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브레즈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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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bgcolor=#cd0000><width=15%> 초대 ||<width=35%>
인민위원장

블라디미르 레닌 ||<bgcolor=#cd0000><width=15%> 제2대 ||<width=35%>
이오시프 스탈린 ||
||<bgcolor=#cd0000><width=15%> 임시 ||
게오르기 말렌코프 ||<bgcolor=#cd0000><width=15%> 제3대 ||
니키타 흐루쇼프 ||
||<bgcolor=#cd0000><width=15%> 제4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bgcolor=#cd0000><width=15%> 제5대 ||
유리 안드로포프 ||
||<bgcolor=#cd0000><width=15%> 제6대 ||
콘스탄틴 체르넨코 ||<bgcolor=#cd0000><width=15%> 제7대 ||
미하일 고르바초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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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대 서기장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Leonid Ilyich Brezhnev

파일:3774231-img-breznev-smrt-vyroci-v2.jpg
출생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카멘스코예
(現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카미얀스케)
사망
1982년 11월 10일 (향년 75세)[1]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주 오딘초보구 자레치예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오딘초보 지구 자레치예)
재임기간
제4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60년 5월 7일 ~ 1964년 7월 15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64년 10월 14일 ~ 1982년 11월 10일
제7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77년 6월 16일 ~ 1982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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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브레즈네바
형제자매
남동생 야코브,[1] 여동생 베라[2]
배우자
빅토리야 페트로브나 브레즈네바[3]
자녀
아들 유리 레오니도비치 브레즈네프
딸 갈리나 레오니도브나 브레즈네바
학력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 연구소[4]
종교
국가 무신론 (명목상)
신체
176cm
소속 정당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4회)
사회주의노력영웅
레닌훈장 (8회)
10월혁명훈장 (2회)
적기훈장 (2회)
적성훈장
전승훈장[5]
군사 경력
복무
소비에트 지상군
1941년 ~ 1946년
최종 계급
원수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1.1. 브레즈네프의 국적 및 민족성
2.3. 권력의 길에 오르다
2.4.1. 회색의 시대: 여러모로 무난했던 시대
2.4.2. 산업경쟁력 강화 실패와 중동형 경제
2.4.3. 일당독재 아래의 점진적 자유화
2.4.4. 지방권력 강화
2.4.5. 의욕적인 군비확장
2.4.6. 대외개입 정책
2.4.7.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다
2.4.8. 중국과의 관계 악화
2.4.9. 아프가니스탄 개입: 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
2.4.10. 종교정책
2.5. 말년
3. 평가
3.1. 영국
3.2. 미국
3.3. 러시아
3.4. 우크라이나
3.5. 구 공산권
3.6. 남유럽
3.7. 북한
3.8. 아프가니스탄
3.9. 중국
3.10. 베트남
4. 관계
4.1. 미국 정상과의 관계
4.2. 김일성과의 관계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7. 진급 이력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80).jpg


소련정치인.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의 최고권력자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지냈다. 1964년에 전임자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해낸 이래로 1982년 죽을 때까지 18년간 집권했다.[2]

전임자 흐루쇼프는 대내적으로는 급진적인 개혁, 대외적으로는 모험주의적인 대미 강경 노선을 펼친 반면, 브레즈네프는 체제 개혁은 보류했지만, 시끄러운 '열전'보다는 평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전임자가 그랬듯이 미소 간의 핵 전력 격차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핵 전력 격차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재임 기간 내내 군비 투자를 대폭 늘렸다.

그의 집권기에 국민 생활은 계속 개선되었다.[3] 흐루쇼프벼랑 끝 전술을 반대하고 데탕트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려 많은 노력을 한 결과, 흐루쇼프 시절보다 전쟁의 위협이 줄어드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본인이 주도해 흐루쇼프를 축출했으면서도 흐루쇼프의 체제 안화 조치를 상당 부분 유지했기 때문에 일부 정치학자들은 브레즈네프 시기를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 체제"라고 부른다.[4][5]

다만, 어두운 면도 있었다. 스탈린 사후부터 준비한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이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심각해 중단되었으며 60년대 초반 연간 5% 이상의 고성장을 거듭하던 소련 경제의 성장이 점차 낮아지고 있음에도 좋은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70년대 후반의 저성장(평균 2%)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는 1980년대 소련 경제의 붕괴에 단초가 되었다. 이밖에도 소련 체제의 모순과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조짐을 방관하여 연방 해체의 싹을 키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 예산을 대폭 늘려 소련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군부의 비대화를 야기했다.[6]

그래도 러시아 내에서는 브레즈네프에 대한 평가가 꽤 높은 편이다. 스탈린 시대의 공포 정치도, 연방 해체 시기의 아비규환도 없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던 데다가 유가 급등으로 벌어들인 풍부한 오일 머니로 다양한 기호품과 사치품을 소련 인민들에게 제공하고, 생필품과 소비재의 공급도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났기 때문이다.[7]


2. 생애[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F0417-0001-028%2C_Berlin%2C_VII._SED-Parteitag%2C_1.Tag.jpg
왼쪽은 후임인 유리 안드로포프, 가운데는 동독에리히 호네커, 오른쪽이 본인.


2.1. 초기[편집]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예(현 우크라이나 카미얀스케)[8]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였던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Илья Яковлевич Брежнев)[9]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브레즈네바(Наталья Денисовна Брежнева)[10]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를 우크라이나에서 보내서 그런지 브레즈네프의 러시아어를 들어보면 г를 표준 러시아어처럼 /g/ 발음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처럼 /ɦ/로 발음하며, 어말의 в 역시 표준 러시아어처럼 /f/ 발음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처럼 /w/로 발음한다. 1971년 신년사.


브레즈네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을 때, 소련은 스탈린이 지배했으며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많은 청년 공산당원들이 스탈린주의자로 성장했다. 스탈린은 제정시절부터 내려오던 비볼셰비키 계열 정치 집단 출신 전문직, 관료들인 '스펩치'들을 대체하기 위해 혁명 이후에 '사회주의적 사고'를 교육받은 젊은 당원, 관료, 전문직 종사자들을 육성했었고, 브레즈네프도 이 정책의 수혜은 '뷔드비쩨이(승진자)' 중 하나였다. 푸틴 같은 대숙청 옹호론자들은 대숙청이 이런 스펩치들을 븨드비쩨이로 대체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고도 주장하기도 한다.

브레즈네프는 1921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SFSR쿠르스크로 이사해 15세 때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였다. 1923년에는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하고, 몇 년간 쿠르스크에서 측량사로 일했다. 27년에 결혼한 그는 우랄 지역으로 이동해 측량사로서의 경력을 쌓아 나갔고 1930년에 모스크바 공과 대학에 입학했다가 31년에 드니프로제르진스크 금속 공대에서 금속 공학을 배워 1935년 졸업한 뒤, 우크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35년에는 소련군 육군정치장교입대하였으며, 1936년 말에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도바 공산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지구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산업을 조직하였다.[11]

파일:external/6e2e18908479624997cf406e26e5168a2ccd8dc90b6d9c64513abcdb2a4690ee.jpg
1920년대 후반의 브레즈네프 부부. 부인 빅토리야 브레즈네바(Виктория Петровна Брежнева) 사이에서 아들 유리(Юрий)와 딸 갈리나(Галина)를 두었다.데이비드 핫셀호프 닮았다.

2.1.1. 브레즈네프의 국적 및 민족성[편집]


브레즈네프가 스스로 우크라이나인을 자칭한 기록은 있지만, 이것은 민족적 함의를 갖지 않았다. 혈통적으로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그는 엄연히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랐다. 또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통혼과 이주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흔한 일이라서 이중 정체성을 가지는 일도 많았다.

브레즈네프는 1906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직업을 찾아 러시아 제국 남부, 이른바 '노보 러시아'(지금의 우크라이나 남동부)로 이주한 쿠르스크 지역 출신의 전직 농민인 산업 노동자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초기 문서에서 브레즈네프는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칭했지만, 나중에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신분을 '러시아인'으로 바꿨다. 이것은 느슨한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신중한 선택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우크라이나인'이 볼셰비키 국가 분류 체계에서 선호도를 누렸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균형이 '러시아인'으로 바뀌었다. 소련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된 '신러시아'(노보 로시야)의 영토는 브레즈네프의 작은 고향이었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쾌활하고 사교적인 '남부 러시아인'으로 보았다. 또한 문화적으로 브레즈네프는 러시아 농민과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다. 그는 농민을 돌보고 농민 가족의 가치를 보존했다.

Brezhnev was born in 1906 in the Russian empire. He came from a family of industrial workers, former peasants from the Kursk region who moved in search of jobs to the southern region of the Russian empire, so-called ‘NewRussia’ (now Ukraine). In his early documents Brezhnev put himself down as ‘Ukrainian’, but later, after he moved to Moscow he changed his identity to ‘Russian’. This was natural for people with a loose ‘Russian’ identity, but it was also a prudent choice: in the 1920s ‘Ukrainians’ enjoyed preferences in the Bolshevik national taxonomy, while after the 1930s the balance became reversed in favour of ‘Russians’. The territory of ‘New Russia’ (Novorossiia) that became part of Soviet Ukraine was Brezhnev’s small homeland; his contemporaries viewed his character as stereotypically ‘southern Russian’ – cheerful and gregarious. Also culturally, Brezhnev never fully separated himself from Russian peasantry. He cared about peasants and preserved peasant family values.

Zubok, Vladislav. "‘Do not think I am soft…’: Leonid Brezhnev." Mental Maps in the Era of Détente and the End of the Cold War 1968–91. Palgrave Macmillan, London, 2015. 7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57/9781137500960_2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에는 일관되게 본인을 대러시아인(великорос)으로 기록했지만 이후 지역의 이동에 따라 1940년대에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칭했다. 1947, 1942, 1942 이 와중에 러시아인으로 자칭하는 기록도 존재한다.1943 브레즈네프는 일관되게 대러시아인으로 자칭했었지만 나중엔 이동하면서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칭한 것이었고, 그 와중에도 러시아인으로 자칭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1970년대에 쓴 자서전에서는 본인이 러시아인임을 인정했다.

따라서 민족(혹은 국적)에 따라 나는 러시아인이며 출신은 프롤레타리아이며 유전 야금 학자다. 그것이 내 가계도에 대해 알려진 전부다.

Таким образом, по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я русский, по происхождению — коренной пролетарий, потомственный металлург. Вот и все, что известно о моей родословной.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Жизнь по заводскому гудку" (Москва: Издательство политиче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1981), с.7

여기서 национальности는 국적, 국민성으로도 번역된다.

1.민족

2.민족소속

3.국민성, 민족성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노한사전


민족(民族); 국적, 국민성, 민족성

출처 : 도서출판 문예림 최신 러시아어-한국어사전


국적

национа́льность;национа́льная принадле́жность; по́дданство; гражда́нство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한노사전


국적

1.гражданство

2.национальность (судна)

3.национальный характер;национальные черты

출처 : 국립국어원 한국어-러시아어 학습사전(KORU)


국민성

национальность

출처 : 국립국어원 한국어-러시아어 학습사전(KORU)

검색출처
상단에 인용된 Zubok, Vladislav. "‘Do not think I am soft…’: Leonid Brezhnev."란 논문에 사용된 national taxonomy도 국가 분류로 번역된다. 그리고 소련에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실존했다. 공문서에 기재된 것만으로는 국적이 기재된건지 민족을 기재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 시절부터 문서에 일관적으로 '대러시아인'으로 기재했었다. 당시 소련은 러시아/우크라이나를 대러시아/소러시아라는 식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므로, 국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브레즈네프에게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사실은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비밀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러시아인 혈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인이라고 했을 뿐이며, 평소에 말하는 말투에서부터 우크라니아어 억양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에 당대 소련인들에게 브레즈네프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Мастер Петя мне ответил:

마스터 페탸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길[12]

«Брэйк зробили у США

"브레이크란 놈은 미국에서 만들어 낸 것이야"[13]

Чтоб ряденски классы у клети

"소비에트의 계층을"

Засадить на уси года.»

"영원히 철창에 가두고자 만들어 낸 것이지"

-

데데테, 컨베이어(Конвейер, 1987) 노래 영상 (한국어 자막)


소련 특유의 낮은 노동생산성과 경직된 사회를 비판하는 노래인 데데테의 "컨베이어"에서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해당 부분의 "마스터 페탸"는 브레즈네프의 비유로, 보컬 유리 셰프추크는 브레즈네프의 연설을 희화화하며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뒤섞인 '혼종'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14]


2.2. 독소전쟁 시절[편집]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났고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독일 국방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도시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정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 위원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부 방면 군 정치 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1942년 우크라이나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방면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그는 제18군의 정치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말에 소련군은 주도권을 잡고 반격에 나섰다. 소련 육군 제18군은 제1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일부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다시 되찾고 서방으로 진격했다.

당시 방면군의 상급 정치 위원은 후에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브레즈네프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제4 우크라이나 방면군 정치 지도부 부장으로서 프라하로 갔다. 브레즈네프가 자체 훈장 수여와 주코프 회고록 조작 등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깎아 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브레즈네프가 캅카스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진군하며 전선에서 활약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독소 전쟁의 참담한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브레즈네프는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전쟁을 기피하는 성격이 되었다. 훗날, 서기장이 된 뒤에도 브레즈네프는 프라하 침공, 아프간 침공 등 중요한 군사적 결정에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무력 개입이라는 선택지를 꺼리며 데탕트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1946년 8월, 브레즈네프는 육군 소장 계급을 단 것을 마지막으로 소련군에서 전역했다. 이후에는 전후 재건에 참여했고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지구당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에는 소련 최고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그 해 말에 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했다. 몰도바에서 일하면서 주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말년에 회고록을 집필할 때도 몰도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구구절절 언급했다.

