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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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균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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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2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2 KBO 베스트 10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10번}}}[1]
팀 창단

윤동균
(1982~1989)


문희성
(1998)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70번}}}
김익환
(1991)

윤동균
(1992~1994)


김평호
(1999~2003)



파일:OB베어스 윤동균.jpg

윤동균
尹東均 | Yun Dong-Kyun

출생
1949년 7월 2일 (74세)
강원도 삼척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전문창초 - 충남중 - 동대문상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기업은행 야구단 (1969~1977)[2]
포항제철 야구단 (1978~1981)
OB 베어스 (1982~1989)
지도자
OB 베어스 플레잉코치 (1986~1989)
OB 베어스 2군 감독 (1990~1991)
OB 베어스 1군 수석코치 (1991)[3]
OB 베어스 감독대행 (1991)[4]
OB 베어스 감독 (1992~1994)[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2001~2002)
경력
KBO 규칙위원 (1996~1997, 2008, 2010)
KBO 상벌위원 (1999, 2007~2008)
KBO 기술위원장 (2007~2009)
KBO 경기운영위원 (2008~2011)
KBO 기술위원 (2012)
KBO 자문위원 (2018)
일구회 회장 (2016~2021)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연도별 주요 성적
3. 은퇴 이후
3.1. 감독 성적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야구인으로, OB 베어스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감독. 등번호는 10번.


2. 선수 경력[편집]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야구는 대전에서 시작했다. 대전 문창초등학교와 충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동대문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배명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투수 유망주였지만, 연습경기 도중 던진 공이 팀 동료의 머리를 강타하는 사건 때문에[6] 이후 투수로서의 자신감을 상실, 야수로 전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부터 기업은행, 포항제철에서 실업야구 선수를 했으며, 강타자로 맹활약했다. 또한 이해창과 더불어 국제대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국제용 선수'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파일:OB윤동균.jpg

파일:OB 베어스 엠블럼.svg OB 베어스 선수시절
1982년[7] OB 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8] 주로 3번과 4번을 맡으며 타율 0.342로 백인천에 이어 타격 2위를 기록했고, 팀의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중심타자로 크게 기여한다.[9]

이후 외야수와 지명타자를 오가며 중심 타선에서 활약했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1988년 시즌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고[10], 1989년 시즌 선수 겸 2군 타격코치로 임명되어 간간히 경기에 출전하다 그 해 8월 17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잠실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날 경기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열린 은퇴기념 경기였고 주인공인 윤동균은 이날 4번 지명타자로 출장하여 첫 두 타석은 범타로 물러났지만, 4대 2로 앞서던 6회말 생애 마지막 타석에서 상대 선발 김시진으로부터 좌중간 담장을 직격하는 1타점 적시 2루타를 날리며 이날 OB가 7대 3으로 승리하는 쐐기점을 올리는 공을 세웠다.[11] 이날 경기 후 윤동균은 관중들에게 은퇴사를 낭독하며 아쉬움에 눈물을 지었고, OB 선수단은 윤동균을 헹가래 치며 그의 은퇴를 축하해 주었다. 당시 기사

그의 통산 기록은 594경기 출장, 560안타, 38홈런, 277타점, 263득점, 타율 0.285 이다.


2.1.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장타율
출루율
OPS
1982
OB
77
.342
(2위)
97
(3위)
20
(3위)
5
(공동 1위)
8
47
54
(3위)
9
46
(5위)
27
.532
(5위)
.428
(3위)
.960
1983
97
.275
97
19
1
10
54
49
7
55
(3위)
33
.419
.370
.789
1984
99
.287
100
14
4
10
40
54
14
61
(2위)
27
.436
.389
.824
1985
85
.290
83
12
6
(2위)
8
41
41
6
45
32
.458
.343
.841
1986
102
.267
92
14
4
2
37
32
5
46
36
.348
.352
.700
1987
93
.276
81
17
1
0
48
32
0
36
33
.340
.350
.690
1988
35
.205
9
1
0
0
8
2
0
5
4
.227
.280
.507
1989
6
.125
1
1
0
0
2
0
0
0
2
.250
.125
.375
KBO 통산
(8시즌)
594
.285
560
98
21
38
277
263
41
294
194
.415
.375
.790


3. 은퇴 이후[편집]


