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호(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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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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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20.postimg.org/OB1995.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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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KBO 리그 MVP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5 KBO 리그 홈런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5 KBO 리그 타점왕



{{{#ffff00 [[MBC 청룡|MBC 청룡]] 등번호 45번}}}
결번

김상호
(1988~1989)


김종철
(1990~1993)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44번}}}
김원식
(1988~1989)

김상호
(1990~1998)


박종윤
(2000)
LG 트윈스 등번호 33번
임선동
(1997~1998)

김상호
(1999~2000)


홍현우
(2001)




파일:김상호ob.jpg

김상호
金湘昊 | Kim Sang-ho

출생
1965년 10월 19일 (58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선린상고 - 계명대
포지션
3루수[1],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1차 지명 (MBC)
소속팀
MBC 청룡 (1988~1989)
OB 베어스 (1990~1998)
LG 트윈스 (1999~2000)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KBO 리그 선수. 등번호는 45번(MBC 청룡) - 44번(OB 베어스) - 33번(LG 트윈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external/image3.inews24.com/1313713065853_1.jpg
전성기를 보낸 OB 베어스 시절.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_2013_674751_13780470411002481.jpg
말년을 불태웠던 LG 트윈스 시절.

1987년에 열린 신인드래프트에서 MBC 청룡의 1차지명을 받고 1988년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에 입단한다. 그러다가 1990년에 재일교포 투수 최일언과의 트레이드로 OB 베어스로 이적하였다. 참고로 이 트레이드는 MBC 청룡럭키금성그룹으로 매각된 후 처음 단행된 선수 거래였고 MBC 시절을 통틀어 서울 라이벌 팀끼리 단행한 최초의 선수 대 선수 거래였다.[2]

당시 OB는 김상호가 오기 전까지 소총부대라는 오명을 갖고 있었는데[3] 일발장타가 있던 김상호를 영입해 장타력을 보강하고 노쇠화가 시작된 최일언을 LG로 보내 선수단의 체질 개선을 꾀하고자 했다.[4] MBC에서는 3루수를 주로 봤으나 입스가 온 탓인지 송구 실책을 내기가 일쑤였다. 결국 OB에 와서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OB는 김상호를 타선의 핵심으로 기용하는데 김형석과 함께 클린업 트리오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특히 1995년 25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면서 OB 베어스의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홈런왕, 타점왕, MVP를 수상하였다. 무엇보다 이 해의 MVP는 옆집 에이스 투수인 선발 20승의 이상훈을 제친 것이어서 상당한 파격이기도 했다. 물론 소속팀 OB가 그해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통합으로 제패한 것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5]

50도 나온 현재 시점에서 보면 25홈런은 홈런왕 치고는 상당히 적은 숫자로 느껴질 수 있는데, 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는 투고타저 경향이 강했으며, 1992년 장종훈의 41홈런 이후로도 3년간은 25홈런~30홈런 사이가 홈런왕이 되었다. 또한 원년부터 1995년까지 14년간 25홈런 이상 기록한 경우는 15번[6]으로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쓰면서도 당시로선 그리 적은 숫자도 아니었고, 리그에서 가장 많은 홈런까지 친 것. 101타점의 기록도 1992년 장종훈 이후 역대 두 번째의 100타점 돌파였기에 기여도는 타선수들에 비해 높았다고 보긴 어려워도 상징적인 면에선 받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던 상황이긴 했다.

특히 1995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으로 둔 팀 소속 선수로는 최초로 홈런왕을 따낸 선수가 되었다.[7] 1998년 시즌을 끝으로 류택현과 함께 친정팀인 LG 트윈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으나[8]크게 활약하지 못하고 2000년 말에 은퇴했다.