브레즈네프는 몰도바인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공식 기록과 통계상으로는 브레즈네프가 제1서기로 있으면서 몰도바의 상황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브레즈네프 자신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성공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통계와 정부 보고서와는 별개로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일부 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1952년, 소련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보고를 맡은 그는 이 때 처음으로 스탈린과 대면하게 되는데, 스탈린은 그를 두고 '아주 잘생긴 몰도바인'이라고 총애했다고 한다. 대회 이후, 브레즈네프는 당 중앙위 위원으로 승진했고, 재차 소련 공산당 상무 회의 후보 위원, 당 서기국 서기로 파격 승진하였다.

브레즈네프는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몰도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 만든 인맥을 권력 강화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는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2.3. 권력의 길에 오르다[편집]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망 직전 브레즈네프를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후보위원으로 임명하는 등 브레즈네프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지만[15] 그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맡기기 전에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소련 공산당 상무회가 폐지되고, 보다 작은 정치국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후보위원 자리는 자동으로 취소되었으며 서기국에서도 해임되었다. 대신에 새로 구성된 간부회는 브레즈네프를 해군 정치국장에 임명하였는데 얼마 후 해군성과 육군성이 통합되어 국방성이 되면서 해군 정치부가 사라졌고, 국방성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이에 브레즈네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이 이제 50살이 되었고 심장마비와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자신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내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라브렌티 베리야 숙청에도 참가하는 등 브레즈네프는 다시 권력 중심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1953년 8월, 브레즈네프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53년 9월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처녀지 개간 사업을 선포하면서 1954년 1월 전원회의에서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에 임명되어 말렌코프의 지지자인 제1서기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를 보좌하였다. 1954년 2월,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 제1서기 샤야크메토프는 자아비판을 하고 해임되었으며 포노마렌코와 브레즈네프가 카자흐스탄을 장악하였다. 1955년 2월 8일, 포노마렌코의 후원자인 말렌코프와 흐루쇼프와의 대결에서 패배해서 각료회의 의장에서 축출되자 흐루쇼프는 1955년 5월 8일, 포노마렌코를 폴란드 대사로 임명해서 쫓아내고 브레즈네프가 카자흐스탄을 장악하게 했다. 브레즈네프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개척 사업을 지도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후보위원 겸 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계획,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 임무를 맡았다. 1957년 6월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반당 그룹의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쇼프와 대치한 당 지도권 싸움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반당 그룹을 배제한 후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신임을 받으며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1960년 브레즈네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해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당연히 실권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겸직한 소련 공산당의 제1서기(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직은 해외여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서유럽의 비싼 의복이나 승용차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이런 취향은 한참 뒤에야 유명하게 되었다.


1961년, 상무회 주석 시절 생환한 유리 가가린과 포옹하고 입맞춤하는 브레즈네프.[16] 조국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고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튼튼했지만, 그의 건강 악화와 동시에 나타난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진의 신뢰를 무너뜨려 그의 정치 기반이 흔들렸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문제가 한층 더 심화돼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에 충실했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권유로 1963년 흐루쇼프의 추방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흐루쇼프도 낌새를 눈치채었지만 스탈린처럼 브레즈네프를 제거하기는 커녕 소련 지도부에 또 다른 혼란이 발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코시긴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올랐다.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은퇴를 맞이한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후임으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했는데, 이 시기까지를 삼두정치 시기라 칭하기도 한다. 원래는 셸레핀까지 합쳐서 사두정치였으나 셸레핀이 제일 먼저 축출돼서 소련 직총중앙위원회로 좌천되면서 널리 알려진 브레즈네프-코시긴-포드고로니 체제가 자리잡히게 된다.

2.4. 최고지도자 시절[편집]



2.4.1. 회색의 시대: 여러모로 무난했던 시대[편집]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기 당시 모스크바. 대규모 도시 계획을 통해 확장되고 생활 여건도 개선되면서 1970년대 이후 인구 700만이 넘게 되었다.

서구 역사가들은 그의 집권기를 회색 시대 혹은 침체 시대(era of stagnation)라고 부른다. 이는 소련 초기처럼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이나 기근, 무자비한 정치 탄압도 없었고, 소련 말기부터 해체 이후인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휘몰아친 격동적인 혼란멸망도 없었기 때문. 전체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편안해졌지만, 동시에 전체적으로 침체되어 가는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17] '회색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브레즈네프는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브레즈네프의 집권기는, 경제난이나 공포정치도 없었으며, 우상화도 없었기에, 혹자의 말에 따르면 '이 가혹한 땅에 문명이 들어선 이래'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았던 시대, 여러모로 소련 인민들에게는 무난한 시대였다.

스탈린 시대는 중공업 몰빵으로 경제 성장률은 높았지만 국민 생활 수준은 열악했는데 흐루쇼프 시대부터 경공업을 중시하여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소련에 TV와 세탁기, 라디오[18] 같은 가전 제품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경공업 중시와 일상 용품 생산 강조는 흐루쇼프 시대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은 흐루쇼프의 공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소련 국민의 생활 수준은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지만 과오도 있는데 의료 복지 개선과 음주 규제를 하지 않아 국민 건강 수준이 악화된 것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흐루쇼프 시대 말기까지 소련 국민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러시아 SFSR의 1948년 평균 수명은 남자 47세, 여자 56세였는데 1964년 평균 수명은 남자 64.89세[19], 여자 73.58세로 선진국 수준 턱밑까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남자 평균 수명은 3세나 감소했고 여자 평균 수명은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증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가 금주법을 시행하자 남자 평균 수명이 흐루쇼프 시대 말기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나, 1987년 64.83세에서 남자 평균 수명이 더 증가하지 않아 1964년 64.89세 기록을 경신하지는 못했다.

브레즈네프는 보수적이었지만 비교적 온건해서 흐루쇼프 시대의 분위기 자체는 계속 이어받았기 때문에 대놓고 반정부나 반사상 활동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는 보장되었고[20], 경제 성장 둔화와 별개로 사람들의 삶의 질 자체는 상당히 나아졌다.[21] 게다가 이후에 소련이 골골거리다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가 쪽박을 차면서 자연히 브레즈네프 시대에 향수가 일고 평가가 급속히 올라가게 된 감도 있다. 게다가 이때 당내 의사 결정 구조도 당내 여러 세력 간 합의에 따른 집단 지도 체제로 귀결되었고 과거 같은 1인 독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당내에 팽배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이를 알고는 나중에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1977년에는 드디어 절대권력자가 되었다.[22] 정작 이 시점부터 건강 문제로 리더십 공백이 생긴 것을 보자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2.4.2. 산업경쟁력 강화 실패와 중동형 경제[편집]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와는 반대로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거나 벼랑 끝 전술을 하지 않고, 미국과의 갈등 완화를 위해 데탕트를 실행하여 과거 핵전쟁 위기가 만연했던 흐루쇼프 시대보다 훨씬 평화로워졌으며, 비록 군사력의 증강으로 국방비가 GNP의 12%를 넘었으나, 그렇다고 미국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서방 국가와의 무역 또한 늘어났다.[23] 그러나 이러한 무역의 상당수는 소련의 석유나 각종 자원을 서방의 완제품과 소비재로 교환하는 것이라서, 전형적인 후진국형 무역 구조였다. 무엇보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은 대대적인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손쉬운 자원팔이로 경제를 운영하다 보니 나중에 가면 소련 제조업의 경쟁력은 서방보다 점점 떨어졌고, 이는 양과 질 모두 형편없는 소비재라는 결과로 돌아와 인민들의 불만을 불렀다. 특히 서방과의 무역을 통해 들여온 질 좋은 수입산 소비재와의 비교가 이런 위화감을 부채질했다고 한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고유가 시대에서 1980년대 말 저유가 시대가 되자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는 박살이 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불렀다. 그리고 이는 2020년대인 현재에 와서도 러시아가 중동형 경제로 굴러가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훗날 그렇게 될 줄 소련 내에서 아무도 몰랐고, 그저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소련의 소비재의 질이 어느정도였냐면 겨우 최빈국에서 벗어난 개발도상국에 불과했던 당시의 한국이 1970년대 초 부터 트랜지스터를 활용하는 텔레비전을 내놓았을 때 소련은 여전히 진공관을 사용하는 텔레비전이 많았었다.[24] 게다가 라다 쥐굴리 같은 승용차를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으면 이후 차량을 수령하기까지 몇 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었다. 노멘클라투라와 같은 공산당 고위간부들은 서방제 소비재를 즐기고 있었다.

이외에도 흐루쇼프 시대부터 준비하던 코시긴 - 리베르만 개혁을 단행해 경제 체제 전반을 개선하려 했으나, 커다란 성과 만큼이나 부작용도 심각해서 개혁을 추진한지 5년이 되는 1970년에 중단해 버렸다. 1970년대 들어서는 경제성장률이 5~6% 안팎에서 3%로 급속히 저하되었고, 관료제의 폐해가 적나라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 관료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바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된다.

소련은 스탈린 치하에서 1930년대 신화적인 공업화를 이뤄냈고, 1940년대는 독소전쟁 승리를 거두었으며, 1950년대는 전후복구로 아주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도 경제성장률이 5~6%대로 어느정도 나왔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점차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소련 내에서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데 저항이 심했다.

흐루쇼프는 소련 지배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적인 정치[25]를 하다가 결국 지도층의 반발을 사서 실각했고,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예를 봐서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전면적인 개혁을 하는데는 흐루쇼프라는 반면교사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나마 브레즈네프 재임 초기인 1960년대에는 어느정도 성장률이 유지되었지만 1970년대 들어서는 성장률이 급속히 하락하여 3% 안팎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소련시민들의 구매력은 높아지기는 했지만 지하경제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고한 경제개혁안은 계획되어있기는 했지만 이보다 쉬운 길이 갑자기 열렸으니 그것은 바로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오일 쇼크였다.

브레즈네프는 오일 쇼크 때 소련이 풍부하게 가지고 있던 자원, 즉 석유에 주목했다. 그래서 자원을 서방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인민의 복지를 향상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보다는 쉬운 길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소련에 독이 되어 자원의 저주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은 기술이나 교육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더 나은 길이 있었지만, 이념적 경직성 및 쉬운 길로만 가다보니 이렇게 제조업을 등한시한 것이다.[26] 브레즈네프의 전성기인 1970년대는 고유가 때문에 소련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고 인민의 삶도 서방 국가들에 맞먹을 정도로 좋아졌지만[27], 앞으로의 파국을 내재한 풍요로움이라는 점에서 청나라건륭제 말기가 연상될 정도로 상당히 비슷한 시대였다.

어쨌든 고유가 때문에 이렇게 경제를 꾸리는 것은 쉽고도 좋은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도 마찬가지 문제였고, 저유가 시절인 1980-90년대, 2010년대 내내 침체를 하다가 고유가가 된 2000년대, 2020년대 갑자기 경제가 좋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사망한 이후 1980년대 들어 유가가 떨어지던 시기가 되면서 유가로 경제를 꾸리던 소련경제는 위기에 접어 드는데, 이 시기를 맡은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들 세 명이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소련의 불운이었다.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는 건강이 문제가 있어서 최고권좌에 앉은지 1,2년만에 단명해 개혁은 엄두도 못냈고, 마지막으로는 방향은 옳았을지 몰라도 당 장악력이나 리더십에 문제가 있던 고르바초프가 최고 권좌에 올라서[28] 개혁을 추진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있었던 리더십 공백 또한 소련의 불운이라고 할수 있다.


2.4.3. 일당독재 아래의 점진적 자유화[편집]


전임자 흐루쇼프는 소련을 지배하던 스탈린 우상화를 종식하고, 자유화를 이끌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집권한만큼, "흐루쇼프 해빙기"의 여러 자유화 조치를 폐지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식 공포정치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았고, 흐루쇼프가 지향한 자유화는 계속 이어나갔다.

스탈린 시절에는 파벌 싸움에서 지면 암살당하든 사형당하든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흐루쇼프 때부터 이것이 점차 순화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르러서는 파벌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평당원이나 야인으로 강등만 되어 연금을 받으며 집에서 유유자적할 만큼 온건해졌다. 한 역사가는 이를 “정치가들의 파벌 싸움이 피비린내 자욱한, 목숨을 건 치열한 결투에서 신사들끼리의 스포츠 게임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권력투쟁이 상당히 온건화되어 실각하더라도 그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실각이나 파면정도에 그쳤다. 실각이나 하야한 사람은 한직으로 가거나 연금을 받는 은퇴자로 살아갔다. 실각해서 권력을 잃은 고관들의 연봉은 현직에 준할정도로 꽤 높았다. 그러니까 권력투쟁이 있었다고 해도 패배한 사람은 스탈린 시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당하지 않았다.[29] 코시긴이나 포드고로니와 같이 브레즈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다가 야인이 된 인물들은 그냥 실각 수준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유유자적하며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이 실제로 곤경을 겪은 것은 브레즈네프시기가 아니라 소련체제의 위기로 연금이 끊기는 1980년대 말기였다.

물론 브레즈네프 자유화는 서방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반체제적인 언론이나 출판물은 금지되었고, 의회 민주주의나 다당제를 주장하는 운동가들은 탄압을 받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스탈린 시절처럼 고문, 처형, 투옥되는 게 아니라 거주지 이전조치, 정신병원 감금에 그쳤다. 그것도 안되면 아예 서방국가로 추방했다.

다만 브레즈네프가 본의 아니게 오명을 산것은 소련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 의장(국영방송사 사장)인 세르게이 라핀(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과 후에 서기장을 지내게 된 유리 안드로포프가 심의와 검열을 강화하면서 소련 연예계가 그 영향을 받았기때문이다. 세르게이 라핀이 1970년부터 1985년까지 15년 동안 소련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 의장직을 맡을 동안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심의에 반영한데다가 문화적으로 유대인예술가들을 방송에서 배제하는 등의 행동도 같이 일삼았던지라 그런 평가가 나왔던 것이다. 당시 서구권에서 68혁명의 영향을 한창 받던 시절인데다가 미국과 영국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된 1980년대에도 방송심의만큼은 케이블 방송 발달의 영향으로 그렇게 보수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 상황에서 소련은 과거의 방송심의기준을 고수하다보니 불평이 나오지않는게 이상했다. 그렇지만 라핀이 브레즈네프의 취향에는 잘부합했기 때문에 의장으로 장수할수는 있었다.

