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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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로트링겐의 공자
카를 알렉산더
Prinz Karl Alexander von Lothr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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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랑스어
샤를 알렉상드르 드 로렌
(Charles Alexandre de Lorraine)
독일어
카를 알렉산더 폰 로트링겐바르
(Karl Alexander Prinz von Lothringen und Bar)
출생
1712년 12월 12일
로트링겐 공국 뤼네빌
사망
1780년 7월 4일 (향년 67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브라반트 공국 테뷰런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여대공[1]
(1744년 결혼 / 1744년 사망)
아버지
로트링겐 공국 공작 레오폴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
형제
레오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루이즈 크리스틴, 마리 가브리엘 샤를로트, 루이, 조제핀 가브리엘, 가브리엘 루이즈, 레오폴 클레망, 프란츠 1세, 엘레오노르, 엘리자베트 테레즈, 안 샤를로트
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2.4. 이후의 삶



1. 개요[편집]


로트링겐 태생의 오스트리아군 원수 및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2] 총독.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행정 능력도 우수한 편이었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연거푸 패배했다.

뛰어난 군사 기동능력을 갖추었으나 전장에서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평이 갈리는 인물이다.


2. 일생[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샤를 알렉상드르(카를 알렉산더)는 로트링겐 공작 레오폴트 요제프 카를과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의 다섯 번째 아들[3] 이다. 1716년, 갓 4살이 된 그는 삼촌 카를 요제프의 뒤를 이어 로트링겐 보병 연대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1729년 4월 5일, 황금 양털 훈장을 수여받았고, 1736년 그의 셋째 형 프랑수아 에티엔[4]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자 형과 함께 으로 갔다. 카를 알렉산더는 곧 오스트리아군 대령으로 임명되었고 1737년 8월 6일 소장으로 진급한 뒤 형과 함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1738년 1월 20일 중장으로 승진한 카를 알렉산더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중 코르니아 전투에서 후위대를 맡아 아군의 철수를 훌륭하게 엄호했고, 뒤이은 메아디아 전투에서는 앞장서서 적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 세인의 찬사를 받았다. 1739년 7월 22일, 카를 알렉산더는 그로츠카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지휘했으나 아군의 대패를 막지 못하고 그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편집]


1740년 11월 22일,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의 시동생인 카를 알렉산더를 제국군 원수로 승진시켰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는 1741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이 되었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발발 때문에 1744년까지는 부임하지 못했다. 1741년 11월 바이에른에서 프란츠 1세 휘하의 군대와 합류한 카를 알렉산더는 1742년 초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왕국 남부 지역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모라비아를 통해 슐레지엔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적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라는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의 권고에 흔들려 3주 동안 출발을 지연시키다가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의 독촉을 받고 나서야 출격했다. 그러나 그가 출발을 늦추는 사이 오스트리아군의 의도를 간파한 프리드리히 대왕이 선제 공격에 나섰고, 카를 알렉산더는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처음으로 맞붙었으나 1만 9천 명의 사상자와 대포 18문을 상실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패배로 수도 빈까지 프로이센군의 가시권에 들자 어쩔 수 없이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지배하는 걸 용인하는 조건하에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는 브라운 장군의 권고에 따라 프랑스군과 맞서기 위해 군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1743년 바이에른 전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칭한 카를 7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바이에른 전역을 유린했다. 다만 실제 지휘는 브라운 장군 등 유능한 부관들이 맡았고 카를 알렉산더는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했을 뿐 전투 자체를 지휘하진 않았다. 심지어 일설에 따르면 데겐도르프 전투에서 브라운 장군이 바이에른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을 때 카를 알렉산더는 오랫동안 낮잠을 잤다가 전투가 끝난 후에야 전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어쨋든 바이에른을 성공적으로 굴복시킨 카를 알렉산더는 7월 하나우에서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인 조지 2세와 만났다. 조지 2세는 그에게 연합군을 결성해 자신의 지휘를 받을 것을 권유했으나 카를 알렉산더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영국-하노버 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했고, 카를 알렉산더는 이후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오스트리아 궁정과는 상의도 없이 바이에른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이 오스트리아에게 별로 이롭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정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1744년 1월 7일, 카를 알렉산더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다.[5] 그러나 신혼 생활을 채 즐기지도 못한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또다시 보헤미아를 침공하자, 카를 알렉산더는 서둘러 병사들을 끌어모아 보헤미아로 진군해 트라운 장군의 조언을 받아들여 적과 정면전을 회피하고 요새에 틀어박혔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를 알렉산더가 싸워주질 않는데다 보헤미아의 민심이 매우 험악하자 슐레지엔으로 철수했고, 카를 알렉산더는 그런 적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내가 12월 16일 브뤼셀에서 출산 도중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다.

