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좌완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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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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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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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wins_champion_v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4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4, 1995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5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7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이상훈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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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등번호 47번
김진명
(1991~1992)

이상훈
(1993~1997)


결번
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17번
히라타 히로시
(1998~1998.4.24)

이상훈
(1998.4.24.~1999)


타케다 카즈히로
(2000~2001)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40번
마이클 콜맨
(1999)

이상훈
(2000)


알레한드로 마차도
(2005)
LG 트윈스 등번호 47번
결번

이상훈
(2002~2003)


오승준
(2004)
SK 와이번스 등번호 47번
조중근
(2002~2003)

이상훈
(2004)


최정
(2005~2006)
두산 베어스 등번호 85번
황병일
(2014)

이상훈
(2015)


이병국
(2016)
LG 트윈스 등번호 47번
조윤준
(2012~2015)

이상훈
(2016~2018)


김윤식
(2023~)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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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2636_25519_5344.jpg

파일:MBC SPORTS+ 로고.svg 해설위원
이상훈
李尙勳 | Lee Sang-hoon

출생
1971년 3월 11일 (53세)[1]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신길초 - 강남중 - 서울고 - 고려대[2]
신체
181cm, 82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3년 1차 지명 (LG)
소속팀
LG 트윈스 (1993~1997)
주니치 드래곤즈 (1998~1999)
보스턴 레드삭스 (2000)
LG 트윈스 (2002~2003)
SK 와이번스 (2004)
지도자
고양 원더스 투수코치 (2013~2014)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5)
LG 트윈스 피칭 아카데미 원장 (2016~2018)
해설위원
MBC /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9~)
소속 그룹
What![3]
병역
전시근로역[4]

1. 개요
2.1. 수상 내역
3. 피칭 스타일
4. 은퇴 이후
4.2. 해설자 경력
5. 논란
5.1. LG 트윈스 프런트와의 마찰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3경기 연속 등판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던질 수 있겠냐는 양상문 투수코치의 물음에 답


LG 트윈스, 주니치 드래곤즈, 보스턴 레드삭스, SK 와이번스 소속 좌완 투수이자 가수. 前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現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별명은 '야생마'. 특유의 장발이 말갈기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러한 외적 특징때문인지 일본 주니치에서의 선수생활에서 유니폼에 적힌 이름은 SAMSON LEE이다.

대한민국 투수 중에서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 오승환과 함께 한, 미, 일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자,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했던 최초의 선수이다.[5]

등번호는 47번(LG&SK) - 17번(주니치) - 40번(보스턴). 선수로 활동했던 12년 중 대한민국에서 뛰었던 기간은 7년[6] 밖에 되지 않지만,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좌완 파이어볼러로 강렬한 임팩트로 인해 LG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이다. 그의 임팩트는 아직까지도 LG에게 크게 다가오기에, 그가 잠시 LG 코치를 맡았다 떠난 후 그의 번호 47번은 예우 차원에서 2022년까지 결번상태로 남겨져 있었고 2023년부터 그의 좌완 후계자격인 김윤식이 허락을 받고 47번을 사용하게 되었다.

현역 은퇴 후에는 록밴드 What!의 보컬 및 세컨기타를 맡았으며, 지도자와 해설위원 경력을 거치며 야구계와의 접점을 이어가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수상 내역[편집]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1994)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5)
다승왕 2회 (1994[7], 1995)
승률 1위 (1995)
구원왕 (1997)


3. 피칭 스타일[편집]



150km/h 포심 패스트볼

128km/h 슬라이더

133km/h 스플리터

121km/h 커브

평균 구속 145km/h, 최고 구속 150km/h의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로, 포심슬라이더, 커브, 스플리터를 던졌으며, 포심과 변화구의 비율이 6:4~7:3 정도였다.

데뷔 초 선발 시절에는 포심과 빠른 슬라이더의 투피치였다가, 20승을 했던 1995 시즌에는 포심, 슬라이더, 스플리터의 3피치였고 간간히 커브를 던졌다. 일본시절까지 이 플레이 스타일이 유지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며 슬라이더의 비율을 조금 줄이고 포심 - 스플리터의 투피치로 던지다가 한국 복귀 이후에는 1995년 때의 플레이 스타일로 돌아가 포심 - 슬라이더 - 스플리터의 3피치로 은퇴전까지 유지하였다. 마지막 시즌인 2004 시즌에는 구종 다양화를 위해 슬로 커브나 싱커 등을 연마하기도 하였다.


4.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에는 잠시 야구와 거리를 두었다. 포스트 그런지 록밴드 'What!'[8]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으며 가수 활동을 했고[9], 강남구 청담동에서 'Closer 47'이라는 뷰티샵을 운영하기도 했다.[10] 음악을 좋아해서 선수 시절에도 늘 기타를 가지고 다녔는데[11], 이순철 감독과의 갈등의 출발점은 여기서 온 듯 하다. 당시 이순철 감독은 이상훈이 라커룸에서 기타를 쳐 팀 분위기를 해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상훈은 2010년 4월 5일 LG 프런트의 만행을 폭로한 글에서 자신은 덕아웃, 라커룸에서 기타를 친 적이 없는데 누명을 쓰고 트레이드된 것이라 진술하였다.

그러나 사회인 야구에서 그를 봤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공 던지고 덕아웃에서 내려와서 계속 기타만 치고 있었다고. 고된 생활을 했던 자신에게 기타만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할 정도로 기타라는 악기는 이상훈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김태형 감독과도 친한 이유가 바로 기타 때문이라고.. 사실 이순철이 이걸 뭐라 했던 이유는 기타 소리가 시끄러워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가 가고 기타를 치다가 손가락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 일이니, 기타를 치지 말라고 했던 것이었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이종범에 증언에 따르면 이상훈이 숙소에서 기타를 허구헌 날 쳐서 일본 선수들이 싫어했었고, 주로 높은 음의 락음악 노래를 불러서 프런트측에서 항상 숙소 옆방을 같은 한국 선수인 선동열과 이종범으로 배치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LG 프런트 측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2009년 7월에 친정 팀으로부터 코치 제의가 들어왔다가 퇴짜를 맞았고, 2010년에는 초상권 침해로 인해 친정 팀과 또 마찰이 있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What! 3집을 발매했으나 이 시기부터 이상훈이 다시 야구계에 손을 대던 때라 이후 밴드는 사실상 잠정 해체되었다. 가수로써의 평가도 상당히 좋아서 왓!은 브로큰 발렌타인과 함께 한국 내 포스트 그런지 밴드의 시초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앨범의 평가와는 별개로 마스터링이 개판으로 된 건지 본인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곡에서 이상훈의 보컬이 악기 사운드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많다.

은퇴 후 마구마구, 슬러거 측의 은퇴 선수 이름 무단 사용에 문제를 제기하여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마구마구와 슬러거 측의 안일한 태도로, 사태는 언제쯤 해결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커졌다. 이는 다른 선수들의 경우 KBO 또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 권한을 위임한 덕에 양측과의 협의를 통해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상훈은 개인 자격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정확히는 최초에 게임사에서 선수협[12]에만 계약이 되어있었고 은퇴 선수들은 무단 사용을 해왔다. 이에 이상훈이 이를 처음 문제시하면서 몇몇 은퇴 선수들과 소송을 걸게 된 것. 이게 이슈화 된 후 많은 은퇴 선수들은 새로 만들어진 은퇴선수협의회를 비롯 일구회, 혹은 선수협에 초상권을 위임하고 게임사는 협회들과 단체협약을 맺었는데 이상훈만 협회에 가입을 안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프로야구게임 초상권 침해 사태참고.