애플바움의 논픽션 〈굴라그〉에 따르면 이때 당시도 굴라크 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었지만, 스탈린 시대와는 다르게 반체제 유명 인사가 굴라크에 수감되거나, 좌천되어 노동현장에 떨어지더라도 서구의 지속적인 관심과 구명 요청 및 생사확인이 가능했던 시대다. 굴라크 대신에 정신병원에 대신 가둬넣었고 많은 반체제 인사들은 정신병자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주기도 했다. 또는 컨테이너에서 살게 하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굴라크에 가는 사람들은 정치범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교화라는 명목으로 파렴치범이 대상이었다. 위험분자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으며, 시위와 같이 직접 행동에 나서면 연금하거나 근무지를 북극권 혹은 중앙아시아로 보내는 방법으로 간접적인 탄압을 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집권기에 동네북 취급이었던 스탈린을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 재평가 시도를 하였다. 1966년에는 자신의 직함인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다시 바꾸었고, 1970년에는 스탈린의 무덤에 스탈린의 흉상을 세워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된 다른 소련 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는 스탈린 시절피해자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던 시절이고[30], 1957년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주도하에 말렌코프, 불가닌, 보로실로프, 사부로프, 페르부힌, 셰필로프 등 인물들이 흐루쇼프에게 도전하다 숙청당해 버리는 등의 이유로 스탈린주의적인 인물들이 사라졌으므로 정치국 내 입지를 다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복권 시도로 생기는 강한 반동에 도전하는 것이 정치적 큰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었다.[31] 이로 인해 흐루쇼프 시절 폐기되었던 스탈린식 공산주의 발전은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여전히 불가능해 졌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고식적 공산주의 전진만 이어나가게 되며, 소련은 공산주의에의 도달이 멀어지며 점점 침체되어 간다.[32] 그리하여 스탈린 재평가는 실패하여 스탈린 시절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던 볼고그라드의 명칭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계속 유지되었고, 1977년에 소련 국가의 가사를 다시 제정했을 때 가사에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 또한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탈린의 친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회고록 등을 발간하고 다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브레즈네프 본인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듯 흐루쇼프를 탐탁치 않게 여긴 당내 보수파들이 옹립한 인물이었음에도 브레즈네프의 집권 기간은 오히려 흐루쇼프식 수정이 더 확장되어 가는 시기였으며 실제 정책에서 흐루쇼프식 수정이 취소될 수 없었다. 이는 흐루쇼프식 수정 이후를 "현실사회주의"라고 칭했던 것과 같이 당시의 소련 관료들이 보기에도 스탈린 집권 당시에 통용되었던 형태의 이념에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소련의 굴라크 문제는 흐루쇼프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겉으로만 해결했다고 선전했을 뿐 실제로는 다소 형태만 바뀌어서 그대로 존속했으나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굴라크들이 일부 철거되는 등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2.4.4. 지방권력 강화[편집]


전입자 흐루쇼프는 여러 개혁조치를 실시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시절에 흐루쇼프의 여러 조치가 폐지되지만, 지방분권 만큼은 계속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브레즈네프 통치 기간에는 전에 비해서 서기장과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스탈린 이래로 흐루쇼프 때까지는 서기장과 중앙정부가 전 연방을 통제했다면 브레즈네프 시대는 사실상 구성 공화국 또는 자치 공화국, 주의 서기장들[33]이 상당한 실권을 가졌다. 이는 브레즈네프 본인의 유약함과 서서히 커지던 민족주의의 발흥 때문이었다. 게다가 브레즈네프 통치 말년에 이르면 명목상 본인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등의 직함을 가진 최고권력자였지만 현실은 뒷방 노인네로서 안드로포프, 수슬로프, 체르넨코, 우스티노프, 그로미코 등의 주요 서기국원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한편으로 소련의 경제가 현대화되는 시기에 이렇듯 급작스러운 지방 분권이 일어나면서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 같은 공화국들은 이 시기에도 유목민의 비율이 거의 낮아지지 않아 소련 해체 이후에도 생활상에 큰 변화를 겪지 못했다. 그나마 카자흐스탄은 21세기 이후 알마티의 규모가 커지고 아스타나가 신설되면서 어느 정도 변화가 발생했으나 키르기스스탄은 현재까지도 유목민의 비율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더 이상 중앙정부에서 지역 개발에 직접 관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2.4.5. 의욕적인 군비확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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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보듯이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는 소련의 국방비가 오히려 미국을 앞섰다.

흐루쇼프는 벼랑 끝 전술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켜서 소련과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 넣었지만, 신중한 성격의 브레즈네프는 이와 반대로 나갔다. 아무래도 소련은 국력이 미국보다 뒤쳐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여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해가면서도, 조용하고 착실하게 소련의 군비를 확장했다. 그리하여 소련은 흐루쇼프 시절에 미국에 비해 열세이던 핵탄두 수가 브레즈네프 시절부터 역전했고, 1만기가 넘는 탄두에 수천 기의 소련 ICBM,SLBM이 미국 및 서방의 도시들을 겨누게 되었다. 소련의 ICBM들은 1970년대가 들어 더욱 정밀해졌고 델타급 잠수함들은 나토의 대잠망을 돌파하지 않고도 소련 연안에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게 되어서 미국과 확실히 공멸할 수 있는 수준의 핵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의 최신예 무기에 버금가는 소련제 재래식 무기들도 속속 개발되어, 소련군의 전력은 그의 치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소련 해군이 세계 2위 대양해군으로 부상하게 된 것도 브레즈네프 정권 시절이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개발된 재래식 무기체계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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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 당시 서방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2K12 쿠프 지대공 미사일. 당시 미국제 전투기의 RWR에 전혀 잡히지 않는 레이더파를 가지고 있었기에 미공군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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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권에서 냉전의 상징으로 알려진 MiG-25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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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세계에서 경계하던 소련의 신형 T-72 전차. 1973년 실전배치 이후 단 몇 년만에 자그마치 수천대가 양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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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24 공격헬기.

미국과 우주에서 돈을 뿌리며 우주 경쟁을 펼치던 우주개발에서도 브레즈네프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아폴로 11호로 달에 미국이 먼저 착륙하자, 브레즈네프는 돈지랄로 간주되던 달착륙 계획을 미련없이 취소하고, 조용하지만 좀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우주개발에 방향을 틀게 된다. 그래서 소련은 달 탐험 대신 우주정거장 건설로 방향을 틀어 1971년에 살류트 우주정거장을 발사하였고, 우주정거장 운용의 노하우를 축적하여 현재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ISS의 운용 노하우도 상당부분 살류트-미르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던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브레즈네프는 충동적이고 요란하던 흐루쇼프와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신중하고 집요하게 목표를 추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군비 확장은 소련 경제에 있어서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로 거액의 돈을 벌게 된 소련이었지만 브레즈네프는 이러한 막대한 수익의 상당수를 소련의 경제와 인민들의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군사력에 집중 투자해버리는 바람에 군대는 비대해졌고 결과적으로 경제를 좀먹게 되었다. 특히 소비재 그리고 컴퓨터와 같은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도 지지부진해졌다.[34]

한편 브레즈네프의 군비 증강은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깊은 위기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이때 소련이 SS-20 세이버 중거리 탄도 미사일Tu-22M 중거리 폭격기를[35] 1970년대 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갔다. 문제는 해당 시스템들이 ICBM과 SLBM, 장거리 폭격기를 규제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아서 안보 위기로 이어졌다.(일명 유로미사일 위기(Euromissile Crisis)) 서유럽 국가들은 자국 이기주의로 비춰질 수도 있는 미국의 핵협상을 비판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후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서유럽 국가들의 안보적 경각심을 해소하기 위해 서독과 이탈리아에 퍼싱 II 탄도미사일이 배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군비 확장의 책임을 브레즈네프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브레즈네프 시기 군비확장의 가장 큰 이유는 흐루쇼프의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군사력에 대한 엄청난 트라우마가 정치국을 휩쓴 것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2.4.6. 대외개입 정책[편집]


브레즈네프는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동유럽에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던 프라하의 봄소련군 탱크로 깔아뭉개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하였다. 다만 브레즈네프는 프라하의 봄 당시 군사 개입을 최대한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는 이 사태를 두고 "나는 온화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런 다음에는 사흘을 토할 것 같아요."라고 언급했다.[36] 하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해결을 못하며 사태가 악화되자 어쩔 수 없이 군사개입을 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브레즈네프에게 값진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성공적 마무리는 그에게 큰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다.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은 1980년부터 1981년 말까지 소련 지도부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소련은 프라하의 봄을 반복하여 이 사태를 끝내고 싶었지만 쇠약해졌음에도 무력을 혐오한 브레즈네프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또한 브레즈네프는 데탕트의 희망을 여전히 놓지 못해서 폴란드 침공이 데탕트에 악영향을 끼칠거란 공허할 뿐인 우려를했다. 그리고 정치국에서는 브레즈네프의 반대 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제 때문에도 침공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정치국에서는 협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수십 만이 넘는 대규모의 바르샤바 조약군을 동원해 '자파드-81'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하며 폴란드를 프라하의 봄과 마찬가지로 폴란드를 침공할 것 처럼 연출을 했었다.[37] 그와 함께 폴란드에 40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을 하여 폴란드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폴란드 경제는 쇠퇴하며 반소감정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연대노조는 계속되었지만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결국 소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81년 말 계엄령을 선포하며 이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동안 소련은 15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폴란드에 쏟아 부었다.[38]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소련의 원조를 받은 북베트남남베트남을 멸망시키고 베트남무력 통일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패배를 남쪽에서 소모전만 벌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북베트남을 침공해서 전복했어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미국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소련과 중국이 뒤에 있었기 때문. 브레즈네프는 북베트남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군이 북위 17도선, 즉 원래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국경선 위로 진격할 경우 소련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 경고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과 앙숙이던 마오쩌둥도 지속적으로 베트남에 군사원조를 했고, 확전되면 백만 대군을 투입하겠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게릴라에 시달리던 남베트남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했는데 더 나아가 북베트남을 침공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북베트남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게 되었고, 결국 철수로 이어졌다. 미국이 북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했으면 소련+중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져 3차대전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북폭도 중지했고, 결과적으로 피해만 입은 채 아무 소득도 없이 물러나게 된다. 거기에 중일관계 정상화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키프로스 전쟁에서도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를 이간질해서 북키프로스 건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기도 하였지만 소련은 처음에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쿠바군이 정치국의 동의 없이 앙골라 내전에 개입한 것을 두고, 정치국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앙골라 내전 개입에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첫째로 쿠바군이 앙골라에서 패배를 소련이 관망하게 되면 쿠바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것을 두려워 하였다.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아공이 내전에 개입하면서 소련도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미국의 개입으로 붕괴된 칠레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정치국은 잊지 않았었다. 결국 정치국은 이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개입으로 인해 아프리카 남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늘었지만 쇠퇴하고 있는 데탕트가 더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 시기는 브레즈네프가 그토록 이루려한 데탕트가 빛나는 시기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련과 미국은 이 전쟁에 대해 서로의 신뢰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브레즈네프는 중동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며 소련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경고를 했었고, 닉슨은 이집트에서 소련의 군사고문단 17000명이 쫓겨나는 것에 대해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의도를 모르며 미국은 연관이 없다는 해명을 하였다. 또한 전쟁 발발 후 브레즈네프는 중동 전쟁에 개입을 주장하는 코시긴과 포드고르니를 성공적으로 제거하며 미국과 대립을 피하기 위해 전력으로 노력하였다. 결과 이 위험한 전쟁은 소-미 데탕트를 후퇴시키지 않았으며 소련, 미국의 데탕트를 더욱 공고히 하게되는 계기가 될수 있어보였다.[39]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를 절정으로 데탕트는 쇠퇴해간다. 당시 브레즈네프의 데탕트 최대의 친구인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미국내 데탕트 세력은 닉슨과 함께 추락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 시기 아메리카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중남미 지원으로 인한 소-미 대립은 데탕트 외교에 치명적인 방해만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남미에서의 각종 사회주의 세력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에 의해 강력히 통제되어서 중남미의 많은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 반공 세력에게 무참히 패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 브라질의 사회주의 성향 대통령인 주앙 굴라르가 집권하자 움베르투 카스텔루 브랑쿠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사회주의적인 후안 에밀리오 보스크가 집권하자 미군이 직접 개입해서 친미 정부로 바꾸고, 칠레의 사회주의적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부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체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데탕트를 위시한 브레즈네프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하여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중남미의 사회주의 정부에게 대외원조적 형태의 차관지원 정도로 끝냈다.[40] 그래서 브레즈네프 시기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전횡에 고통을 받은 것은 브레즈네프식 데탕트 외교의 과오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데탕트 체계가 붕괴되고 안드로포프 시기가 돼서야 멈춰서 당시 소련은 미국의 전횡에 적극적인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83년에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반발이다.

그리고 소련과 함께 공산권 양대 강대국인 중국과 공산권의 지도자 위치를 놓고 대립하여 중소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 강 유역의 다만스키 섬(중국명 전바오 섬)에서 양국 군대 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을 참조.

이처럼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은 세계에 소련의 영향권을 확장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1980년대가 되면 무려 세계 69개국의 나라들을 지원했지만 이 지원들은 당연하게도 국내 경제에 큰 부담만 되어 돌아왔으며 국제적 영향력은 그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점점 후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브레즈네프는 이 문제를 풀만큼의 건강하지 않았으며 그 후임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예정이었다.


2.4.7.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다[편집]


"브레즈네프는 고르바초프로의 이행에 필수적이었다. 브레즈네프는 고르바초프가 성취한 것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는 세계평화의 자산이었다."

