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울 레이더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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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단
2. 1990~1995시즌
3. 1996~1997시즌
4. 1998~1999시즌
5. 2000년 1월 7일: 해체



1. 창단[편집]



1985년 빙그레 이글스가 7구단 시대를 열자, 한국야구위원회는 일정의 불균형 등을 개선하기 위해 제8구단 창단을 추진했다. 이 때 입찰에 참여한 기업은 마산시를 중심으로 한 한일합섬[1]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미원[2]-쌍방울[3]컨소시엄. 일반 여론은 영남 지방으로 2 팀이 있기 때문에 전북에 8구단을 창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이 높았다.

그런데 전라북도에 제8구단을 창단하겠다는 KBO의 계획이 알려지자 전라도 지역 연고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구단은 물론 호남 야구팬들이 격렬히 반발하며 들고 일어났다.[4] 호남 지역민들은 쌍방울의 제8구단 계획은 영남 정권의 음모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5] 해태가 왕좌의 자리를 지키며 호남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자 이를 꼴사납게 여긴 영남 정권이 전라북도에 신생 구단을 창단하여 호남을 남북으로 분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호남의 맹주였던 해태 입장에서도 전북 신생팀 창단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북 야구의 핵심이던 군산상고는 해태 선수단의 중심 축이자[6] 굳건한 팜이었고 전주구장에서 열리는 분산 홈경기의 승률도 유독 높았기 때문에[7] 전북을 신생팀에 내주면 해태 입장에서도 손해가 크다는 판단이 섰다. 이에 해태 타이거즈와 호남 지역팬들은 신생구단 창단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호남지역 여론이 신생구단 창단 비토론으로 들끓자 정치권에서도 제8구단 창단 반대에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정치권으로부터 신생 구단 창단을 중단하라는 압력이 KBO에 이어졌다.

제8구단 창단을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이용일[8] 당시 KBO 사무총장은 호남 지역민들의 극심한 반대로 쌍방울 창단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호남 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차지하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에게 직접 읍소했다.[9] 이에 김대중 총재는 신생팀을 전라북도에 유치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러자 해태 구단과 호남 사람들의 반대는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이후 8구단의 창단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결국 미원-쌍방울 컨소시엄이 제8구단 창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쌍방울이 미원과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하며 쌍방울 단독으로 제8구단을 창단하게 된다. 훗날 밝혀진 얘기이지만 전주중-전주고 출신으로 야빠였던 이의철[10] 당시 쌍방울 사장이 야구단을 창단하고 싶지만 자본금 50억 원이 되지 않는 회사의 사정 때문에 미원의 이름을 팔아서 창단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광역연고제였기 때문에 전라도 단일 연고를 가지고 있던 해태 타이거즈에 연고지 분할 배상금 10억원을 지불하고 전라북도 연고를 구입하였다.


2. 1990~1995시즌[편집]



1990년 3월 31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식 및 전북도민 환영대회 주요 장면[11]

마침내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창단된다. 창단 감독은 김인식. 1990 시즌 1년 간은 2군 리그에 참여한 뒤, 1991년 4월 5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열린 빙그레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본격적으로 1군 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이 경기에서 11-0으로 대승을 거뒀는데 당시 개막전 최다 점수차 완봉승이었다.[12][13] 이에 힘입어 팀 사상 첫 시리즈부터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다.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홈 개막전은 그 해 4월 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라진 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인 '모기업이 약하다'는 부분이 불안을 자극하였고 이 부분은 뒤에 "빤쓰 팔아 팀 운영한다"는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연고지 측면에서도 전라북도 관내에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전주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2개뿐으로[14] 군산상고가 아무리 야구 명문이라 해도 연고지 선수만으로는 야구 팀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다 보니 전술한 대로 KBO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전력 약화를 기대하며[15] 창단하게 했다는 루머도 나돌았다. 쌍방울 구단 이사였던 공천섭민주정의당 재정위원 겸 지구당위원장이기도 해서 당시 민주당은 쌍방울의 창단을 호남 민심 회유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1군 리그 참가 1년을 앞둔 1990년 6월 21일 전주에서 군산으로 훈련하러 가던 2군 선수단 버스가 번영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운전기사와 트레이너가 사망하고 선수 전원이 부상을 당했으며[16] 1991년 9월 17일에는 임신근 수석코치가 심장마비로 타계하기까지 한다.... 어찌 보면 앞으로 팀의 비참한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신인급 선수 수급도 쉽지 않았지만 전북지역 팬들에게 어필할 만한 스타 선수를 구하는 것도[17] 어려웠다. 이 당시 전북지역 출신 유명 선수들은 대부분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었다.[18] 쌍방울 창단 당시 해태나 타 팀에 있던 전북 출신 선수들은 김일권, 김성한, 김평호, 백인호, 조계현, 정명원 등이었는데[19] 이들은 당시 선수단에서도 말년에 속했거나[20]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아서[21] 해태가 쉽사리 놔주지 않았다. 결국 1989년을 끝으로 은퇴한 완주 출신 김준환을 타격코치로 영입하고[22] 해태에서 백업 외야수로 뛰던 군산 출신 김평호를 데려오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다.[23] 따지고 보면 구단 창단 당시 쌍방울에 합류한 기존 선수 중에서도 전주시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선수진이 약한 상태에서, 1991년 이후 신인 선수 지명도 거듭되는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이미 1991년 말 드래프트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이 당시 쌍방울 1차 지명 선수가 방천화극방극천으로, 타 팀 지명자들의 네임밸류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현장 분위기도 의외의 지명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팜의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봤고...[24] 심지어 양준혁이 신인 지명에서 쌍방울에 2차 1순위로 임창식과 함께 낙점되자, 상무를 간 뒤 삼성 라이온즈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군 생활을 하다가 기어이 삼성에 1차 지명을 받아 도주탈주한다. 결국 다른 팀에서 방출된 한물간 선수들로 팀을 운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를 들어 왕년의 해태 타이거즈 우승 포수였던 장채근, 해결사야왕 한대화, 독일병정 박노준, 독종 김광림, 2루수 최초 홈런왕 김성래, 학다리 신경식 등이 여기에서 은퇴하거나 다시 한 번 부활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1991년 1군 첫 시즌에서 예상을 깨고 승률 4할 이상(.425)을 기록하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OB 베어스를 제치고 LG 트윈스와 공동 6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조규제는 방어율 2위에 구원왕, 김기태는 홈런과 타점 2위를 기록하며 신인왕은 쌍방울 집안싸움이었고 결국 신인왕은 조규제가 가져갔다. 이 때의 기록은 역대 창단 팀이 1군 진입 첫 해에 기록한 최고 승률로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1992년에는 주력 선수들이 부상과 군대 문제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31홈런을 친 김기태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시즌이 끝나고 성적 부진에 따른 책임을 물어 김인식 감독이 물러나고 신용균 태평양 돌핀스 투수 코치가 사령탑에 올랐다. 그러나 감독 한 명이 바뀐다고 성적이 오를 일은 그리 많지 않은 법. 1993년도 삼성과 치른 개막전에서 0대 17로 참패하는 등 시즌 7위에 머물렀고 신용균 감독은 1시즌 만에 사퇴했다. 빈약한 구단의 재정 상황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1군 진입 원년 이후로는 되려 꼴찌로 떨어진 뒤로는 꼴찌이거나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성적이었다. 1994년에는 김기태가 25홈런을 기록하며 왼손 타자로는 최초로 홈런왕에 올랐고, 1995년에는 시즌 개막 4연승을 달리며 기대를 모으지만 갑작스러운 12연패 끝에 꼴찌로 추락해 버리는 아픔을 겪는다.DTD OB에서 이적한 김광림이 타율 1위(0.337)를 차지한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단 이후 68788이라는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는 만년 꼴찌팀.