1745년 슐레지엔 탈환 작전에 착수한 카를 알렉산더는 6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격돌했으나 13,730명의 사상자를 기록하는 대패를 당했다. 이후 9월 30일 자신을 추격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회심의 역습을 가했으나 역시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뒤이은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전쟁 평의회는 이러한 카를 알렉산더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불신하며 그를 물러나게 할 것을 권고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묵살했다.

1746년 카를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2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에 맞서 영국-하노버-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 9만 7천명을 통솔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전역에서 모리스 드 삭스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게 시종일관 밀렸는데, 특히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서는 적이 공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가 프랑스군이 아군의 좌익을 맡은 네덜란드군에 공세를 퍼부어 제압해버리는 걸 막지 못했다. 결국 카를 알렉산더는 로쿠스 전투 후 리에주 등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대부분이 프랑스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2.3. 7년 전쟁[편집]


1748년 전쟁이 종식된 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랑스로부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돌려받았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1756년까지 활동하며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해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던 1757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카를 알렉산더를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가 4월 30일에 보헤미아에 도착했을 때, 프로이센군은 이미 보헤미아 침공을 개시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프라하에서 병력을 끌어모으면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군단의 합류를 기다렸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오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고 5월 6일 프라하 전투를 개시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전투 도중 기절해 프라하 요새로 이송되었고, 그 대신 브라운 장군이 지휘해 프로이센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으나 도중에 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바람에 통제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군이 브라운 장군의 복수를 하겠다며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가 프로이센군에게 측면이 공략당하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는 요새 수비에 전념하다가 다운 백작이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격파하고 프로이센군이 본국으로 철수를 개시하고 나서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57년 가을,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 공세를 개시했다. 카를 알렉산더 휘하의 유능한 지휘관들은 그에게 승전을 여러 차례 안겨줬다.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은 11월 12일 슈바이트니츠를 점령했고, 다운 백작과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장군은 11월 22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를 공략했다. 그러나 카를 알렉산더는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완패당했고, 기껏 탈환했던 브레슬라우도 프로이센에게 도로 빼앗긴 뒤 보헤미아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질 수 없는 싸움을 졌다"는 문책을 받은 그는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났고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가 신임 원수로 취임했다.

2.4. 이후의 삶[편집]


카를 알렉산더는 군직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복귀한 후 선정을 베풀었다.[6] 그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으며 테르부렌 성에 기발한 궁정을 지었다. 또한 1761년에는 튜튼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도 했다. 1780년 7월 4일 카를 알렉산더는 테르부렌 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68세. 그의 시신은 브뤼셀의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Cathédrale Saints-Michel-et-Gudule/Kathedraal van Sint-Michiel en Sint-Goedele)에 매장되었고 심장은 코르델리에 예배당에 보관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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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2] 현재의 벨기에룩셈부르크.[3] 장남 레오폴드와 차남 루이는 유아기에 요절했고 삼남 레오폴드 클레망 역시 일찍 사망해서 프랑수아 에티엥과 샤를 알렉상드르가 사실상 장남과 차남이었다.[4] 독일어로는 프란츠 슈테판.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5] 형인 프란츠 1세와 형수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 당시에 드문 연애결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아 안나와 카를 알렉산더 역시 서로 사랑해서 연애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아 안나의 아버지 카를 6세는 카를과 마리아 안나까지 결혼해서 로트링겐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겹사돈이 된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이 몽땅 로트링겐 가문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겨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카를 6세 사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한 뒤, 어느정도 국정이 안정되자 카를과 마리아 안나는 무사히 결혼할 수 있었다.[6] 그와 그의 형이던 프란츠 1세는 루이 14세의 조카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유년 시절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다. 심지어 자신은 독일 귀족인데 본명이 프랑스어일 정도. 어쨌든 프랑스어에 유창했기 때문에 프랑스어권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통치하기에 수월했다.[7]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 장례 방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