에곤 바르[41]


"그는 선의를 갖고 행동했지만, 상대의 속임수에 굴복하지는 않았고 조금이지만 정중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는 항상 재치있는 농담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브레즈네프는 공식적인 오찬 회동중에도 기꺼이 비공식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출처]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


"만사가 잘 되고 있습니다. 결국 승리하는 세력은 전쟁 세력이 아니라 평화 세력입니다."[42]


군비를 늘린 행보와 대리전을 통해 미국을 곳곳에서 괴롭힌 것과 별개로 미국, 서방 세계와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주력했고, 실제로도 그는 서방세계와 정면대립은 피하려 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독소전 시기 사단장급 정치인민위원으로서 호된 전투를 직접 경험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캅카스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기까지 군대와 함께 행군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보며,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그 대가가 훨씬 크다는 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43] 이런 브레즈네프에게 있어 흐루쇼프벼랑 끝 전술과 위기도발 행위는 깊은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이를 극복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토대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 브레즈네프 대외 정책의 주요 동기가 된다. 그로미코의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 거침없고 호탕한 언사로 서방세계를 압박하길 즐겨했던 흐루쇼프와 달리 브레즈네프는 정중한 태도로 상대방의 호감을 사도록 노력했고 그 덕에 서방과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여러 번 정상회담을 거치며 서방과 동구권의 긴장 완화에 주력했다.

당시 미국과 서방은 균열과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라 프라하의 봄중소국경분쟁 그리고 소련의 경기 침체로 인해 니키타 흐루쇼프 처럼 공격적인 대서방 외교를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브레즈네프는 이런 긴장을 원하지 않았다.[44] 그렇기에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함께 냉전시대 데탕트 체제의 주역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미국 정상과의 관계'에서 서술. 이런 해빙무드 덕에 서방과의 무역도 늘어났고, 반미 선전이 넘쳐났던 소련 뉴스들은 그 자취를 감추고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들이 나왔으며, 서방 문화에 대한 제재도 풀어서 인민들은 미국 팝과 비틀스의 노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화기애애한 두 정상을 보며 사람들은 냉전 체제가 머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1974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추락함을 계기로 미국 내 반데탕트 세력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닉슨이 사임 하기 얼마 전 닉슨이 브레즈네프에게 소-미 독트린을 통해 세계평화를 구축하자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45]

그럼에도 브레즈네프가 서방과의 데탕트에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쏟아부은 결과 1975년 8월 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체결된 헬싱키 협정에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함께 참가해 서명할 수 있게 되었다. 헬싱키 협정에 인권 보장과 같은 소련 체제에 부담이 되는 조약 내용도 있었지만 브레즈네프는 그보단 양대 초강대국으로써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것이 자국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련은 '내정 불간섭'이라는 조항을 근거로 공산주의 체제 내에 대한 서방 세계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으로 활용했으며[46] '영토 보전' 조항을 근거로 발트 3국을 자국에 종속시킨 것이 합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47]

요약하자면 '인권 존중'과 같은 소련 체제에 있어서의 마이너스 요소가 있는 협정임에도 브레즈네프 자신의 정치적 자산 그리고 소련의 명분을 위해 헬싱키 협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명시한 헬싱키 협정에 참여한 덕에 서방과 동구권의 긴장은 완회되었고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정치적 치적이 마련되었다고 기뻐했다. 이후 1977년, 프랑스를 방문해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국제 긴장상태 완화와 핵무기의 확산을 방지하자는데 양국이 공감대를 가졌고 성공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데탕트 체제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내부에서는 점점 반체제 운동이 되살아나며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1977년, 미국에 지미 카터 행정부가 새로 들어선 이후 한동안 개선되던 미소간 관계는 다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은 폴란드 출신인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였는데, 러시아가 폴란드에 자행한 탄압과 폭거의 역사를 경험해서 그런지 대소 강경파였고 인권을 강조하던 지미 카터도 소련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브레즈네프가 애써 구상한 초강대국 데탕트 체제는 점점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도 1978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 사절단에게 핵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미국의 대소 강경파에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앞선 균열들은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초대형 사고가 터져버린다.

2.4.8. 중국과의 관계 악화[편집]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었지만 흐루쇼프 시절부터 악화되던 중소관계는 브레즈네프의 집권기에 개선되지 못했다. 흐루쇼프 실각 직후 소련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에게 말리놉스키가 우리가 흐루쇼프를 조졌듯이 당신네도 마오쩌둥을 조져야 한다고 술에 취해서 망언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브레즈네프가 직접 저우언라이에게 사과했음에도 중국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그가 부하들 손에 쫓겨난 것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류사오치가 자신에게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계속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난하였다.

1969년에는 중소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무력 충돌과 전면전 위기까지 발생하여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고려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났다.[48] 다행히 양국 지도부의 협상으로 1969년의 위기는 봉합되었으나 중소관계는 특별히 개선되지 못했고 중국은 1970년대에 미국의 손을 잡았다. 1979년에는 중국이 소련을 자극하기 위해 중소분쟁에서 소련 편을 들던 베트남을 침공했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중국이 소련을 비난하며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게 군사 지원을 하여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집권 말기인 1980년대 초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중국은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요구하며 브레즈네프의 손을 뿌리쳐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중소관계는 개선되지 못했다.


2.4.9. 아프가니스탄 개입: 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편집]


В 1980 году Любовь Брежнева задала своему отцу нелицеприятный вопрос об Афганистане. Яков Ильич принялся оправдывать брата... «Справедливости ради хочу сказать, — пишет Любовь Брежнева, — что дядя мой звонил ежедневно Дмитрию Устинову и, употребляя общепринятый фольклорный диалект, спрашивал: «Когда эта блядская война кончится?». Злясь и краснея, 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 кричал в трубку: «Дима, ты же мне обещал, что это ненадолго. Там же наши дети погибают!»…

1980년 류보피 브레즈네바는 부친에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돌직구성 질문을 던졌다. 야코프 일리치는 자신의 형제를 정당화하려 애를 썼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 말해 두자면 말이다", 류보피 브레즈네바가 기술했다. "내 삼촌은 매일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통속적인 어투를 구사하며 물었다. "이 씨발놈의 전쟁이 대체 언제 끝나는데?" 소련 서기장은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전화기에 외쳤다. "디마,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죽어나가고 있다고!"[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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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의 조카딸 류보피 브레즈네바의 증언.#


이렇게 데탕트 외교로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 가지 거대한 오판으로 데탕트의 완전한 붕괴는 물론, 나중에 소련 멸망의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에 무력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사실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 친소정권에 군사개입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프간의 헤라트 시와 주변 지역이 친소 정권에 맞선 반란을 일으켰고, 폭도들은 잔혹하게 카불의 관리, 소련 고문들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에 아프간의 대통령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는 모스크바에 소련의 군사 개입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이는 개입에 관심이 없던 브레즈네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정치국은 이 새로운 사태를 분석할 준비도 되지 않았었다. 이에 정치국에서는 3주 동안이나 계속 아프간 개입에 논의를 한 결과 아프간에 군사 개입은 하지 않고, 추가 지원만을 약속했다. 그리고 파키스탄이란을 압박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간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아프간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아프간 친소혁명을 이끌던 타라키 아프간 대통령이 하피줄라 아민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50]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여긴 정치국은 강하게 분노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에 포섭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민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구하겠다는 입장이 큰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국이 우스티노프-안드로포프 계획을 승인했다. 만약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아프간이 친미 국가가 되고, 아프간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된다면, 사실상 소련 전역이 미국 핵미사일의 공격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브레즈네프도 개입 결정에 서명을 하면서 소련군이 아프간으로 파견되어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다만 브레즈네프는 아프간 개입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으로 대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어떤 군사 개입도 최후에 의지할 수 있는 무기라 여기고, 승리를 위해 치르는 대가는 승리 자체보다도 언제나 크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래서 맨처음에는 아프간 개입을 주장한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가 브레즈네프를 아프간 개입에 찬성하도록 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먹었다. 특히 안드로포프는 놀라울 만큼 사실 여부가 희박한 증거와 정보들을 이용해 브레즈네프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침공이 개시된 후 브레즈네프는 아프간 개입이 엄청난 실수[51]였음을 깨닫고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이때는 정치가로서 브레즈네프의 경력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좀 깨어있던 관리들은 소련이 이 험난한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적을 기다렸다고...

무엇보다 이 개입은 사실 정치국에서도 격론이 있었고, (한 표 차로 찬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제정세로 봐서도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정점에 이른 소련군의 전력을 과신한 것이 탈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개입하도록 하는 미국 CIA의 공작도 있었다고 나중에 카터 행정부의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가 밝혔다. 결과적으로 10년간 소련군은 악전고투하다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후 고르바초프 재임 시기인 1989년 철군하게 된다.


2.4.10. 종교정책[편집]


흐루쇼프 시기 강화되었던 국가 주도의 종교 탄압 정책도 이 시기에 완화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중축과 건설이 허용되었고 이 때 부터 교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칼미크인들의 전통적인 불교에 대한 신앙심도 허용되었고 이슬람교, 여호와의 증인, 몇몇 개신교 종파 등(오순절침례교 일부 종파)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었다는 것이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 정부에 의해 허용된 종교들도 기본적으로 소련 당국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소련 당국의 감시와 통제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들은 가차 없이 폐쇄되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종교 행사에 참여했다가 발각된 소련 공산당원들도 당연히 출당되었다.


2.4.11. 심한 자기과시욕[편집]


파일:브레즈네프 훈장.jpg
자뻑이 좀 심했던 브레즈네프는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일이 잦았다. 느닷없이 2차대전 때의 전공을 이유로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자신에게 직접 수여하기도 했는데 그 횟수가 무려 네 번(1966, 1976, 1978, 1981)이었다. 장군 중의 장군으로 손꼽히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동급이다. 거기에 그와 비슷한 등급인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1961)까지 더하면 무려 5중 영웅이 되는 셈. 이외에도 재임 기간 18년 동안 총 200여 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브레즈네프의 명예욕을 아는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무차별적인 훈장 수여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상훈에 대한 욕심은 전직 서기장들인 스탈린이나 흐루쇼프에 비해 브레즈네프 자신이 전쟁 때 별다른 전공이 없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스탈린은 2차대전 때 당, 정, 군을 망라한 최고 지도자였고, 흐루쇼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드물게 개념인 축에 속한 정치위원으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정치위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흐루쇼프. 물론 브레즈네프도 일선 정치장교였고, 블라우 작전때 격전지였던 캅카스 방면에서 실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일개 전투에서조차 원수나 대장급이 줄줄이 야전군을 움직이던 독소전쟁에서 일개 소장급의 정치위원의 전공이 클 리가 없었다.[52]

말년에 갈수록 이러한 훈장부심은 심해지기만 했는데, 생전에도 사후에도 해외뿐 아니라 소련 국내에서까지 비웃음거리가 되어 사미즈다트 같은 지하 출판물에서도 디스했을 정도였다. 죽기 6개월 전에도 키예프 1500주년기념메달을 받고 갔을 정도이고, 1978년에는 2차대전 종전 직후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영웅들에게만 일괄적으로 수여되고 사실상 수훈이 종료되어 있던 전승훈장을 멋대로 부활시켜 수상하는 자뻑 모드를 보여주었다. 이 짓은 자신의 전공을 명실상부 독소전 최강 장군 게오르기 주코프, 스탈린그라드를 천왕성 작전으로 구원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막판에 베를린을 두고 주코프와 레이스까지 한 이반 코네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빨치산만 끌고 나치 독일을 애먹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의 각을 뜬 버나드 로 몽고메리와 동급으로 놓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들이 이걸 안다면 미치고 펄쩍 뛸 일이다. 그나마 눈치는 봤는지 게오르기 주코프,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처럼 2회 수훈은 안했다.

브레즈네프의 셀프 전승훈장 수여는 소련에서도 대놓고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텔레비전에서 브레즈네프가 전승훈장을 받는 모습이 나갈때 모스크바 거리의 택시 기사들부터 당중앙위원회에 근무하는 운전기사들까지도 배를 잡고 웃어댔다. 체르나예프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은 이런 도를 넘은 자뻑이 여론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였다. 하지만 당 최고위층은 브레즈네프 우상화 경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참고로 브레즈네프가 전승훈장을 탐낸 이유는 그 영예도 영예이지만, 갖은 보석으로 장식된 전승훈장이 너무 멋져보여서(...) 였다. 브레즈네프는 공식적으로 전승훈장을 받기 5일 전에 일기장에다가 전승훈장을 보고 하악하악하는 내용을 남겼다.

