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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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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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우승반지

1985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75~199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2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83 KBO 베스트 10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83, 1985, 1986, 1987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83~1987, 1991 KBO 리그 출루율왕











보유 기록
0.427
통산 최고 출루율
1983~1987
5년 연속 출루율왕
6회
통산 최다 출루율왕


장효조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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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0번
허규옥
(1982)

장효조
(1983~1988)


정성용
(1989~1992)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0번
이충우
(1985~1988)

장효조
(1989~1992)


이요섭
(199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3번
결번

장효조
(1993~1998)


정현발
(1999~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4번
임호균
(1996~1998)

장효조
(2000)


이선희
(2001~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3번
강성우
(2006~2009)

장효조
(2010~2011)


세리자와
(2012~2014)




장효조
張孝祚 | Jang Hyo-Jo

출생
1956년 7월 6일
경상남도 부산시[1][2]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사망
2011년 9월 7일 (향년 55세)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3가 동아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구삼덕국민학교 (졸업)
대구중학교 (졸업)
대구상업고등학교 (졸업 / 47회[3])
한양대학교 (체육학 75 / 학사)
신체
175cm, 78kg, B형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 (1979~1980)[4]
삼성 라이온즈 (1983~1988)
롯데 자이언츠 (1989~1992)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1993~1998)[5]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1998)[6]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 연수코치 (1999)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00)[7]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0)[8]
대불대학교 야구부 코치 (2001)
삼성 라이온즈 2군 수석·타격코치 (2010)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타격코치 (2011)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05~2009)
병역
육군 경리단 (1980~1982)
상훈
체육훈장 거상장
체육훈장 백마장
가족
아내 강경화, 아들 장의태
종교
불교개신교[9]
서명
링크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후
4.1. 지도자 1기
4.2. 야인, 스카우트, 지도자 2기
5. 사망
6. KBO 영구결번 지정 관련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

당시 심판들에게서 나온 말. 그의 뛰어난 선구안을 잘 표현하는 말이며 장효조 은퇴 이후 선구안이 뛰어난 선수가 볼넷으로 출루하면 그 선수 이름을 붙여 언급된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소속으로 활동했던 전 야구 선수.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등번호는 10번,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20번이었다.[10] 좌투좌타의 외야수였고[11] 지명타자로도 자주 출전하였다. 코치로서의 등번호는 83번(롯데) - 74번(삼성, 2000) - 83번(삼성, 2010~2011)

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타격의 달인, 장효조"
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 上



선수 시절의 전성기 대부분을 삼성 라이온즈에서 기록한 삼성의 대표적 스타지만, 의외로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활동 기간도 짧지 않은 편이다. 프런트(스카우트) 시절을 제외하고 유니폼을 입었던 기간만 따지면 삼성에서 9년(선수 6년, 지도자 3년), 롯데에서 10년(선수 4년, 지도자 6년) 동안 있었다. 그외에 유니폼을 입지는 않았지만 스카우트로 삼성에서 5년간 일했다. 같이 트레이드 되었던 김시진처럼 삼성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주로 2군에 있어 우승 멤버는 되지 못했던 김시진과 달리 롯데에서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장효조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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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이 스타일[편집]


선수 시절 별명인 타격의 달인답게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던 강타자다. 족히 30년동안 깨지지 않았던 통산 타율 역대 2위(0.330)와 아직도 깨지지 않은 통산 출루율 역대 1위(0.427)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수많은 후배 타자들이 그 아성에 도전했고 마침내 이정후가 2022년에 통산 비율 스텟 집계 기준인 3,000 타석을 만족하면서 2위로 내려왔지만, 당시에는 공인구 반발력이 낮았고 3할 타자의 숫자가 현재보다 훨씬 적은 투고타저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록의 가치는 낮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출루율 1위의 기반이 된 BB/K가 1.75로 2위와 0.28이나 차이가 나는 1위이며, BB%도 무려 13.9로 3위인데 K%는 8.0으로 뒤에서 7위. 한 마디로 볼을 던지면 거르고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치는[12] KBO 역대 최고의 교타자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왼손 교타자로 활약했다. 장효조-양준혁-이승엽-최형우-구자욱으로 이어지는 삼성 라이온즈 좌타계보의 시작점이다. 발도 빨라서 적은 경기 수에도 불구하고 두자릿수 도루를 밥먹듯이 했다.

