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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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종희
(1952 ~ 1981)
2대
김승연
(19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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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 회장
김승연
金昇淵 | Kim Seung-yeon


파일:external/blogfiles16.naver.net/B1E8BDC2BFACC8B8C0E54.jpg

출생
1952년 2월 7일 (72세)
충청남도 천안시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순천 김씨
직업
기업인
현직
한화그룹 회장
한화 이글스 구단주
학력
장충초등학교 (졸업)
장충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멘로 대학 (경영학 / 학사)
드폴 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 석사)
서강대학교 (경영학 / 명예 박사)
부모
아버지 김종희 어머니 강태영[1]
형제자매
누나 김영혜
남동생 김호연
배우자
서영민[2]
자녀
장남 김동관
차남 김동원
삼남 김동선
종교
파일:대한성공회.png 성공회(신명: 프란시스)

1. 개요
2. 평가
2.1. 긍정적 평가
2.1.1. 의리 있는 남자
2.1.2. 스포츠 기여
2.1.2.1. 한화 이글스
2.1.3. 일가의 깨끗한 병역사항
2.2. 부정적 평가 및 사건사고
2.2.1. 자식들의 이미지
2.2.2. 1993년 횡령혐의
2.2.3. 동생과의 재산권분쟁
2.2.4. 2007년 보복 폭행 사건
2.2.4.1. 외신 반응
2.2.5. 배임 사건
2.2.6. 취업제한 위반 논란
3. 여담
4. 어록
4.1. 한화그룹 창립기념사 발언
4.2. 신년사 발언
5. 수상경력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한화그룹 회장.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다이너마이트이라고도 불린다. 기업의 태생이 화약 제조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다이너마이트 김은 김승연의 아버지인 현암 김종희 전 회장의 별명이기도 하다. 미군이 붙여줬다고

1952년 2월 7일 한화그룹의 창업주 김종희와 강태영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종희는 생전에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담배도 피워 보며 단맛 쓴맛 다 맛봐야 한다.”며 “어차피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호연지기를 키울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1981년 김종희가 유언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한화그룹을 이끌게 되어 국내 6위 초거대 재벌로 키워낸 것으로 유명하다.

남동생 김호연과 10여년간 상속 다툼을 벌인 끝에, 김호연이 빙그레를 가지고 독립했다.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바뀐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B2C가 아닌 한국화약보다야 식품회사인 빙그레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광고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빙그레 이름을 붙였던 것. 비슷한 사례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경우가 있다.

누나 김영혜도 1996년 제일화재를 이끌고 독립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제일화재의 사정이 나빠지면서 다시 한화그룹에서 인수합병했다.

장인은 내무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서정화 국민의힘 상임고문. 큰아버지 김종철도 1980년대 한국국민당 총재를 지낸 정치인이며, 작은아버지 김종식도 정치인이다.

김승연 회장을 비롯한 범한화가는 꽤 독실한 모태 성공회 신자들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어머니와 아내도 독실한 신자다. 국내에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보다 인지도가 다소 밀리는 성공회에서 가장 유명한 신자일 듯. 소년 시절엔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 활동을 했으며, 1997년에는 성공회대학교 이사장이었고, 성공회대에 일부 대금을 면제해 주는 형태로 대학본부 건물을 지어주어서, 건물 이름이 승연관이 되었다. 한때 건물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관련 기사.


2. 평가[편집]



2.1. 긍정적 평가[편집]



2.1.1. 의리 있는 남자[편집]


언론에서 의리 있는 남자라고 자주 다룬다.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해서 고객에 대한 신용과 의리를 강조한다. 한화그룹의 가족적인(?) 분위기나 그에 따른 회장님의 여러 일화를 봐도 그렇다. 이는 부전자전이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아버지 김종희자기 재산 90억 전부(지금 물가가치로 무려 5,000억원 이상)를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하여 사용했다. 지금의 90억과 1977년 당시 90억의 가치가 천지차이임과 이후에 벌어진 다른 대형사고에서 사건 책임자들이 사과만 하고 물질적인 지원을 해준 적이 거의 없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양심적인 케이스다. 참고로 1978년에 완공된 저 유명한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당시 돈으로 2,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지금 시세로 비교해 보면 100배는 차이가 나나 대략 계산해도 50배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서울 프라자호텔 전면 리모델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텔 문을 3개월 동안 닫게 하자, 개장공사가 끝날 때까지 쿨하게 모든 직원(600여명)에게 60일 혹은 90일이나 유급휴가를 줬다. 또한 IMF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넘길 때 돈을 20~30억원 덜 받더라도 100% 고용승계를 반드시 지키라는 조건으로 매각협상을 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이 부도위기에 처했을 때 자금지원도 하고, 진보적인 학회를 후원하기도 했으며, 진보지(예를 들어 월간 말)에 꾸준히 그룹 광고를 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과학과 신학 등에서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대학인 성공회대를 후원하고 있고 재정지원 뿐만아니라 성공회대 학생들을 갤러리아 등 계열사에 인턴으로 고용해주고 정식 채용까지도 해준다. 이사장까지 지냈다.