여기에는 팀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8구단 드립은 핑계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만든거 아니냐부터 주변에 해태 팬들 많으니까 이 팀은 해태 2중대가 딱 어울린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실제로 이 기간동안 전주에서의 인기는 해태보다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퇴출당한 선수들이 모인 구단인 만큼 처음 쌍방울에 자의건 타의건 입단하게 된 선수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팬들부터 선수들까지 광범위하게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던 팀. 암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원형이 1993년 4월 30일 OB를 맞아 단 한개의 볼넷만을 허용하는 완벽한 투구로 역대 7번째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유일하게 볼넷을 얻은 OB 김민호도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아웃되어 이날 OB 선수 가운데 2루를 밟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투구 수 96개 탈삼진 6개 내야 땅볼 12개 내야플라이 3개 외야플라이 5개였다.


3. 1996~1997시즌[편집]


그동안 야구단을 방치해왔던 쌍방울 그룹은 1995년 시즌 종료 후 드디어 야구단에 본격적인 투자를 결심했다. 우선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전년도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을 스카우트 자금으로 배정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다. 대대적인 선수단 충원으로 1997년 쌍방울은 전체 8개 구단 중 연봉 총액 1위를 기록했다.[25]

사실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에도 쌍방울의 전력은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투수력은 하위권이었지만 타격은 중상위권의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 타격 지표들을 보면 1995년 팀 타율, 팀 홈런이 모두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력에 비해 팀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투수 문제도 있었겠지만 현장 코칭스태프의 능력 부족에 기인한 바가 컸음을 암시한다.

우선 김성근 감독은 최소 60승을 달성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60승은 전년도 5위였던 삼성이 기록한 승수. 일단은 만년 하위팀으로 패배의식에 찌든 선수단에게 승리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 1차적으로 중위권 도약을 목표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이 때는 FA2차 드래프트처럼 외부에서 전력 보강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혹독한 훈련으로 전력 향상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하면 미친 짓이라고 욕먹지만 1990년대 프로야구는 이런 방법이 아직까지 먹혔던 시대다.[26] 쌍방울의 중심 타자 중 한 명이었던 심성보"상상도 못할 훈련이 계속됐다. 타자들은 손바닥이 찢어져 스윙할 수 없는데도 감독님 앞에서 다시 수천 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내야뿐 아니라 외야 펑고도 하루 1천개 이상씩 받았다. 오죽 힘들었으면 휴식일에도 어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만 무리하게 놀아도 다음날 몸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겨우내 흘린 구슬땀은 시즌 성적으로 나타났다. 4월 9승 5패, 5월 10승 12패로 5할 싸움을 했다. 6월 초반 10경기에서는 2승 8패로 부진했지만, 이후로는 8연승을 하면서 진짜로 올해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7월에는 9승 9패로 잠시 숨을 골랐고, 8월에는 6월과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3승 6패로 부진했지만 14일부터 28일까지 무려 13연승을 거두면서 치고 올라갔다. 당초 목표였던 60승은 8월 30일에 이미 거두었으며 그 이후로도 9월에 9승을 보태면서 김성근 감독의 부임과 함께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1996년 0.563의 승률로 해태의 뒤를 이어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당당히 진출했다. 이런 환골탈태한 쌍방울의 모습을 보고 언론과 야구팬들은 경악했다. 홈 17연승의 신화도 이 시즌에 나온 것.

