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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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근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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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통령배고교야구심볼.png
1967~1968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s-2|{{{#a78329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대회 신설

임신근
(경북고등학교)


서종수
(선린상업고등학교)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86
198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8번
팀 창단

임신근
(1982)


홍승규
(1984~1990)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김동엽
(1982)

임신근
(1985~1987)


이상윤
(1990~1995)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38번}}}
최재은
(1985~1986)

임신근
(1988)


김풍기
(1989~1990)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2번}}}
팀 창단

임신근
(1990~1991)


결번



파일:ruvbdA8.jpg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가운데 안경 쓴 인물이 임신근.
임신근
林信根 | Lim Sin-Keun

출생
1949년 11월 28일
대구광역시
사망
1991년 9월 17일 (향년 41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경상중 - 경북고
포지션
투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겸 코치
소속팀
한일은행 야구단 (1969~1970, 1974~1977)
삼성 라이온즈 (1982)
지도자
한일은행 야구단 코치 (1978~1980)
한일은행 야구단 감독 (1981)
삼성 라이온즈 1군 플레잉코치 (1982)
해태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2군 투수코치 (1988)[1]
태평양 돌핀스 감독대행 (1988)[2]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수석코치 (1990~1991)
병역
해병대 야구단 (1971~1974)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前 야구선수. 실업야구 시절에 활동했으며, 이선희 이전의 대한민국 야구계의 좌완 에이스였다. 또한 투수, 타자 양쪽 모두 뛰어났던 선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서영무 감독과 함께 1970년대 초 경북고등학교 전성시대의 막을 연 선수라 할 수 있으며, 1967년 경북고 2학년 때 1회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다. 경북고 야구부의 첫 전국대회 우승. 이후로 여러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임신근이 던지면 이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공이 빠르진 않았지만 제구력과 변화구로서 타자와 상대하는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였다.

1969년 실업 팀인 한일은행에 입단, 10승 7패로 그 해 신인상을 수상했고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다. 1970년에는 승률 1위를 했다. 1971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1972년에는 다승 1위(18승)와 승률 1위(0.818)를 했다. 특히 이 해에 해병대는 20승을 올렸는데, 이 중 18승을 임신근 혼자 올린 것.

1974년 해병대를 제대하고 한일은행에 복귀했는데, 해병대 시절 무리한 등판으로 구위가 떨어지자 1976년에 당시 한일은행의 감독이었던 김응용은 임신근을 타자로 전향시켰다. 성적은 부진했지만 당대 최고의 좌완 투수로 손꼽혔던 임신근은 그에 반대했으나, 결국 김응용에게 굴복해(…) 타자로 전향했다.[3]

하지만 1976년 춘계 리그에서 0.512의 타율을, 추계 리그에서 0.440의 타율로 그 해 타격 1위를 차지했고 1977년에도 타격 1위를 차지하는 등, 김응용 감독의 전향 선택은 탁월했다. 실업 야구 역사상 2년 연속 타격왕은 임신근이 유일하다. 이 점에서 임신근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며, 이후 롯데의 김응국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에 타자로서 뛰어난 성적과 과묵하고 남자 다운 카리스마로 인기도 많았다고.


3. 은퇴 후[편집]


선수 은퇴 후 한일은행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1981년 김응용이 미국 연수를 떠나자 김응용의 후임으로 한일은행 감독을 맡았다. 그러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연고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코치 겸 선수로 합류했다. 선수로서는 2경기에 대타로 들어서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원년에 준우승을 기록한 후 삼성 라이온즈는 그를 해임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조지대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었다.[4] 1987 시즌 후 해태와 계약이 만료되자 이듬해 태평양 돌핀스의 2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가, 1988년 4월 강태정 감독이 팀의 부진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감독 대행이 되었다. 이후 태평양 투수진을 안정시키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듬해 태평양이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며 태평양에서 나왔다.

1990년 신생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수석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던 중 1991년 9월 17일,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OB 베어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의 타격 훈련을 지도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전주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향년 41세. 10년 후인 2001년에 역시 시즌 중에 타계한 김명성 전 롯데 감독과 함께, 코치진의 일원으로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례로 기억된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2
삼성
2
5
.000
0
0
0
0
0
0
0
KBO 통산
(1시즌)
2
5
.000
0
0
0
0
0
0
0


5. 관련 문서[편집]



[1] ~4월 22일[2] 4월 23일~[3] 김응용은 임신근의 고향팀인 삼성 감독 시절이던 2004년에 환갑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SK 와이번즈와의 난투극에서 SK 외국인 용병 카브레라를 헤드락으로 제압할 정도 포스가 넘쳤다.[4] 한일은행 시절 스승이 감독이었다. 훗날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송유석이 임신근 코치의 지도를 받고 기량이 향상됐으며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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