슬러거 치고는 발도 빨라서 매년 20개 가까운 도루를 했으며 1995년 홈런왕을 수상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빠른 발을 가진 중장거리 타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9] 그러나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쓴다는 것을 감안해도 통산 기록에서 홈런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이며(통산 136홈런) 전성기도 2~3년 정도로 짧았다.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스윙[10]으로 곧잘 쓰러질 정도로 큰 헛스윙을 해서 '칼춤'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단단한 체구와 강인한 체력으로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11]

안성기를 닮은 쾌남형 얼굴에 이판사판 식의 화끈한 허슬플레이[12], 우락부락한 몸매의 영향으로[13] 적지 않은 팬이 있었지만 사실 모범생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엄청난 주당으로 야구장에서보다 잠실 근처 술집에서 그를 봤다는 팬이 더 많았을 정도였으니... 당시 신인급이었던 안경현이나 정수근[14]도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술을 배웠다는 후문. 특히 정수근은 롯데 자이언츠에 가서 청출어람이뤄냈다 인터뷰에서도 당시의 여느 선수들과 달리 언제나 자신만만한 태도로 뭔가 보여드리겠다고 큰소리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면에선 팀 후배 홍성흔이나 오재원같은 똘끼 캐릭터의 원조격인 선수.[15]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역이기도 한데 그중에서도 특이하게 팀에 복귀하고 연봉을 깎거나 동결한 다른 선수들과 달리 안 올려주면 나가겠다면서 결국 연봉인상을 받아낸 바 있다.[16]

게다가 1995년 1월, 이종민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자신의 차를 두고 갔는데, 그 다음 날 이종민은 그가 두고 간 차를 돌려 주려고 대담하게 면허없는 상태에서 운전하고 가다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근처에서[17] 사고를 내고 말았다.[18]


3. 은퇴 이후[편집]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10821181326773.jpg
2011년 8월 21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 전에 시구를 하는 모습.

파일:external/www.viva100.com/2016041001000516900022934.jpg
2016년 언론 인터뷰에서의 모습. 외모가 현역때랑 별로 변하지 않았다.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외식업에 종사하고 있고, 2011년 현재 프랜차이즈 전문 기업 '후인'의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2011년부터는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 사회인 야구선수들과 중고생들을 위한 실내야구연습장 '팀 베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과거 LG와 두산에서 선후배 사이였던 정삼흠이나 정수근 등이[19] 초빙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관련 기사

2011년 8월 21일 한화 이글스와의 3연전 마지막 홈경기에서 사인회와 시구를 했다. 과거 윤동균 감독의 강압적인 지도방식에 반발해 항명했던 선수들이 2011년까지도 구단의 초청한 번 받지 못하면서 잊혀져 갔는데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김상호도 당시 주동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 정규시즌과 2011년 개막전 때 시구를 했던 불사조 박철순도 항명파동 요주의 인물 중 한 명이었지만... 박철순의 경우엔 워낙 원년 우승의 주역이기도 하고, 불사조의 전설로 팬들에게 OB의 박철순이 아닌 박철순의 OB로 기억될만큼, 엄청난 상징이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인물이긴 하다.[20]

아무튼 김상호의 초청과 프런트진 개편을 계기로 90년대 올드스타들에 대한 대우도 달라지는 것일지 귀추가 주목되었다.[21] 이후 항명 파동에 가담한 권명철다시 생각해라 프런트!!, 이광우가 코치로 두산에 복귀하고, 2015년 두산이 우승하자 김상호가 축하 인사를 남기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축하 인사 보러가기.


4. 기타[편집]