그러던 중 프로야구 매니저에 난데없이 서울고 출신 좌완투수 신철수 선수가 업데이트되었다. 누가 봐도 이건…[13] 트집잡힐 게 두려웠는지 등번호는 물론 기록마저 죄다 0으로 표기해 놨다. 심지어 2014년 1월 23일 업데이트에서는 그 신철수의 레전드 카드도 나왔다! 베이스 카드는 좌완 최후 20승을 올린 1995년도 카드. 물론 통산 스탯, 수상기록 등은 모두 삭제되어 비어 있지만... 유독 마지막 '기타' 문단에는 마운드의 영원한 불꽃, 트윈스의 심장이라고 이 카드를 소개해, 팬들을 아련하게 하고 있다. 영입을 위한 카드 1성구는, 1995년의 호적수였던 김상진. 그리고 2014년 2월 13일 업데이트로 드디어 퍼블리시티권 계약이 됨에 따라 폭풍 간지나는 이상훈 선수의 선수 사진과 실명이 적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마구마구에서도 2월 19일자로 다시 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성명권 문제로 나오지 않았던 02 Asia 대표팀 카드도 출시됐다.

2022년 말 들어서는 기존 록밴드 왓!과 해설자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다만 밴드의 경우 새 보컬을 들이고 본인은 기타만 잡는 듯.

4.1.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상훈(좌완투수)/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해설자 경력[편집]


2019년 2월 1일 고려대학교와 LG 시절 후배였던 심재학과 함께 MBC SPORTS+의 해설위원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됐다.

그리고 2019년 4월 2일 ~ 4월 3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본격 해설자로 현장 데뷔를 시작하였다. '마운드 위 야생마' 이제는 공 대신 마이크를 쥔 이상훈 해설 위원

그리고 2019년 4월 16일 ~ 4월 17일 창원 NC 파크에서 벌어진 LG 트윈스NC 다이노스의 경기에서 친정팀 중계로 사실상 첫 중계를 시작하였다.

또한 개그도 가끔씩 하는 편이다. '특별 도우미 등장' 김희주 아나운서가 전하는 어제 경기 리포팅

베이스볼 투나잇에서는 고양 원더스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은 이원재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2019년 10월 17일 베이스볼 투나잇에서 해설위원 아니랄까봐 장정석 감독을 장영석 감독으로 부르는 실수를 했다.[14]

해설로서 평가는 좋은 편이다. 최근 몇몇 선수 출신 해설들이 발성과 언변부터 안 좋아서 일단 듣기가 불편하거나 발성이나 언변은 괜찮은데 경기 해설과 분석보다는 현역 시절 일화나 얘기하면서 농담 따먹기 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상훈은 일단 발성이 좋아서 듣기 편하고, 언변도 좋아서 멘트가 비지 않을 뿐더러 선수 시절과 코치 경험을 살린 상황 분석도 듣기 좋게 잘 해주는 편인데다가 무엇보다 야구와 야구선수들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나와서 좋다는 야구팬들이 많다. 단점이 하나 꼽힌다면 목소리가 상당한 저음인 탓에 잘못 들으면 매우 졸린 목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점 정도다. 정작 밴드 시절 노래나 밑에 나올 이종범과의 썰에서 나오듯 이상훈은 고음도 시원하게 내지르는 사람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15]

2020년 6월 23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하였다. 영상 이후 7월 7일에 다시 출연하였다. 영상

2020년 들어서면서 다시 서서히 뒷머리를 기르는 것 같다. 해설위원 시작 때보다는 확실히 뒷머리가 길어졌다.

2022년 LG와 KIA의 개막전에서 해설을 맡으며 지상파 해설 데뷔를 하게 되었다.


5. 논란[편집]



5.1. LG 트윈스 프런트와의 마찰[편집]


한 줄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김재현과 함께 LG 구단의 스타였음에도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피해를 입었던 대표적 사례. 이 둘은 누구보다도 트윈스를 사랑했고, 트윈스 팬들에게 사랑받던 선수들이다.[16]

2004년 LG 감독으로 이순철이 임명되면서, 당시 LG의 주축 고참이었던 유지현-서용빈이 순서대로 은퇴 수순을 밟고, 김재현은 부상 재발 시 책임 소재에 대한 각서를 구단에서 강요받아 이에 반발하여 SK로 이적한다. 고참들을 정리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팬들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매우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가장 결정판은 이상훈의 트레이드였다. 계획적이면서 단기간에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이순철 감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당시 젊은 신임 감독이었던 이순철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구단 프런트의 의중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처럼 팬들의 사랑을 받던 스타 고참 선수를 홀대하며 벌인 LG 구단의 선택은 이후 10년이 넘게 지속된 부진의 출발점이 되었다.

감독이 된 이순철은 자기가 원하는 영입 선수들의 이름을[17] 은연 중에 언론에 흘리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기존 멤버들이 부족하여 교체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상훈을 쫓아낼 명분을 만들었다. 언론에 진필중을 데려오고 싶다고 선언한 이상, 이상훈을 이미 팀 전력외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 기존 멤버들을 제대로 기용해주지 않고 2군에서 검증되지 않은 선수들을 계속 불러올려 실험하고, 이미 한물간 중고 FA들을 무리하게 떼돈을 주고 영입해 무작정 띄워주는 식으로 기존 멤버들을 도태시키는 식의 운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이라도 가능했던 김재현, 이상훈은 구단에서 내보내는 상황이 되어도 전혀 중재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입지가 좁아진 유지현은 철저하리만치 무능한 노장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방치했다. 특히 이순철이 이상훈과 기타 관련하여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제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외면하였다는 것이 후일 이상훈의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선수가 감독에 항명한다는 이상한 이미지로 왜곡되며 방출성 트레이드로 결말이 나고 말았는데, 계속 대화를 시도하던 애꿎은 이상훈은 해명, 화해의 기회 한번 없이 고향팀과 인연이 끊기고 말았다. 이상훈은 박동희와의 후일 인터뷰에서 당시 단순히 이순철과의 불화도 있었지만 이순철은 그 사태의 주연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 만큼(상술했겠지만 나중에 이순철과 만나 서로 오해를 풀었다), 당시 구단의 방향성이 이미 이상훈, 그리고 다른 베테랑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2009년 7월에 LG 트윈스 프런트가 그에게 복귀를 종용하다가 뒤통수를 날린 행각을 폭로하는 내용의 글을 2010년 4월 5일 LG 팬 게시판인 쌍둥이 마당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나중에 밝히길 선수들은 구단을 상대로 항상 을의 입장인데, 운동을 그만둔 후에도 을이 돼야 하고, 있었던 일도 관점의 차이라며 없는 일로 만드는 처사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음은 그가 쌍둥이 마당에 올렸던 글의 전문이다.

보기
정치 트윈스

안녕하세요 이상훈입니다.