아무리 성공회 신자라지만 재벌 총수가 진보 성향이 강한 대학, 더 정확하게는 학교 경영권이나 금전적 혜택을 기대하지 않고 이런 기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성공회 교리가 워낙 국내 개신교나 사회 전반의 시선에서 리버럴해 보이고 사회적으로 추태로 비난받는 일에 거의 끼지 않는 덕이 클뿐, 대부분의 성공회 신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매우 보수적인 신자들도 많을 뿐더러 극우나 '태극기부대' 성향인 신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과 그 일가도 성공회 신앙을 갖고 있다.

1995년 뉴욕 미주본부로 발령을 보냈지만 교통사고로 하반신 척수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된 이모 직원을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계속 근무하도록 미국 지사로 보내주었다. 또한 징역 기간이 끝나자 그 동안 심려끼쳐 죄송하다며 한화 전 직원에게 보너스를 얹어주기도 했다. 최말단 갤러리아백화점 캐셔가 받은 돈이 무려 50만원.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북한의 잠수한 경로를 한국에 유출해줘 간첩 혐의로 처벌받은 재미동포 로버트 김은 감옥도 가고 한국 정부도 선을 그어서 어려운 상태였는데 딱히 인연도 없던 김승연이 애국 동포라고 생활비를 대줘서 어려움을 넘겼다.

1999년 지금은 대전의 자랑이 된 대덕테크노밸리가 세워진 것도 김승연의 결단 덕분이었다. 한화 이글스의 우승 축하 파티에서, 홍선기 전 대전시장으로부터 산업단지로 개발하려는데 한화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사업성이 낮다며 그룹 내부에선 난색을 표했지만, 김승연은 대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업분석과 시행을 지시했다. 그 결과 2018년 기준 연매출 18조원, 임직원 35,000명에 이를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2003년 6월 30일 전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던 진정필이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등지자 그 동안 누적되었던 치료비와 장례비까지 모두 지원했다고 한다.

2009년 4월 예술의전당은 한화그룹의 후원 10주년을 맞아 감사의 뜻으로 종신회원증을 전달했다. 후원에 어려움을 겪은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를 위해 10년 동안 단독으로 후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관지 파열로 8강전을 포기한 복싱 선수 백종섭에게 위로금 3,000만원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한 후 1년 지난 2011년 3월 20일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중 36명의 유족이 희망했으며, 이중 2010년도에 취업을 희망한 가족 5명 전원이 입사해 다니고 있으며, 2021년 현재 7명이 한화에 근무하고 있다. 2015년 2월 총 12명이 각 계열사에서 근무중이며, 2월 초에 2명을 추가채용하였다. 즉 5년 동안 꾸준히 채용 중이라는 것.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개념찬 행보인데, 한화 이글스 경기에 천안함 유가족을 초청하여 시구, 시타 행사도 진행하고 의리의 한화, 천안함 유가족 초청 행사 실시 한화, 현충일 홈경기에서 천안함 유가족 특별 시구·시타 실시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천안함 견학도 하고 한화그룹, 대전 초ㆍ중등 학생과 '천안함' 견학 임직원들이 천안함 묘역을 찾아가기도 한다. 천안함 묘역 찾은 한화임직원[3]역시나 유가족들을 초대해 격려했다. 천안함을 잊지 않고, 그 유족들을 확실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9월 14일,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있던 최동원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치료비는 물론 그룹 차원에서 장례식 비용 지원을 지시했다. 이 모습은 최동원의 친정팀이던 롯데의 행태와 그야말로 극과 극의 비교가 되며 야구 팬들과 여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한편 팀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당시에는 전 직원들에게 수십만원씩 특별 포상금을 준 바 있다. 그것도 정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직이며 미화직이며 한화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줬다.

2014년 한화건설의 이라크 공사 현장을 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광어회 600인분을 떠 가지고 비행기로 실어갔다고 한다. "회는 활어회지~!"를 외치며 비행기에 광어 수조와 요리사를 태워 비행기에서 회를 떠서 전달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사막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하니 사막이라 회를 먹고 싶어한다는 말에 "그럼 여기서 떠 가지고 가지."라며 쿨하게 지시했다고.

2015년 7월 3일 울산광역시 소재 한화케미칼 폭발 사고로 협력업체 직원 6명이 숨지자, 한화그룹 임직원에 준하는 보상을 지시했다. 비슷한 사례에서 협력업체 직원들은 보상에서도 차별받는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이번에도 의리있게 대처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아래에 서술할 무지막지한 흑역사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게 잊혀지지 않고 이미지의 일부로 강하게 자리잡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보 때문인지 다른 재벌가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상술한 사례 이외에도 긍정적인 미담들이 여럿 나오기 때문에, 돈만 많고 개념없는 졸부가 아니라, 자기만의 특이한 원칙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든지 튈 수 있는 복잡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가장 크다.

김승연이 이렇게 의리를 강조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이자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의 영향이 크다.