1996년 쌍방울이 승승장구하자 쌍방울에 대해 냉소적이던 전북 야구팬들의 마음도 달라졌다. 쌍방울 구단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관중이 들어온 해가 바로 1996년인데, 이 때 26만 5918명의 관중이 쌍방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월명 야구장에 모였다. 물론 수도권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관중 동원 실적이지만, 이 당시 전주 야구장의 경기당 최대 관중 수용 규모가 1만명에 불과했고, 연고지인 전주시의 인구는 55만명 대에 불과했으며, 쌍방울 팬들이 대부분이 거주하던 전북 북서부권(전주·군산·익산)의 인구를 싹싹 긁어모아도 140만 명 안팎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전북 야구팬들의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는 한 예로, 쌍방울 시절부터 팀과 같이 해 온 박철호 SK 와이번스 전 홍보팀장은 이 때를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전주구장에 암표장사가 나타났다. 이거 하나로 충분하다."라고 회고했다. 즉, 쌍방울이란 팀이 이때쯤 돼서야 전북 야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얘기.

김성근 감독이 약체팀을 강팀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혹독한 훈련도 있었겠지만 선수들에게 신뢰를 불어 넣어주면서 패배주의를 타파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보면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계속 불어넣어 주었고 마인드를 바꾸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8년 8월 OB에서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어 김성근 야구를 경험한 박상근은[27] "매정한 분 같지만 선수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고 밝혔다. 팀에서 야쿠르트 캠프에 선수를 파견한다고 해서 감독님한테 사비라도 괜찮으니까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감독님이 왜 가려고 하느냐고 해서 "저도 나중에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 야구를 꼭 경험하고 싶습니다."고 했더니 아무 말 않고 명단에 이름을 올려 주었다고 한다.

이 시즌에 돌격대의 돌풍을 주도한 것은 마운드였다.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린 선발투수는 성영재밖에 없었지만 올망졸망한 투수들을 잇달아 투입하는 인해전술식 마운드 운용이 빛을 발했다. 부상에서 돌아온 마무리 투수 조규제는 1.81의 평균자책점과 20세이브를 올리며 뒷문을 확실하게 걸어 잠갔고, 김기덕도 보직을 가리지 않고 힘을 보탰다. 그 외 삼성에서 온 김현욱오봉옥도 좋은 활약을 했다. 그 결과 창단 이래 5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 평균자책점이 3위(3.33), 4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 투수 총합 WAR[28]도 4위로 로 뛰어올랐다. 공격력도 팀 홈런은 58개밖에 치지 못하면서 꼴찌를 기록했지만 팀 득점과 출루율, OPS에서 2위를 기록했다.[29]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해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한 플레이오프에서는 게임 스코어 2:0에서 2:3로 사상 첫 리버스 스윕으로 탈락하면서 쌍방울의 첫 포스트시즌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1997년에도 돌격대의 전진은 계속됐다. 성영재, 박성기, 오봉옥 등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에서도 전년도보다 1승 더 많은 71승을 거두며 정규시즌 3위에 올랐다. 투수진에서는 김현욱이 시즌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3개 부문에서 1위를 하면서 대활약했고[30], 성영재. 김원형, 조규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타자들도 역시 그해 3관왕을 달성한[31] 김기태를 필두로 OPS .983을 기록한 박경완과, 3할 타율을 달성한 최태원이 전년도에 이어 활약했으며, 조원우, 심성보 등도 포텐을 터뜨렸다. 참고로 1997년에는 당해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엇비슷한 공격력을 보였으며[32] 팀 홈런, 타점, 득점은 뒤졌지만 오히려 타율, OPS는 해태를 앞지르기도 했다.[33] 이렇기 때문에 이 시즌에 대해서는 이 당시 선수들이나 많은 전문가들이 쌍방울이 한국시리즈에 올라갔다면 해태를 꺾고 우승했을 것이다란 평가도 있었다.

이 시즌에는 4월 9승 7패로 전년도와 비슷하게 시작했다. 허나 5월 11승 12패, 6월 8승 12패로 주춤했다. 7월에도 올스타전 이후 첫 시리즈에서 3연패로 시작하면서 불안했으나 월말에 5연승을 하면서 9승 1무 6패로 끝냈고, 8월 14승 9패, 9월 18승 1무 11패로 차곡차곡 승수를 쌓으면서 전년도의 성적이 플루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허나 이번에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시리즈 스코어 1:2로 탈락한다. 필승카드 김현욱이 1, 3차전에서 무너지며 패전 투수가 된 것이 뼈아팠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던 게, 그 해 삼성 상대로 5승 11패 2무로 크게 뒤졌다. 재미있는 점은 포스트시즌에서 쓴맛을 보여준 상대였던 현대 유니콘스삼성 라이온즈가 바로 이듬해인 1998년과 2년 뒤인 1999년에 박경완/조규제/김현욱/김기태로 대표되는 핵심 전력을 빼 가서 쌍방울을 몰락하게 했던 팀이라는 점.

사실 이 팀에는 가장 심각했고, 아니 우승팀이 되기에는 부적격한 문제점이 있었는데 바로 선발투수의 부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서는 S급 선발투수의 활약이 중요했으나, 1996년도에는 10승 성영재가 전부였고, 1997년도에는 평균 5이닝은 버텼지만 9승 9패를 거둔 김원형빼고는 아예 없었다. 그 문제점은 포스트시즌에서 드러났다. 성영재는 1997년에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상대로 1승을 거두었지만 이것이 쌍방울의 포스트시즌 유일한 선발승이었다. 그렇게 1996년에는 선발이 강한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배, 그리고 1997년에는 선발은 약하지만 타격은 넘사벽으로 강했고 무엇보다 에이스 김상엽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고, 쌍방울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였다.