몸이 부서져라 팀 전체가 희생했었던 2002년 시즌을 기억하시는 지요?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전이었던 2002년 뼈와 살을 파고드는 날씨의 한국시리즈… 그곳까지 가기위해 자신들을 버렸던 감독, 코칭 스텝, 선수, 그리고 엘지야구 팬들…

아마도 그 기억을… 지우기란 어려우실 것입니다. 또한 그시절을 그리워하며 엘지를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가 아닌...마치 훌륭한 영화의 클라이막스 같은 장면을 여러 번이나 연출을 한 듯한 신들리고 그 추운 날씨에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경기장면들…

그 이후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전 기타를 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운동도 안하고, 팀 분위기 더럽게 만들었던 선수로 내몰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억지 트레이드를 당해야만 했던 2004년… 참으로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난 덕아웃..락커룸에서 기타친 적 없다 어느 미친놈이 거기서 기타를 치냐..? )

내 입으로도 조차 입에 오르내리기도 창피했던…
나 자신은 결국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어둠 속에 갇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가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런 모습은 프로야구 선수로써의 자세가 못 된다 하며.....
스스로의 자악에 야구를 그만 두었던…
그 후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이자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타와 음악을 하며 여러 가지 일거리로 생계유지를 하며 7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하던 중 은퇴했던 선. 후배선수 들의 모습 중에 가장 많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적인 사업이나 일을 하다가 야구가 그립거나 야구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부딪혀 구단을 기웃거려야만 하는 전직 야구인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너무나도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야구인이 되기 싫어서 은퇴 후 결정한 것에 대해서 후회 없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고 누구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뭐든지간에 선택한 결정은 뒤도 안 돌아보며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음악에 있어서는 밴드의 스타일과 색깔대로 4장의 앨범이 나오게 되었고, 계속적인 우리들의 무대에서 활동 중에 있으며… (사업이라 해야 하나요?) 생계유지에 있어서도 많은 벌이는 아니지만 가족들과 하루 세끼 챙겨먹으며 아주 큰 탈 없이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전… 그간에 엘지의 성적을 떠나 맘속으로 진정한 응원을 해왔었고,....
또는 크고 작게나마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지 복귀나 야구계의 복귀를 외치던 여러 곳곳의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며 알고 지내왔었고,.. 나의선택 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여러가지들의 현실에 마음아파 했었습니다.

엘지 트윈스 팬들의 목말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엘지의 몰락에대한 여파의 여운이라 생각했으며 마치 옛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엘지도 더더욱 훌륭하고, 아리따운 애인을 만나서 옛 애인에 대한 생각은 지나간 추억으로 만들어지는 날이 오겠지…

또한 새로운 설레임속에 데이트를 즐기며 안정된 살림을 차리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마디로 슬프지만 7년전부터 엘지는 무슨 이유인지? 박혀있는 각각의 조강지처들을 보내 버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중 하나였던 나는 버려진 영혼이라 분명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이후에도 많던 적던 나의 새끼들이라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찾아오거나 때로는 찾아가서 라면에 소주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다독일 때도 있었고, 때론 그들로부터 위로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흔쾌하게도 어느 누구든 만나며 지내왔고, 바쁜 시즌에는 그저 브라운관을 통해서 나오는 야구공과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고 던지는 모습을 보며 부상 없이 1년을 잘 치르는 선수가 진짜 프로야구 선수다라는 것을 맘속으로 후배들에게 전달해가며 살았습니다. 하다못해 얼굴한번 제대로 보지못했던 선수들에게도 그 놈의 마음을 읽어가며 품에 안고싶은 마음에 위로의 말을 직.간접적으로 나의 시간과 정신을 들여가며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

잘 커나가는지 숨죽여가며 그냥 뒤에서 항상 앞장서지 못함을 뼈저리게 아파하며 고통스럽게 6~7년을 남모르게 눈물 흘려가며 살아왔습니다.

엘지에 신인으로 들어와 나의 분신이 되 주었던 47번…
문신으로까지 먹물 들여가며 나의 오른쪽 팔에 고통을 주었던 나의등번호......
지금은 의미가 없어져버려서 몇 년 간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지워도 봤지만‐ 잘 지워지지 않네요......

미국 다이아몬드 안에서 야구에 미친놈들과 눈을 부라리고 맞짱 한번 떠보겠다는 심정 하나로 미국 진출을 외치다 구단끼리 오가는 머니가 모자라다며 쌩 까버리고 일본 주니치에 엘지는 렌트 머니 두둑하게 받아가며 그 당시 일본으로 가지 않으면 나쁜 놈으로 낚인 찍혀야만 했던 98년 초…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어 98년 많은 것을 느끼며 병신처럼 보내다가 어찌라도 해보려고 귀국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뛰고, 들고, 던지는 몸부림 속에 얻은 혈행장애를 숨겨가며 버틸 수밖에 없었던 98년 가을서부터 99년 스프링캠프…그리고 개막전까지의 내 모습…

보직에 상관없이 마운드에만 오르는 것을 좋아했었지만 시즌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혈행장애 고통의 숨김을 팀에 전달하고 중간으로 보직을 변경해가며 운이라도 좋았는지 최고의 중간 계투진과 건재한 마무리가 버티고 있는 팀이 되어버린 주니치…그리고 11년 만의 샌트럴리그 우승… 허리 척추 분리증… 툭하면 빠지는 어깨탈골… 거기에 혈행 장애…
특히나 갑작스레 닥쳐온 혈행 장애를 이겨 내느라 혈관주사를 맞아가며…
또 그 해에는 왜 이리도 남모르게 어깨가 자꾸 빠지는지 던지는 팔까지 혈행 장애가 섞여서인지 왜 이리도 아프고 쑤셔대는지 혈관주사에 근육이완제까지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주사를 맞아가며 던지던 99년..... 결국 그것도 되지 않아 양쪽 어깨에 살색 테이핑을 두르고 감고 던졌던 것을 생각하면 2002년 못지않은 개인적인 감동의 시즌을 보낸 것 같습니다.

물론 원래의 생각이었던 야구에 미쳐있다는 미국놈 들과 맞짱 한번 뜨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일본을 떴지만 그 당시 항간의 언론에 나왔던 쥬니치 구단의 몸값 제시액?
여러분 그것은 그 당시 주니치 대표를 제외한 사람 중 저만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인 듯 홀랑 벗고 핏덩이로 태어나서 죽어선 가루가 되어버리는 인간의 법칙이 있듯이 돈이란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결과 또는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확고한 생각이 아직도 나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듯 그 당시에도 나와의 약속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화려함은 일본에서의 생활이 더했겠지만 야구 인생의 의미로 따지면 마이너리그의 생활이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메이저에 성공 못한 놈이라고 할지언정… 지껄이쇼!!! 나에겐 그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야구이기 전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야구를 깨달았고, 야구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더불어서 2002년 같은 미친 듯한 시즌도 있을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나에게 돈과 명예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하는 것을 묻는다면.....난 엄마,아빠 중 누가 좋느냐를 물어볼 것이고 난 그저 내 운명을 받아 들이고 택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즉!!! 본인 앞에 와있고 그것에 대한 사리사욕이 없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택하겠노라고 말입니다.