2.1.2. 스포츠 기여[편집]


해외에서도 여러 스포츠단의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스폰서로 활동하면서 구장 광고권을 따내기도 했고[4] 축구에도 볼튼 원더러스함부르크 SV, 유벤투스 FC의 스폰서 계약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추어 복싱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복싱에도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1982년부터 1988년,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복싱협회장을 역임했다. 사실 야구단 창단 전부터 시작하고 있던 게 아마복싱 후원이었다.

사격에도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서, 한화그룹이 사격연맹 회장사를 맡아 자금 지원을 해 주는 등의 활동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격이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의 호성적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딱히 본인이 관여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나, e스포츠 구단인 한화생명e스포츠도 팬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2.1.2.1. 한화 이글스[편집]

파일:/image/109/2012/05/17/201205171311777640_2.jpg

손수 한대화에게 퇴직금을 전달하는 김화약 회장

2012년 5월 16일, 한대화 당시 감독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는 모습.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부문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지만 한화 이글스 구단주답게 유독 야구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1999년 한화 이글스가 창단 첫 우승을 확정 짓던 한국시리즈 5차전 당시엔 일반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구단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한화 이글스의 프런트가 FA인 이범호를 놓치는 일을 포함하여 몇 가지 사고를 터뜨리자 2011년 5월 프런트를 전면 교체하고 야구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팬들에게 약속했다. 아예 본인의 비서진을 통해 야구단을 관리 하려는듯 하며 직접 잠실 야구장에 행차해서 팬들에게 "김태균이 잡아올게"라고 단번에 OK 사인을 내는 등.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한화 프런트가 물갈이 된 신호탄이었던 이범호 KIA행 사건은 한화그룹 전체가 수사당국의 표적이 되어 돈을 풀 수가 없었던 시기를 지난 직후였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 당시엔 구단 사장까지 조사 받으러 나갔던 일도 있었으니...

2014시즌 한화가 또 최하위에 그치자 김성근을 데려와 달라는 팬들의 영상 릴레이, 1인 시위가 빗발쳤다. 프런트 측에서는 팬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내부승진을 밀었으나, 김승연의 강력한 요청으로 2014년 10월 25일, 기어코 한밭구장에 그 때까지만 해도 야신이었던 김성근을 데려온다. 게다가 16일 뒤인 2014년 11월 10일부로 구단 대표이사에 자신의 비서실장 출신인 김충범을 내정하는 초강수를 덤으로 두기도 했다. 2015년 FA시장에서도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2016년 들어 한화 이글스가 그렇게 팬들이 불러서 뽑은 감독의 독단적인 전권 장악, 미치광이 혹사와 시대착오적 전략, FA 영입 선수들의 잇다른 먹튀, 노쇠화 되어버린 선수층 등으로 다른 팀 다 상위권 다툼 벌일 동안 혼자 하위권에서 노닥거리며 팀이 나락에 빠짐과 동시에 야신이라 칭송받은 자의 더러운 실체가 드러나자 프런트를 무시한 권력 남용, 당장의 성적에 눈이 멀어 팀의 미래를 내다버린 선택 등으로 나쁜 의미로 재평가를 받으며 비판받고 있다.

김승연의 문제점은 허구연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일단 야구를 좋아하긴 하나 정작 야알못이라 팀의 현실을 모른다는 것.[5] 이 때문에 한대화와 김응용 등을 연달아 거치며 팀을 추슬러야 하는 선택의 순간 별 생각없이 유명인사(김성근)에게 의존해 버렸고, 그 결과가 토탈 700억 쏟아붓고 7위 경쟁한 16시즌의 한화다. 매년 100억대의 적자가 나는 프로야구단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 주는 애정은 분명 높이 살만하나 팀의 내실을 키우기보단 당장 성적에만 눈이 가서 효율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2017년 5월 23일에 김성근이 자진 사퇴의 탈을 쓴 경질로 퇴출됐다, 김성근과 단장과의 마찰로 인한 여러 일들에 격분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거 말고도 구단 내부에서도 특타를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결국 그룹 차원의 내부감사 때 자질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 후 경질이 됐다. 사실 야구단을 챙기기 시작한 직후에도 김승연 회장이 직접 구단의 경영에 간섭을 하진 않았고, 비서진을 통해 소식을 전달 받고, 몇몇 중요한 안건들에 대해서만 본인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1일 벤치 클리어링이 빌미가 되어 그룹감사가 진행 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를 들은 뒤 격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팀 내부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리빌딩을 비롯한 장기적인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을 감독으로 기용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여서 한용덕을 감독으로 임명하는데 동의 했으며, 한용덕은 오랜 부진에 시달렸던 한화 이글스를 포스트 시즌으로 진출 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즌 순위 3위, 최종 순위 3위다.