이후 OB의 코치를 하다가, 1991년 이재우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임하자 감독대행을 맡고, 이듬해 프로선수 출신 1호의 감독에 올랐다. 1992년에는 시즌을 5위로 마감했지만, 1993년에는 시즌 3위까지 올라 준플레이오프에 오르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94년 시즌 막판 윤동균 감독의 거친 지도 스타일에 반발하여 다수의 선수들이 이탈한 OB 베어스 항명파동이 터지면서 이를 책임지고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이 사건으로 OB 베어스의 잔여 경기 몰수패가 논의되었으며 결국 윤동균 감독이 자진 사퇴하고 선수단의 대대적인 징계로 막을 내렸다. 사태의 원인인 만큼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 사건 후 윤동균은 주동자들과 화해하며 지금도 원만하게 잘 지낸다고 한다.[12] 안경현의 증언에 의하면 의외로 항명파동 때 당시만은 폭행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일날 선수들이 "우리는 못 맞겠다"고 하자 그냥 보냈었다고. 대신 윤동균은 평소에 다혈질로 유명해서[13] 선수들이 혼란을 겪은 게 많아[14] 앙금이 많이 쌓여있던 건 맞다고 한다.

그 후 PBC와 SBS 야구 해설위원, 음식점 '고향골' 경영 등 개인 사업을 하면서 1997년 실버야구단 '노노 야구단' 창단 당시 최동원과 함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01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맡아 야구계에 복귀했지만 2002년 말에 이광환 감독이 경질되면서 코치직에서 사퇴했다.


3.1.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1
OB 베어스
47
26
20
1
8위
-
1992
126
56
66
4
5위
-
1993
126
66
55
5
3위
3위[15]
1994
120
50
69
1
7위[16]
-
통산
419
198
210
11


  • 1991년은 감독 대행 성적


4. 기타[편집]


  • 비록 성적에 대한 부담을 못 이겨 경력에 큰 흠집을 남겼지만, 김민호, 안경현, 임형석, 장원진 등 훗날 OB의 황금기를 이끄는 선수들을 발굴해 1995년 OB 베어스의 창단 두 번째 우승의 초석을 다졌다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두산 베어스 공식 홈페이지의 역대 감독 소개에서도 "베어스 간판 선수 출신으로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던 윤동균 제 5대 감독은 부임 후 무명 선수 발굴 등 부족한 환경 속에서 팀의 경쟁력을 키워내며 베어스의 팀 재건과 상위권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 당시로서는 은퇴할 나이인 33살에 프로 데뷔해서 40살까지 활약할 수 있었던 건 김성근과의 인연이 한몫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업은행에 들어갔는데 당시 김성근이 투수코치였다. 그가 보기에 제구는 떨어지지만 볼이 빨라 투수로 키워보려고 해서 김성근의 집으로 잡혀 들어가 하숙생활을 하면서 매일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오전 5시만 되면 뒷산에 올라가 훈련하고 출퇴근도 함께 해서 술 마실 틈이 없었을 정도. 비록 이후에는 투수가 아닌 타자로 전향해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지만, 그 덕분에 선수생활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 1988년 시즌 후 5년 계약이 만료된 김성근 감독이 OB를 떠나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임명되어 OB의 일부 코치와 선수, 프런트 직원까지 데리고 가면서 이른바 김성근 사단을 구축할 때 선수생활 말년에 접어든 윤동균은 김성근에게 "감독님, 저도 태평양으로 가고 싶습니다" 라고 요청했지만, 윤동균은 OB 고위층의 신뢰를 받고있던 성골급 선수인 것을 알고있던 김성근은 "잘난 OB맨들 끼리 팀을 재구성한다고 하니 넌 여기 남아 있어야 클 수 있다" 라며 충고하였다고 한다. 윤동균은 비록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명예롭지 못하게 물러나긴 했지만 은퇴 후 OB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지내면서 김성근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한국프로야구 은퇴 선수 협회 제3대 회장, 일구회 제14대 회장을 지냈다.

  • 현재는 KBO에서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호쾌하고 듬직한 인상을 지녀 OB 베어스 초창기의 얼굴 마담으로서 동양맥주와 태평양화학 '파낙스 D' 등지의 광고 모델로도 자주 기용됐다. 1989~1992년까지 대웅제약의 소화제 '베아제'의 전속모델로 나왔는데,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으로 호감을 얻어 주위 사람들에게 '베아제 아저씨'로 불렸고, 딸 역시 '베아제'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TV 광고에선 목소리는 대역 성우를 썼지만 촬영 시 NG 없는 능숙한 연기로 관계자들로부터 연기자 전직을 제안받기도 했다.(1991년 7월 11일 경향신문 기사) 그 외에 김정일[17] 감독 영화 <내일은 야구왕: 홈런이다 홈런(1982)>과 KBS2 어린이드라마 <우리 아빠 홈런(1990)>에도 출연한 바 있다.

