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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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헝가리 왕국 러요시 2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María de Austria

파일:오스트리아의 마리아.jpg}}}
이름
스페인어
마리아 데 압스부르고 이 트라스타마라
(María de Habsburgo y Trastámara)
헝가리어
오스트리아의 마리어
(Ausztriai Mária)
출생
1505년 9월 15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브뤼셀
사망
1558년 10월 18일 (53세)
스페인 시갈레스
재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1531년 1월 ~ 1555년 10월
배우자
러요시 2세 (1515년 결혼 / 1526년 사망)
아버지
펠리페 1세
어머니
후아나 1세
형제
레오노르, 카를 5세, 이사벨, 페르디난트 1세, 카탈리나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Signature_Marie_de_Hongrie.svg.png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왕비
2.3. 헝가리의 섭정
2.4. 네덜란드의 총독
2.5. 말년
3. 가족관계
3.1. 조상
4. 여담



1. 개요[편집]


펠리페 1세후아나 여왕의 3녀. 헝가리 왕국러요시 2세의 왕비이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505년 9월 15일 펠리페 1세후아나 여왕의 3녀이자 다섯번재 아이로 태어났다. 매우 난산으로 태어나서 어머니 후아나 여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한다. 5일 뒤인 9월 20일에 세례를 받았고, 이름은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의 이름을 따 '마리아'로 지어졌다. 대부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였다.

고작 1살이던 1506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아를 헝가리 왕국울라슬로 2세의 장남과 결혼시키고, 마리아의 오빠 중 한명[1]과 울라슬로 2세의 장녀를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 결혼을 약속할 때 울라슬로 2세의 장남 러요시는 태어나기도 전이었다(...)[2]

1506년 아버지 펠리페 1세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 후아나 여왕의 정신건강은 매우 악화됐다. 페르디난트카탈리나를 제외한 마리아와 형제들은 네덜란드에서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보살핌을 받았다.


2.2. 왕비[편집]


1515년 7월 22일, 마리아는 1살 연하의 러요시의 슈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마리아가 겨우 10살이었기 때문에 결혼 후 몇년간은 남편과 함께 살지 않았다. 마리아는 빈에 머물며 오빠 페르디난트와 결혼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와 여러 교육을 받았다.

1516년 시아버지 울라슬로 2세가 사망하여 러요시와 마리아는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과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어렸기 때문에 올케 언너와 함께 인스브루크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춤과 음악 등을 배웠고 많은 인문학자들과 교류했으며, 무기를 다루는 법까지 배웠다.

파일:Marie_de_hongrie_1520.jpg}}}
1520년의 마리아
마리아는 1521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로 향했고, 그곳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공식적으로 왕비가 되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마리아와 러요시 2세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3] 마리아는 러요시 2세보다 훨씬 활기차고 정신적으로도 강인했는데, 국민들은 왕비에 비해 무능한 국왕을 비판하곤 했다.

마리아는 가톨릭 교도였으나 마르틴 루터와 교류했고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오빠 페르디난트 1세가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교류를 멈춰야 했다. 루터교회에 대한 관심은 언니 이사벨과 형부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러요시 2세가 국왕이 되었을 때 헝가리 왕국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데다 1525년에는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가 쳐들어왔다.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쉽게 헝가리의 방어선을 함락시켰고 러요시 2세는 2만 대군을 끌고 맞섰으나 2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전멸했다. 러요시 2세는 얼른 도망쳤지만 말에서 미끄러져 익사하고 말았다. 마리아는 죽을 때까지 남편을 애도했으며 절대 재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다스리는 오스만 헝가리, 서포여이 야노시가 다스리는 동헝가리 왕국, 그리고 페르디난트 1세가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삼분할되었다. 또한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 또한 마리아의 오빠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2.3. 헝가리의 섭정[편집]


헝가리 왕국이 삼분할된 이후 페르디난트 1세는 마리아를 합스부르크 헝가리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마리아는 이를 원치 않았으나 1527년에 페르디난트 1세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치를 때까지 섭정직을 수행했다.

