 맨 끝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왕은 성인이셨다.'[24] 송시열효종을 성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일반적인 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 현종 초에 송시열예송논쟁 과정에서 체이부정을 언급하여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이후 송시열이 기유독대를 공개하는 등의 맥락에서 본다면 일반적으로 보기 어렵다..[25] 당연하겠지만 세조가 성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짓을 한 건 아니다.[26] 단, 이건 묘지문에 한정한 경우고,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라는 구절이 나온다. 세종에 대한 당대 신료들이나 지금의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식은 군자를 넘어 성인의 그것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학문적 업적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정조의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보다도, 세종훈민정음 창제가 훨씬 값지고 빛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7]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현종때 신하들의 묘비석이나 현화사비"우리 임금은 성군이시다"라는 문구는 확인 할 수 있다.[28] 앞의 말은 정조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이전부터 비슷한 말이 있었다.[29] 정조 실록 34권, 정조 16년 4월 18일 병진 3번째 기사.[30] 요약하자면 '나 제발 죽여주세요'라고 빈 셈이다.[31] 하지만 채제공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왕이 추숭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이 마음을 채제공이 눈치는 챘지만 좀 앞섰다고 하는 게 좀 더 옳을 듯하다. 실제로 승부수를 걸었을 때 김종수가 "아니 5.22 하교를 들은 신하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왕채제공에게 금등을 내리셨는데 상소의 구절 중 하나가 그 금등 안에 있던 어서에 있던 문구였는데 지금 죽기 전이니 진실을 얘기한 거다."라며 처벌을 내리는 데에 적극 반대했다.[32]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병서와 무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게 죽음을 부르기도 했지만...[33]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다른 점이 사도세자와는 달리 문, 무 모두 능통했다는 점[34] 정조 때는 이렇게 활쏘기 이벤트를 통해 기분 좋아졌다는 핑계로 새로 부임한 상급자 관리가 하급자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35]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같다기보단 더럽다에 가깝지만[36] 물론 그래도 의빈 성씨에게 대한 태도 같은 걸 보면 은근히 로맨틱한 기질이나 자상한 성격도 지녔던 듯 하다. 물론 여기서도 두 번째 프로포즈에 실패하자 의빈 성씨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하는 불같은 성격이 드러난다.[37] 다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 받았지 눈 밖에 난적은 거의 없었다. 영조의 사람 재는 기준이 깐깐하다 못해 병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자기 조절과 처신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애당초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가 왕의 정통 후계자임에도 비참하게 죽은 것은 영조의 병적인 결벽을 견디지 못해 엇나간 것이 큰 이유였는데, 그런 영조 밑에서 20년 이상을 총애받은 정조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내내 궁궐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사도 세자가 죽은 뒤에 청소년 시기는 홍봉한의 집에서 오래 지내었다. 2009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심씨 문중에서 모아 보관해온 어찰첩에는 정조의 불같은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38] 처음에는 심지어 백지였고 이후에는 말도 안 되는 삼행시였다고 한다.[39] 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해당 내용의 정확한 출처를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40] 정조가 즉위하던 해의 춘추이다.[41] 아주 좋은 예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만리를 비롯한 창제 반대 세력에게 신랄하게 디스를 한 것을 들 수 있다.[42] 다만 논리적으로 독설을 날린 건 정조가 거의 유일무이하다. 나머지는 빡친 상태에서 걍 내뱉은 말 정도[43] 앞서 본 이들의 절정은 영조다. 정승조차도 영조 48년엔 열번이나 갈아치울 정도.[44] 하지만 대사헌은 요즘으로 치면 검찰 총장에 대응하는 상당한 중책인데, 그런 자리에 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을 올린 걸 보면 마냥 쪼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45] 다만 순조도 자기 가족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변했다. 생모인 가순궁의 추숭과 상복 문제로 대간이 '그래도 후궁인데 예가 지나치다'고 비판하자 '입 닥치지 못하겠니?' 하면서 단칼에 씹어버렸고, 비판이 나오면 예는 정에서 나온다고 하며 공자의 어록까지 인용해가며 미친 듯이 깠다. 결국 상복을 3년 동안 입는 것까지 기어이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갔다.[46] 실제로 사약의 재료 중에는 체질에 따라선 사약보약으로 나뉘는 경우가 있었다. 그냥 50:50의 도박.[47] 대표적으로 1788년에 영의정에는 노론 벽파인 김치인, 좌의정에는 소론 강경파인 이성원, 우의정에는 남인 채제공을 임명하였다.[48] 박지원 특유의 비주류 - 실학자 성향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박지원은 당시 노론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히던 반남 박씨 가문 출신이다.[49] 참고로 선조 시대인 기대승은 삼국지 연의에 대하여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보기에는 격조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가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50] 여담으로 패관 문학체는, 소설을 즐겼던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51]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그걸 떠나서 불교천주교나 교리 자체는 다 좋은 말들이니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밖에.[52] "그 책에 '하느님이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
[
上帝
]
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다만 그 인륜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
[
玉皇
]
, 하나는 조물주
[
造化翁
]
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53]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문장은 나라를 세운 이후로 모두 육경(六經)과 사자(四子)에 오랫동안 노력을 쌓은 속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길을 달리한 때가 있었지만 요컨대 모두 경학(經學) 문장의 선비들이었다."[54] 정조를 성인으로 존경했던 정약용도 정조의 정책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참고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규장각, 초계 문신, 장용영의 존재 이유를 모두 부정했다.[55] 다만 이 사람의 말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는데, 사학과 교수가 아니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2002년 이래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있기 때문이다.[56] 실제로 정조식 탕평은 당파 없애기보다는 당파 간 세력 조율하기정도에 가깝다.[57] 정조 못지 않게 급한 성격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영조조차도 스스로 군사(君師), 즉 백성들의 임금이자 스승을 자처하며 말년까지 경연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영조는 죽기 직전까지도 건강의 문제도 특별히 없었고, 오히려 검은 머리가 나서 회춘한 거 같다고 즐거워했다. 후계도 안정되어 있었다. 또한 정통성 문제도 해결되어 심리적 불안, 정치적 불안도 크게 없었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면 정조는 건강, 정치 상황, 후계 모든 것이 불안했다. 특히 영조가 70이 넘어 검은 머리가 난 걸 기뻐한 반면 정조는 30대의 나이에 머리가 반백이 되고 눈이 안 보인다며 불안해했다. 때문에 동일선상에 두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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