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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우스티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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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08년 출생
- 1984년 사망
- 사마라 주 출신 인물
- 독소전쟁/군인
- 소련군 원수
- 소련 제1부총리
- 소련 국방장관
- 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 사회주의노력영웅
- 소비에트연방영웅
- 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간부회 후보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서기국 서기
- 소련 공산당 23기 정치국 후보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서기국 서기
- 소련 공산당 24기 정치국 후보위원
- 소련 공산당 24기 서기국 서기
- 소련 공산당 25기 정치국 위원
- 소련 공산당 25기 서기국 서기
- 소련 공산당 26기 정치국 위원
1. 개요[편집]
소련의 정치인 겸 군인. 독소전쟁 시기부터 방위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공산당 내에서 큰 권력을 행사한 소련 정계의 실력자였다.
2. 생애[편집]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1908년에 러시아 제국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우스티노프는 적군에 입대해 중앙아시아의 바스마치 운동[1] 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제대한 뒤에 우스티노프는 발라크나의 제지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마카리예프의 직업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코의 섬유 공장으로 근무지를 옮긴 뒤에는 이바노포-보즈네센스코 종합기술대학교 기계공학부에 입학했으며, 나중에는 모스크바 고등기술대학교로 편입했다. 이후 레닌그라드 중공업인민위원회 군사기계대학교로 다시 편입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레닌그라드 포병해양연구소에서 엔지니어 겸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경험을 쌓은 다음에 볼셰비키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공장의 감독관이 되었다.
독소전쟁 직전에 우스티노프는 스탈린에 의해 군비인민위원으로 발탁되었고, 붉은 군대와 소련 해군에 각종 군수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쟁 초기 우스티노프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수백 개의 기업, 수만 개의 장비를 전선에서 대피시키기 위해 엄청난 작업을 수행했고, 모든 인력과 물자를 대피시킨 뒤에 후방에서 곧바로 군수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우스티노프의 노력을 바탕으로 소련은 서방의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시체제를 갖출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을 물량에서 압도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우스티노프는 직책을 유지했고, 인민위원회의가 장관회의로 개편됨에 따라 군비장관이라는 직책명으로 유임되었다. 우스티노프는 첨단 무기 개발에 집중해 소련의 ICBM 잠재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프로옉트 627형 잠수함 "키트"의 인수를 책임졌고, 이후에도 여러 원자력 함선의 건조를 지원했다. 한편 우스티노프는 대공 미사일에도 관심을 가져 S-125 네바의 도입을 지지했으며, S-200 앙가라와 S-300 파보리트의 개발 및 도입에도 도움을 주었다.
우스티노프는 1952년 19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방위산업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계에도 영향력을 넓혀 군사산업위원회 주석과 장관회의 제1부주석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5년 전원회의에서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면서 서기국 서기에 선임되었으며, 1966년 23차 당대회에서 간부회가 정치국으로 개편된 후에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유임되었다.
2.1. 국방장관[편집]
우스티노프는 재직 중 사망한 안드레이 그레치코의 후임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국방장관 취임과 함께 대장 계급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수로 진급했다. 그리고 1976년 2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국방장관의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서기국 서기직은 사임했다.
국방장관에 취임한 이후 우스티노프는 핵전력의 현대화, 특히 고체연료 추진 핵미사일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RT-23 몰로데츠, RT-2PM 토폴, 프로옉트 941형 잠수함 "아쿨라"가 완성되었다.[2] 그리고 우스티노프는 유럽과 극동에서 강력한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고강도 비핵전쟁을 구상하던 소련군의 교리를 고쳐 전술 핵무기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 RSD-10 피오네르와 OTR-23 오카를 배치해 기갑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우스티노프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총참모장을 포함한 군부 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리 안드로포프,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밀어붙이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편 우스티노프는 정치국의 핵심 구성원[3] 중 한 명이었으며, 콘스탄틴 체르넨코를 밀어내고 안드로포프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후계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해 소련의 킹메이커로 평가받았다.[4]
우스티노프는 국방장관 재직 중이던 1984년에 폐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 국방장관에 취임한 이후 각 지역을 순방할 때마다 환영 행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고위 장성들의 음주가무와 사냥 여행을 중단시켰다.[5]
- 아들인 니콜라이 우스티노프는 소련 레이저 공학의 권위자였으며 1K17을 비롯한 레이저 탱크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돈 먹는 하마인데 당장 큰 성과는 나오지 않던 레이저 탱크 프로젝트가 오랜 기간 진행된 것은 니콜라이의 아버지가 국방장관인 우스티노프여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프로옉트 1164형 미사일 순양함 "아틀란트"의 2번함이 "마르샬 우스티노프"로 개명되었다.[6] 현재 마르샬 우스티노프는 북방함대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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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차 세계대전 도중 러시아 제국의 무슬림 징병으로 인해 반러시아 감정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봉기로, 적백내전 시기까지 이어졌다가 적군이 승기를 잡고 무슬림에게 일부 이권을 양보하면서 진압되었다.[2]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9&num=38909[3]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알렉세이 코시긴 장관회의 주석(후일 니콜라이 티호노프로 교체.), 미하일 수슬로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겸 최고 이론가, 유리 안드로포프 국가보안위원회 주석,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콘스탄틴 체르넨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4] 체르넨코가 당정 관료조직의 지지에만 집중하던 것과 달리 안드로포프는 KGB와 군대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우스티노프가 체르넨코에게 "나와 군대는 안드로포프를 지지한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체르넨코도 브레즈네프의 후계자 자리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5] https://en.topwar.ru/149030-zheleznyj-ministr-oborony-dmitrij-ustinov.html[6] 단 이는 개명된 이름이며 소련 해군이 처음 붙인 이름은 "아드미랄 플로타 로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