항간의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자유분방?....... 여태껏 말입니다. 그 사람들 과연 날 얼만큼 아는지요? ,......맞습니다. 그리 표현하는 것도 그 사람 자유니 억지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와,자율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억제할 줄 알고, 사리 판단을 할 줄 알며,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순간 생각합니다. 내가 배운 것이 그렇고 느낀 것이 그러하니….....

서두가 길군요....... 난 항상 그렇다....... 서두가 길다!!

그런데…서두가 너무나도 긴 사연이 있다. (아...손가락 힘듭니다..존칭 빼고 가겠습니다)

03년 이후 벌레같이 트레이드가 되어 바보같이 몇 개월 더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제껏 야구에 대한 나의 후회는 엘지에서 병신같이 트레이드 될 때 그만두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라고 주야장천 물어보는 이들에게 대답했었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나와 팀…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이 망가지던 말던 반팔에 그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던졌던 시절… 그런데 아주 정신적인 병신을 만들어서 나를 내쫓은 팀이 뭐가 좋다고 먼발치에서 나마 팬들과 더불어 엘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때론 대놓고…

언론에 얘기합니다. 난 엘지 팬이라고 또 엘지의 녹을 먹고 살았다고… 물론 엘지도 나로 인한 녹을 먹었겠지만 말입니다…

6년이 지난 작년 09년 7월 말쯤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엘지 단장이 나와 자리 한번 하고싶다고…!!

난 만나지못할 이유가 없었고 편한 시간 잡아 연락 달라했고 단장과의 약속은 하루 이틀 만에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나 또한 단장이 만나자는 말에 쉽사리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인 5~6월부터 인가 내 주변과 주변이 아닌 온갖 야구 관계자들 누구라고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의외의 곳에서까지 엘지 복귀에 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든 재촉 또는 확정에 대한 인사이드에서 돌아가는 말들이 터무니 없는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나의 귀에 들려왔었습니다.

이 또한 모든 것을 선택할 때처럼 나의 운명이라 받아 들였으며 단장과의 만남은 물음표를 달수는 있었지만 거부감까지는 없었습니다. 끝을 보면 오히려 내가 마음을 열고 만났다고 자신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단장 혼자 나올 줄 알았던 자리는 3:1로의 자리가 되어버렸고 점심식사를 2시간씩 먹어가며 애기를 들었습니다. 내 생에 2시간 점심을 먹은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만나서 1시간 정도 완전히 형식적인 얘기들.. 구단 실무자들이 내가 엘지에 있었을 때와는 많이 바뀌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허공 잡는 얘기만 하던 그들에게 만나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먼저 물어보았고. 단장은 무엇인가 결정을 짓는듯한 표정, 말투와 행동으로 분명 날 보며 얘기했습니다. “엘지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엘지에서 언제짤릴지 모르겠지만 성적을 떠나서 이상훈이라는 사람을 끌어들여 다시 엘지다운 팀을 만들고 싶다. 도와달라”!!! “지도자에 대한 생각은 없느냐”? 등등..

여러분 야구는 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난 이사람들이 뭔가에 목이 말라있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들은 말 중 가장 뚜렷하게 생각나는 말들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 듯 내가 병신이 되어서 트레이드가 됐을 때 야구를 그만둘 때, 그만두고 나서 6~7년간… 내 자신을 만회하고자 엘지에 침을 뱉은 적도 없고 오히려 난 엘지 팬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던 만큼 엘지가 잘되길 바라며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 끝에 약 2~3시간의 만남이 끝나고 당장 며칠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듣고 헤어졌다 그때부터난 야구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어느 곳에서도 즐비하듯 특히 프로야구라는 곳에도 여러분들이 모르는 구단과의 만남 속에 계약서에 사인 아닌 계약서 사인 이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곳 야구 경기 중에 보이지 않는 예의를 지키며 야구 경기를 하듯 말입니다.

이것은 프로야구계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도 있을것 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예의가 깨지는 순간 그라운드에서 전쟁이 일어나듯 뒤에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습니다. 전… 그 자리의 마지막 말로 기억되는 단장의 말… 우리 수일 내로 다시 만나자는 말이었고 난 그말들을 되짚어 보며 다시 내게 야구라는 운명이 찾아오는구나…아니...찾아 왔고 그리고 해야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굳게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였고 엘지에 어떤 그 무엇으로 들어가든 지난 6년간의 생활을 작은 것 에서부터 큰 것까지 정리하기에 들어갔습니다.

더군다나 그간 했었던 일은 하루 아침에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정말 우연하게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8월부터 6개월의 시간이라면 2010년 2월… 즉 해외로 캠프를 가는 일을 하던지 국내에서 캠프를 하는 일을 하든지 2010년 시즌 전에 정리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일단 밴드 멤버들의 상의와 양해를 구하고 밴드 ‘왓’의 3집 앨범 작업을 일단 중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샾, 공연장, 일간스포츠 네버엔딩 인터뷰. 앞으로의 일거리 계약 철회 등등… 걸리고 보이는 데로 정지나 스톱모드로 들어갔습니다.

야구 이외의 것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말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듣기 싫어서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극도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수입마저 감수해가며 야구를 그만 두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돈은 두번째 라는 생각과 함께 난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시켰습니다. 더군다나 또다시 엘지의 최악의 시즌으로 인한 여러 가지 말들이 언론에 나오는 상황 속에서 나에게는 엘지와의 만남은 언론에 감춰야 하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자연스럽게 형성 되어버렸고, 만남조차 엘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후배들에게 보이지 않는 예의라 생각하였기에 그 예의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 극도로 사람들과의 얘기나 만남을 피해가며 나 스스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또한 말을 아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내가 또다시 병신이 되어가는지… 아니면 속은 건지… 세상이 날 안도와 주는 건지…
야구 판의 정치에 놀아난 건지? 그 후 어느 누구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진짜 어느 누구에게도…
만남을 가진지 거의 한달 째인가 기억이 안 나지만 왠지 그들의 정치에 놀아났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슨 정치인지는 그들이 알겁니다.. 그렇다라는 판단아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진짜 패닉 상태로 집에서 나오면 오갈 데가 없어서 그저 연습실에서 저녁 늦게까지 산 송장처럼 앉아만 있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기를 수십일 지냈습니다.

그들의 말에 야구 모드로 돌아가기 위해 개인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바꾸었던 나로써는 다시 돌려놓기에는 또 다른 시간과 정신적, 금전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랄까? 붙어있는 똥 딱지는 커녕 떨어진 똥 딱지라도 핥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 단장과 그사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날 만난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물어봤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식 기대 이하의 발언을 하는 그들을 쫒아 가서 주먹이라고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이 양반들 나이를 숫자로만 쳐먹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무리 짖고 싶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동물이 있듯이 참 대단한 양반들이구나… 야구 생각들은 안하고 정치를 어설프게 배워서 순간 위기를 벗어나려 하는 행위에 치가 떨립니다.

