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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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 스페인 등 당대 열강들과 맞서 싸웠으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인에게는 외세의 압제에 맞서는 민족투사로 그려지면서 '대공'(il Grande)으로 불리었다.
2. 생애[편집]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프랑스의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Valois 1523~1574)[1] 의 유일한 자식이다. 1580년 부친의 뒤를 이어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이 되었으며 158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딸 카탈리나 미카엘라 공주와 결혼했다.
1588년, 프랑스가 위그노 전쟁으로 약해진 틈을 타 프랑스의 보호를 받던 살루초 변경백국을 점령했다. 위그노 전쟁을 마무리한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살루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하면서 프랑스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스페인의 도움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1598년 베르뱅 조약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이 조약은 살루초 문제에 관해 거론하지는 않았다. 결국 1601년 리옹 조약을 체결하여 살루초의 점유를 인정받는 대신, 과거 조상들이 손에 넣었던 브레스(Bresse)와 뷔제(Bugey), 젝스(Gex) 지역[2] 을 프랑스로 양도했다.
1602년, 제네바를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제네바에서 조롱거리만 되었다.[3]
1610년, 스페인을 상대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아들 비토리오 아메데오를 루이 13세의 누이 크리스틴 마리(Christine Marie de France 1606~1663)와 결혼시켰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1625년에 벌어진 제노바 공화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1628년, 만토바 계승 전쟁이 벌어지고 프랑스군이 카살레 몬페라토(Casale Monferrato)를 점령하자 스페인 편을 들었고,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피에몬테를 점령하자 다시 프랑스 편을 들었다. 스페인이 침략군을 보내자 이번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정책은 후계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에게 큰 부담을 지웠다. 163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자녀[편집]
이외에도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4.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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