또한 1979년에는 조악한 수준으로 쓰여진 자신의 회고록이 출판되자마자 레닌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는 등 문학에 대한 능욕까지 해버렸으며, 그와 레닌문학상을 두고 경합했다가 어이없게 낙마한 빅토르 골랴브킨은 "이 위대한 작가가 살아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우리처럼 거리 위를 행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 그는 당연히 레닌문학상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그가 나를 앞선다고 본다. 이 장밋빛으로 뺨을 물들인 뚱땡이가 말이다. 여러분은 그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뒈질 것이다."라고 축사를 빙자한 조롱의 글을 레닌그라드의 문학 잡지 '오로라'에 기고했고 오로라 편집진은 몽땅 숙청당했다. 여기에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에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자그마한 자신의 전공[53]을 창작해서 쓰라고 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54]

결국 이 양반이 죽은 후인 1988년에 소련 최고회의에서 관련 법규를 개정해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든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이든 1회 초과 수상 자체를 금지해 버렸다. 1년 뒤인 1989년에는 억지로 단 전승훈장이 박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식 우상화는 실시하지 않았다. 이런 자화자찬을 인민들이 비웃든 말든 자기만 만족하면 괜찮다는 스타일이었던 듯.[55] 그래서 흐루쇼프에 이어 브레즈네프에 대한 유머가 소련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 KGB 요원들도 인민들이 서기장 동지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진 알고 있었겠지만, 본인들이 생각해도 브레즈네프의 훈장 수집 욕구는 너무 지나치다 못해 어이없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2.5. 말년[편집]



1978년, 미래의 서기장에게 수상식을 하는 브레즈네프.(8분 37초부터)

브레즈네프는 막상 절대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뒤부터 건강이 나빠졌다. 브레즈네프는 술과 담배를 좋아했고[56] 그 때문에 말년에 브레즈네프는 각종 성인병으로 고통받았다. 담배 자체는 1970년대에 건강 악화로 끊긴 했지만 젊은 시절에 피어둔 담배가 결국 그에게 큰 화로 다가왔다. 1975년엔 심장마비를 겪었으며 사실상 이때 이후부터 브레즈네프는 유리 안드로포프 KGB 국장,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의 고위 관료들의 집단지성에 의존해 통치해야 했다. 1977년 이후부터 페이스메이커도 달고 다녔으며 중추 신경계의 악화, 뇌졸중, 불면증, 통풍, 백혈병, 당뇨병, 폐기종, 기관지염 등의 질병들을 앓고 있었던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심지어 적국인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의 의료진들을 초청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얻은 불면증으로 수면제 중독도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에게 가짜 수면제를 처방하면서 그의 약물 중독을 치료해보려 했지만 체르넨코는 눈치 없이 진짜 수면제를 브레즈네프가 달라는대로 공급해주어서 별 소용이 없었다.[57] 소련 사회에서 약물중독은 부르주아 퇴폐종자들이나 걸리는 한심하고 역겨운 것이었으므로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에 시달린단 사실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따라서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브레즈네프를 수행하던 차조프는 안드로포프에게 비밀리에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임을 알리고 이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알리자고 제안했다. 안드로포프는 이를 한동안 숨기려 했지만, 브레즈네프가 1974년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파리를 방문하다가 쓰러지고 1975년에 모스크바 외곽에서 또 쓰러지는 등 심각한 건강이상을 보이자 브레즈네프의 과로를 풀어준다는 구실로 그를 약물치료를 받게 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조금 건강상태가 괜찮아지자 요양소를 탈출해버렸다.(...) 브레즈네프의 약물 중독은 심각한 것이었는데, 헬싱키 회담 직후 크림반도에 휴가를 보내러 간 브레즈네프는 쓰러져서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고, 지스카르 데스탱과의 정상회담은 국제적 스캔들로 비화되기 직전까지 갔으며 1975년 11월, 폴란드 통일노동당 7차 당대회에 초대받은 브레즈네프는 약물에 취해서 주악되는 인터내셔널가를 듣더니 흥분해서 헐떡이며 박수를 치고 지휘를 했다. 폴란드 제1서기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를 비롯한 폴란드 측 당국자들은 모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안드로포프도 더 이상 브레즈네프의 약물중독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치국에 이를 보고하려 했지만 수슬로프가 반대하면서 브레즈네프 주위의 일부 핵심 측근만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에 걸렸음을 눈치챈 포드고로니가 반격해왔기 때문이었다. 1975년에 브레즈네프의 새 주치의로 미하일 코사료프가 임명되어 전임 주치의 로디오노프가 아무때나 약물을 공급하는 관행을 철폐하고 약물공급권을 주치의에게 독점시켰다.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약을 주지 않겠다는 부하들의 말에 폭발 직전까지 갔으나 이러다간 1976년 2월에 열릴 25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간곡한 설득과 더불어 포드고로니가 자꾸 쑤시고 다니는 상황을 인시하고 받아들였다. 브레즈네프에게 약물을 주면서 비선실세가 되었던 니나 코로뱌코바 간호사도 해고되었다.

고르바초프 회고록에 따르면, 한번은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회의를 주재했지만,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회의 중간에 심각한 기억상실증 증세를 보이면서 회의 주제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국원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는체 이를 무시했고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를 따로 찾아가 우려를 표했지만 안드로포프는 "이보게 미하일, 우리는 레오니트 일리치를 돕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걸 다 해야 하네. 레오니트 일리치가 이런 상태여도 말이야. 이건 당내와 국가의 안정성의 문제고, 더 나아가 국제적 안정성의 문제야."라고 그를 타일렀다고 한다.

브레즈네프의 건강이 너무 나빠진 것은 뛰어난 정보 기관의 도움 없이 그를 일상적으로 보는 서방 외교관의 눈 정도로도 알 수 있어서, 서방 기자들이나 외교 대표들은 브레즈네프가 70세 생일을 넘기면 은퇴할 것으로 여겼다. 사실 브레즈네프도 너무 늙고 지친 나머지 자신의 칠순 생일 파티에 참석한 정치국원들에게 이제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늙은 브레즈네프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운 안정된 체제에 만족하고 있던 정치국원들은 잠시 하얗게 질렸다가 앞을 다투어서 브레즈네프가 없으면 이 나라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를 뜯어말렸다. 이에 브레즈네프가 미국의 정당들처럼 명예 당주석 자리를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이것도 반려되었다. 이후에도 브레즈네프는 한 차례 자신의 은퇴를 정치국 회의에 상정했으나 그때도 모두가 뜯어말렸다. 사실 브레즈네프도 자신이 은퇴한 후에 서기장으로 누리는 호화로운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과 정치적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자신의 은퇴를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하진 않고 은근슬쩍 뭉개고 말았다.

자녀들과의 갈등도 잦아서[58] 아내 빅토리야는 매일 텔레비젼에 나오는 남편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는 것을 보고 은퇴를 권유했지만 자식놈들은 서기장의 자녀로서 얻을 수 있는 각종 비법적인 특혜를 잃고 싶지 않아서 브레즈네프에게 은퇴해선 안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댔다. 브레즈네프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고 이런 요구만 한다고 환멸을 토로하는 등 많은 스트레스도 겪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소련 인민들은 브레즈네프의 병세 악화를 두고 슬퍼하거나 연민하기는 커녕 조롱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었고 노멘클라투라의 득세, 브레즈네프의 무식 등에 많은 소련 인민들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는 주요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소련은 정보 통제가 심했던 나라라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사망설, 대역설 등이 심심찮게 제기되었고, 공식 사진도 여러차례 포샵처리가 가해졌다. 포샵처리가 안 되거나 어쩌다 찍힌 브레즈네프의 사진을 보면 눈에 초점도 없고 입도 반쯤 벌리고 축 늘어진 모습이 있어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이미 1977년 경부터 연설할 때 발음이 뭉개지기 시작하면서 건강이 안 좋음을 인증했다. 1980년 신년사만 봐도 발음이 더 뭉개지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다.


1979년에 발표된 그의 신년사. 우크라이나 억양도 있는데다가 뇌졸중, 치아, 시력 문제까지[59] 겹쳐서 술취한 사람마냥 어눌한 발음이 나왔다.[60]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되고 당연히 주최국의 지도자로써 연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서방과의 관계가 틀어진 상황에서 단체로 서방 국가들이 보이콧을 한 터라 반쪽 짜리 올림픽이 되었고 모처럼 올림픽을 통해 데탕트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던 그의 구상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협박해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폴란드의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라고 강요했고 결국 소련군의 직접적 군사개입을 원치 않았던 야루젤스키는[61] 자국 군대를 동원해 폴란드 민주화 인사들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비록 폴란드 인민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소련의 입김과 지원하에 벌여진 일이라 당연히 서방과 소련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기에 이르렀고 마침 반공주의를 모토로 내걸던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를 단행해버렸다. 브레즈네프는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분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노쇠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밑에서도 언급된 1979년 6월, 오스트리아에서 진행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소련 측은 브레즈네프가 정상으로 보이기 하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지만 브레즈네프가 맛이 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고 그의 건강을 염려해 건배조차도 앉아서 할 것을 제안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면서 브레즈네프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레드카펫 위를 뒤뚱뒤뚱 걸어서 비행기에 올랐는데 전세계 시청자들은 그가 넘어지는지 안넘어지는지를 노심초사하면서 보았다. 이후 1981년 11월, 생애 마지막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본에서 헬무트 슈미트와 에곤 바르를 만났을 때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정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측근들이 건네주는 서류들을 기계적으로 받아서 낭독할 뿐이었다. 모든 실질적인 대답은 그로미코가 하였고, 서독 측은 이제 소련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브레즈네프가 아니라고 판단할 정도였다.

이후 1982년 3월에 타슈켄트의 항공기 공장을 방문하였다가 해당 공장 시설의 일부가 붕괴되는 사고에 휘말리며 건강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당시 브레즈네프는 살아남았지만 쇄골과 갈비뼈 골절, 간출혈 등의 중상을 입었다. 진통제 덕에 외부 일정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이미 몸 상태는 시쳇말로 맛이 간 상태였다. 사고를 두고 # KGB에서는 사보타주를 의심했지만 상술했던 성격은 온화한 편이었던 브레즈네프는 "간청합니다. 거기에서 누구의 머리도 베지 마십시오. 처벌하지 마세요.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안드로포프 KGB 주석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 직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도착해서 레닌 훈장을 수여하면서 아제르바이잔(Азербайджан)을 아프가니스탄(Афганистан)으로 잘못 부르는 대형 사고도 쳤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사고 이후에도 주치의들의 건강 관리를 받으며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82년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모스크바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사망한지 몇시간이나 지나서 경호원들에게 발견되었고 경호원들은 그를 살려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를 썼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후 KGB 보안책임자와 의료진이 투입되었지만 브레즈네프의 얼굴은 푸른색이었고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사망을 보고받은 정치국은 그의 죽음을 예견했었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자세한 설명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마지막 공개 활동은 사망하기 3일 전에 열린 10월 혁명 65주년 기념식이었으며, 사후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지고 붉은 광장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장례 절차 및 부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나중에 발표되었으나 그의 사망이 정치국에 보고되자마자 모든 라디오 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장송곡만 내보냈기 때문에 인민들은 발표 이전부터 브레즈네프가 죽은 줄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인민들은 늙은 브레즈네프에게 이만저만 싫증이 난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마자 고인드립성 농담들이 나돌았다.

문: 브레즈네프의 유언은 무엇일까??

답: 유랴! 내 페이스메이커에서 손 떼!



그의 장례식이 담긴 영상.

그가 죽은 직후에 그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기 전 TV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백조의 호수를 방영했다. 이후 소련러시아에서 쿠데타나 다른 서기장이나 대통령이 서거하거나 실각하는 등 나라에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을 때 라디오나 TV 채널에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이 곡이나 발레 영상[62]재생하는 게 전통이 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주요 언론들이 그의 사망 직후 특집 보도를 했으며 로널드 레이건을 비롯해 브레즈네프가 생전에 만났던 미국 전직 대통령들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3. 평가[편집]



3.1. 영국[편집]


"매력이 있으면 당신은 정치적으로 오래 갈 수 있다."[63]


"탁월한 지성을 갖지 않고도 자신감과 능력을 발산하려는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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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영국에서 그를 만난 필립 마운트배튼의 평.#



3.2. 미국[편집]


시기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데탕트를 이끈 적국의 명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위성국과 아프가니스탄에 폭정을 저지르자, 그에 대한 시선이 차가워지면서 급기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기에는 '적국의 수괴'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나마 현재 미국은 승자의 여유인지 브레즈네프를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나라가 되었다.


3.3. 러시아[편집]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리스 옐친이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혹독한 역사를 경험한 현재의 러시아인들은 브레즈네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소련이 해체되며 러시아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 등 소련의 주요 구성국들이 독립하면서 모스크바를 보호할 완충지대가 순식간에 쪼그라든 것은 물론이고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순식간에 후진국 수준으로 몰락하면서 수 백만의 인구가 사망, 이민 등으로 영구 손실을 입어버렸다. 게다가 사회적 분배를 어느정도 보장하던 소련 시절과 달리 사회안전망이 완전히 붕괴된 러시아에서는 빈부격차가 급속도로 늘어나버렸고 그 결과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도 급감하고 저출산까지 겪게 되었다. 사회안전망의 붕괴로 인해 범죄율이 급증하고 네오나치, 레드 마피아와 같은 막나가는 폭력조직들도 늘어난 것은 덤이다. 결국 현대 러시아인들, 특히 브레즈네프 시기를 보낸 사람들 입장에서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해나가며 살기도 편했던 당시가 좋아 보일 수 밖에 없다.[64]

하지만 상술했듯 장기간의 집권 과정에서 결정한 막대한 군사비 증강은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고, 자원 수출 위주로 경제 구조를 결정지어 버린 것은 소련은 물론 후임 러시아에 있어서도 두고두고 큰 우환이 되어버렸으며, 결정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것은 소련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여기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적기에 퇴임하지 않아 후임 서기장이 될만한 인물들도 다같이 늙어버리는 결과를 낳아, 결국 통치 스타일이 안정적인 노선만 추구하며 보수적인 노선만 탄 결과 브레즈네프 시절 말기에 이르러서 젊은 세대들은 보수적인 늙은 세대들을 혐오하며 깊은 변화의 욕구가 쌓여버리고 만다.[65] 이 쌓인 불만을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로 폭발 시켜버리자 소련은 폭주하며 통제불능 상태가 되며 멸망해버린다. 종합적으로 그는 소련의 운명을 알게 모르게 종말로 가게 했다. 다만 젊은 세대의 불만을 브레즈네프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어폐가 있을 것이다. 이 불만을 폭주로 만들고 통제하지 않아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로 만든 것은 고르바초프이기 때문이다.[66]

그럼에도 분명한 공도 있는데,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부에 득실거리는 매파들을 견제하면서 그로미코, 안드로포프를 지원하여 프랑스, 서독, 미국과의 데탕트를 이끈 것은 오로지 브레즈네프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했다는 것이 당시 독-소 데탕트를 이끌었던 에곤 바르나 역사학자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등의 평가이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 내부의 무능한 매파들을 실각시키고 똘똘하고 젊은 국제부 간부들을 중용하였는데, 대놓고 자신의 외교 보좌관들에게 "저들이 자네들을 먹어치우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두진 않을걸세."라고 그들이 자신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을 분명히 했다. 젊고 실용적인 개혁파 관료들은 브레즈네프의 보호 덕분에 중진으로 성장하여 이후 고르바초프의 측근들로 자리잡게 되는데 문제는 소련이 망하면서 딱히 브레즈네프가 이들을 지켜준 것이 고평가받긴 힘들게 됐다.


3.4. 우크라이나[편집]


고향인 우크라이나에서도 평가가 엇갈리지만 제법 괜찮게 나오는 편인데 우크라이나가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을 때가 브레즈네프 때였다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긍정평가가 우크라이나의 다른 위인들처럼 아주 압도적인 수준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고 긍정률 자체는 40~50%대를 오가는 수준이다.