말과 행동을 바꾸기에 너무나도 바쁜 이 양반들아… 당신네들의 짓은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하늘은 알고 있네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당신네들은 비가 오는 날에도 먼지가 나올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소!!! 단지 나에겐 치사한 증거만 없을 뿐… 이 글 이후로 나 또한 어떤 식으로 몰릴지 모르겠고 그대들이 어떠한 처신을 할지 모르겠지만 가슴과 마음에 손을 얹으시지요…

악상이 떠오르면 녹음 했었던 녹음기라도 올려놓고 얘기했을껄… 그 자리에 나 혼자였다는 것이 너무 후회스럽소… 그래서 3:1로 자리를 만든 건지 자신들이 없으셔서 아니면 피해갈 수 있는 쥐구멍이라도 만들어 놓으려고 3:1로 자리를 만든 건지… 어느 한 언론 또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 시작되는 기사를 내보냈다가 왠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후속 기사조차 내보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는 완전 폐인이 되어있었던 상태라 모든 것이 귀찮아서 반응조차 하질 않았었습니다.

결국 6년간의 모든 것을 바꾸고 버리고 남은 거라고는 패닉 상태로 쳇바퀴 돌듯한 생활에서 빠져 나오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막한 연습실에 틀어박혀 산 송장마냥 생활하길 2~3달 아무도 안 만나면서 정말 술 한잔 안 마셔가며 패닉 상태로… 지난 11월이면 나와야 할 3집 앨범이 올 초에 나온 이유도 엘지를 만난 이후로 모든 것을 중단하고 그만 두었던 것 중 한가지입니다.

그냥 마냥 날 이해해주고 믿어 주었던 밴드 멤버들에게도 너무 미안하다. 아~~ 여기서 부연설명 하나 드리자면 우리들은요 저 이상훈의 멤버가 아닌 정말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콩 한쪽도 나눠 쓰고, 나눠 갖는 팀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미니 앨범 때부터 지금 나와있는 정규 3집까지의 활동이 그렇고 정말 우직한 멤버들이죠 오히려 제가 멤버들에게 도움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딜 가든 존경하는 뮤지션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여타 유명하고 전설적인 외국 뮤지션을 말하기 보다 우리 멤버들이라고 바로 말합니다. 야구 선후배들처럼 말입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흘러 미안하군요… 늦었지만 개인적으로 패닉 상태가 풀리고 중단했었던 3집 작업과 녹음을 마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단지 수입이 없어서 악기를 팔고 모든 것을 돈으로 만들어 생활해야 하는 순간적인 처지에 놓인 억울하고 비통하지만 당분간 그리 해야 하고 뭐든 돈으로 만들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나에게는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그것 또한 그리 해야하고… 니미~ 상훈아 샾 어떻게 됐냐? 공연장은? 앨범은? 준비 했었던 것은? 너 나랑 같이 하려고 했던건? 아무것도 모르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뭐라 대답할 길이 없으며 내 스스로가 병신 같아지는 이런 기분… 이런 식으로 내가 싫어져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일들의 사실이 한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들이 무슨 핑계를 대고 다녔는지?
나에게 돌아오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상훈이 네가 거절했다며??...
이런 말들을 듣는 순간 난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어이가 없어 구단 사무실이라도 들어가서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 있었던 지난 과거까지 몰아 닥치는 이순간 난 어떻게 버티며 살아야 하는 건지 막막합니다.

또 참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순간 러브페스티벌 진행 담당자라는 구단 직원의 연락이왔고. 이런 상황에서 러브페스티벌에 대해서 논의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거라 생각했으며 분명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회의를 거쳐 섭외해 보라는 단장의 말이 있었다는 것 또한 황당하다.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무뇌한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건지? 그 직원에게까지 마음 억눌러가며 그때의 상황을 애기하고 대충 정리하고..... 섭외하려면 단장한테 직접 전화하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 대한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라는 식으로 핑계를 대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정말 밉다. 러브페스티벌 섭외까지 날 딱 3번 죽인 거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작년 러브페스티벌은 뭐고 나한테 연락을 했었는데 내가 거절했다고? 시구 섭외했는데 뭐가 어째? 이런 빌어먹을… 난 어떠한 연락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오히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을 직접도 아닌 간접적으로 전달하며 지들이 먼저 만나자 해서 만나고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도와 달라해서 그러려고 마음 먹었건만… 필요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오해로 묻어 버리려는 이런 개 뼉다구 같은 발상은 어디서 배워 처먹은 것인지? 내 스스로 엘지맨이고, 엘지 팬이기를 자청했건만 엘지의 몰락을 꿀 발라 감쌀 일이 있으면 토종 벌꿀로 감싸기 위해 노력한 건 아시는지?

아니 어쩌면 모르는게 낫고 없던 일로 하고 싶소이다. 이리 된 마당 나도 더 이상 그들의 그늘 속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떨쳐버릴 수 있는데 까지 떨쳐 버리겠습니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 닥쳐오는 것들을 더더욱 미친 듯이 열심히 할 것이며,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내가 이순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입니다.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결과가 어찌되든지 간에 말입니다. 대신 예전 같은 마음을 아니겠지만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선.후배들이 그곳에 있기에 먼 발치에서 나마 지켜보렵니다. 정치적인 행동을 했었던 ...지금도 하고있는그들은 제외하겠습니다.

하지만 선.후배와 팬들을 응원합니다. 올해에는 제발 지난 옛 애인을 그리워 하지 않는 팬들의 마음을 풍족 시켜 줄 수 있는 줄무늬 유니폼의 선.후배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더 이상 내 품에 가둬놓고 참고 살아가기엔 이젠 너무나도 억울하고 가슴이 찢어집니다

엘지의 미래를 위해 진정한 마음으로 말씀 드립니다
장인정신 하나 없이 야구단을 이끌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고 있는지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찾아보십시오.
순간을 모면하기위한 쓰레기 같은 발상들은 이젠 그만입니다. 미국과 일본에 교류를 맺어서 배워 가지고 오는 것들이 과연 무엇들인지요?

이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내가 깡통을 차든, 가족들과 길거리로 나앉든, 정치 놀음에 어떠한 파장이 나한테 돌아오든, 야구계와의 마지막 끄나풀까지 끊기던 어떠한 것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핑계적인 정치를 해도 하늘은 당신들을보고 알고 있으니까요…
내 맘속에 신이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엘지의 모든 것이 잘되길 바랍니다.
이세상 사람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을각오로 덤비는 사람입니다.

...짧게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09년 7월말 그들이 만나자해서 만났고 ...도와달라해서 야구를 그만두었을 때처럼 깊이 생각하고 결정했고 따라서 지난 6~7년간의 인생을 접어버렸고 두통수 당할 무렵 쪽팔리게도 구리에서 땅고르는 일이라도 달라했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으며...정치에 따른 인간들이 위에 올라가 있는것을 보고 있노라니 기가 막힐 뿐.......
구리에서 땅고르는 일이라도 달라했잖아.......
그와중에 러브페스티벌 섭외차 전화하는 당신네들은 도데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가있는 집단인지?