이 시절 김성근 감독은 상당히 변칙적인 운영을 통해 성적을 거두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전술했듯이 1996년 정규 리그 2위인 팀 성적에도 불구하고 10승을 넘긴 선발 투수가 단 1명에 불과했다,[34] 1997년 김현욱의 구원승 20승[35]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이런 운용이 논란은 있지만, 애초에 선수단의 깊이가 얇았던 팀이 성적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는 의견도 꽤 많다.

혹자는 김성근 감독의 '감독으로서의 실력'은 1121을 이룩한 SK에서보다 쌍방울에서 더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김성근 감독 본인도 훗날 맡았던 팀 중 제일 애착이 가는 팀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쌍방울 레이더스'라고 답했을 정도로 리즈 시절로 여겼던 듯 하다. 물론 감독 혼자서만 이룬 성과라고는 할 수 없고, 이 문서를 비롯해서, 여러 기사나 자료에서 김성근 감독에 대해 과장되었거나 미화된 내용도 상당히 많으니 어느 정도는 걸러서 봐야겠지만, 적어도 이전의 쌍방울과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년 동안의 쌍방울은 달랐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 당시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 징크스에 시달리는 감독이었고 아직 그걸 깨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도 시즌은 쌍방울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1997 시즌의 쌍방울은 삼성, 현대를 제치고 팀 페이롤 1위팀이었으며,[36] 가난한 구단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만한 운영은 결국 외환위기 이후 부메랑으로 돌아온다.[37]


4. 1998~1999시즌[편집]


파일:attachment/쌍방울 레이더스/SBWRaiders.jpg
1997년 준플레이오프 도중 쌍방울의 부도 소식이 들려오자 쌍방울 팬들이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


1998년 9월 9일 KBS1 <사람과 사람들> 방영분

다음해는 기필코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던 1997년 말, 갑자기 IMF가 터지고, 무리하게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자금을 쓰게 되면서[38] 모기업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팀을 유지하기 위해 쌍방울은 KBO에 운영 자금 20억 원을 요청하게 된다. KBO는 구단주 회의를 통해 해당 자금을 대여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 되자 쌍방울은 어쩔 수 없이 선수를 팔아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된다. 팀의 투타 주축들이었던 김기태김현욱삼성으로, 박경완, 조규제, 김광림[39] 등은 현대로, 박성기롯데로, 김실OB로 이적하게 되는 등 팀의 중심 선수 상당수가 팀을 떠나게 된다. 이런 선수 파이어 세일은 1999년 말에 마일영 지명권까지 현대에 넘어간 이후 KBO의 쌍방울 선수 양도 자제 요청과 이미 팔아먹을 선수는 다 팔아먹어 버렸기에 중단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선수들이 새로 수혈되었지만, 떠난 선수들에 미치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을 판매하면서 감독에게는 사후 통보를 했다.[40][41][42]

1998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었으나, 그 해 쌍방울은 외국인 선수를 뽑지 않았다. 비싼 돈 주고 선수를 쓸 수 없었고, 중도 퇴출되어도 마땅히 대체 선수를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1998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때는 아예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9 시즌에는 큰 마음 먹고 마이크 앤더슨제이크 비아노라는 나름 이름 있는 용병 둘을 영입했다.

1998 시즌은 최종적으로 전해보다 다소 낮은 6위(8팀 중)라는 성적을 거뒀다. 가을야구는 당연히 실패. 조규제김실이 트레이드되기 전까진 4위권에 잘 붙어있었지만, 그들이 떠나자마자 동력을 잃어버리며 LG, 해태, OB의 반격에 의해 포스트시즌 진출권에서 이탈했다. 이 해 챔피언 현대와는 수차례 충돌이 있었는데, 김원형 빈볼시비와 마운드 높이 관련 시비가 있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1999년 4월 22일에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현장르포 제3지대"라는 다큐멘터리인데, 위의 동영상 제목에 나와 있듯이 "9회말 투 아웃 김 감독의 선택"이라는 제목이다.[43] 1999년의 쌍방울의 당시 현주소를 잘 설명해준 다큐멘터리. 2018 시즌 종료 후 kt wiz에서 은퇴를 한 마지막 쌍방울 선수 이진영의 신인 시절도 잠깐 보인다. 2016 시즌 당시에는 이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 중 무려 2명이 KBO 리그 감독이 되었다. 김기태, 조원우, 그리고 김성근 감독 본인. 더불어서 인터뷰에는 없지만 당시 1군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도 영상에 잡혔으면 4명. 여담으로, 2018년 부로 저 셋은 모두 팀을 나락으로 평가가 안 좋아졌다. 2023년 기준으로 김원형까지 SSG(SK)의 사령탑을 맡게 됐다.

1999년이 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절 일화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김성근 개인팬들에 의해 날조된 것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가려 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 1999 시즌 쌍방울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사실 이 해 쌍방울 구단은 큰 맘 먹고 무려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를 영입하기도 했다.[44] 어쨌든 당시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선수단 급여가 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겨울 전지 훈련은 홈구장 옆 비닐 하우스 안에서 난로를 때며 대신했고, 원정 경기는 당일 아침에 이동하거나 선수단의 식사는 기사식당에서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숙소도 열악하여 에어컨이 없어 선수들이 더위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다른 팀 선수들이 원정경기 전날 이동[45]하여 호텔에 묵고 호텔에서 고급 음식을 먹는 것과 비교해 비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7개 구단들은 28인승 우등 고속버스인데, 유독 쌍방울 구단만 1991년 1군 진입 초기부터 해체 직전까지 유일하게 45인승 일반버스[46]로 이동하여 원정 경기를 갔다.[47] 이진영을 제외한 1999년도 드래프트에 지명된 고졸 선수들을 모두 대학으로 보내야 했다.[48]