2018년 한화 이글스가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자, 11년간 비밀번호를 찍을때 기다려준 팬들에게 고맙다며 장미꽃 13,000송이를 선물했는데, 이 비용 4,000만원을 사비로 냈으며, 1차전에 대전으로 직접 가족들과 직관하러 왔다. 기사

그리고 2018시즌 종료 후 아예 팬들에게 그 동안의 암흑기 속에서도 팀을 믿고 응원해줘서 감사하다는 한화 이글스 단독 광고를 제작해 지상파 황금 시간대에도 편성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때문에 광고 단가가 매우 비싸기로 유명한 주말 저녁드라마 시작 전 광고 타임때 여러 대기업들의 주력 제품 광고 사이에 한화 이글스 광고가 등장해 여러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부터 한화가 또다시 하위권에 쳐졌고, 구단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전달 받은 뒤엔 아예 구단 대표이사에게 구단주 대행을 맡겨 야구단의 운영을 존중 하기로 했다. 그동안 간간히 비서진을 통해 구단의 중대사를 결정 해오던 방식도 폐지하고, 구단에게 운영 전권을 맡겼다.

여담이지만, 중앙일보의 2020년 기사에 의하면, 구단 주식의 10%를 가지고 있는데, 이걸 27년째 팔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19년 신구장 건립 사업이 확정되자 430억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2.1.3. 일가의 깨끗한 병역사항[편집]


자신은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고, 아들 셋도 병역 의무를 이렇다 할 잡음 없이 깔끔히 마쳤다. 이는 한화의 근원이 한국화약이라는 방산업체이기 때문에 김승연이 병역 문제에 대해선 확실하게 해야한다는 지론 때문. 병역 관련 의혹이 존재하는 다른 재벌가 총수와 자제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 맏아들 김동관과 둘째 아들 김동원은 각각 하버드 대학교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처럼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나온 셋째 아들 김동선은 현역 출신은 아니지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승마 금메달리스트로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았으므로 별다른 논란이 없다. 김동선은 꾸준히 승마 선수로 활동하며 2010, 2014년에도 모두 금메달을 땄고 2016 리우 올림픽에도 대표로 출전했다.

다만 병역기피로 의심을 받을 만한 과거가 있는데, 1995년 5월~1996년 12월 사이에 당시 주한 그리스 대사의 양아들로 들어가면서 그리스로 귀화했었다. 한화그룹 측에 따르면 "그리스 대사가 (김)동선이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해서 잠시 양자로 보내줬다"고 했다. 그리스와 한화의 관계는 선대 때부터 매우 좋다. 당장 주한 그리스 대사관이 20년 넘는 기간동안 한화그룹 본사 건물에 입주해 있다. 선대 회장 김종희가 그리스의 주한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고, 김종희가 사망하자 그리스는 김승연에게 해당 직위를 승계시켰을 정도.

재벌가의 병역 문제가 비리 의혹 때문에 불거지는 것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병역비리 문제와 김승연 일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에 지금은 빙그레로 분리해 나간 동생 김호연 일가도, 김호연 본인은 김구의 차남인 전 공군참모총장 김신의 사위이며, 장인처럼 공군 장교로 복무해 중위로 만기전역했다. 김호연의 둘째 아들 역시 공군 장교로 복무했고 심지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누나 김영혜도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김호연의 장남은 공익 근무로 복무를 마쳤다.


2.2. 부정적 평가 및 사건사고[편집]


1998년 IMF 시기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정리해고를 한 공으로 정부에게서 상까지 받았다. 정리해고는 일괄 사직서를 제출하게 하고 무급휴직을 수개월간 한 후 수리하고 전화로 통보하는 방식이었는데 주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하에서 자신보다 큰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등 급속히 사세를 불려나갔다.

2007년 둘째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상대로 특수폭행 보복 사건을 일으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항목 참고. 이 사건이 청계산에서 일어났기에 국내야구 갤러리와 각 팀별 갤러리에서는 한화 이글스가 경기에서 못할 때마다 "청계산 가야겠네"라는 드립을 치고 있다. 2012년 들어서는 경기간 나오는 이니스프리 광고 때문에 '숲으로 와~' 드립이 야구 커뮤니티 등에서 성행했다.

2012년 8월 17일에 배임혐의로 법정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되었다. 보통 재벌 수장들이 비슷한 혐의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전례를 볼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2014년 2월 11일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 및 벌금 선고를 받고 석방됐다.


2.2.1. 자식들의 이미지[편집]


병역 문제가 깨끗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빠따갑인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둘째와 셋째 아들이 사고를 많이 치는 편이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바로 밑의 사건. 기업을 이어받을 장남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나머지 둘은 자유분방하게 키워서 그런 건지, 재벌 3세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 때문인지 차남은 밑의 보복 폭행사건 뿐만 아니라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된 적도 있다. 2019년 현재 한화생명 상무로 재직 중이다.# 2014년 2월 김승연 회장 차남 대마초 혐의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연합뉴스)

2011년에는 교통사고를 내고 구호조치 없이 도망가서 뺑소니 벌금 700만 원이 선고된 전력도 있다. 셋째도 역시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전적이 있다. 2010년에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 주점에서 여종업원을 성추행하고 보안직원 2명을 폭행하고 유리창과 집기를 부순 혐의 등으로 불구속 입건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017년 1월 5일 새벽 3시 30분에는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종업원의 뺨 2대를 때리고, 다른 종업원의 머리를 2∼3차례 때렸다. 김동선은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돼 경찰서로 호송되던 중 순찰차 내부 유리문을 걷어차고 카시트를 찢기도 했다. 김승연 3남 김동선 술집 난동, 한화家 사건사고 보니…보복폭행·대마초까지 이외에도 문제가 많다.