...내가 어마어마한 당신네들을 이길수는 없겠지만 맨땅에 헤딩 한번 해볼랍니다
바윗돌에 계란 던지는 거겠지만....
7년 동안 내 이름 훔쳐서 유니폼 팔아먹은 것과 ... 이번 일 공식사과 요청하니 뭐가 어째 ?
알아서 하겠다고.....? 단장이시여 말이면 다가 아니지...
아무런 해결책도없고 그냥가만있으면 나가떨어질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뭔가 착각을하고 있는것 같군요
봅시다.....
# 엘지 유니폼을 입고계신 선후배 여러분들과 팬들에게는 죄송합니다
찢어지는 가슴에 목이메어 엘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 올리는 글이니 이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노력해 보았지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하시고 우리 엘지팬들이 옛 애인들을 버릴수 있도록 줄무니 유니폼 입으신 분들께서는 노력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할수 있습니다...아니...해야합니다.....아니 ....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하십시요.....
맘속깊이 응원하겠습니다..... 1년간 부상없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자가 진정한 프로입니다... 건강하세요..
엘지팬 여러분들도 기쁜마음 가질수 있도록 응원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p.s 동정은 사양입니다
운영자님 의 글내리기도 사양입니다


이에 구단과 단장의 변명은 "이상훈이 오해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인사하려고 점심 한 끼 하면서 구단 실무자를 두 명이나 대동하고 2시간이나 점심을 먹었을까?

이 사건이 알려진 뒤 올드 팬들이 잠실 야구장에《성적은 못 내도 상관없으나 추억은 건드리지 마라》는 플래카드를 걸었다가 두산 직원들에 의해 철거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상훈은 안 그래도 LG 구단이 봉중근 2군 강등 사건 등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플래카드는 걸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플래카드 사건 며칠 뒤에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팔이 더러워지는 것 같다"고 하며 더 이상 LG 구단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글을 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 이 시절의 막장 프런트가 갈리고 LG 트윈스와 이상훈의 관계가 많이 풀려졌는지 LG에서 이상훈에게 코치직을 제안했고, 두산의 양보로 LG는 다시 야생마를 안게 되었다.


6. 여담[편집]


  • 유명한 별명으로는 '야생마', 긴 머리가 말의 갈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과 마운드를 향해 전력질주로 등판하는 모습이 야생마를 연상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가 야구선수 치고는 꽤 길어서 붙여진 '삼손'이 있다. 덕분에 주니치 시절의 등록명이 삼손 리였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이종범과「LEE」가 겹쳐서 즉흥적으로 결정한게 별명이었던 삼손 리(Samson Lee, サムソン•リー). 데뷔 초창기에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고, 두산 코치 시절도 깔끔하게 정돈된 헤어를 한 적 있었다.

  • 구원 등판을 할 때 항상 불펜에서 마운드로 전력질주를 하며 올라갔는데, 그 열정적인 모습에 LG 팬들은 환호하고 상대 선수들은 기가 죽기도 했으며, 이 행동은 야구선수 이상훈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그러나 정작 은퇴 후, 이상훈 본인은 이 행동에 대해 자기가 그때 미쳤다면서 다른 투수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18] 처음에는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한 건데, 이게 팬들의 호응이 너무 좋아서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서 마운드에 올라갔다고 밝혔다. 기사를 보면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한다.

  • 위에 써 있듯이 일본 활동 당시 등록명이 삼손이었는데, 하필이면 일본 내에서는 삼손이 유명한 게이 잡지의 이름인지라.. 물론 이상훈 본인이야 그걸 알지는 못했겠지만. 여튼 그런 이유로 당시에도 좀 DQN네임 취급을 받았고 아직도 일본 인터넷에서 이름이 특이한 야구선수 하면 꼭 등판하는 추억의 선수이기도 하다. 참고로 삼손은 2017년에도 발행 중이다.

  •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역면제를 받았던 사실이 있다고 한다. 아마 생계곤란이 정식 사유인 것으로 보인다.[19]

  • 나이 들어 상남자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데뷔 초에는 꽤 순박하고 앳된 얼굴이었다. 이상훈이 95년도에 20승 도전 당시 인터뷰를 보면 그 야생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밝고 명랑하다.

  • 국내에서 뛸 때 달았던 등번호 47번은 같은 왼손투수 톰 글래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미군 방송에서 톰 글래빈의 투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던져야겠다고 마음먹어서 47번을 달았다고 한다. 마해영은 같은 이유로 외야수 조 카터의 49번을 달았다. 관련 칼럼

  • 47번 이외에 이상훈이 프로 선수로 활동하며 달았던 번호로는 17번(주니치), 40번(보스턴)이 있다. 선호하는 등번호인 47번을 달 수 없어서 비슷한 숫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 주니치에서 같이 뛰던 이종범의 증언에 따르면 주니치 시절에도 숙소에서 매일 기타를 치는 바람에 일본 선수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런트측에서 항상 숙소 옆방을 같은 한국선수인 선동열이종범으로 배치해 놨다고 한다. 숙소에서 항상 기타를 치며 주로 높은 음의 락음악 노래를 불러서 잊을 수 없다고 한다.[20]

  • 초등학교 때는 잠시 축구선수로 뛴 적도 있다. 학교 축구부에서 주전 골키퍼를 했을 정도로 축구 실력도 꽤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학교 운동장에 야구부가 와서 훈련을 했다 보니 자연스레 야구부원들과 친해졌고, 비슷한 시기에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그 뒤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 SK의 좌완투수 김광현이 어릴 때는 LG팬이어서 이상훈을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던 임수혁과는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선후배 사이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방황하던 이상훈을 임수혁이 도와 주고 삐뚤어지지 않게 바로잡아 줬다고 한다.# 그리고 임수혁은 이상훈이 프로에 입문하기 직전 해인 1992 신인드래프트에서 LG의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다. 임수혁이 자신을 지명한 LG에 그대로 입단했다면 이상훈과 영혼의 배터리를 이룰 수도 있었다. 훗날 2000 시즌에 임수혁이 경기 도중 쓰러진 후 꾸준히 그를 도와 왔으며 2010년 2월 7일 임수혁이 끝내 눈을 감자 조용히 그의 옆을 지켰다.

  • 2010년 10월 3일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열린《서울 국제 자전거 디자인 페스티벌》중 자전거 락 페스티벌에서[21] 공연 중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 대해 "XXX, 2년이나 남았네"라는 발언을 하였다. # 평소 엄청난 보수 성향인 LG 트윈스 갤러리에서도 이상훈을 까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사이트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그날부로 별명이 하나 추가되어 좌생마란 별명이 전 야갤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 2009년 SkyEN에서 편성된 <이상훈의 MLB the city>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찍은 적이 있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편의 4부작이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고생했던 이야기 등의 사담이 많이 나오니 팬이라면 꼭 챙겨보자.[22] 음악과 관련해서도 이야기를 많이하는데 슬래시의 굉장한 팬인 듯하다. 당시 뉴욕 양키스에서 뛰던 마쓰이 히데키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있던 박찬호가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23]

  • 한창 야구와 거리를 두고 지내던 2009년, 스포츠춘추의 박동희가 3부작으로 나눈 이상훈에 관한 인터뷰가 있다. 사람들이 잘 몰랐던 이상훈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과거 등이 잘 나와 있다 보니 LG, 그리고 이상훈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글. 읽어보기

  • 2016년 4월 16일, LG vs 한화전이 우천 취소되어 KBS N 스포츠에서 대체 프로그램으로 레전드 스토리 이상훈편을 방영했다. LG에서의 영광의 시절부터 비극적인 이별, 그리고 LG로 돌아온 이상훈 코치의 야구 인생이 방영되었다. 양상문, 김동수, 서용빈, 최동수, 심재학 등 많은 은퇴한 선수들이 출연했고, LG 팬으로 알려진 최훈과 현역 이동현김광현[24]도 출연했다. LG 트윈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큐멘터리 초반 눈물을 보인 야생마는 다큐멘터리 마지막에도 조용히 눈물을 흘려 이를 지켜보던 많은 LG 팬들도 함께 울었다. LG 열혈팬 민혜경 작가가 집필했다.
사람이 애인을 만나면 헤어질 수 있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또다른 사람하고 좋은 사랑을 하게 되면
옛 사랑은 어떻게 보면 추억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로 비유하자면...