그나마 시즌 초반에는 반등의 요소가 약간이나마 있었지만, 5월부터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이 이어지며 점점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계속된 혹사로 인한 후유증이 1999 시즌에 자비없이 나타난 것이다. 특히 팀 내에서 타율, OPS 등 팀 내 타격 성적 1위를 기록하던 조원우의 시즌 아웃 부상은 뼈아펐다. 당시 조원우는 0.314의 고감도 타율을 자랑하며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즌 도중 외야 수비 훈련을 하던 중 김성근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다가 고무판을 잘못 밟고 미끄러져 무릎 부상을 당한 후 시즌 아웃되어 버렸다.[49] 그 외 김원형, 이동수, 김성래 같은 다른 주축 선수들도 하나같이 부상에 시달렸다. 한편 10년 전인 1989년 태평양에서 김성근의 가혹한 혹사로 망가졌던 박정현이 1999 시즌 초 예상 외로 너무 잘 던져서 10년만에 부활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정현은 5월 중순까지 5승을 거두며 15승 페이스까지 나갔으니 언론에서는 1989년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다는 내용의 기사도 작성했다. 그러나 박정현은 친정팀 현대와의 경기에서 난타를 당하면서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해 6월부터 시즌 끝날 때까지 1승도 못 거둔 채 5승 11패로 끝나고 말았다. 1999 시즌 쌍방울의 추락은 이러한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1999 시즌의 구단이 나름 큰 맘 먹고 영입한 외국인 선수인 마이클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는 김성근의 외국인 용병 잔혹사의 첫 주자들로 그야말로 다사다난하고 파란만장한 시즌을 보내야만 했다.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김성근의 외국인 길들이기의 일환으로 스프링캠프에 제외되기도 했으며, 투수 폼 교정을 두고 마찰을 빚기도 했다. 시즌 시작 후에도 2군 강등을 반복하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 외인 용병들은 김성근과 맞지 않은 궁합을 보이며 6점대의 저조한 방어율을 보였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주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그럭저럭 성적을 냈다. 그러나 쌍방울에서 초반에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이유없이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납득할 수 없다며 훈련에 불참하며 김성근에게 항명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이러한 상황을 항의하기도 했다. 구단의 중재로 앤더슨이 김성근 감독에게 사과하며 사태는 표면적으로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팀은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구단과 김성근 감독과의 마찰도 심화되었다. 구단 고위층은 경기 내에서의 선수 기용과 작전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이 와중에 김성근 감독은 전무후무한 심판 폭행 사건[50]을 일으켰고,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쌍방울 구단은 올스타전 즈음 김성근 감독을 해임한다.

후임으로는 김준환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에 선임되어 남은 시즌 팀을 이끌었다. 후반기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김준환 감독은 와해되어 가는 팀을 이끌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국 쌍방울은 그 해 8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내리 17연패를 당하면서[51][52]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인 97패(28승 7무)를[53]0.224라는 기록적인 승률을 기록하면서 마지막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1999 시즌 김성근 감독과 후반기 김준환 감독 대행은 똑같이 0.224의 승률을 기록했다. 그래도 상황이 나았던 전반기에 비하면 정말 팀이 공중분해되어가는 와중에 있었던 하반기에 팀을 이끌었던 김준환 감독 대행이 김성근 감독과 같은 승률을 유지했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대단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시즌 후 모기업이 사실상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에 의한 위탁 관리가 이루어졌다.


5. 2000년 1월 7일: 해체[편집]


1999년 말, KBO는 SK그룹을 끌어들여 쌍방울 인수건을 논의하였는데, 당시 쌍방울은 매각 대금으로 240억원을 희망했다. 이 때 문화관광부 장관이던 박지원은 당시 5대 그룹 중에서 혼자 프로야구단이 없던 SK그룹과 접촉을 하게 된다.

당시 법정관리 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인수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길 원했지만, SK그룹은 조만간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굳이 접촉할 이유가 없었다. SK는 쌍방울이 자동으로 법정 퇴출되는 2000년 2월 12일까지 버티다가 신생팀을 창단하는 과정만 밟으면 된다는 의도였다.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굳이 SK 입장에서 레이더스를 인수하는 것보다 해체 후 신생팀 창단이 더 나았다. 그래서 양측 당사자 모두 팽팽하게 줄다리기 식으로 버티기만 한 끝에 쌍방울은 얼마 못 가서 GG를 치고, SK그룹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SK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

이 시기 쌍방울을 살리기 위한 전북 도민들과 전북 출신 출향민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서울과 전주에서 쌍방울 살리기 바자회가 열렸고 쌍방울의 대표 브랜드인 "트라이"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김수미를 비롯한 전라북도 출신 연예인들이 앞장서서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구단의 자금 사정은 이미 바자회 한두 번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처지에 놓여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 공시되었고, 창단 10주년을 불과 3개월 앞둔 2000년 1월 7일에 쌍방울은 해체되었다. 당시 SK는 어떻게든 서울 연고를 원했지만, KBO는 "서울 연고는 안 되니 수원에서 창단을 하든가, 쌍방울을 인수해서 전주에 머무르라"라는 입장이었고, 쌍방울은 인수 대금으로 140억원이라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SK가 인천으로 가면서 쌍방울을 직접 인수하는 일은 없었다.