참고로 장남 김동관은 어린 시절부터 전교 1등은 도맡아 했으며 김승연의 부인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수석 출신이다. 공부 재능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듯. 하버드대 유학 중에도 한인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경영 승계를 위해 실무를 익히고 있다. 직급에 상관없이 자신의 직원들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하는 등 사내문화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게다가 아버지와 동생들과는 다르게 별다른 구설수 없이 독서가 취미이며, 운동은 주짓수와 스키를 즐긴다고 알려져 있다.

김동선은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마장마술 단체전에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함께 출전해 금메달을 딴 승마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다.
여담으로 리우 올림픽에 승마 선수로 출전 당시 대한승마협회의 일 때문에 약간 고생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예선 탈락이 확정적이고 (예선 최종 순위 43위) 때마침 조모상이 겹치면서 귀국하게 되었다. 한화그룹 3남 김동선, 리우에 날아든 비보에 조기 귀국

2017년 9월 말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술집에서 열린 대형로펌 김앤장 소속 신입 변호사 10여 명의 친목 모임에 동석해서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남아있던 변호사들은 김씨를 부축했는데 그 남자 변호사의 뺨을 때리고, 한 여성 변호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 폭언과 함께 폭행했다고 한다. 한화家 3남 김동선, 또 음주 폭행 물의 김앤장 신입 변호사라면 모두가 부러워 하는 최고의 자리 중 하나인데 그래봤자 결국 부모 잘 만난 금수저에게는 똑같은 월급쟁이들일 뿐이며 재벌 회장의 가족이면 김앤장 변호사에게 그 어떠한 부조리함를 저질러도 그냥 눈감고 아무런 조치없이 그냥 넘어가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 평범한 28살 직장인이면 김앤장 변호사에게 저렇게 해놓고 결코 원만하게 끝내지 못한다.

이에 대해 김앤장측의 일방적인 주장과 재벌 회장의 직계 아들이 관여돼서 김동선 측에 일방적으로 갑질 논란을 씌운 것이라는 기사 보도도 있긴 하다. 김앤장 변호사들이 먼저 김동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근데 김동선 이력을 보면 무시할만도 당시 김동선을 김앤장 변호사들의 술자리에 동석시킨 지인이 일찍 나가버리면서 혼자 남았는데 김앤장 변호사들이 김동선을 그냥 제껴두고 자신들끼리만 대화를 하며 무시했다는 것. 일각에선 이것이 김앤장 변호사들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도 한화측에 강하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로 유력시되고 있다. “변호사가 먼저 무시했다” 한화 김동선이 처벌 안 받은 결정적 이유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히 무시한 것으로 폭행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며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2.2.2. 1993년 횡령혐의[편집]


김승연은 6공 실세라던 박철언 전 장관과 친하며 그의 사조직 "월계수회"의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박철언이 당시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과 권력투쟁을 벌였다가 민자당을 탈당했고 이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이끌던 통일국민당에 들어가 김영삼을 디스한다.

그런데 1992년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집권하자 박철언은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6] 김승연도 회사 돈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는 정치 보복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2.2.3. 동생과의 재산권분쟁[편집]


동생 김호연과 재산권 분쟁이 일어나 한화그룹을 반분했다. 수 년의 법정 공방 끝에 결국 그룹 분할에 합의하여 유명했던 빙그레를 비롯한 여러 계열사를 동생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야구 팀 명칭까지 갈아치우게 된다. 현재는 화해한 상태로 김호연의 아들이자 김승연에게는 조카의 결혼식에 아들들과 함께 참석 하는등 갈등은 사라진 상태이다.[7]


2.2.4. 2007년 보복 폭행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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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8일, 새벽 서울 청담동 S클럽에서 술을 마시던 김승연의 둘째 아들이 북창동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8명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벌였다가 집단 폭행을 당하는 바람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불만있으면 와보라는 식으로 종업원이 던지고 간 명함에 격노한 김승연은 아들을 폭행한 인물에게 보복을 가하기 위해 아랫 사람들을 시켜 G노래방을 통해 S클럽 종업원들을 불렀다. S클럽 종업원들은 자신들 5명에 노래방 종업원 3명을 끼워서 대신 내보냈으며, 그들은 김승연 경호원들에게 붙들려 산으로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이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 폭행을 저지른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고 호소하자, 김승연은 이젠 경호원들을 이끌고 가게로 쳐들어갔다.