  • KBO 리그의 원년 선수라 그런지 2004년작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이명수.

  • 은퇴하고서 영구결번을 받았지만, 항명사태가 터져서 윤동균 감독이 반쯤 흑역사로 전락하자, 영구결번이 해제되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10번은 누구도 달지 않았다.[18]

  • 아들 윤준호[19]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구선수였다. 1996년 한국프로야구 드래프트 당시 OB의 마지막으로 지명된 윤준호는 서울고 졸업 후 대학 대신 상무에 입대하여 기량이 성장했지만 사실 프로에서 활약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 지명은 의외라는 평을 들었다. 대체로 구단에서 우승도 했고, 한때 프랜차이즈였던 윤동균 감독에게 화해의 의미로 지명했다는 게 중론이다.기사 당시 프로야구 최초의 부자(父子) 야구선수로 화제를 모았으나, 결국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아무런 활약 없이 조기 은퇴를 하고 말았다. 이후 베트남으로 건너가서 침향 관련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5. 관련 문서[편집]


[1]강원도 삼척시. 야구를 대전에서 시작했으나 실제 출생지는 강원도 삼척 원덕면이라고 한다. 류중일이나 이만수처럼 야구를 시작한 곳이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것과 유사 사례.[2] 1970~1973년까지는 군 복무.[3] ~7월 29일[4] 8월 1일~[5] ~9월 13일[6] 이때 윤동균에게 투구를 맞은 동료 선수는 한동안 기억상실증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윤동균은 당시 동료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면 야구를 포기하고, 인생도 망쳤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이와 비슷하게 선수생활이 망한 선수로는 이케빈이 있는데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잠깐 겨울에 미국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던 도중 다른 쪽에서 타자 훈련을 하던 선수의 타구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여러차례의 외과수술(광대뼈와 코뼈 골절) 및 안과수술을 했지만 최종적으로 영원히 시력이 정상범위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판정을 받고, 그때부터 제구력이 현저히 망가졌다고 한다. 결국 수년간 2군만 떠돌고 1군은 어쩌다 한번씩만 나오다가 최종적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중국적자라 군문제가 있었지만, 한국에 온지 2년만에 눈에 생긴 시각장애로 군대면제가 되어 군복무 없이 한국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7]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이 해의 나이가 무려 33세로 노장 중에서도 최고 노장 선수 군에 속했다. 참고로 이 당시는 빠르면 20대 후반, 늦어도 30대 초반만 돼도 대부분 은퇴를 하던 시기였고(실제로 김유동, 천보성은 은퇴했다가 프로 출범과 함께 선수로 복귀했다.), 윤동균의 2년 후배인 유남호는 일찌감치 현역에서 은퇴하여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로 부임했다.[8] 특히 윤동균은 1982년 원년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전 구단 선수 대표로 나와 선서문을 낭독하는 역사적 장면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9] 그 해 한국시리즈에선 1번 타자로 나와 맹타를 휘둘렀다. 4번은 신예 1루수 신경식이 윤동균 대신 맡아 제법 활약을 보였다. 사실 윤동균은 거포 이미지와 달리 발이 빠르고 눈썰미가 좋아 국가대표 팀에서는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고, 36세이던 1984시즌에 무려 14도루를 기록한 바 있다.[10] 윤동균은 이미 백인천이 은퇴한 1984년 이후로 프로야구 최고령 선수였다.[11] 은퇴 경기, 그것도 마지막 타석에서 좋은 타구를 날린 타자는 의외로 많지 않다. 양준혁은 마지막 경기에서 김광현에게 삼진 3개를 당했고, 김성한은 9회 2아웃 후에 대타로 나와 3루 정면 땅볼로 물러나면서 권명철에게 완투승을 헌납했다.[12] 항명 파동의 핵심이었던 박철순은 이후 세차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동균과 소주 한잔 하면서 서로 눈물을 흘리며 화해했다고 한다.[13] 후배 김광수는 그에 대해 평소에는 섬세한데 경기할 때는 유독 다혈질인 분이라고 평했다.[14] 어느 경기 때 부진한 선수를 욱해서 욕하며 2군에 가라고 해 놓은 뒤, 그 선수가 다음날 2군 훈련장에 갔는데 갑자기 코치가 전화해서 "감독님이 너 2군 명단에 안 보냈대. 돌아와라." 이러는 경우.[15] 준플레이프에서 4위 LG에게 패했지만, LG가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하여 최종 3위.[16] 사퇴 당시[17] 북한 독재자와 동명이인이다.[18] 참고로 감독시절에는 70번을 달았다. 기사 [19] 2000년생 야구선수 윤준호와는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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