쌍방울에게 들어온 돈은 SK의 가입금에서 할애된 70억원의 위로금이 전부. 현대그룹이 400억원에 사겠다던[54] 야구단이 불과 7년 만에 70억원 짜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레이더스의 빈자리는 인천광역시를 연고지[55]로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채웠으며, 기존의 레이더스 선수단을 전원 인수했다.[56] 이에 따라 쌍방울 레이더스 법인은 청산절차를 밟았고 2002년 12월 31일부로 폐업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제 8구단의 역사는 이렇게 어느 구단에도 계승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KBO의 지원 속에 SK 와이번스200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2005년 준플레이오프 진출,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 등을 통해 리그의 일원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으며 이렇게 쌍방울 레이더스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쌍방울의 몰락 과정은 야구의 삼미, 청보, 태평양과 축구의 전북 버팔로, 농구의 나산, 골드뱅크, 코리아텐더 등과 함께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2008년 우리 히어로즈(현재 키움 히어로즈)가 창단되기 전까지 자생력이 없음을 확인시켜준 사례로서 교훈을 주었으며, '구단 해체 이후 창단'의 수순은 쌍방울의 기둥을 뽑아갔던 바로 그 구단에서 정확히 8년 뒤 재현된다.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 공교롭게도 두 구단의 해체일은 (2000년/2008년) 1월 7일로 똑같다.