3.5. 구 공산권[편집]


프라하의 봄을 겪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선 당연히 원수 취급이다. 자국의 민주화 의지를 짓밟고, 민주 투사를 억류했으니 그럴 만하다.

폴란드에서도 야루젤스키를 압박하여 민주화 세력을 간접 탄압한 이력 탓에 결코 좋게 보지 않는다.

알바니아 또한 부정적인 시선이 다수이다. 엔베르 호자가 브레즈네프의 체코슬로바키아 탄압을 이유로[67] 소련과 거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이 때문에 개혁 개방이 늦어진 것이 엄청난 경제난을 부른 탓이다.


3.6. 남유럽[편집]


그리스키프로스는 북키프로스 건국으로 인해 그를 고깝게 보고 있다. 특히 키프로스는 브레즈네프를 자국의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를 이간질한 악당으로 평가한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북키프로스는 브레즈네프를 독립의 은인으로 여긴다.

튀르키예는 북키프로스를 독립시킬 때 잠깐 협력했던 탓에, 그를 딱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적의 적은 쓸만한 동맹이라는 예시로 보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도 않고 있다. 애초에 튀르키예는 어디까지나 아타튀르크를 위해 세속주의를 표방할 뿐, 철저한 이슬람 중심의 나라라 무신론 국가의 지도자들을 좋게 봐준 적이 거의 없다.


3.7. 북한[편집]


애매모호하다. 애초에 김씨네 제외하고는 다른 역사적 인물들을 주목하는 나라가 아니기도 하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시기마다 그와의 관계가 개선되었다가 틀어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8. 아프가니스탄[편집]


민주 세력[68]이나 탈레반이나 결국엔 소련-아프간전에서 싸운 무자헤딘의 후예를 자처하기 때문에, 당연히 해당 전쟁을 일으킨 브레즈네프를 부정적으로 본다. 다만 구 공산권과 다르게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비웃고 있는데, 아프가니스탄을 우습게 보았다가 국제적 늪에 제대로 빠진 머저리로 취급하고 있다.


3.9. 중국[편집]


중소국경분쟁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이를 갈고 있다.


3.10. 베트남[편집]


베트남 전쟁 당시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4. 관계[편집]



4.1. 미국 정상과의 관계[편집]


틈만나면 존 F. 케네디를 얕잡아보던 니키타 흐루쇼프와 달리 브레즈네프는 상대적으로 미국 정상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 린든 B. 존슨 - 서구와 계속 갈등을 빚던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한 브레즈네프와 초기에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브레즈네프는 미국을 두고 '야만적인 침략자'라고 맹비난했고 양국 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 그럼에도 미소 양국간의 여러 가지 협력과 교류는 계속되었고 존슨은 직접 브레즈네프와 만나진 않았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과 여러 번 회담을 하며 의견을 공유했다. #

  • 리처드 닉슨 - 데탕트 시대를 연 주역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화기애애했다. 전략무기제한협정으로 양측의 군비를 통제한 데 이어서 여러 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미소 양국간 경제-문화적 교류도 이전보다 향상되었다. 서비스 차원에서 브레즈네프를 직접 에어포스 원에 태우고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친분은 제4차 중동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고 세계 주요 여론은 드디어 냉전이 종식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 하지만 미국에서 워터게이트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데탕트 또한 닉슨과 같이 비판을 받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닉슨의 사임 몇 달 전부터는 비밀 외교의 서신이 점점 초현실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이는 고립된 닉슨이 폭풍우 몰아치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바다에서 브레즈네프와의 우정을 평온한 섬으로 여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브레즈네프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이용하여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 하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닉슨을 지지한 유일한 외국 지도자가 되었다. 서로 사인 잘 하고 있나 감시하는 개그를 선보이는 두 정상들

  • 제럴드 포드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국내외 데탕트에 대한 지지가 사라지자 미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모욕을 주며 미-소 무역법안을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며, 블라디보스토크 전략무기제한협정[69]의 조인도 거부하며, 데탕트에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그래도 워터게이트 사건의 훨씬 전부터 진행되던 1975년, 역사적인 헬싱키 협정에 브레즈네프가 간신히[70] 서명할 수는 있었고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비롯한 우주 분야에서의 협력은 개시되었다.

  • 지미 카터 - 양측과의 정상회담과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으나 지미 카터는 소련을 불신하고 있었고 데탕트 체제는 점점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이 결렬되더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여지면서 데탕트 체제는 붕괴되고 카터는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곡물 금수 조치를 취하며 소련에 대한 압박 정책을 취했다. 카터는 재임 기간만 하더라도 공화당 인사들한테 유약한 지도자로 비난받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MX 미사일과 같은 적극적인 군비증강 프로젝트를 착실히 준비해 소련을 군사력으로 압도하려고 준비하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 로널드 레이건 - 브레즈네프 생애 말기에 레이건이 당선되었기에 큰 접점은 없었으나 레이건은 집권 초기 부터 대소련 강경주의를 선포했고 1981년,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치하 폴란드의 계엄령과 노조탄압을 돕는 소련에 대한 추가 경제제재를 취하며 악화 일로를 걸었다. 브레즈네프도 개인적으로 입만 열면 소련을 비난해대는 레이건을 혐오했고, 미국의 다음 대통령은 좀 더 친소적인 인물이 당선되기를 기다렸다. 레이건은 브레즈네프에게 추가적인 군비 통제 협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응답하지 않았다.


4.2. 김일성과의 관계[편집]


북한과 단독 수교국이었던 특성상 여러 번 정상회담을 가지며 우호관계를 다져나갔지만, 이는 겉치레였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소련 지도부는 김일성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제2세계가 아니라 제3세계국가로 행동했고, 소련이나 동유럽과 우호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제3세계권 [71]과 공조를 하면서 중소 양국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면서 양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뜯어냈고, 중소 양국도 북한을 상대하는 것을 까다롭게 여겼다. 1970년대에 북한은 친중외교를 펼쳤고, 브레즈네프는 데탕트 체제를 통해 미국과의 긴장완화에 주력했는데 북한은 이에 아랑곳 없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C-121 격추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로 미국과 긴장을 고조시켰기 때문에 소련은 북한을 외교적 골치거리로 여겼다.[72] 다만 1970년대 말 지미 카터가 집권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검토하자, 북한측도 미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군사도발을 자제하여 1970년대 말부터는 데탕트를 추구하는 소련과의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이에 맞춰 1970년대 말부터 중미관계가 좋아지면서, 다시 북한과 중국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이를 틈타 브레즈네프의 말기에는 북한과 소련은 사이가 좋아진다. 이때 북한은 소련의 최신예기인 MiG-29를 도입 약속을 받아내며 1987년 결국 도입되어 한국 공군은 긴장하였다.


5. 여담[편집]


  • 브레즈네프는 다른 공산당 고위층처럼 화려한 다차(러시아식 별장)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유머로 평생 시골에서 살던 자기 어머니를 불러 다차를 구경시켜주자 어머니는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 좋구나, 레오니트.”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들이 오면 이건 다 어떻게 될까?”[73]

파일:external/i286.photobucket.com/14-SovietleaderLeonidBrezhnevandEas.jpg

  • 브레즈네프는 뜨거운 맨 투 맨, 마우스 투 마우스, '입술' 키스로도 유명하다. 이 키스는 원래 전통적인 러시아의 인사법이다. 1960년대 러시아에서 영화나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인 닥터 지바고에서도 지바고(오마 샤리프)와 이복형 예프그라프(알렉 기네스)가 처음 상봉할 때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런 풍습이 공산권으로 들어가서 동지들끼리의 우애의 상징이 되었는데 정작 러시아에서는 이런 식의 인사와 동성애를 결부하지 않았다. 미국 같이 게이에 대한 터부가 강했고 남자들끼리의 육체적 접촉(잡기, 포옹)이 금기시되는 나라에서는 굉장히 괴악하게 봤다고 한다.[74] 위 사진에서 연출된 뜨거운 키스는 1979년 동독 창건 30주년 기념으로 방독했을 때 에리히 호네커와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모사한 그림이 베를린 장벽의 잔존 구간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남겨져 있다. # 참고로 브레즈네프의 키스 장면이 공산주의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에서 한 것만 부각되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9년 오스트리아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만났을 때도 한 적이 있다.# 물론 브레즈네프만 한 것은 아니고 브레즈네프의 전임자인 스탈린, 흐루쇼프도[75] 키스를 했으며,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들도 했는데, 고르바초프와 호네커의 키스도 꽤 유명하다.

  • 메모광으로 자신의 정치활동부터 사적인 일까지 모두 3권 분량의 개인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학자들이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연구하기 쉬웠다고 한다. 단 브레즈네프는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서 그가 쓴 글은 문장구조가 기이해서 알아보기가 어렵다. 완벽한 문장은 거의 없고 매우 단편적인 단어들과 비문들만 가득하다. 가령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쓴 첫 메모에는 1965-1929=36이라고 적혀 있는데, 역사학자들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내는 데에 gg를 쳤다. 소련의 장군 겸 역사학자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Dmitri Volkogonov 1928~1995)는 문법의 기초적인 이해도 없던 사람이라고 브레즈네프를 매우 혹평했다.[76] 그리고 생각보다 일기장에 별 내용이 없는데 그가 후계자로 내세운 수슬로프가 죽은 날 일기에도 별 다른 얘기가 없다.

  • 훗날 그의 후임 서기장들 중 하나가 되는 고르바초프와는 사진을 통해 처음 대면하게 되는데, 청년 공산주의자 대표로 고르바초프가 유력하게 천거되었지만 “이 친구 청년치곤 머리숱이 너무 적구먼”하고 반려시킨 일화도 있다. 고르바초프는 이미 그때부터 탈모가 심했던 것 같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도 있었다. 미국 CIA에 의해 일어났다던가 하는 스토리는 아니고 어떤 반체제 성향의 시민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다. 범인인 빅토르 일리닌은 소련 각지를 여행하면서 소련 TV에서 보여주는 소련의 모습과 현실의 소련 간의 괴리감에 상당히 분노하던 시민이었는데 지하자원 판매대금으로 모든 인민들에게 추가적인 봉급을 주자는 자신의 제안을 담은 편지를 크렘린에 내보냈다가 아무런 답장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주장이 주목을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암살 시도를 했던 것이었다. 이때 브레즈네프의 자동차는 항상 있던 대열이 아니라 후방에 있어서 운좋게도 브레즈네프는 살았지만 우주비행사 2명이 다치고 운전수 1명이 죽었다. 이 차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발렌티나 테레시코바 같은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영웅들도 타고 있었지만 둘은 무사했다. 결국 브레즈네프 암살은 실패했고 빅토르 일리닌은 체포되었다. 빅토르 일리닌은 재판에서 과거 정신병 경력으로 인해 정신병으로 감형되어[77] 정신병원에 장기간 수감되었다. 그 이후 브레즈네프가 죽고 9년 뒤에야 풀려났고 이후로는 소규모 아파트 1채와 연금을 받았으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아직도 살고 있다. 또한 일리닌은 감금된 정신병원에서 충분히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이 일이 알려지게 된 것은 냉전이 끝나고 나서였으며 냉전 도중에는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은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 거물급 인사를 향해 벌어진 유일무이한 암살(시도)사건으로 손꼽힌다.

  •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답게 겉으로는 종교에 냉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심 정교회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과 핵무기 감축 건으로 회담하던 중 카터가 브레즈네프에게 발언을 요청하였다. 문제는 브레즈네프는 원고 없이는 발언하지 않는데, 브레즈네프가 그날 준비한 원고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축사에 대한 화답 뿐이었다. 이에 브레즈네프는 카터의 어깨 위에 손을 얹더니 "만약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신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거요!"라고 했다.[78] 다들 가만히 있자 자신도 당황했고, 그로미코가 웃기려는 듯이 "예, 저 위에 있는 신이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네요"라는 말을 꺼냈다. 물론 단순한 관용구였을 수도 있으나 평생 정교회 신앙을 유지했던 브레즈네프가 신실한 개신교 신자인 카터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었을수도 있다. 브레즈네프의 주치의의 증언에 의하면 유년기에 정교회를 믿는 가정에서 자란 브레즈네프는 평생 정교회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며 1982년 건강이 악화되자 정교회에 의지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당시 모스크바 총대주교 키릴과 친분도 있었고 이에 따라 정교회에 대한 탄압 정책을 완화하기도 하였다.[79]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체격이 정말 엄청나게 크다. 특히 어깨 넓이를 보면 이게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수준이다.

  •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자동차광이었다. 서독 방문시 빌리 브란트에게 BMW 자동차를 선물받은 이후 자동차에 맛이 들렸는지 서방제 고급 승용차를 특히 좋아해서 메르세데스-벤츠, 닛산 자동차를 구매하기도 했다.[80] 게다가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리처드 닉슨과의 정상회담 당시 링컨 컨티넨탈을 선물받고선 매우 흡족해하더니 닉슨을 태운 채로 다짜고짜 독단적으로 주행을 해버리는 기행을 벌여 미소 양국의 보좌관들이 심히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다. 그 덕에 닉슨은 30분이나 핵가방에서 멀리 떨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여졌다.[81] 참고로 브레즈네프의 이 돌발적 행동은 단순히 그가 차에 환장해서가 아니라, 브레즈네프의 약물 중독 때문이기도 했다. 닉슨을 만나기 직전에 브레즈네프는 약물을 복용한 상태였는데 이 때문에 뇌에서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구되어 돌발적으로 마구 밟아버린 것.

  • 자동차 외에도 양복을 좋아하여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한 뒤에는 서유럽의 나라들을 순방할 때부터 고급 양복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 권력을 잡고 나서는 고급 양복과 서방의 자동차 수집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브레즈네프가 개인의 허영에만 몰두한 것 같긴 하지만, 그의 시대에 소련은 피아트와 합작해 새로운 자동차 기종을 개발하고 자가용 보급을 늘렸으며 가전 제품의 개발과 보급, 육류와 유제품 공급에도 신경 썼다.

