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카지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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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1. 개요
2. 생애
2.1. 합스부르크 황가의 사위가 되다
2.2. 쓸쓸한 결혼 생활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차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남편이자 작센 공작


2. 생애[편집]



2.1. 합스부르크 황가의 사위가 되다[편집]


16세기 당시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남녀는 정략결혼이 당연하던 시대에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연애결혼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넓힌 걸 감안하면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크리스티나가 황녀였고 알베르토 본인이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4남이어서 작센 선제후국의 후계자도 아니었고 다른 작위도 없어서 일국의 황녀의 남편이 되기엔 처지는 조건이었는데도 자유연애 뿐만 아니라 결혼까지 가능했던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수많은 딸들 중 가장 총애했던 황녀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고 우울해하던 1765~1766년,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연애결혼을 허락하면 평생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다"고 속삭였다.

결국 그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받았다. 이것만으로도 행운인데 결혼하면서 막대한 지참금과 알베르토가 테셴 공작으로 임명되는 특권과 락센부르크의 대저택 등을 선물받았다.

알베르트 역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자리까지 받았다. 크리스티나가 알베르트보다 신분이 훨씬 높고 처가에서 여러 작위를 하사받았기에 크리스티나는 결혼 후에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성(姓)을 유지하였다.


2.2. 쓸쓸한 결혼 생활[편집]


크리스티나와 알베르토 두 사람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여러모로 편애와 특권까지 받았고 크리스티나는 자신과 같은 이름의 크리스티나란 딸을 낳지만, 난산으로 산모와 아기 모두 죽을 뻔 한다.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목숨을 건졌으나 딸은 다음 날 사망하였다. 이후 크리스타는 평생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아내의 동생이었던 레오폴트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를 대공을 입양하였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후 양자 카를이 테셴 공작위를 이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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