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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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이용일
李容一 | Lee Yon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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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1년 4월 17일 (92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학력
경동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상학 50 / 학사)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육군 (1953~1956)

1. 소개
2. 생애
3. 한국프로야구를 만들다
4. 이후 행보
5. 이력
6. 참고 링크



1. 소개[편집]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를 창단하고 KBO 리그가 출범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아울러 KBO 초대 사무총장,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 KBO 총재 대행을 역임했다.

측근인 유영구가 사학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정권 낙하산 총재를 막아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KBO 총재로 밀기도 했다. 결국 유영구 총재가 자진 사퇴한 후 '총재 특보'를 넘어 아예 자신이 그 자리에 앉기도 했다.

김성근과 절친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성근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한 장본인. 이용일은 4-50년대 야구선수 출신답게 아주 구시대적인 야구관을 가지고 있어서 선수를 혹사시키는 김성근을 무척 좋아했다. 쌍방울의 구단주 대행 시절 이용일은 만년 하위 팀인 쌍방울은 "혹사로 굴려야 제정신 차린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김성근을 적임자로 여겼고 실제로 영입했다.

여러모로 야구계의 명암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31년 4월 17일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경성고무 창업주였던 이만수(李晩秀)의 넷째로 태어나 꽤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후일 매부가 되는 전 야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유복룡(劉福龍)[1]이 바로 아래집에 살아서 매일 캐치볼 하며 야구를 접했다고 한다.

이후 군산중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서울 경동중학교에 전학을 갔는데, 그 해에 해방이 되었고, 그때 유복룡이 학교에 제안하여 경동중학교 야구부를 창설하고 초대 감독에 오른다. 당연히 이용일도 경동중학교 야구부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졸업 후인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상학과(50학번)에 진학해 상과대학 야구부에 가입하여 야구선수 이력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1950년 6월 개최된 전국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야구부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치러질 예정이었던 전국학도호국단 체육대회 준결승전을 앞두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회가 중지되었고, 이용일은 1950년 10월에 군에 입대, 특과장교로 6년간 군복무를 했고, 1956년 3월에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6.25 전쟁 말기인 1953년 창단된 육군 야구단의 창단 멤버가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육군 야구단 감독으로 재임하기도 했는데 이때 항상 공군에게 깨져서 당시 정훈감이었던 김창정 장군과 양국진 육군참모차장에게 엄청 깨졌다고 한다.[2]

군문을 나온 후 가업인 경성고무의 전무로 재직하던 이용일은 전역 6개월 만에 살이 89kg까지 불어나자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사내 야구 동아리를 만들어 군산중학교, 군산고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작했는데 당시 군산에 불량 청소년들이 많아서 '이들을 교화시키는 데 야구를 활용하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로 야구부 창단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2년 2월에 군산국민학교, 중앙국민학교, 남국민학교, 금광국민학교등 4개 국민학교 야구부가 창단했고 이들이 졸업한 후 지역 야구팀이 없어 휘문고등학교 야구부동대문상업고등학교 야구부로 진학하는 모습을 보고 군산에도 고교야구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 1968년에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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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뒷줄 오른쪽 네번째가 이용일

1978년에 경성고무를 선경그룹에 매각한후, 대한야구협회 회장이었던 김종락[3]의 부탁으로 대한야구협회, 한국실업연맹, 한국대학연맹, 한국고교연맹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1979년 2월에 현재의 대한야구협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유소년 야구 지원, 유망주 미국 유학[4] 등 유망주 양성에 힘썼다.

3. 한국프로야구를 만들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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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재직 당시 모습

대한야구협회 전무로 일하던 중,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사회 정화 운동에 휘말려 1980년 2월 협회 전무 자리를 타의로 사직하고 야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서울대 상대 동창이자 협회 운영부장으로 일하던 이호헌[5]도 모가지를 당하며 동병상련의 처지로 같이 백수 시절을 보내던 중, 1981년 5월 청와대 이상주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만나 프로야구 창설에 대해 적극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한국 프로야구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상주 수석이 TV를 보다 중앙대학교 서영무 감독이 "이제 한국도 프로야구를 만들어야 됩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고 나서 "야구와 축구 프로리그를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프로야구 출범과 관련된 논의를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당시 피를 보고 집권한 신군부가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3S정책을 검토하는 와중에 정권 실세 중 하나인 이학봉 민정수석이 프로야구를 언급하면서 본격화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용일과 이호헌은 머리를 맞대고 프로야구 창단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프로야구에서 이미 전설적인 스타가 된 강타자 장훈의 도움으로 장훈의 은사이자 일본 야구계의 거물이던 미즈하라 시게루와 동료이자 전설의 야구왕인 나가시마 시게오를 소개 받아 프로 창단에 필요한 노하우의 자문을 받았고, 이런 인연으로 나가시마는 시모다 다케조 NPB 커미셔너 및 장훈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장훈은 이용일과 긴밀히 협업하며 리그 초기에 NPB에서 뛰던 재일교포 선수들을 한국프로야구 각 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연결해주는 역할도 하였다.