또한 집권 초기의 브레즈네프는 수 년 동안 코시긴 같은 거물 정치인과 테크노크라트들을 서방 각국에 파견해 정부나 기업들과 의류, 섬유 산업 기술 이전, 기계 구입 계약을 체결했으며 서방 패션쇼에 방문하여 최신 유행하는 의복들에 대한 정보와 서방의 의류 유행을 파악해 소련의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제공했다. 소련 수뇌부들의 패션 감각이 보수적인 편이라 의상 제작에 있어 규제나 검열을 많이 적용해 창의성이 넘치는 소련 패션 디자이너들의 발목을 많이 잡고 소련 인민들이 멋지고 개성적인 의복에 갖는 욕구를 잘 해결해주지 못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나름대로 신경은 많이 썼던 것이다. 그래서 고급 양복과 자동차에 대한 브레즈네프의 취향을 이유로 일신의 영달만 추구한 독재자들과 비교하며 그를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 여자를 상당히 밝혔는데, 외국 순방 때 아내 빅토리야를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도 마누라 대신에 애인들을 거느리고 나가고 싶어서(...). 캠프 데이비드 방문 때도 전용기 승무원을 애인으로 대동하고 다니면서 심지어 닉슨 대통령에게 수차례 소개도 시켜주었다. 통역관에게 아내를 대동하고 외국에 가는 것은 으리으리한 성에 석탄을 싣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적도 있다. 나중에 자신이 좋아했던 브란트가 엽색 스캔들로 사임하게 되자 이를 보고받은 브레즈네프는 분기탱천했는데, 사내가 계집질하는 것은 당연한데 겨우 그딴걸로 시비를 걸어서 몰아내는게 어딨냐는 이유였다.(...) 그리고 브란트의 엽색행각이 사진에 찍혔다는 보고에는 만약 사내답게 사진이 찍혔으면 남성성을 증명해준 파파라치에게 돈을 후하게 쳐줘야 하면서 자신이라면 결코 그딴 일로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렇게 여자를 밝히는 브레즈네프의 성격은 의외로 서방 지도자들에게 그가 엄숙한 공산주의 정치가가 아니라 인간적인 지도자로 다가오게 해서 빌리 브란트나 조르주 퐁피두와 꽤 죽이 잘 맞았고, 닉슨은 브레즈네프의 애인 승무원에게 서기장 동무 좀 잘 모시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1973년에 그에게 배치된 개인 간호사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코로뱌코바는 브레즈네프에게 의학적 봉사 뿐만 아니라 이도 닦아주고 맛사지도 해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무엇보다 브레즈네프가 원할 때마다 각종 약물을 공급하면서 브레즈네프 말기에 막강한 비선실세로 자리잡았는데, 1975년에 새로 임명된 브레즈네프의 주치의 미하일 코사료프는 코로뱌코바가 가진 권력을 보고 경악할 정도였다. 참고로 코로뱌코바는 유부녀로, 브레즈네프는 자신이 총애하는 간호사를 위해 그녀의 남편을 KGB 간부로 고속승진시켜주었다.

  • 손자 안드레이 브레즈네프는 크림 반도에서 살고 있었는데 소련 붕괴 이후로 여러 정치활동을 했지만 죄다 군소정당이라 그리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으며 2018년 57살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 개그물로 패러디된 모습. 배우의 외모도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어느 날 브레즈네프는 크렘린의 주치의를 찾아가서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의사 동무, 오늘은 가슴 확대 수술을 해주시오."

주치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브레즈네프 동지,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전환 수술이라도 바라시는 것인가요?"

"새 훈장이 나왔는데 훈장을 달 자리가 없어서 그렇소!"


"제기랄! 저 브레즈네프 낯짝 좀 그만 보고 싶군. 악어한테나 잡아먹혀라!"

"이봐 라비노비치[82]

, 악어한테 불쌍한 소리 하지 말라고. 브레즈네프를 잡아먹으면 2주 동안 똥으로 훈장을 싸지 않겠나?"


1969년 1월, 모스크바의 크렘린 성벽 인근에서 브레즈네프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빅토르 일리닌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83]

"그나저나 당신이 군인이였다니, 다행히 암살에 실패한 게 더 신기할 따름이군."

"내가 권총을 빼들자마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덤벼들었소."

"과연 인민들이 우리 지도자의 생명을 구했구먼!"

"그게 아니고, 모두 자기가 쏘겠다며 권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실패한 거란 말이오..."


  • 더 자세한 내용은 공산주의 유머/소련/정치와 행정 참조. 이렇듯 브레즈네프 재임 후기 이후로는 침체되는 경제와 80년대 소련을 괴롭힌 아프간전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으로 인해서 소련 대중들에 있어서 노쇠하고 무능한 지도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 오늘날 러시아 등지에서는 소련 해체 이후 혼란기로 인해 브레즈네프를 그리워하는 여론도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보낸 40대 이상 중장년 세대들에게 해당된다. 현재 러시아의 2,30대들은 최소한 브레즈네프 시대로부터 시간이 지난 1980년대 중후반이나 소련 붕괴 (1991년) 이후 태어난 세대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청년 세대 입장에서 브레즈네프는 역사 시간 때 배우거나 과거 시대의 인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 흐루쇼프 집권 시절 흐루쇼프는 1980년이 되면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로 돌입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가면 소련 고위층이나 인민들이나 이 약속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980년에 공산주의는 오지 않지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은 온다고 자조적인 조롱을 했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기 미국의 반공극에서 소련의 높으신 분 내지는 최종보스격으로 자주 출연했다. 아예 브레즈네프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경우보다는 주로 브레즈네프 비슷한 높으신 분이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1980년대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 시대를 다룬 인기 정치 드라마에 나온 브레즈네프는 의외로 그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고 한다. 느글느글하게 닉슨 행정부를 조종하려고 하는 암흑보스의 이미지가 잘 나왔다는 평.

  • 그때 그 사람들 - 김재규 역을 맡은 백윤식이 박정희의 죽음을 감추자는 이유로 "쏘오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 일주일이나 비밀로 감추었어요."를 서두로 박정희의 죽음을 보안에 부치자고 주장하는데 오류다.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직 살아있었고 크렘린은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사망 하루 만인 1982년 11월 11일에 발표했다.

  • 닉슨 -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로, 소련 국가를 배경 음악으로 닉슨과 회담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오랜 친구 마냥 마오쩌둥을 미치광이에 비유하는 등 뒷담화를 하면서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다가, 닉슨의 보좌관이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관련한 급보을 가져오면서 이야기가 중단된다. 닉슨과 보좌관이 창가쪽으로 물러나 대책을 숙의하는 동안 브레즈네프도 자신의 보좌관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보고를 들으면서 "한 때는 세계를 호령하던 사람이 안됐어" 라고 말한다.


  • 브레즈네프: 2005년 - 러시아 채널1에서 방영한 4부작 TV영화다. 말년의 브레즈네프가 병마로 시름하면서 젊은시절부터 말년에 이르는 기간을 회고하면서 그 내용대로 전개되는 방식의 시대극으로 세르게이 사쿠로프가 브레즈네프를 연기했는데 연기력이 우수한 것은 물론이고 싱크로율이 매우 좋은 것이 특징. 그러나 브레즈네프 유족, 전직 소련 공산당 정치인들은 브레즈네프는 그렇게까지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스토리를 짰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 스탈린이 죽었다! - 제럴드 레프코프스키가 배역을 맡았다. 베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주코프가 신호를 주자 회의실에서 스위치를 설치하고 화장실에서 스위치를 동작시키면 불이 들어오는 전구를 설치한다. 이후 주코프와 함께 행동을 한다. 이후 자막상으로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에게 실각당했다는 자막이 뜨고 뒤에서 흐루쇼프의 뒤를 내려다 본다.

  • 스파이 하드 - 레슬리 닐슨 주연의 패러디 영화로, 여기에 나오는 미친 장군 레슬리 렝코가 완벽하게 브레즈네프의 이미지를 채용했다. 그의 이미지를 채용한 렝코 장군은 21세기인 지금 나왔다면 유족의 항의를 받을 정도의 캐릭터이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 인트로와 컷신에서 자주 모습을 보인다. 콜옵 시리즈 통합 세계관에선 여러모로 마음 고생이 심할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 역사에서도 본인이 겨우 밀어낸 소련 매파들이 더 위험한 놈들로 대체된 것은 물론이고, 그 놈들이 서방에 대한 증오를 키워주겠다고 1세계 요원으로 위장해서 자국인 소련에 핵을 터뜨리는 바람에 골이 아프다 못해 깨지게 생겼다. 본작부터 좀비 모드가 정사에 속하게 되면서[84], 자국 내의 좀비 사태까지 수습해야 함은 덤이다.

  • 토이 스토리 3 - 랏소 베어: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알렉산더 로마노프와 함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생각되며 외모나 분위기 등도 상당히 흡사한 편이다. 성향은 스탈린에 가깝지만 말이다.[85]

  • Command: Modern Air / Naval Operations - 실시간 밀리터리 워게임이며, 1975년에 3차 세계 대전이 벌여진 가상 역사를 다룬 스탠드얼론 확장팩 Command: Northern Inferno에서 당연히 최종 보스 격 인물로 등장한다. 나토 해군과의 해상 분쟁을 틈을 타 노르웨이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고 아이슬란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전쟁 후반기에 나토군의 반격으로 노르웨이 점령 지역과 아이슬란드를 상실하고 소련 해군도 박살이 나[86] 수세에 몰리자 핵전쟁 대비 태세를 갖추며 미국을 위협한다. 그러던 와중에 호텔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이 우발적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해 뉴욕보스턴을 박살내고 당황한 브레즈네프는 급히 에어 포스 원에 탑승한 미국 대통령에게 핫라인으로 전화를 걸어 자기는 핵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명한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미국과 핵전쟁이 벌여졌기에 지하벙커로 피신했을듯 하다.

  • Road 96 - 독재자 타이락 대통령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행보를 고려해보면 도널드 트럼프와 브레즈네프를 섞은듯하다.