이후 2021년, SK 와이번스의 모기업인 SK텔레콤이 야구단을 신세계그룹에 매각하면서 쌍방울의 해체 과정도 재조명받았다. 다만 SK는 재정난으로 구단을 매각한 것이 아니라 기업 차원의 전략적인 이유[57]로 야구단을 정리했고, 신세계그룹도 마찬가지 이유로 구단을 인수한 만큼 서로 제 값을 주고받으며 정상적으로 구단이 거래되었다는 것이 쌍방울 때와 다른 점이었으며, 민경삼 사장 이하 프런트도 고용승계를 100% 보장받았다.[58] 야만없이지만 쌍방울도 구단을 적당히 유지할 정도의 재정만 되었어도 SK나 타 기업에게 제값을 받고 팔았을 수도 있지만 불안정한 시대 상황으로 인한 급박함이 팀의 해체를 불렀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59]
[1]마산 지역에 연고가 있었던 기업. 현재 창원 NC 파크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가 과거 이 회사의 공장 부지였다.[2] 창업주가 정읍시 출신으로 전라북도에만 2개의 공장을 가동하는 등 현재도 전북과 인연이 깊은 기업이다.[3] 익산시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으로, 오래 전부터 전북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 속옷 회사 맞다. 지금도 익산시에 공장이 있다.[4] 해태와 호남이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과 달리 또다른 유력한 후보지였던 마산에 대해서는 롯데그룹이나 부산-경남의 지역 민심의 반발이 별로 크지 않았다. # 하지만 2010년대 초 창원을 연고로 하는 9번째 구단이 창단을 추진할 때 롯데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문제는 경남지역 팬들은 환영하는데 유독 롯데만 혼자 급발진해서(...) 반발했다는 점이다.[5] 현실에서 지역감정을 찾아보기 힘든 2020년 시점에서는 이게 뭔 개소리냐고 치부할 일이지만, 당시는 군사정권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었고, 민주화 세력도 지역 맹주에 따라 둘로 갈라지는 등 영호남 지역갈등이 가장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정치와는 별 상관없는 사소한 것으로도 영남과 호남이 서로를 물어뜯기 바빴고, 이는 비단 정치권뿐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조차 해당되던 일이었다. 이 당시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위험한 상견례를 보면 영호남 지역감정이 매우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김봉연, 김준환, 김용남, 김일권, 김성한 등 내로라하던 해태의 초창기 슈퍼스타는 모두 군산상고 출신 선후배들이었다. 광주일고 출신이 선수단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쯤의 일이다.[7] 1982년부터 8년간 해태의 전주 홈경기 통산 성적은 65전 40승 1무 24패로 승률이 무려 0.623에 이른다.[8]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창단에 산파 역할을 하며 군산시 야구의 대부로 자리매김했고 한국프로야구 출범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차지했던 인물. 훗날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맡았으며,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 때도 전라북도-부영그룹 쪽을 대변했다.[9] 이 당시 광주와 전주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면 해태 팬들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해태라는 팀명과 주력 선수 이름을 외친 뒤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빼놓지 않고 외쳤다.[10] 이산(而山) 이봉녕 쌍방울 창업주의 맏아들. 1997년에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아 쌍방울그룹 회장을 맡기도 했다.[11] 당시 창단식은 전주문화방송에서 생중계했는데 2019년 4월에 전주문화방송 측이 이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쌍방울 구단의 초창기에 대한 영상자료가 부족한 상황을 감안할 때 상당한 가치가 있는 영상이다. 화질부터 보면 최상급이다.[12] 1993년 4월 10일 삼성 라이온즈가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17-0으로 개막전 최다 점수차 완봉승 기록을 깼다.[13] 당시 강팀이었던 빙그레가 새파란 신생팀 쌍방울에게 대전 홈에서 0-11로 거하게 털렸다는 소식이 당시 한국화약그룹 고위층에 전해지자 김승연 구단주 등이 격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때문에 개막 2차전을 앞두고 '오늘도 지면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가 한국화약그룹에서 내려왔다고 한다.[14] 지금도 전북의 고교야구팀은 전주고, 군산상고, 정읍인상고 3개뿐으로 적은 편이다. 고창영선고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야구부를 운영하였다.[15]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1986~1989년 4년 연속 우승을 이룬 리그 최강팀이었다.[16] 교통사고 관련 MBC 뉴스데스크 보도, 교통사고 관련 KBS 뉴스9 보도[17] 쌍방울에 앞서 제7구단으로 창단됐던 빙그레 이글스는 구단의 연고지 출신(충청북도 영동군 태생) 선수이자 옛 충청 연고팀 OB 베어스의 슈퍼스타였던 김우열을 영입한 바 있다. 물론 말년에 접어든 선수였기에 뭔가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2시즌을 빙그레에서 뛴 이후 은퇴한다.[18] 타이거즈 선수단의 핵심이 광주일고, 광주상고, 광주진흥고 등 광주 출신 선수들로 잡힌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1982년 해태 창단 당시 선수단의 핵심은 단연 전북에서 나고 자란 군산상고 출신 선수들(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종윤, 김용남, 김성한)이었다.[19] 참고로 위에 언급된 선수들은 모두 군산상고 출신이다. 전주고 출신이 중용되기 시작한 것은 쌍방울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다.[20] 김봉연은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후 해태 타격코치를 맡고 있었다.[21] 김성한은 1990년대 초반까지 두 자릿수 홈런은 우습게 칠 정도로 여전히 짱짱한 실력을 뽐냈고 조계현은 그 시절 해태 마운드의 중심축이었다. 군산상고 출신 중에는 이건열도 있었지만 실제 태어나고 고1 때까지 자란 곳은 광주광역시다.[22] 위의 창단식 영상에서 선수단 소개 때 가장 많은 환호성을 받은 사람이 바로 김준환이었다. 선수가 아닌 코치에게 이처럼 환호가 쏟아진 것은 선수들 중에 전북 출신 스타가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23] 위에 언급했던 선수 중에는 백인호만 1992년 시즌 후 쌍방울로 왔다가 1996년 시즌 후 다시 해태로 돌아간다.[24] 결국 방극천은 4년 동안 2경기 등판, 3.2이닝 1탈삼진, 그것도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5년에야 달성한 부진한 기록만 남기고 은퇴한다.[25] 후술하겠지만, 먼 훗날인 2010년대 중반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이 사례는 김성근의 부자 구단에 맞서는 가난한 지도자 이미지가 말도 안되는 허상이라는 것이란 주장의 증거로 많이 거론된다.[26] 불과 몇 년 전에 이광환 감독의 LG 트윈스가 추구한 자율야구가 혁신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27]양주 레볼루션 감독.[28] 스탯티즈 기준.[29] 김성근 감독은 부임하면서 상대 팀의 장타를 억제하기 위해 홈 구장의 외야 담장을 2.1m 펜스 위에 3.7m 철망을 얹으면서 높였다. 그 결과 쌍방울 타자들도 홈런을 치지 못했지만, 투수들도 9이닝당 피홈런율이 0.51일 정도로 홈런을 맞지 않았다.[30] 후술하겠지만 이는 현재도 논란이 많다.[31] 타격왕, 출루율왕, 장타율왕. 세 타이틀을 한 시즌에 동시에 딴 타자는 1993년 양준혁, 1997년 김기태, 2010년 이대호, 2019년 양의지 4명밖에 없다.[32] 타자 총합 WAR이 해태는 27.63, 쌍방울은 27.61로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백인천 감독의 리빌딩이 성공한 38.92의 1위 삼성 라이온즈와는 꽤 차이가 났다.[33] 사실 이 당시에 해태는 공격에서 홍현우이종범 의존도가 굉장히 심했다. 장성호이호준 등 신예들의 포텐이 터진 건 해태가 하위권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의 일이니...[34] 10승 5패를 기록했던 성영재김원형은 이 때 구원투수인 김현욱, 조규제, 김기덕, 오봉옥 등에게 갈취당한 승수가 많았다.[35] 이는 살려조 이전의 김성근 투수 혹사의 사례로 가장 유명하다. 당연히 선발을 조기 강판하고 남은 5이닝 이하의 이닝을 김현욱을 던지게 하며 만들어진 기록인지라 다승왕이 되고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데 실패했다.[36] 김성근 감독의 가난한 언더독 이미지와는 달리 그가 이끄는 구단은 2016 시즌까지 5차례나 페이롤 1위를 달성한 적이 있다. 그 중 한 시즌이 바로 97 쌍방울.[37] 물론 구단이 해체된 직접적인 원인은 구단 자체의 방만한 경영 때문은 아니고, 모기업이 무주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무주 리조트를 건설하는 등 무리한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었다.