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사보이아 공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친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여 먼 훗날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기틀을 다졌다.
2. 생애[편집]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 샹베리에서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와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의 3남으로 태어났으나, 성인으로 성장한 유일한 자녀였다. 그가 8살에 불과했을 때 프랑스 왕국의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 공국을 영구히 합병할 전초기지 격으로 사보이아 공국을 공격해 점령했고, 공국 대부분이 프랑스의 간접통치를 받는 상황에 놓였다.
어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처제[1] 였던 인연으로 카를 5세의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프랑스에게 빼앗긴 공국을 되찾고자 했다. 1553년 8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보이아 공작이 되었지만 다스릴 영토가 없었기에 그의 작위는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1555년부터 외사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밑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복무하였다.
8차 이탈리아 전쟁 중인 1557년 8월 10일, 스페인군을 이끌고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전의 결과로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로부터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았다. 원래는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남편으로도 고려되었으나 종교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누이 마르그리트 공주(Marguerite de Valois 1523~1574)[2] 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결혼을 축하하는 마상창시합에서 스코틀랜드 왕국 근위군 대장이었던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3] 의 랜스 파편이 앙리 2세의 눈 위를 찌르는 바람에 치명상을 입었고, 앙리 2세가 자신의 사후 사보이아 공국이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우려해 결혼식을 재촉하는 바람에, 둘은 앙리 2세의 사망 전날 눈물 속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부부의 자녀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유일했다.
이후 프랑스 점령으로 망가진 사보이아 공국을 복구하는 것으로 치세 대부분을 보냈다. 1561년 공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고, 1563년에는 프랑스 침공에 노출된 샹베리에서 알프스 산맥 뒤편에 있는 토리노로 천도하여 프랑스의 위협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이제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가문은 본격적으로 이탈리아화하여 이탈리아 역사에 전면으로 등장했다. 이외에도 플랑드르에서의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배워와 피에몬테 출신의 군사조직을 조직하여 공국의 방위를 용병이 아닌 상비군에게 맡겨 국방을 튼튼히 다졌으며, 오랜 전란으로 제기능을 못한 토리노 대학교를 복원하고 각 지역에서 열리던 신분제 의회를 토리노에서 열리도록 통합하여 중세 봉건 국가에 가까웠던 사보이아 공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해 힘썼다.
말년에는 텐다(Tenda)[4] , 오넬리아(Oneglia) 등을 병합하였으나 숙원이었던 살루초 후국 병합까지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1580년 간경화로 사망했으며 토리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기타[편집]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천도한 이후인 1578년, 사보이아 가문이 대대로 샹베리 성 예배당에 보관하던 수의를 토리노 대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수의는 후대에 토리노의 수의(Sindone di Torino)로 알려진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03:41:52에 나무위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는 카를 5세의 황후인 포르투갈의 이자벨과 친자매 관계였다. 둘 다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딸.[2] 여담으로 마르그리트의 할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할아버지 필리포 2세의 장녀였다. 5촌 간의 근친혼이었던 셈이다.[3] 사족으로, 이 사람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영국의 명장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조상이다.[4] 현재 프랑스 탕드(Tende). 1947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