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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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
August II


출생
1670년 5월 12일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사망
1733년 2월 1일 (향년 62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재위기간
작센 선제후국 선제후
1694년 4월 27일 ~ 1733년 2월 1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697년 9월 15일 ~ 1706년 9월 24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709년 10월 20일 ~ 1733년 2월 1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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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
어머니 덴마크의 안나 소피
배우자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1693년 결혼 / 1727년 사망)
자녀
아우구스트 3세(적자[1]), 요한 게오르크 폰 작센(사생아), 모리스 드 삭스(사생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루토프스키(사생아), 마리아 안나 카타리나 루토프스카(사생아), 안나 카롤리나 오르젤스카(사생아)
형제자매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4세
가문
베틴 가문
종교
기독교 (루터교회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겸 작센 선제후로, 강건왕 아우구스트(der Starke)[1]라고 불렸다. 작센 선제후로써의 왕호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이다.


2. 상세[편집]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로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와 덴마크의 안나 소피 공주[2]의 차남이었기 그에게는 계승권이 없었다. 그러나 형 요한 게오르크 4세가 정부(情婦)와 놀아나다 천연두에 걸려 죽은 덕분에 작센 선제후로 즉위할 수 있었다. 작센 선제후로 만족한 형과 달리 야심만만했던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후원을 받아 전 국왕 얀 3세의 아들인 야쿠프 소비에스키를 밀어내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루터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이 때문에 아내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가 별거를 선언하고 신하들이 퇴위하라고 반발한 흑역사도 있었다. 크리스티아네는 남편의 즉위로 형식상 폴란드의 왕비가 되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남편의 권유를 거절하고 평생 폴란드 땅에 발을 딛지 않았으며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 작센은 독일 개신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작센 선제후는 개신교 선제후들 중 상석으로 제국의회에서 개신교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이 개종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가톨릭 신자가 제국의 개신교도를 대표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트 2세의 개종 때문에 베틴 가문에서 알브레히트계는 에른스트계와 달리 21세기 현재까지 가톨릭을 믿고 있다.

이명인 강건왕에 알맞게 힘이 장사였으며 동물 던지기[3]가 취미였다. 그리고 여자를 밝히고 정력도 장사여서(...) 수많은 사생아들을 두었는데, 어떤 기록에 따르면 무려 365명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신이 정식 자식으로 인정한 수는 11명 뿐이었다. 얼마나 여색을 밝히고 자식이 많았는지 자신이 하룻밤을 보낸 여성이 알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는 악소문도 있다.

하지만 강건왕이라는 별명과 달리 아우구스트 2세의 치세는 불안정했으며 지휘관으로써의 자질은 가히 동유럽 최고로 형편없어서 러시아에 의존하여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였다. 오스만 제국과의 대 튀르크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4], 본인이 폴란드 왕위 선출 조건으로 내건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탈환해보겠다고 나서 대북방전쟁을 일으켰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에게 탈탈 털렸다. 크라쿠프까지 함락시킨 스웨덴군이 아우구스트 2세가 도망간 본토 작센의 라이프치히까지 쳐들어오자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 왕위에서 퇴위하고 작센 선제후 자리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 평화를 맺었고 폴란드 왕위는 친 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1세가 차지하였다. 그러나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이 대승을 거두자 그에 힘입어 폴란드 국왕으로 복위했다. 이때 표트르 대제한테 자기가 아끼는 포르노 그림을 선물로 보내는 기행을 벌였으나, 표트르도 성격이 별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어서 자강두천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좋아했다고. 참고로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도 이런걸 보냈는데[5] 당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일단 표면상으로는 화를 냈지만 이상하게 조용히 받아들였다.[6]

치적은 외치보다는 내치에 집중되었는데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드레스덴을 북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육성하였다. 오늘날 드레스덴의 관광지 대부분이 아우구스트 2세가 조성한 것들이고 1727년에 세계 최초의 공공 박물관[7]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의 박물관은 소수의 초청자들에게만 공개되는 개념이었기에 의의가 크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유럽의 도자기 기술의 발달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일본과 중국산 도자기에 심취하였으며,[8] 그가 수집한 컬렉션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왕이 사랑한 보물' 특별전으로 대한민국에서 공개된 바 있다. 또한 수입 도자기를 모방하여 백자의 자체 생산에도 노력하여 유명한 마이센 자기의 기틀을 닦았다.

작센의 군주로는 호평을 받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로는 악평을 받는다. 원래 아우구스트 2세는 작센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묶어서 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태를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스웨덴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다가 오히려 연전연패하여 대홍수 이후로 한번 더 풍비박산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때문에 원래도 높은 편이 아니었던 지지도는 더더욱 떨어졌고 귀족들이 사사건건 그의 정책에 반대할 지경이 되었다. 나중에는 아우구스트 2세도 상심해서 "폴란드를 팔아버리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고 하니 뭐...

참고로 아우구스트 2세는 수많은 사생아 중 8명만을 적자로 인정했는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삭스 백작 모리스[9]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작센 군의 지휘관으로서 활동한 요한 게오르크 폰 작센이 이렇게 인정받은 사생아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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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어로는 August Mocny[2] 덴마크-노르웨이 왕국프레데리크 3세의 딸.[3] 축제에서 여우 647마리, 토끼 533마리, 오소리 34마리, 살쾡이 21마리를 던졌다고 한다.[4] 그나마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휘관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 덕분이었으며 폴란드는 숟가락만 얹었다. 어쨌거나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미하우 1세때 빼앗겼던 포돌리아를 되찾았다.[5] 프로이센에는 누드 여성 그림을 보냈다.[6]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또한 괴상한 성격과 가치관의 소유자로 유명하다.[7] 유명한 대영박물관은 1759년 개장했다. 다만 '공공 전시'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 두 번째인데, 바티칸에서는 1506년부터 라오콘 상을 대중에 개방하였기 때문이다.[8] 특히 중국산 청화백자에 환장하여 근위용기병 1개중대와 청화백자를 바꿀 정도였다.[9] 삭스는 프랑스어로 작센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