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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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체하여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 생애[편집]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와 사보이아의 엔리케타 아델리이데(Enrichetta Adelaide di Savoia 1636~1676)의 맏아들이다. 형제로는 프랑스의 왕세자비인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3] , 나중에 쾰른 선제후가 되는 요제프 클레멘스,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Ferdinando de' Medici 1663~1713)와 결혼하는 비올란테 베아트릭스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물려받았으며 제2차 빈 공방전과 그로 인해 촉발된 대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685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von Österreich 1669~1692)와 결혼하여 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 von Bayern 1692~1699)를 얻었다. 9년 전쟁에서 제국군으로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1692년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후사가 없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는 강성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대신 부르봉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 모두와 적당히 가까우면서도[4] 세력은 고만고만했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스페인을 물려주려 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6살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스페인 제국의 일부를 물려받겠다는 그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1694년에 재혼한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의 친정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차기 국왕 선거에 도전할 수도 있었으나[5] 일단은 서유럽에 남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대체하려는 야심을 품고 루이 14세의 편에 참전했으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 존 처칠과 사부아 공자 외젠[6] 에게 먼지나게 털리며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바이에른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 사이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와 팔츠 선제후국에 탈탈 털린 뒤였다.
프로이센 국왕이 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영국 국왕이 된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를 보며 희망을 버리지 않은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은 1724년 동생인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 트리어 선제후 프란츠 루트비히와 손잡아 비텔스바흐 가문 연합을 만들었다. 1726년 2월 26일 뮌헨에서 사망했고, 그가 만든 비텔스바흐 연합은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들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빛을 보았다.
3.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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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여서 Max Emanuel로 표기하기도 한다.[2] 쾰른 선제후.[3] 루이 14세의 적자 그랑 도팽 루이의 아내로 프티 도팽 루이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어머니다. 프랑스어로는 마리 안 빅투아르.[4]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합스부르크 왕조 레오폴트 1세의 사위이고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누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세자비였다.[5] 장인인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처남인 야쿠프를 지지했으나 장모인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은 띨띨한 아들 야쿠프 대신 야망있는 사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을 차기 국왕으로 밀면서 서로 다투었다. 결국 장모의 직감은 틀리지 않아 얀 3세 사후 야쿠프는 국왕 선거에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패배했다.[6] 사부아 공자 외젠과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은 6촌 친척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