청와대에서 대한야구협회대한축구협회에 프로리그 출범 계획서 제출을 요구하자 1975년 재미교포 홍윤희 씨가 주도하여 작성했던 프로야구 창립 계획을 골자로 프로야구 출범 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 이용일이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단장으로 참가했을 당시 쿠바 야구협회장으로 부터 "우리는 연고지 제도를 도입해서 운영하고 있고 이것이 쿠바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라는 말을 들었고 지역 연고 고등학교 별로 프랜차이즈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예를 들어 부산직할시경남고 출신은 무조건 부산 연고의 팀에 입단하고 광주직할시광주제일고 출신은 무조건 광주 연고의 프로팀에 입단 하도록 한 것. 그리고 이는 프로야구의 조기 정착과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6]

이렇게 짜여진 프로야구 창단 계획서를 제출하고[7] 이상주 수석과 면담을 가졌는데 이상주 수석이 "계획서 자체의 내용은 좋다. 그런데 요즘 지역감정 때문에 정치가 힘든데, 지역감정을 더 심화 시키는게 아니냐. 계획서를 좀 바꿔야 할 것 같다."라는 제안을 했는데 이용일은 "프로 스포츠는 먹고 살 걱정 없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여가 생활로 즐기는 건데, 지금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2천달러도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 스포츠가 성공하려면 반드시 뭔가 특색이 있어야 한다. 고교야구가 인기 있는 이유도 지역민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인데 프로야구 또한 그렇게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상주 수석도 그 의견을 흔쾌히 받아 들여 그렇게 윗선에 보고했고, 그 후 청와대에서 "원안대로 추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며[8] 본격적으로 기업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서울특별시에는 MBC 청룡, 인천직할시에는 삼미 슈퍼스타즈, 부산직할시에는 롯데 자이언츠, 대구직할시에는 삼성 라이온즈, 충청남도 대전시에는 OB 베어스, 전라남도 광주시에는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되며 프로야구가 발족하게 되었다. 자세한 일화는 KBO 리그 역사 항목 참조.


4. 이후 행보[편집]


1981년 12월 11일 한국야구위원회가 발족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후 1991년까지 사무총장으로 재직했으며 한일 슈퍼게임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 후 1991년에 이용일 본인이 주도하여 새로이 창단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구단주 대행으로 근무했고 쌍방울그룹 부회장 직도 겸임했다. 1998년 시즌 종료 후인 1999년 2월에 쌍방울그룹 부회장 및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직을 그만두었다.관련 기사

2008년에 참여정부의 낙하산 총재였던 KBO 신상우 총재가 퇴임하자 상도동계였던 박종웅 前 국회의원이 신임 총재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상 정권이 바뀌면서, 또 다른 낙하산 총재가 부임한다는 소문이었던 셈이다. 이 때 야구계의 최고 원로 중 한 사람이었던 이용일은 평소 친분이 있던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을 KBO 총재로 추천하였고 이용일은 KBO 총재 고문을 맡으면서 사실상 바지 총재를 세우고 뒤에서 야구계를 좌우한 실세였다는 평이 있다. 2011년 유영구 KBO 총재가 명지학원 비리로 구속되어 총재 직에서 물러나자 잠시 KBO 총재 대행을 맡았고, 신임 총재 선거를 과리했다.

제 10구단 창단 구단 선정 당시 전라북도에 프로야구단을 유치하자는 취지로 구성된 "제 10구단 범도민유치추진위원회"의 위원장 직을 재직하기도 했다.


5. 이력[편집]



6. 참고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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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린상업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 출신으로 발이 빨라 야구 대표팀에서 주로 중견수 겸 1,2번타자를 도맡았다.[2] 당시 육군과 공군 간에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데다, 공군은 육군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용일이 말하길 당시 육군은 순수하게 사병들 중에서 야구 좀 한다는 사람들만 모아서 꾸린 반면, 공군은 입대부터 선수출신 등 야구 잘하는 사람들만 별도로 스카웃하여 만든 팀이어서 상대가 안 되었다고. 다만, 당시 육군에도 박현식, 장태영, 김양중 같은 당대의 실업야구 슈퍼스타들이 소속되어 있었다.[3] 정치인 김종필의 친형[4] 이 때 혜택을 받은 이가 바로 김응용.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대회 때 선수와 단장으로 만났는데 김응용이 선수단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남은 금액은 돌려주는 모습에 선택했다고. 다만, 모종의 이유로 시기가 늦어져서 김응용은 1981년에 연수를 떠났고, 이후 대한야구협회에서 "더 이상 지원은 어렵다"라고 밝혀서 1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5] 마산시 출신으로 본명은 이정렬. 마산상고와 서울대 상대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했고 1963년 대한야구협회 공식 기록원을 시작으로 야구 행정가의 길을 걸어왔으며 한편으로 하일성, 허구연 이전 야구 해설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한국 야구의 표준 기록 법을 세운 야구 기록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인물. 2012년 10월 15일 노환과 폐렴 합병증으로 별세했다.[6] 반면 한국프로축구의 경우 시설문제등을 이유로 창단 작업에 난항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 프로야구가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1년 늦게 출범했고, 본격적인 연고 제도가 정착된 것은 1990년부터였다.[7] 그런데 계획서 제출 후 한 달 가까이 소식이 없어 이호헌이 이상주 수석에게 전화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이 수석은 오히려 "왜 아직도 계획서를 안 주느냐?" 라고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계획서를 받은 우병규 당시 정무수석비서관 밑의 비서관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 책상 서랍 속에 쳐 박아 버린 것이라고 했다. 뒤늦게 계획서를 읽어본 이 수석은 무릎을 치며 "옳커니! 이렇게 하면 되겠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8] 다만 처음에 계획안이 보고됐을 때 전두환의 반응이 다소 엉뚱했다. 축구 광이었던 전두환은 청와대로 도착한 프로 스포츠 리그 창설 계획이 프로축구 창설 계획안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뱉은 말이 "어? 뭐야? 야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