  • NPB의 외국인 슬러거였던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와 외모가 닮았다.
  • 역대 KBO 리그 MVP 중 최저 WAR을 기록한 타자이다.[22] 당시 1995년 MVP는 WAR만 놓고 따지면 선동열, 김상진, 이상훈 중 한 명이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는데, WAR같은 2차스탯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23] 당시 MVP 투표는 홈런왕, 다승왕 등 상징성이 강한 클래식 스탯이나 클래식 스탯 다관왕 등 클래식 스탯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는데, 이로 인해 최초의 잠실홈런왕이라는 임팩트와 팀의 우승까지 더해지며 김상호가 MVP 표를 가장 많이 받게 된 것.
  • 특이한 점으로 소속팀이 두 번 바뀌었음에도 홈 그라운드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 현역 시절, 귀마개 없는 헬멧을 사용한 대표적 선수기도 하다. 터프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답답함이 덜하다는 이유로 90년대까지는 이 형태의 헬멧을 사용하는 선수들이 제법 있었다. 삼성 장효조나 롯데 김민호도 무귀헬멧을 사용한 강타자. 2000년대 중반부터는 투수들의 구속 향상과 몸쪽 볼 구사율이 높아지면서 타자들은 부상의 위험성때문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포수(수비 한정)들의 전유물로 자리매김 했다. 요즘은 귀마개도 모자라 검투사 헬멧이 대세이다
  • 현피가 꽤 세다고 알려져 있다. LG와 벤치 클리어링때 김재현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자리에서 육두문자를 거하게 퍼부으며 눈빛 레이저를 발사하자 김재현이 깨갱 하면서 바로 뒤돌아설 정도였다. 물론 김재현보다 한참 선배이긴 하다.
  • 1995년 홈런왕이라는 명예를 가진기념으로 1995년 12월 13일 가족오락관에서 같은 팀 멤버인 강병규와 동반출연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타자 기록. 붉은색은 리그 1위 기록, 굵은 글씨는 5위 이내 입상기록을 뜻한다.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8
MBC 청룡
88
267
.270
72
17
2
7
43
35
11
22
.427
.323
1989
109
362
.257
93
9
4
13
(5위)
56
51
21
55
.412
.35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OB 베어스
114
400
.275
110
18
1
14
52
61
12
61
.430
.370
1991
93
318
.208
66
10
1
5
42
33
12
36
.292
.287
1992
102
370
.300
111
26
4
12
49
61
16
46
.489
.377
1993
122
440
.264
116
17
1
11
56
53
19
47
.382
.333
1994
113
410
.249
102
11
5
(3위)
9
49
55
6
54
.366
.334
1995
126
(1위)
504
(1위)
.272
137
(5위)
23
2
25
(1위)
101
(1위)
79
(3위)
10
51
.474
.335
1996
117
439
.269
118
27
0
20
(4위)
75
53
5
39
.467
.324
1997
96
343
.315
108
24
3
11
52
45
4
46
.499
.393
1998
34
87
.241
21
3
0
1
7
12
0
17
.310
.36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9
LG 트윈스
94
221
.253
56
10
1
8
40
39
1
34
.416
.350
2000
21
31
.065
2
1
0
0
2
4
0
9
.097
.275
KBO 통산
(13시즌)
1229
4192
.265
1112
196
24
136
624
581
117
517
.421
.344

6. 관련 문서[편집]