아직 LG트윈스 팬들은 더 좋은 사람을 못 만난거 같아요. 그렇게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을 추억으로 간직해야 하는데,
자꾸... 그 때를 그리워하니까,
그게 마음이 아파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25]

그래서, 빨리 옛 사람은 추억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 드릴거에요.[26]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이상훈 코치가 남긴 말.
이 다큐멘터리 방영 후 7년 뒤 LG 팬들은 무려 29년을 기다린 끝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됐다.[27]

  • 1990년대 라이벌인 김상진과는 친했다고한다. 둘의 선발 맞대결 후에는 항상 사석에서 만났는데, 김상진은 항상 기달렸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이유인 즉, 이상훈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긴 머리를 정리정돈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라고...[28]

  • LG와의 가슴 아픈 이별 이후 다시 돌아온 이래, 야생마의 영구결번을 원하는 팬들도 많다. 실제로 그의 번호 47번은 LG팬들에게는 준영구결번급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번호이기도 하다.[29]

  • 이상훈은 LG에 다시 소속되었을 때도 스프링 캠프는 따라가지 않아서 스프링 캠프용 모자(하얀색)는 써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2019년에 LG 스프링캠프를 해설위원 자격으로 방문해서 처음 모자를 써보게 되었다.

  • 카리스마 넘치는 상남자스러운 이미지에 걸맞게 이 양반도 옆동네의 김태형 감독과 같이 구타에 대한 구설수가 좀 있다. LG 시절 후배였던 신윤호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 푼 썰에 의하면 연습을 설렁설렁 했다고 투수조를 집합시켜서 머리를 박게 하고[30][31] 신윤호를 불러 '개XX가 야구를 설렁설렁하냐.' 면서 안경낀 신윤호를 귀싸대기를 후려 쳤다고 한다.[32] 저때 너무 열받은 신윤호는 구단 버스도 안타고 짐 챙겨서 나가 혼자 술을 마시다 너무 열받아서 시장에서 무기를 사고 들어왔다고.[33] 이후 이상훈이 방으로 불러 맥주를 따라주며 본보기로 잡은 거라면서 타일러서 넘어갔다고 한다.

  • 두산 김태형 前 감독이 수시로 비판받는 게 저런 식으로 집합을 시켜서 유망주 후배 하나를 본보기로 때리고 쪽줘서 선수단 기강을 잡는다는 이야기인데, 이상훈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당시 아구계에서 만연했던 더러운 똥군기 문화의 하나인 것 같다. 박명환야구TV에 나오는 은퇴선수들은 대개 1990-2000년대 활동했던 선수들인데 당시 저런식으로 선배들이 후배 하나 잡고 본보기 구타썰이 꼭 나왔다. 저기에 당한 썰을 푼 선수들은 정수근[34], 신윤호, 이인구, 구자운이고 오상민은 오히려 그렇게 한 명[35]잡고 때리는 역할이었다고...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길 항상 집합을 걸면 본보기로 이강철을 잡았는데 이유가 '야구를 잘 하는 사람을 잡아야 효과가 있지 못 하는 사람을 잡으면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실제로 구타 피해 썰이 나오는 선수 대다수가 듣보잡은 거의 없고 이름있는 선수들이 주로 나오는 편. 물론 지금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사회적 지탄은 말할 것도 없고 야구판에서도 매장당할 행위이다. 즉 마땅히 근절되어야 할 행위.

  • 상당한 애주가라고 한다. 은퇴 이후에 밴드 활동을 하면서 맥주 5병을 혼자서 마셨다는 모양.

  • 후배 선수들의 복지에도 신경쓰는 모습이 있다. LG트윈스 선수들의 지정식당인 서울 신천의 고깃집인 고박사는 이상훈 마무리 투수였던 시기에 LG 트윈스 구단에 제안하여 지정됐고 21년째 LG 트윈스 선수들이 가고 있다고 한다.#

  • 이종범이 술회하기를 주니치 시절 이상훈이 혼자서 기타를 연습하자 전라도 사투리로 '어디 좀 봐보자'하면서 악보를 봤다고 한다. 이상훈의 자작곡이었으며 영상 편지를 통해 '친구야 화이팅'을 말하면서 응원했다.[36] 이종범이 이상훈을 모창했는데 이상훈이 연주하며 불렀다는 노래는 HelloweenA Tale That Wasn't Right[37] 그리고 4 Non Blondes의 What's Up[38]

  • 처남아웃사이더라고 한다. 두 사람은 장르가 다르지만 나란히 음악인으로 활동한 바 있고 아웃사이더는 LG 구단 측에 응원가를 만들어 헌정했을 정도로 열혈 팬이다.[39] 2022년 7월 14일 아웃사이더가 LG 홈경기 시구를 할 때 "저희 매형이 LG의 레전드셨습니다. 매형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시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이상훈의 유니폼을 팬들에게 보여줬다.

  • 경성대학교와 의외로 인연이 있는데, 경성대를 졸업해서가 아니라 경성대 후문 근처의 건물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부산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상훈이 왜 거기까지 가서 일을 했냐면, 고려대 재학 시절 수시로 야구부 합숙소를 이탈했는데[40] 서울에서 가장 먼 부산으로 떠났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며 노숙을 했다고 스톡킹에서 밝혔다.[41] 꽤 유명한 일화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장소까지 언급한 것은 스톡킹에서 최초로 밝힌 것이다.

  • 서울토박이어서 그런지 해설을 들으면 서울사투리 억양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 재일교포 출신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뛰었던 장명부와도 인연이 있다. 장명부는 현역 은퇴 이후인 1980년대 후반 서울지역의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았는데 이상훈의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도 방문한 바 있다. 이 당시 장명부가 지도했던 고교생 투수 중에는 이상훈도 있었다. 장명부는 이상훈을 비롯한 서울고 투수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더니 자신이 히로시마 도요카프에서 뛰던 시절 일본시리즈 등판 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장명부는 이 영상을 보여주면서 투수가 경기를 주도할 수 있는 여유와 배짱의 필요성을 어린 투수들에게 강조했다고 하며 고교생 이상훈도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7. 관련 문서[편집]


