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샤포시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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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소련의 군인.
스탈린 시절에 대숙청 이후 총참모장을 맡아 수많은 장교가 숙청되어 난장판이 된 소련군의 재건에 큰 기여를 했다.
2. 생애[편집]
2.1. 러시아 제국[편집]
카자크족 출신으로 1882년 첼랴빈스크 주에서 태어났다. 1901년 러시아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장교의 길을 걷는다. 1910년에는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참모장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소령계급으로 참모장교로 참전하여 오스만 투르크군과 싸웠다.
1914년 머리를 부상당하기도 했으나 회복되어 복직하였고, 대령까지 진급하였다.
2.2. 대숙청 이전까지[편집]
1917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장교출신으로는 드물게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붉은 군대에 입대하였다. 정규장교가 드물었던 초기 붉은 군대에서 정규군사교육을 받았던 정통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당장 붉은군대 제1 참모차장으로 승진하여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의 승리에 기여했다. 1918년 다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후 회복되어 복귀했다. 이어 여러 전공을 세워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야전으로 돌아가 여러 군관구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931년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후임으로 붉은 군대 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취임한지 1년만에 1932년 군내 파벌간의 투서사건에 휘말려 한직인 프룬제 군사대학의 교장으로 좌천되었다. 1935년 다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야전으로 복귀했다. 1935년 군에 계급이 도입되자 대장을 달았다.
1937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예고로프가 숙청되면서 다시 총참모장직에 복귀했다.
성향을 의심받는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고, 대숙청 이후였던 1939년까지 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행동이나 발언을 극히 삼가고 순수한 군인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숙청을 피해갈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산당 내에 수많은 파벌이 난무하던 대숙청 이전에 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계파로 찍히지 않아서 대숙청을 피해간 행운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숙청에 고위 재판관으로 참가하여 이후에 복권된 투하쳅스키나 요나 야키르 같은 여러 전직 동료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기도 했다. 사실 본인이 판결을 내렸다기보다는 스탈린이 내린 명령에 도장찍어주는 역할이었다.
2.3. 이후[편집]
샤포시니코프는 대숙청 이후 막장화된 소련군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스탈린을 설득하여 감옥에 있거나 예편된 수천명의 장교들을 군에 복직시켰다.
스탈린은 의심많은 성격답지 않게 특별히 샤포시니코프를 신임했으며, 직책이나 이름("총참모장 동무"나 "샤포시니코프 동무")로 부르지 않고 "샤포시니코프 선생"[1] 이라고 높여 불렀을 정도로 샤포시니코프를 신임하고 총애했다. 그리하여 자기 책상에 샤포시니코프의 저서인 "군의 두뇌"를 항상 놓고 탐독했다고 한다.
1939년 겨울전쟁에서 침공작전을 입안하지만,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지휘한 소련군은 처음에 핀란드군에 참패했고, 이후 후임 사령관 세묜 티모셴코가 전선을 추스려 겨우 핀란드의 항복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초기 실패는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보로실로프의 책임이 더 크다고 판단되었고, 최종적인 승리가 평가되어 1940년 5월, 원수로 승진했다. 하지만 만성폐결핵 환자이었기 때문에 전쟁중 건강을 해쳐 8월 총참모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후임 총참모장이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인데, 스탈린의 신임을 잃어 다음해 1월에 다시 주코프 대장으로 교체되었다.
결국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주코프는 특유의 고집으로 스탈린과 잦은 의견 충돌을 벌이다 다시 야전으로 돌아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위를 맡았다. 샤포시니코프는 이런 주코프의 뒤를 이어 10월 다시 총참모장에 취임하지만 이는 명목상이었고, 참모차장인 바실렙스키가 실질적인 총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모스크바 전투를 지휘하는 주코프를 보좌했다.
이후에도 샤포시니코프는 명목상 계속 총참모장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차장이었던 바실렙스키가 총참모장 역을 한다. 샤포시니코프는 독일군의 청색 작전으로 전쟁이 중대국면에 치달은 1942년 5월이 되어서야 이 자리를 바실렙스키에게 물려주고 한직인 보로실로프 군사학교 교장으로 물러난다.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나기 직전인 1945년 3월 26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매장되었다.
3. 평가[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전지휘를 맡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의 신임을 이용하여 소련군내에 여러 개혁조치들을 실행했다. 또한 관리능력도 출중했기 때문에 대숙청후 박살난 소련군의 재건에 큰 기여를 했다. 이것이 독소전쟁 발발 이전까지 끝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재건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야전군인이라기보다는 행정가, 군사이론가, 저술가로 더 이름이 높다. 그의 저서들은 소련군 및 공산권 군대에서 널리 읽혀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 소련군 장성들의 스승으로 간주된다.
4. 기타[편집]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열렬한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
-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인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와는 성만 같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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