북창동 S클럽에 도착한 김승연은 '내 아들 폭행한 놈들'을 끌고 오라고 말했고,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가게 측이 폭행 가담자를 데려오자, 김승연의 아들 김동원이 자신을 폭행한 사람에게 직접 주먹으로 보복을 가했다고 한다. 이 때 종업원들도 경호원에게 두들겨 맞았다. 이 과정에서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까지 동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김승연은 술값이라면서 카운터에 100만원을 던져 놓고 나갔다.

김 회장은 "내 아들이 눈을 다쳤으니 네놈들도 눈을 좀 맞아야겠다"라면서 가죽 장갑 낀 손으로 두 팔이 붙들린 종업원들의 눈을 집중 가격했다. 낮은 신음소리가 연신 터져나왔다. "저희는 전무님이 가서 사과하고 오라 그래서 왔을 뿐이에요" (중략) 김 회장 아들 폭행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조 전무"가 김 회장 앞으로 불려왔다. 김 회장은 조 전무를 룸 안으로 데려갔다. 곧이어 고성과 함께 뺨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세 차례 들려왔다. 김 회장은 곧이어 새벽에 폭행을 당했던 아들을 불러서 "네가 맞은 만큼 때려라"고 일렀다. 곧 룸 밖에서도 분명히 들을 수 있는 "퍽, 퍽, 퍽" 하는 폭행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겨레, 2013년 4월 5일.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정치권에서까지 논의가 될 정도였다. 하술할 실상이 알려지기 전 국민들의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고 공개되고 나서도 반응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조폭과 다를 바 없는 폭행에 이어 경찰까지 움직여 없는 사건으로 처리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두둔하는 사람들은 "서민 부모는 자식이 집단 폭행을 당해도 합의금만 받고 분을 삭힐 수밖에 없는데 능력이 있는 부모라면 당연히 때린 놈들 사지를 분질러 놓아야 한다"면서 그런 행위를 한 김승연을 칭찬했다. 대중 뿐 아니라 김구라, 복거일 등 유명인들도 김승연 회장을 옹호했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들의 변호역시 원칙적으로 하면 안되는 일을 옹호했기 때문에 비난받았을 뿐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저랬겠느냐?"는 식으로 "분명히 잘한 행동은 아니지만 이해는 된다"면서 공감하는 반응들이 적잖았는데 "내 자식이 두들겨 맞고 왔으면, 재벌 회장이든 아니든간에 가해자를 한 대 쥐어박고 싶지 않겠냐?"는 식의 여론이 상당수 었던 것이다.

이런 반응이 시사하는 의미는 사건상 최초 피해자인 차남의 경우가 결투에 준하는 1:1 대결 끝에 패배했거나 쌍방 폭행 중 폭행 피해를 입은 정황이 아니라 1:8의 상황에서 일방적 집단 린치를 당했으므로 비겁한 클럽 종업원들이 보복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인식상 조건이 여기서 갖춰졌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가해자들은 한화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저질렀다고 한다. 사실 워낙에 김승연이 보복폭행 출구전략을 범죄적으로 해서 묻히는 부분이지만, 보복피해자들도 죄질이 나쁘다. 시비가 붙은 게 누구의 잘못인가를 떠나서 8명이 한 명을 집단으로 구타한 것인데, 피해자가 재벌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이었다면 두들겨 맞고 합의금 몇 푼에 분을 삭혀야 했을 것 아닌가. 앞선 여론들의 경우도 분명 있지만 이런 사건은 대한민국 내에선 하도 조직폭력배나, 학교폭력같은 문제 때문에 학을 뗀 사람들이 많아서, 보복 폭행의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피해자가 동정받는 경우도 드물고 김승연이 특권계층이 아닌 오히려 일반인이었다면 여론은 반분되지 않고 오히려 절대적 영웅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특권계급으로 행세하던 재벌의 일탈 및 비행이 아니라 더 정치권으로 까지 비화된 까닭이 있다.