[1] 원래 1970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렸다는 썰, 1971년생인데 학교를 조기입학했다는 썰이 있다. 어쨌든 학교는 70년생-89학번들과 같이 다녔다 보니 70년생인 이종범, 마해영 등과 친구로 지내고, 류지현, 서용빈, 류택현 등 71년생 선수들에게는 1년 선배취급을 받는다.[2] 경영학과 89학번[3] 꽤 오랜 기간 잠정 해체 상태였으나 2022년 말부터 활동을 재개했다.최근 합주 영상[4] 사유는 생계곤란으로 추정된다.[5] 구대성은 2005년 미국에 진출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고 박찬호는 2012년, 임창용은 2013년, 오승환은 2016년이었다. 김병현일본에서 1군 기록이 없다. 아울러 한미일 3개국 1군 무대에 모두 섰던 날 기준으로 유일하게 만으로 20대에 달성하였다.[6] 2004년은 절반만 뛰었으므로 제외.[7] 조계현과 공동 1위[8] 앨범 3장에 EP 1장을 낸 프로 뮤지션이다. 지금도 What!의 CD를 구할 수 있다. 왓!이라 검색해야 음원사이트에서 찾기 쉽다.[9] 2022년 말부터 활동을 재개했다.최근 공연 기록 단, 이제는 따로 보컬을 두고 기타만 잡는 것으로 보인다.[10] 다녀와 본 팬에 의하면 뷰티샵 한켠에 LG 사인구와 유니폼 등을 전시해뒀고, 가끔 이상훈 본인이 손님들 머리를 감겨주기도 했다고 한다.[11] 기타를 치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숙소를 이탈할 때 일하던 식당에서 통기타 공연을 엿보게 되었고 마침 주방장도 기타를 쳐서 기타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12] 마구마구의 경우엔 여기에 MLBPA까지[13] 사실 이런 형식의 가명으로 된 선수는 실제 선수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 게임에서는 꽤 흔한 일이다. 물론 사태의 99%는 초상권료가 원인이다. 마이클 조던, 배리 본즈가 그 예.[14] 사실 장정석과 장영석을 헷갈려 이름을 잘못 부르는 해설위원들이 적지 않다. 과거에는 장성호정상호를 헷갈려서 잘못 부르던 사례도 있다. 한명재 캐스터도 나주환최주환으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15] 의외로 고음 좀 낸다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 목소리는 상당한 저음이다. 음역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16] 김재현류지현은 원래도 그랬지만 선수협 관련 등으로 인해 사이가 썩 좋지는 않다. 지금은 그냥저냥한 사이지만... 자세한 건 류지현 문서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김재현-서용빈 사이와 유지현-서용빈 사이는 또 괜찮은 편.[17] 진필중, 마해영, 최상덕 등... 그리고 이들의 영입은 대실패로 드러났다.[18] 리듬을 갖고 일구일구에 집중해야 할 투수가 숨이 차서 헉헉거리거나 심장이 쿵쾅거리면, 투구가 원하는 대로 될 리가 없으니 이는 당연한 말이다.[19] 대학생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을 뛰었을 정도였다.[20] 이종범이 이 일화를 설명하면서 부른 노래 2곡은 Helloween의 A tale that wasn't right~윗 마이 하트 윗 마이 소울~과 4 Non Blondes의 What's Up~워너 세이 하이 야이~이다.[21] 왓! 3집을 발매한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22] 내레이션은 연예계 내 최고의 LG 트윈스 광팬으로 유명한 배우 공형진과 중간중간 이상훈 본인이 담당했다.[23] 이 후 4년이 지난 2013년 SkyEN은 전직 축구선수 안정환을 섭외해 '안정환의 사커 앤 더 시티'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하기도 했다.[24] 이동현과 김광현은 나란히 어린 시절부터 이상훈을 동경하던 영웅이자 롤 모델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들의 인터뷰가 들어간 것. 여담으로 어린 시절 김광현LG 트윈스의 팬이기도 했는데 그 바탕 역시 이상훈의 존재 때문이었다.[25] 이상훈 코치의 평소 말버릇으로 보인다. 현역시절 언론 인터뷰에서도 자주 나왔던 표현이다.[26] LG트윈스 투수 육성군 코치로 취임할 때의 다짐이라고 여겨지는 대목이다.[27]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직후 베이스볼 투나잇에 이상훈 해설위원이 출연했는데 진행자인 박지영 아나운서도 이 멘트를 알고 있는지 "LG 팬들이 이제 새로운 사랑을 찾았네요"라고 말했는데 빙긋 웃던 이상훈 위원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28] KBS N 스포츠 레전드 스토리 이상훈편 김상진 코치의 인터뷰[29] 실제로 2019년 이상훈이 LG를 떠난 이후 차명석 단장이 이상훈이 돌아올때까지 47번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2022년까지 아무도 47번을 달지 않았다. 그러나 2023년부터 김윤식이 47번을 달게 되었다. 본인이 직접 연락해 허락을 받았다고.[30] 당시 집합당한 투수들은 신윤호를 포함해 장문석, 류택현, 최원호(당시 투수조장), 이동현 등. 정황상 이상훈이 해외 생활을 마치고 LG로 복귀한 2002년~2003년 즈음으로 추정된다.[31] 심지어 1년 차이밖에 안 나는 류택현이 '자기도 고참인데 이거 머리를 박아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면서 우물쭈물 거리니까 이상훈이 "류택현 씨X놈아 너도 박아!"라고 호통쳐서 결국 같이 머리를 박았다고 한다.[32] 박명환야구TV에서 신윤호가 밝히기로는 안경을 낀 신윤호를 쳐서 눈가가 찢어졌다고 한다.[33] 가슴에 품고서 이상훈이 불렀을때 거기서 뭐라고 했으면 선배고 뭐고 그냥 뒤짚어 엎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다만 인터넷 방송에서 푼 썰 특성상 과장해서 말했을 가능성도 크다. 또 신윤호는 한창때 놀기 좋아하기도 했어서...[34] 김태형이 두산 주장이던 시절 1-2군 합동 훈련 때 집합을 걸고 '정수근 너 x발새x 앞으로 나와하면서 때렸고 정수근은 그날 밤 숙소에서 혼자 슬퍼하고 있는데 김태형이 불러서 달래줬다고 한다. 달래주는 게 더 슬펐다고...이 역시 박명환야구TV에서 풀어낸 이야기다.[35] 박명환야구TV에서 밝힌 일화로 SK 와이번스 해외전훈 때 이호준과 이진영이 말싸움을 벌이자 프로팀 후배 + 군산상고 후배라서 이진영을 후드려 팼다고 한다. 당시 주장이었던 최태원이 오상민을 군기반장으로 임명했다.[36] 1971년생 이상훈과 1970년생 이종범이 왜 친구 사이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둘은 같은 89학번이다.[37] In my heart~In my soul 후렴구로 잘 알려진 고음 노래다.[38] 그런데 이 노래, 여자 노래다. 젊은층에는 우주게이 히맨 밈에 나오는... 걸로 유명한 노래.[39] 2016년 발표한 타이미와 함께 부른 곡인 "엘팬의 북소리"로, 이 곡은 LG 홈 경기에서 주로 경기 시작 전이나 경기 종료 후에 틀어주는 곡이다.[40] 후에 스톡킹에서 이탈할 당시 제대로 피해를 본 사람이 심재학이었으니 말 다했다고.[41] 이탈을 무려 14번이나 반복했었고 대회 직전에 고려대 야구부원들에게 잡혀와 체벌을 당하고 대회를 참여했다. 그러다 졸업반인 4학년 진급 후 방황을 멈췄고, 성균관대와의 경기에서 그 전설의 14K를 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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