남편이 사망한 이후 마리아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외로움을 느꼈다.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제임스 5세와 재혼하는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마리아는 러요시 2세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재혼하지 않았다. 이후 오빠 카를 5세가 팔츠의 프리드리히 공자[4]와의 재혼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2.4. 네덜란드의 총독[편집]


1530년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사망하여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카를 5세는 마리아를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카를 5세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중이었기 때문에 믿을 만한 가족을 각 나라의 통치자로 임명해야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는 달리 마리아는 총독으로 재임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총독이 된 지 단 4개월만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 "목에 밧줄을 감고 있는것 같다."고 언급했을 정도. 마르가레테는 융통성 있고 재치있었지만 마리아는 단호하고 권위주의적인 통치자였다.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면서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보살피고 있던 조카들인 도로테아와 크리스티나[5]의 후견인이 되었다. 카를 5세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카들을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마리아는 아직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며 이른 나이에 시집보내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도로테아는 한때 마리아와 혼담이 오갔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6]와 결혼했고 크리스티나는 밀라노 공국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마리아는 프랑스 왕국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형부 프랑수아 1세[7]와 조약을 맺기도 하였으나 결국 1537년에 전쟁이 일어났고, 1538년에는 겐트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반란은 1540년에 제압되었다.

1555년에 카를 5세가 제위에서 물러나기로 하자 마리아 또한 네덜란드 총독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카를 5세와 조카 펠리페는 반대했지만 마리아는 여성이라는 성별의 한계와 나이로 인해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에 미련을 갖게 될까봐 네덜란드를 떠나기로 하였다.


2.5. 말년[편집]


마리아는 사임한 이후 언니 레오노르, 오빠 카를 5세카스티야에서 살기로 했다. 어머니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카스티야에서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삶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1558년 언니 레오노르가 사망한 이후 마리아는 우울해했고, 카를 5세는 여동생에게 다시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는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조카 펠리페 또한 마리아가 돌아오길 바란다고 했다. 결국 마리아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1558년 9월 카를 5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충격을 받아 두 차례 심각한 심장마비를 겪었고,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못한 채 1558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유해는 바야돌리드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5년 후에 엘 에스코리알로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Maria of Austria)
펠리페 1세
(Felipe I)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포르투갈의 레오노르[8]
(Leonor of Portugal)
마리 드 부르고뉴
(Mary of Burgundy)
용담공 샤를[9]
(Charles the Bold)
부르봉의 이자벨
(Isabelle of Bourbon)
후아나 여왕
(Juana)
페르난도 2세
(Fernando II)
추안 2세
(Juan II)
후아나 엔리케스
(Juana Enríquez)
이사벨 1세
(Isabel I)
후안 2세
(Juan II)
포르투갈의 이자벨[10]
(Isabel of Portugal)


4. 여담[편집]


  • 미술 작품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얀 반 에이크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1]

  • 미남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펠리페 1세와 아름다웠던 어머니 후아나 여왕과는 달리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을 갖고 있었고 남성적인 외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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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을 약속할 당시 카를이 될지, 페르디난트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2] 러요시는 울라슬로 2세가 무려 50세에 낳은 첫 아들이다. 게다가 미숙아로 태어나서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았다.[3] 다만 러요시 2세는 버시 야노시라는 사생아 아들을 한명 낳긴 했다.[4] 나중에 형 루트비히 5세 사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가 된다.[5] 크리스티안 2세와 결혼한 언니 이사벨의 딸들이다. 크리스티안 2세가 폐위당하고 이사벨이 1526년에 사망하면서 마르가레테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6] 도로테아보다 무려 38살이나 연상이었다(...)[7] 언니 레오노르의 두번째 남편이다.[8] 두아르트 1세의 장녀이자 페르난도 1세의 외손녀이다.[9] 주앙 1세의 외손자이다.[10] 주앙 1세의 손녀이다.[11] 현재는 런던 영국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