1980년대에는 경기수가 적어서 요즘보다 체력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은 반대에 가깝다. 경기수가 적으면 투수가 더 유리하면 유리했지 타자가 유리할 리는 없는데다, 투수 분업화가 미비해서 각 팀의 주력 에이스 투수들이 매우 자주 등판했다. 때문에 경기수는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동원, 김시진, 김일융처럼 한 시즌에 25승 이상을 거두는 투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것이다. 때문에 요즘보다 에이스들과 훨씬 자주 대결해야 했다. 게다가 외국인 용병은 없었지만 재일교포 출신들이 사실상의 용병으로 각 팀에서 몇 명씩 뛰곤 했다. 백인천, 장명부, 김일융 등이 그 예시로, 일본에서도 수준급의 성적을 냈던 선수들이다. 김일융은 삼성과 계약이 끝나고 다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을 정도다. 그래서 통산 OPS가 0.886로 20위에 불과(?)한데 통산 wRC+는 무려 156.1로 팀 후배인 양준혁, 동료였던 이만수에 이은 3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만큼 투수가 강했던 시기에 성적을 올렸다는 얘기다.[13]

동시대에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교타자로 활약한 웨이드 보그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타자라는 평을 받았다. 둘 다 정교한 타격 능력으로 명성을 날렸고,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하는 높은 출루율로도 유명했다. <주간야구>를 비롯한 당시 언론들의 야구 기사에서도 장효조를 '한국의 웨이드 보그스'로 부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14]

유일한 약점이라면 빠른 발에 걸맞지 않게 수비범위가 좁았고, 한국시리즈만 되면 시리즈의 승패를 가르는 뼈아픈 실책이 나왔다는 점이다.[15]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는 4-1로 앞선 7회초 수비에서 롯데 한문연의 플라이를 판단 미스로 만세를 부르는 통에 3루타로 둔갑시키면서[16] 역전패의 시발점이 됐고,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 3-1로 앞선 9회말에 김일권의 타구를 전력질주해서 잡을 수도 있었음에도 머뭇거리며 1타점 3루타로 만들어주고, 이후 김시진김성한에게 몸에 맞는 볼까지 던지면서 김일권이 득점해 경기는 연장전으로 들어가고야 만다. 결국 팀은 연장전에서 패배.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0-0으로 맞선 1회 1사 3루 상황에서 김성한의 짧은 뜬공을 잡다가 놓치는 바람에 3-5 패배의 주범이 된다.


4. 은퇴 후[편집]



4.1. 지도자 1기[편집]


1992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와 동시에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로 임명되어 1998 시즌까지 6년간 롯데에서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1993 시즌 강병철 감독 밑에서 1시즌을 보낸 후 1994시즌부터 김용희 감독과 5년 동안 함께 해서 1995 시즌에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011년 간암으로 별세한 후, 롯데 코치 시절의 모습이 잠시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뉴스 영상[17]

1998년 시즌 후 감독이 김명성으로 바뀜과 동시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며 롯데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9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연수 코치로 활동하면서 1년간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090800848_0.jpg

미국 연수를 마치고 난 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김용희 수석코치[18]의 감독 승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영입, 무려 11년 만에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왔다. 당초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을 받았으나 6월 5일부로 코치진 개편에 따라 1군 타격코치로 승격하면서 박흥식 타격코치와 팀 타격을 담당하게 됐다.