[38] 이때 만든 시설을 가지고 무주군에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포부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치는 강원도 평창군으로 넘어간다.[39] 1997년 시즌 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었다가 1998년 시즌 후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뒤 쌍방울에 복귀.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40] 키움 히어로즈의 초창기 때 야구 관계자들은 물론 팬들이 심히 걱정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다만 키움(구 넥센)은 구단주가 KBO 희대의 딜러는 개뿔이고 횡령범이기도 하거니와, 모기업이 따로 없는 구조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능력껏 스폰서를 물어와서 부족한 재정을 채울 수 있기 때문. 물가 변동을 감안한다 해도 현재 히어로즈가 키움증권으로부터 받는 네이밍 스폰 금액이 당시 쌍방울의 자본금에 필적하는 판이며, 키움증권은 다우키움그룹의 튼튼한 사업포트폴리오 및 개인투자자 사이에서의 압도적 점유율로 인하여 기업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구단주가 횡령을... 덧붙어서 뒷돈으로 131억 원이 넘게 챙겨서 쌍방울보다 훨씬 여유로운 운영이 가능했다.[41] 단, 선수단 자체가 구단의 월급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선수는 구단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이고, 구단이 선수단 구성에 대해서 감독에게 간섭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이러한 선수들을 가지고 경기를 운용하는 것이 감독인 만큼,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도 맞다.[42] 그렇지만 히어로즈 구단이 리그의 규칙을 어기고 KBO에 신고하지도 않은 채 여러 현금 트레이드를 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이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43] 당시 신문 기사,경향신문,1999-04-22[44] 당시는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가 트라이아웃 제도였기 때문에 영입은 일단 할 수가 있었다.[45] 1999년 당시 전주시의 시외 교통 인프라는 꽤 열악했다. 이 때 KTX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고, 결국 버스로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전주에서 가까운 광주대전과의 접근성이야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괜찮았지만, 이보다 꽤 거리가 있는 동네들인 대구부산 방면의 고속도로가 매우 미비했다. 이 때는 새만금포항고속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쌍방울이 대구 원정을 가려면 우선 호남고속도로로 대전까지 올라간 뒤,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야 했을 정도였다. 부산 원정은 더 심각했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에는 통영대전고속도로함양군 ~ 진주시 구간만 개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에 전주에서 부산을 가려면 일단 17번 국도로 남원까지 간 뒤, 왕복 2차선인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함양까지 이동한다. 그리고 비로소 통영대전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진주까지 달린 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야 했다. 물론 지금처럼 남해고속도로가 선형이 좋고 길이 넓은 것도 아니었으니 선수들의 피로도는 더했을 것이다. 수도권 원정은 지금처럼 논산천안고속도로가 없어서 최소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회덕까지 돌아간 뒤 경부고속도로를 타야 했다. 그래서 해태한화 원정 경기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전주에서 당일치기 이동으로 어떻게 때웠지만, 이 두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방면들로의 원정길은 엄청 멀었다. 즉, 서울이나 대구를 가려면 3시간 넘게 걸렸고, 부산이나 인천을 가려면 4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했다. 선수단은 원정 때마다 45인승 일반버스로 몇 시간씩이나 소모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이는 쌍방울의 숨겨진 전력 약화 요인이기도 했다.[46] 이 중 운행했던 쌍방울 구단 버스가 1991년식 AM939였으며, 2000년 쌍방울 구단 해체 후 대구의 협성고등학교 축구부 버스로 활동하다가 2007년에 폐차되었다.[47] 시합이 끝나고 이동할 때 선수들의 피로는 말도 못 했다고 한다. 이 증언은 KBS N SPORTS의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10인 김기태 편과 박동희 기자가 작성했던 칼럼쌍방울 위클리심성보의 증언과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다.[48] 그나마도 계약금을 구단에서 다 줄 수 없어서 김성근이 일부 보조해야 했다. 대학으로 보낸 선수들 중 뒤에 지명권을 인계받은 SK에 입단한 선수는 4명(최경철, 김형철, 이영욱, 한상준) 뿐이었다.[49] 이 무릎 부상은 이후 조원우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은퇴 시까지 고질적으로 따라다니게 되었다.[50] 이에 대한 내막이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51] 기간으로만 치면 한 달 이상을 꾸준히 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당시는 9월 중순부터 우천 취소 재편성 일정을 소화했기에 띄엄띄엄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당시 쌍방울은 띄엄띄엄 편성된 스케줄에서도 승리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팀 전력이 주저앉아버린 상태였다. 결국 10월 8일 전주 LG전에서(실제 경기는 10월 8일에 열렸지만, 공식 기록으로는 10월 6일 경기로 표기한다. 자세한 사정은 아래에 후술.) 7:5 승리를 거두면서 긴 연패의 사슬을 벗어나게 됐다. 하지만 17연패 후 승리를 거둔 그 경기는 쌍방울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달고 치른 마지막 경기가 됐고, 이듬해 해체되고 만다. 그리고 이날 이후 현재까지 전주시에서는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다.[52] 17연패는 KBO 리그 단일 구단 최다 연속 패배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1세기 들어서는 누구도 이 기록에 쉽게 범접할 수 없으리라 생각됐지만, 한화 이글스가 2020년 5월 23일부터 17연패를 찍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 경기마저 져 KBO 역사상 최다 연패 기록인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18연패와 타이기록을 세웠다.[53] 이 패수는 비밀번호 행진을 하고 있던 롯데의 2002년 시즌 패배수와 동일하다.[54] 1993년, 현대그룹은 프로야구 참여를 위해 레이더스 인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상용차 공장이 완주군에 공사 중이었고 이 공장이 1995년에 완공된 것을 생각해보면 지역 연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의 계열사인 주식회사 현양을 모기업으로 하는 전북 다이노스 축구팀이 창단하기도 했고 2001년 농구 대전 현대 걸리버스가 금강고려화학에 인수 되면서 전주로 이전했다.[55] 이 때 현대인천을 떠나서 수원 야구장에서 8년간 머물렀다.[56] 비슷하게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단과 프런트를 센테니얼이 인수하여 히어로즈로 재창단했다. 다만 둘의 차이라면 SK는 쌍방울이 법정 퇴출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센테니얼(히어로즈 모기업)의 경우는 KBO와 처음부터 해체 후 재창단 방식을 전제로 현대 매각을 진행했다.[57] SK텔레콤 산하 농구단인 서울 SK 나이츠, SK텔레콤컴캐스트 산하 e스포츠팀인 T1의 유지비가 훨씬 싸게 든다.[58] 마지막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취임한 김원형과 사장이었던 민경삼을 비롯한 조직이 그대로 승계되었다. 쌍방울에서 SK로 넘어갈 때와는 대조적이었다.[59] 2021년 기준 재정난을 겪고 있는 두산그룹의 경우 다른 계열사를 다 팔면서도 베어스만큼은 결단코 팔지 않았다. 특히 신세계그룹이 두산에게 먼저 접근했을 정도로 매각이 유력했음에도 오히려 팔지 않았다. 이 선택이 이후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일단 두산은 절대 야구단만큼은 팔지 않겠다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두산팬들은 신세계의 새 로고가 혹평받는 것과 개를 마스코트로 정한 걸 보고 미적감각 측면만큼은 두산그룹을 재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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