그러나 김승연은 단순히 사적제제로 보복 폭행 사건만을 저지른게 문제가 아니었다. 폭행 과정에서 뒤처리를 대신 해 줬던 조직폭력배 맘보파 두목 오 모에게 1억 1,000만원을 지급했다. 게다가 이 사건에 관한 소문이 언론에 퍼지기 전후로 5억 8천만원을 뇌물로 뿌려서 전직 경찰청장을 비롯한 전 현직 경찰 간부들을 동원하여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고 이런 죄상이 드러나면서 이는 게이트가 되었다. 경찰이 한 달 넘게 사건 처리를 미적미적거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는 변호인과 상의도 없이 피의자 심문 중에 뜬금포로 검사에게 "검사님은 복싱에 대해 많이 아십니까?"라고 반문하며 "아구 몇번 돌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거기다 이를 설명하며 '오른손, 왼손'이라고 말하며 잠시 복싱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변호인들이 진짜 혼이 나갈 정도로 경악했다고.. 또한,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 사용에 있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다가 사실로 드러나자 겁만 주려는 용도로 썼다고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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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사 내용에선 '귀싸대기, 놈, 맞짱' 드립까지 여과 없이 나오는 바람에 "재판 중인데 나이 먹고 철이 없는 드립을 쳤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재판 중에는 힘들다면서 턱을 괴고 거의 드러누운 자세로 재판을 받다가 재판장에게 주의를 받고 저지를 당했다. 이 결과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는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양로원에서 사회봉사를 열심히 했다. 그 덕분인지 2심에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200시간이 선고 되었다. 그리고 돈을 받고 뒤를 봐준 전직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9월~1년 사이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2007년 이후로도, 10년이 넘어도 계속 회자되는 사건이다. 위에서도 말한 SK 회장 최태원의 사촌동생 최철원재벌 2세 야구방망이 구타사건, 소위 말하는 2010년 "맷값 폭행" 사건이 이것과 거의 유사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잊혀질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겠지만, 한화 이글스가 죽을 쑬 때마다 "한화에서 유일하게 빠따 좀 휘두를 줄 안다는 인간이 타자를 안 뛰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비웃음이 섞인 비아냥을 듣는 통에 잊힐 리가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 사건 이후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청계산"은 한화 그룹의 회장이자 한화 이글스의 구단주인 김승연 회장을 통칭하는 별명이 되었으며. 청계산으로 끌려간다는 드립 또한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2.2.4.1. 외신 반응[편집]

이 때, 김승연은 자택을 취재하는 기자들과 방송국 취재진을 한화그룹 직원들을 동원해 막았는데 CNN등의 외신에선 김승연의 이러한 행각을 들어 크게 보도하면서 "한국의 마피아"라고 뉴스 타이틀을 내보냈다. 외신들은 김승연이 폭력배를 사서 폭행 사건을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회사 내 고용관계에 있는 한화 직원들을 "회사 업무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동원해서 물리력으로 쓰는" 김승연의 행동에 더 주목한 것인데,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마치 유럽의 마피아나 남미의 마약 카르텔처럼 여기고 김승연과 한화그룹을 그에 빗댄 것이다. 외신들의 이런 반응은 한국의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2.2.5. 배임 사건[편집]


2012년 8월 16일 부실 차명회사 불법지원과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승연 회장은 실형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2013년 1월 4일에 위독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구치소에서 구속집행정지 건의서를 제출한 상태라고. 결국 1월 8일 구속집행정지가 내려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이에 대해 재벌 회장 등 유명인들이 건강 문제를 핑계로 법적 구속 및 처벌을 회피하는 사례가 자주 있어서[8] 김승연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여론도 존재했다. 방어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근데 공판에 출석한다고 한다. 결국 2013년 4월 1일 병상에 누워 법정에 출석했고 징역 4년과 벌금 1,500억 원을 구형받았다. 관련 기사

2013년 12월 26일 검찰에 의해 징역 9년이 구형되었고, 2014년 2월 11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1억원이 선고되었다.

결국 김승연은 한화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2014년 12월 사실상 경영에 복귀했다. 비공식적으로 막후 경영을 하다가 취업제한이 끝나는 2020년 2월부터 정식으로 복귀했다.


2.2.6. 취업제한 위반 논란[편집]


2019년 2월 김승연의 집행유예가 종료됐지만 이후 2년간 취업제한이 적용됐다. 그런데 이 기간에 계열사인 한화테크윈에 취업해 수십억 원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한화 측은 김 회장의 취업이 법률상 취업제한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며, 법무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조치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 #

3. 여담[편집]


  • 유전적으로 재벌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병인 탈모가 있어 노안이다. 덕분에(?) 아들 세 명 또한 훤칠함과는 별개로 탈모 진행형으로 극강 노안을 자랑한다.

  • 회장은 물론이요, 아들들의 전적도 화려하다. 위에 언급된 둘째 아들 김동원은 청계산 사건, 대마초 흡연, 뺑소니를 저질렀다. 셋째 아들의 사건사고는 김동선 문서 참조. 유일하게 장남 김동관만 스캔들 하나 없는데, 장남(+그룹 후계자)이기 때문에 유독 공을 들여서 키웠다고.