7. 진급 이력[편집]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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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인은 급성 심장 발작.[2]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장기집권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온화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정치국의 집단지도체제를 본의아니게 이끌었다.[3] 196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는 소련의 전성기로 기억된다.[4] 냉전 시기에는 그가 흐루쇼프의 여러 체제 완화 조치를 스탈린 시대로 되돌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연방 해체 이후에 기밀 문서가 대거 공개된 뒤부터 브레즈네프 체제에서도 흐루쇼프의 개혁 조치들이 그다지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당시 지도부들은 스탈린 치하에서 동료들이 숙청되어 감옥에 보내지거나 처형당하는 살얼음판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히 그 시절로 돌려놓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5] 또한 미국은 1970년대 초,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던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고려로 함구한 반면, 소련에 대해서는 비난을 가했다. 이 때문에 브레즈네프 시절의 인권 탄압이 흐루쇼프 때보다 더 강해진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으나,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6] 안 그래도 정치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났는데, 서방에 유화적으로 보였던 브레즈네프가 군비를 감축시킬까봐 군부는 막대한 군비 증강을 요구했다.[7] 러시아인들 입장에서 체르노빌 사건은 소련 해체 이후의 혼란상에 비하면 그다지 큰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당장에 레드 마피아가 90년대를 기점으로 급성장한 이유가, 사회적 혼란과 국가의 통제력 상실, 급격한 체제 혼란 등의 문제가 야기한 경제 붕괴, 다양한 경제 범죄, 국가 재산 횡령 등으로 큰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8] 과거에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Дніпродзержинськ)라고 불렀으나 크림 반도 사태 이후 2016년 옛 이름을 우크라이나어식으로 바꾼 카미얀스케(Кам'янське)로 바꾸었다.[9]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일랴 야코비치 브레주네우(Ілля Якович Брежнєв)'.[10]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나탈리야 데니시우나 브레주네바(Наталія Денисівна Брежнєва)'. 혼전성은 '마잘로바(Мазалова)'.[11] 야금 대학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어는 테흐니쿰(техникум)으로서 '기술 학교' 라고 번역하는 중등 교육 기관이다. 테흐니쿰 같은 중등 교육 기관들을 영미권에서 College로 번역하다보니 일어나는 오류이다.[12] 1990년 해당 곡을 다른 앨범에 재수록했을 때는 시대에 맞춰 이 부분을 "마스터 미샤"라고 바꿨다.[13] 여기서 "브레이크"는 브레이크 댄스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아는 화려한 퍼포먼스의 비보잉 댄스가 아닌 로봇처럼 어색하게 몸동작들 딱딱 끊어가며 추는 팬토마임 식 춤을 의미한다. 80년대 당시 소련에서 유행했다.[14] 단순히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어식으로 읽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어 계열 단어 및 표현도 섞여 있다. 위 가사에서 밑줄 친 부분은 우크라이나어 단어 혹은 문장을 러시아어식으로 적은 것이다.[15] 말년의 스탈린은 브레즈네프 외에도 자신의 후계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구실로 정치적 신인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아나스타스 미코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키타 흐루쇼프 등 다른 거물 정치인들은 스탈린의 이런 행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으나, 스탈린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너무 갑작스레 승진하여 얼떨떨한 새 후보위원들을 돕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식으로 간접 저항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신인들의 대다수는 시원찮은 일처리 때문에 스탈린에게 찍혀 좌천당했다.[16] 후술하겠지만 브레즈네프가 즐겨하던 동유럽식 인사이다.[17]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도 월남전의 막바지에 이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비슷한 침체기에 있었다. '회색 시대'라는 표현은 미국의 1970년대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강대국들의 침체기 사이에서 성장을 거듭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18] 1960년대 당시 소련의 라디오 보급률은 50%에 불과했다.[19] 소련 붕괴 이전 최고 기록.[20]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어서 공과 사를 구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공적인 상황에는 여전히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찬양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반공 서적이나 반체제 발언도 어느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갔다. 한국에서는 당시 소련을 북한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스탈린 집권기였고 스탈린 사후 소련은 당시 다른 공산권 국가인 베트남이나 불가리아 정도의 자유도는 가지고 있었다.[21] 이때문에 노동 규율이 해이해지는 부작용도 있어서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출근 도장만 찍고 놀러다니거나 무단으로 결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 결과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크게 저하되었다. 후대의 유리 안드로포프가 노동 기강을 강하게 잡으면서 이러한 현상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러시아 현대사 통틀어서 가장 노동 환경이 괜찮았던 시대가 브레즈네프 때였다.[22] 원래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이 같이 실권을 잡고 있었지만, 코시긴이 추진한 경제개혁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당내 보수파들이 브레즈네프를 바지사장으로 올리기 위해서 코시긴을 사임시켰다. 포드고르니가 맡고 있던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도 1977년 브레즈네프에게 넘어간다.[23] 실제로 펩시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이 이 시기에 소련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소련TV에 상업광고가 등장한 때였기도 했다. 이때 상업광고가 도입된 김에 소련 기업들에게 회사자금의 1%를 광고비로 쓰라는 지시도 내렸기 때문에 소련의 광고시장이 팽창하기는 했으나 저급 제품들이나 심지어 제대로 생산되지도 않은 제품들도 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에게 '광고는 저급한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래서 광고 효과는 떨어졌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 것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 시기에 와서부터였다.[24] 소련제 진공관이 자주 폭발하여, 소련 내에서는 TV를 보다가 TV가 폭발해 사망하는 사건도 많았다.[25] 흐루쇼프의 개혁보다는 농업 실패와 대외정책이 결정적이었다.[26] 사실 이것은 소련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원의 저주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영국같은 경우도 북해 유전이 터지면서 제조업이 다 박살난 것을 보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영국은 금융이라는 세계 최고 경쟁력의 산업이 있었지만 소련은 그게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27] 이때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우호성 무역도 활발해서, 당시 북한에서 헝가리산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는 회고담을 볼 수 있기도 하다.[28] 취임할 때 54세였는데, 젊은 리더십을 펴기는커녕 원래부터 안드로포프의 총애 때문에 고속 출세한 인물이라서 능력에 비해 리더십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정치국 위원들은 많게는 고르바초프보다 20살 이상이나 연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임기 초반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영전했다가 1988년에 은퇴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09년생이었다. 이런 원로들 앞에서 그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29] 다만 이전 최고권력자였던 흐루쇼프는 브레즈네프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보 당국에 의한 지속적인 감시는 받고 있었다.[30] 1966년에는 대물리학자 이고르 탐(195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과 표트르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 복권에 반대하는 편지를 브레즈네프에게 쓰기도 했다.[31] 아이러니하게도 흐루쇼프의 숙청으로 대체된 인물이 브레즈네프와 그의 최측근인 안드레이 그로미코이다.[32] 흐루쇼프는 1980년에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에 돌입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결국 소련은 해체될 때 까지 공산주의는 고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도 한참 못 미치는 과도기적인 형태로 끝을 맺게 된다.[33] 카자흐스탄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벨라루스알렉산드르 루카셴코타지키스탄에모말리 라흐몬 등 일부는 소련 해체 때 그대로 자리를 이어받아 독재를 행했다.[34] 비슷한 시기 북한도 김일성이 의욕적인 군비 확장정책을 벌이면서 전체 예산의 자그마치 30%를 국방비에 집중 투자했다. 결과적으로 파탄 지경은 아니던 북한 경제는 한국에게 추월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5] 사실 공중급유 프로판이 있어서 대륙간 폭격이 가능했지만 미국과의 협상으로 인해 제거된다.[36] 이 시기 브레즈네프는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진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나중에 건강에 치명적인 습관이 되었다.[37] 폴란드 서기장 카니아가 모스크바에 회담을 하러 왔을 때 우스티노프는 "카니아 동지,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이났소!"라고 소리지르며 "2주의 최후의 최후의 시간을 주겠소!"라며 압박을 했다.[38] 침공을 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소모되었을 것이다.[39] 다만 소련의 입장으로써 이집트의 완전한 패배는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기에 이스라엘군의 과도한 진격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40] 일례로 1972년 소련에 간 아옌데는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지만, 소련 지도부는 데탕트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있던 터라 칠레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일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 남미의 민주화 인사들은 소련과 동맹국으로 대거 망명하는 일이 잦았으며 망명도 잘 받아줬다.[41]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비서로 활동해 동방 정책을 구상한 인물이다.[출처] Святослав Рыбас. Громыко. Война, мир и дипломатия. — М.: 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2011.[42] 브레즈네프는 미국데탕트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전쟁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면 끝까지 진력하는, 의외의 성향을 보였다. 후술하듯 군사개입을 최대한 피하였고 아프간전 개입에도 부정적이었다.[43] 브레즈네프의 아버지 또한 반전적인 모습이 강했으며, 브레즈네프도 이 영향을 받아 줄곧 아버지 얘기를 했다고 한다.[44] 브레즈네프 시기 세계 공산당에 대한 지령도 폭력 투쟁을 반대하며 평화 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체 게바라 같은 폭력 투쟁을 주장하는 혁명가를 적대하는 영향도 생겼다.[45] 이는 브레즈네프의 꿈이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대외적, 대내적 형편상 불가능한 일이었다.[46] 브레즈네프 독트린도 당연히 폐기하지 않았다. 그 덕에 1981년에 폴란드 연대노조를 탄압하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의 계엄령을 적극 지지해 서방세계로 부터 비난을 받았다.[47] 물론 미국은 해당 협정과는 별개로 소련의 발트 3국 귀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정치국 내 보수적인 인사들은 협정에 매우 실망하였다.[48] 당시 정치국에서는 중국의 인적 자원을 극도로 두려워 하였다. 여태껏 소련은 미국과 핵전쟁 대비만 했지 중국과 같은 인구 대국과의 싸움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소련에서는 "중국군 500만명이 항복했습니다!"와 같은 유머가 나돌았었다. 또한 소련은 중국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국경으로 밀어넣는 시나리오도 두려워 하였다.[49] 디마는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이는 브레즈네프 리더십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그는 고위 정치국원들을 친구처럼 애칭을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했다. 물론 수슬로프와 코시긴처럼 자신이 어렵게 여긴 인물들에겐 경어를 썼다.[50] 여태껏 소련은 아프간 대통령인 타라키와 회담을 했으며, 타라키의 친소적인 행보에 브레즈네프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51] 아프간 침공 전 부터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인해 그동안 브레즈네프가 모든 정치 생명을 바쳤던 초강대국 데탕트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52] 여기다가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서기장 시절 자기 군계급을 소장에서 원수로 4단계나 자가진급시켰다. [53]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을 넣으라고 했다. 당연히 주코프가 일개 정치장교였던 그의 전공을 집어넣을리가 없다.[54] 문제의 회고록은 결국 10판째에서야 수정되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온갖 검열과 수정 압박이 가해져서,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 주코프는 "이 책은 내가 쓴 게 아니야."라고 볼멘소리를 냈다고 한다.[55] 사실 브레즈네프도 살벌한 스탈린 시기를 겪어본 인물이고, 자신이 몰아낸 흐루쇼프 덕에 소련 정계의 살벌한 숙청이 완화된 것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더 이상 우상화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환경이긴 했다.[56] 특히 고급 술과 담배를 수집하는것을 즐겼다.[57] 수슬로프가 죽던 날 브레즈네프 일기에는 수슬로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안드로포프가 그에게 '노란것'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볼코고노프는 그 노란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금일봉일까 하는 추측을 남겼지만 나중에 수면제로 밝혀졌다.[58] 아들 유리와 딸 갈리나가 대규모의 횡령을 저질렀기에 브레즈네프는 자식들을 공직에서 파면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리는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나마 아들 유리는 아내 류드밀라 및 아들 2명과는 좋은 관계였고 80세까지 장수했으나 갈리나는 결혼을 4번이나 할 정도로 사생활이 엉망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알코올 중독에 정신질환까지 심하여 브레즈네프가 이로 인해 속을 썩였다. 이 때문에 갈리나는 정신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리다 결국 69세의 나이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러시아의 남녀 간 수명 차이가 세계적으로도 심한 것을 생각하면 갈리나가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다.[59] 특히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더 좋은 것을 달라는 장면이 나온다.[60] 1971년에 발표된 그의 신년사와 비교해보자.[61] 야루젤스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오히려 개혁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62] 길이는 약 3시간 정도이다.[63] 스탈린과 흐루쇼프 치하에서 경력을 쌓는 동안 브레즈네프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를 배웠다. 특히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온화하고 사교적이고 소박한 습관을 갖고 있으면서 권력의 오만이 전혀 없는, 대화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다. 다만 훈장 욕심은 소박하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은 알았지만 매우 잔인했던 스탈린이나 호탕하고 지나칠정도로 과격한 흐루쇼프와 달리 성격이 온화했다는 점은 장점이 되어 권력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64] 이 뒤에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은 옛 러시아의 영광을 부활시킨다고 남오세티야 전쟁, 돈바스 전쟁, 시리아 내전 등에 개입하며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려 하였지만, 소련 시절의 복지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워졌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도 평화와 멀어지고 있다.[65] 일례로 1981년 레흐 바웬사의 폴란드 노조 사태로 서방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도 브레즈네프는 해결책으로 정치국에 데탕트를 주문할 정도였다!! 당연히 이 시기는 소련 아프간 전쟁과 미국의 공격적인 반공 선전으로 데탕트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브레즈네프는 과거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데탕트라는 보수적인 해결책을 찾을 정도였다.[66]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에 이르면 소련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경제 붕괴, 민족주의 대두 등 수많은 문제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각 공화국 도시들에서 대규모 시위 사태도 일어났다. 그 때문에 계엄군이 투입되는 사태도 생겼는데 고르바초프는 이들의 무력 사용을 금지 해서 계엄군은 분노한 인민들과 미디어에 그대로 노출되며, 정치국은 소련군에 대한 통제력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비슷한 시기 8월 쿠데타 세력도 이런 고르바초프의 행동을 반복했다.[67] 물론 실제 이유는 브레즈네프의 데탕트 탓에 자신의 쇄국 정책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었다.[68] 혹은 그 잔당[69] 이 협정에서 브레즈네프는 2번이나 쓰러졌다. 첫 번째 쓰러졌을 때 주치의들은 회담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지만 강행하기로 했으며, 치열하고 힘든 협정을 마치자 두 번째로 쓰러졌다. 이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몇 주 동안 회복을 못했으며 건강도 크게 악화되었다. 그나마 이후 다시 일어나 업무에 복귀하긴 했지만 1975년 이후에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이전에 비해 확실히 나이가 들고 건강도 나빠진 것을 알 수 있다.[70] 건강이 크게 악화돼서 거의 혼수상태로 최종 의정서에 서명했다.[71] 대표적으로 이집트가 있다. 이집트는 1980년대이래 친미외교를 펴지만 김일성 생존 당시에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원조해준 북한과의 의리를 지켜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72] 이 때 미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던 남한의 박정희는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검토했고 소련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화답한 적이 있었다. 미국만 믿을 수 없었던 당시 유신 정부와 북한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소련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히며 지연되었고 결국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으로 소련과 한국의 관계는 다시 냉각되어서 무산되었다.[73] 해당 유머는 브레즈네프 버전 이외에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이오시프 스탈린 버전도 있다.[74] 농구선수 찰스 바클리가 당했던 뽀뽀처럼 미국에도 존재는 한다. 다만 구세대의 주책맞은 행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뿐이다.[75] 특히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을 만나서도 키스했는데 중국엔 그런 문화가 없었으므로 마오쩌둥은 대단히 불쾌해했다.[76] 볼코고노프는 보리스 옐친의 보좌진을 하던 사람으로, 그가 펴낸 소련 역사서는 옐친 측의 시각이 담긴 역사관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다만 볼코고노프도 어느날 갑자기 반공주의자로 돌변한 것은 아니고 반스탈린주의자에서 반레닌주의자로 변해 소련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적 전향을 거쳤다. 어쨌든 러시아 혁명과 소련 수립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소련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혹평한 사람이긴 하지만, 스탈린이 독소전쟁 승리에 산업화 등을 통해 크게 기여했으며 경험을 통해 전쟁 후반에 어느 정도 전략적 식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다고 인정하는 등 소련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고평가를 남겼기 때문에 정말로 소련을 근본적으로 증오하던 사람들에겐 어줍잖은 회색분자라고 욕을 먹었다. 일단 소련 기밀문서고를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많이 알린 것 자체는 학계적으로 성과라고 평가된다.[77] 사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도 정신병으로 인한 감형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시절 폴란드의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 루치안 스타니아크(Lucian Staniak)의 경우,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사형대에 오르는 대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다만 정신이 온전한 시민이 브레즈네프를 쐈다면 체제에 대한 불만이 무르익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므로 의도적으로 정신병자 판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78] 카터 대통령의 구순 기념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79]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무신론자인 을 하고 몰래 신앙심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덕에 소련 해체후 정교회가 다시 활성화되는데 도움이 되었다.[80]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인 김일성, 카다르, 차우셰스쿠, 호네커도 자동차광으로 수십대의 서방제 자동차를 보유했다고 한다.[81] 30분이면 소련의 ICBM과 SLBM이 미본토에 도달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만한 시간동안 미국의 국가원수가 보복 핵공격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놓였던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다행이도 우발적 에피소드로 끝났다.[82] 랍비(rabbi)를 러시아 이름처럼 바꾼 이름인데, '이반 라비노비치' 등의 이름으로 러시아의 우화 및 농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경우가 대부분.[83] 실제 있었던 일이며, 범인의 이름도 실제로 빅토르 일리닌으로, 군인 출신이었던 것 또한 동일하다. 다만, 후술하는 심문 내용은 창작이다.[84] 그 이전까지의 좀비 모드는 캠페인, 멀티와는 별개의 세계관이거나 평행 세계였다.[85] 브레즈네프가 18년 간 장기집권했고 소련의 전성기를 이끈 지도자이기 때문에 과격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브레즈네프 본인은 매우 신사적이고 신중한 스타일이였고 정치적인 탄압이나 과도한 대립정책도 지양하는 스타일이였다. 사실 랏소 베어의 성격 자체는 브레즈네프 보다는 전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에 가깝다.[86] 미국도 항모전단들을 손실하는 등 피해가 컸지만 소련 해군은 함대가 궤멸된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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