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테오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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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
Karl Theodor, Kurfürst von Bay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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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4년 12월 11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브뤼셀 드로헌보스
사망
1799년 2월 16일 (향년 74세)
바이에른 선제후국 뮌헨 레지덴츠
재위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
1742년 12월 31일 ~ 1777년 12월 30일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선제후[1]
1777년 12월 30일 ~ 1799년 2월 16일
배우자
팔츠줄츠바흐의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여백작
(1742년 결혼 / 1794년 사망)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여대공
(1795년 결혼)
자녀
카롤리네 프란치스카 도로테아(사생아), 카롤리네 요제파(사생아), 카를 아우구스트(사생아), 엘레오노레 카롤리네(사생아), 프리데리케 카롤리네(사생아), 카롤리네(사생아)
아버지
줄츠바흐 궁정백 요한 크리스티안
어머니
마리 앙리에트 데 라 투르 도베르뉴
형제
마리아 아나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라는 소동 끝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 이후 갈라졌던 비텔스바흐 가문팔츠 선제후국바이에른 선제후국을 통합했다.


2. 생애[편집]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브뤼셀에서 태어났으며 본래는 가계가 무수히 많았던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도 계승 서열이 낮아 그가 팔츠 선제후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카를 3세 필리프가 후사를 두지 못하면서 카를 3세의 맏손녀였던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Elisabeth Auguste von Pfalz-Sulzbach 1721~1794)와 결혼[2]했던 그가 계승서열 1순위로 순식간에 뛰어 올랐고, 카를 3세가 1724년 사망하면서 팔츠 선제후가 되었다.

팔츠 선제후로서 정치적인 능력은 좋지 못했으나 특유의 예술 감각을 통한 후원으로 귀족들의 신망을 얻었고 학술 아카데미를 세우는 등 학문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777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마지막 남계였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죽자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계승자가 되었다.[3] 하지만 그에게는 사생아만 있어서 적자가 없었다는 약점이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이를 파고들어 황제의 권한으로 사생아의 상속을 인정하고 팔츠 선제후국과 오스트리아월경지인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4]를 합쳐 새로운 군주국을 승인하는 대신 니더바이에른을 넘길 것을 강요했고, 처음에는 바이에른에 별 관심이 없었던 카를 테오도르는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후임자로 내정되었던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미망인 작센의 마리아 안나와 바이에른 지역 귀족들마저 카를 테오도르의 매국 행위에 반발해 결국 프로이센-작센과 오스트리아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정작 전쟁에서 세 나라는 별로 싸우지도 않고 감자 털기에 바빴고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가 개입하여 체결된 테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가 브라우나우암인을 위시한 인피어텔(Innviertel) 지역만 가져가기로 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거주지를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만하임에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 뮌헨으로 옮겼음에도 바이에른에서의 민심은 영 좋지 못했고 가뜩이나 정치적인 역량은 바닥을 기어 평판은 최악을 달렸다. 치세 도중에도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바꿔 먹으려다가 적발되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 전쟁 중에는 프란츠 2세에게 바이에른을 오스트리아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하기도 하는 등 삽질만 골라서 하다 1799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이에른 시민들은 거리에 나서 며칠 동안 축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바이에른에서는 암군이었다. 팔츠-바이에른은 카를 아우구스트의 동생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의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물려받았다.

3. 기타[편집]


하이델베르크의 카를 테오도르 다리(Karl-Theodor-Brücke)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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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츠 선제후국과 통합.[2] 살리카법 때문에 어차피 여계 상속은 의미 없었고, 팔츠줄츠바흐 분가가 당시 살아남았던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분가보다 맏이에 가까웠다.[3] 다만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정확히는 오스나브뤼크 조약)에서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어느 한쪽의 가계가 소멸해서 다른 가계가 물려받을 경우 선거권을 통합하여 황제 선거에서 2표를 행사하는 것을 막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팔츠-바이에른 선제후로서 1표의 선거권만 부여되었다.[4] 알자스슈바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였는데, 알자스 영토는 프랑스에게 야금야금 뜯겨 18세기 무렵에는 프라이부르크 일대의 슈바벤 영토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