  • 아내 사랑이 각별한 듯하다. 서울대 약대를 수석 졸업한 자신의 아내 머리를 닮아서 아들들, 특히 그룹 후계자가 될 장남이 하버드대를 졸업한 수재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 장서기금을 조성하여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많은 장서를 갖출 수 있게 해 주었다(실제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가보면 '김승연장서기금' 스티커가 붙은 책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성격도 매우 화통하기 때문에 재계 내에서도 인맥이 넓고, 손윗 격인 총수들에 대해서는 예절을 갖추는 것으로 보이는데, 삼성 이건희와는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사적으로는 한화 이글스 하와이 전지훈련 때 자기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이건희가 수백만 원 어치의 양주를 한화 측에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사업적으로도 많은 조언을 구했는지, 현재는 한화그룹에서 없어선 안될 가장 중요한 회사가 된 대한생명이 매물로 나왔을 때도 이건희를 찾아가 "금융업에 대한 노하우를 가르쳐주시면 형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잘 해보겠습니다."고 허심탄회하게 간청했다고 한다. 이에 이건희는 김승연에게 금융 사업의 노하우를 전달했고 김승연은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이후 한화생명을 중심으로 한 한화그룹의 금융 사업은 그룹의 3대 사업축으로 성장했다. 그 이후로도 이건희가 쓰러지기 전까지 김승연과 승지원에서 자주 만남을 가지는 등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이건희가 김승연을 극진히 아꼈다. 그리고 2020년 이건희가 사망하자 직접 조문하기도 했다. 이는 아버지 김종희 회장과 이병철 회장간의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승연이 29살에 회장직에 올랐을땐 이병철 회장이 어린 나이의 김승연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 정몽준 전 의원과도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나이차가 1살 있지만 김승연 회장이 2월 출생이기 때문에 빠른년생으로 초등학교에 1년 일찍 입학하여 정몽준 전 의원과 같은 장충초등학교 동창이다. 이 시기부터 서로 집에 놀러가고 같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놀았다고. 특히 정몽준이 김승연의 자전거를 많이 빌려 탔는데 이 때문에 최근에도 김승연이 정몽준에게 가끔 "그때 자전거 빌려탄 돈 왜 안내냐"(...)고 놀린다고 한다.[9]그리고 29살에 아버지 김종희 회장이 급작스레 사망하여 일찍이 회장직에 오른 뒤엔 정주영 회장과 정몽준, 김승연 셋이서 한 비행기를 탄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정주영 회장이 곤히 잠들어있던 정몽준을 깨워주는 모습을 보고 부자간의 모습을 보며 부러워 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그리움을 느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이외에 박근혜 전 대통령도 정몽준, 김승연 회장과 같은 동창이지만, 박근혜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존재였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박근혜를 잘 알진 못했다고 한다.


  •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그렇듯 끽연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도 담배를 즐겨 피는 듯. 일례로 대통령과 기업총수들 간의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행 버스에 오르기 전에 담배를 꺼내문 사진이 기자들에게 찍혀 기사화되었다. 건물에 나와 천장은 있으나 옆은 뚫린 공간으로 흡연 구역은 아닌지라 옆에 있던 직원이 바로 제지해 담뱃불은 붙이지 않은 채 담배를 수거했다.



4. 어록[편집]



4.1. 한화그룹 창립기념사 발언[편집]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시대다.”

2005년


“글로벌시대에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는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본능’을 배워야 한다."

2006년


"시대에 역행하는 익숙했던 과거와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2007년


"조직의 노화를 부추기는 관료주의, 적당주의, 무사안일주의를 배척하고 세월을 거슬러 영원한 청춘기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의 한화가 꿈꾸고 만들어갈 모습이다."

2016년



4.2. 신년사 발언[편집]


"동란의 초토 위에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기적의 역사를 창조했던 화약인들의 ‘프런티어’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한화인 모두 견지해야 할 일류정신의 표상이다."

2006년


"세계 속의 한화를 이끌기 위해 국적, 학력, 나이와 같은 불필요한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겠다."

2007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명이 동터 오듯이 이제 우리 한화는 새로운 희망을 여는 대한민국과 함께 ‘비극태래’의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2008년


"지금은 숲보다 나무에 집중해야 할 시기이며 작은 구멍 하나에 거대한 배도 침몰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방산•유화부문은 규모의 경쟁력을 넘어 실질적 시너지 확대에 주력해야 한다. 태양광부문은 글로벌 녹색성장을 주도하는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도전하고 해외시장에서 미래 사업기회를 모색하는 금융부문도 글로벌 경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2016년


"새는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 어떤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지금 세상 밖에서 불어오는 위기의 바람 또한 우리가 더 강한 기업으로성장하는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2017년



5. 수상경력[편집]


  • 체육훈장 백마장 (1982)
  • 철탑산업훈장 (1983)
  • 체육훈장 맹호장 (1984)
  • 그리스 피닉스 대훈장 (1986)
  • 체육훈장 청룡장 (1986)
  • 금탑산업훈장 (1995)
  • 그리스 대훈장 (1996)
  • 대한적십자사 유공장 (1998)


6. 가족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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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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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자 김동선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승마 경기에 출전하고 있던 2016년 8월 11일 별세했다.[2] 서정화 전 의원의 딸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재학 시절 결혼함.[3] 5주기인 2015년[4] 그런데 SF의 원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한 류현진과 묶이면서 류현진이 AT&T 파크에서 등판할 때 SF가 류현진에게 도발하는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곤 한다.[5] 김승연의 의리 중시 성향+야알못 문제점으로 인해 팬의 의견에 휘청대는 문제점이 있다.[6] 참고로 이 슬롯머신 사건의 담당 검사가 바로 홍준표이다. [7] 사실 이전에도 화해는 한 상황이었다. 김호연이 빙그레 회장 사임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을때, 김승연이 캠프를 찾아와 지지를 해주고 선거인단을 독려했었다.[8] 여전히 2018년에도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이 8년의 황제 보석으로 공분을 산 바 있다.[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