[1] 청룡 시절 가끔 출장하다 OB 이적 후 외야수로 고정[2] 1985년 이종도가 MBC에서 OB로 건너가긴 했는데 이때는 현금 트레이드였다.[3] 1989년까지 역대 OB 구단 내 한 시즌 팀 최다 홈런 선수는 1982년의 김우열과 1988년의 송재박으로 13개였다. 그나마 1982~1984시즌 OB의 홈은 지금의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였다. 1980년대의 OB는 같은 서울팀 MBC 청룡과 비교해도 눈에 띄게 장타력이 떨어지는 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청룡의 장타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기는 했다. 청룡 구단 역사상 한 시즌 팀 최다 홈런 선수는 1982년의 백인천의 19개였는데 이 시즌은 동대문야구장을 홈으로 썼다. 잠실로 완전 정착한 이후의 최다 홈런 선수는 1984년 이광은으로 그 해 18개의 홈런을 쳤다. 이는 타자들의 타격 기술이나 체격이 현재보다 미흡했고 당시 한국야구의 기조가 투고타저 스타일이었으며 한국인 타자들의 장타력으로는 잠실구장을 넘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4] 상황과 무관하게 매번 엄청난 풀스윙을 보여주던 김상호의 야구 스타일이 LG 창단 감독으로 돌아온 백인천의 야구관과도 그다지 맞지 않아서 OB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인천은 장타력은 물론 작전 수행 능력까지도 중시했던 전형적 일본야구 스타일을 선호했다.[5] 이 당시 OB 홍보팀장이던 구경백이 "내가 기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설득해서 김상호를 MVP로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리그 MVP는 야구 기자단의 투표로 선정되기에 각 구단 프런트가 기자들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소속 선수의 MVP 수상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6] 30홈런 이상은 4, 40홈런 이상은 1번[7] 이후 1998년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 2018년 김재환이 각각 42홈런과 44홈런을 기록하며 잠실 연고팀의 홈런왕을 역사를 이어갔다. 참고로 잠실을 같이 쓰는 옆집은 1982년 원년 이후 단 한 번도 홈런왕을 배출한 적이 없다.[8] 이 시기 외국인 선수 제도의 도입과 세대 교체가 겹쳤다. 외국인 타자로 타이론 우즈, 초특급 신인으로 김동주가 입단하면서 김상호에 목 맬 필요 없이 순식간에 타선 강화를 이뤄냈다. 전년도인 97년에 3할을 쳤고, 98년에도 시범경기에서 팀 내 최고의 성적을 찍었지만 팀에서는 김상호를 자주 기용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김상호 본인이 구단에 선제적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9] 홈런왕을 차지한 95년 전까지는 홈런보다 도루를 더 기록한 시즌도 꽤 있다.[10] 그래도 1992년과 1997년에 3할 타율을 두 번 기록했다. 1995년의 기록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증거.[11] 물론 외야수로 전향하기 전까지는 내야 수비가 엉성한 탓에 '돌글러브'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기도 했다.[12] 1995년 잠실구장에서 LG 김동수의 홈런성 타구를 엄청난 스피드로 쫒아가서 점프해서 잡아낸 플레이는 그 해 최고의 진기명기로 회자된다.[13] 당시 야구 유니폼은 몸에 딱 달라붙게 입는 스타일이 유행이었다. 특히 바지는 스키니진처럼 보일 정도로 다리에 착 달라붙는 스타일이어서 하체 근육이 짱짱한 선수들은 유니폼에 근육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김상호가 이 스타일을 고수했다.[14] 특히, 술 이야기 하면 모든 선수도 이 분 만큼에게 도망친다는 설이 있었다...[15] 공통점이라면 팀내에 케미스트리를 잠시 깨서 두산을 제외한 모든 구단 선수들에게 밉보인 적도 조금은 있었으나 지금은 호감도가 상승하였다.[16] 팀의 고참이자 깡다구가 높던 장호연도 이런 식으로 구단에게 개겼었다... 이던 당대에 두산은 식품 사업에도 있어서 해태 타이거즈롯데 자이언츠 처럼 꽤나 매년 기업에 대한 돈이 많이 나갔음에도 여타 저 두 구단 처럼 선수들 연봉협상에 진통이 컸었다. 예로 들면 해태는 에이스 선동열 이나 고참 이순철, 한대화 롯데는 에이스 최동원, 거포 마해영, 탱크 박정태 등등 이름 값 하는 선수들에게 인상을 하더라도 10% 조금 넘는 수준? 으로만 해주고 그냥 체면상 올려준다 해도 20%까지 올려줬다. 당대에는 20%가 최대치였으니.. 다만, 그 다음해 못하면 얄쨜없이 연봉을 깎아버린다. 그 피해자가 유두열 코치[17] 문제는 음주운전인지 아닌지 단속차 확인을 하던 경찰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해버린 것이다.[18] 징역형을 살고 나온 이종민은 한동안 1군 선수로 뛰다가 결국 2002 시즌이 끝나고 방출당했다.[19] 공교롭게도 정삼흠과 정수근 모두 현역 시절 로 인한 에피소드가 많은 선수(...)였다. 정수근은 워낙 전과가 화려한 선수고 정삼흠은 선동열과의 술 대결 일화가 유명하다.[20] 박철순이 다시 시구하러 온다고 했을 때, 새벽부터 줄서서 1,000명 사인회 기다리다 돌아간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였으니...[21] 당시 윤동균 감독에 반발해 항명한 선수 가운데 가장 구단 속을 썩이던 선수가 김상호였다. 그런 김상호를 시구자로 불렀다는 거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22] 당시 김상호의 war은 스탯티즈 기준으로 4.27인데 시즌 126경기 체제였다. 그래서 war/144로 환산할경우 4.875가 나오는데 2017년 KIA 타이거즈양현종이 144경기 체제에서 4.63으로 MVP를 수상하며 war/144의 최저는 아니게 됐다.[23] 국내에 war이 유입된건 200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며, 2000년대 후반에 세이버 스탯 사이트가 나오기 시작했고, 부침을 겪다가 대표적인 사이트인 스탯티즈의 부활, 2015년을 기점으론 네이버 스탯란엔 공식 업체인 스포츠투아이 기준의 war이 표기되는 등 국내에 대중화된 건 2010년대 중반, 방송사에서도 적극 도입되며 더욱 알려지게 된 건 2010년대 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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