여담이지만 2000년 6월 25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김용희 감독이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고 심판 멱살을 잡아 몸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계형철 투수코치, 이순철 주루코치와 함께 6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자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나흘간 6경기서 장효조가 감독대행을 맡게 됐는데 감독대행을 맡던 6경기에서 4승 2무라는 호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시즌이 끝나고 김응용 감독 부임과 함께 대대적으로 코칭스태프가 물갈이될 때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1년만에 다시 친정팀 유니폼을 벗었다. 김용희와는 롯데에서 감독-코치로 5년을 함께 하다가 동반퇴진했으며, 삼성에서도 감독-코치로 함께 영입되었다가 1년만에 동반퇴진했다.

은퇴 후 2000년까지 롯데에서 6년, 삼성에서 1년간 타격코치를 했지만, 이때 타격코치로서의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한 편이다. 롯데에서는 전임 타격코치였던 김용희남두오성을 길러내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우승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타코 시절 장효조는 전임 김용희와 비교되곤 했다.[19] 다만 이것은 김용희가 타코로서 능력이 걸출했데다가, 김용희 뿐만 아니라 역시 타격쪽에서는 뛰어난 지도자였던 강병철 감독의 역할도 컸다. 장효조의 코치 능력이 김용희에는 못미쳤지만, 타격코치로서의 자질이 평균 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롯데에서 6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타격코치로 머물렀던 것을 보면 롯데 내부에서는 장효조윽 코칭 능력을 나쁘게 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성 타격코치 시절에는 애초에 1년만 있다가 나간데다 당시 삼성의 강타선을 만든 걸로 유명했던 박흥식 타격코치가 있었다 보니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타격코치로서 성과가 좋지 못했던 데는 본인이 선수 시절 워낙 뛰어났던 탓에 선수들이 자신의 지도방식을 따르지 못한 이유가 컸다는 의견이 있다. 한편 당시 언론 등에서는 남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는 직설적인 언변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성격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의 성격 문제는 장효조와 매우 껄끄러웠던 삼성 프런트의 언론플레이였던 측면도 있다. 삼성 프런트는 1988년 장효조를 트레이드로 내보낸 이후 2010년에 2군 타코로 기용할 때까지 2000년 단 1시즌을 제외하고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하지 않았다. 2000년에 잠시 타격코치로 기용한 것도 당시 감독으로 내정된 김용희가 장효조를 워낙 강하게 요청했던데다가, 어차피 1년 후면 김응용 사단으로 교체될 테니 1년 쓰다 버릴 심산으로 기용한 측면이 크다. 삼성팬들은 당연히 팀 역사상 최고의 강타자 중 한명이었던 그를 지도자로 영입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러나 삼성 프런트는 장효조의 성격이 워낙 강하고 직설적이서 지도자로는 힘들다는 얘기를 언론에 주기적으로 흘리곤 했다. 물론 장효조가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효조가 롯데에서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두 감독과 그 유명한 롯데의 강성 프런트 밑에서 별다른 잡음없이 타격코치직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장효조의 성격이 지나칠 정도로 완고하고 비타협적이라는 삼성 프런트의 주장을 그대로 납득하기는 어렵다. 사실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은 지도자에게는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이전에 한국 야구계에서 소위 명장이라고 불렸던 이들의 상당수는 이런 카리스마형 지도자였다. 다만 이런 유형의 지도자들은 프런트와 마찰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훗날인 2010년 삼성 2군 코치가 되고난 후 인터뷰에 따르면, 현역에서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코치가 되었기 때문에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코치가 됐고 이 때문에 미숙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지도자 수업을 받지 않고 곧바로 지도자가 되어 성공한 경우도 많았기에 정답은 없는거지만, 그래도 자신의 경우에는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면 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롯데에서 6년간 코치를 한 후 미국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온 후에도 삼성에서 타격코치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때문에 선수 시절에는 팀의 간판스타였지만 삼성 코치에서 물러난 후 10년간 현장 밖에 있어야 했다. 다만 10년만인 2010년 삼성 2군 코치로 복귀한 후에는 지도자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효조 본인은 현역시절은 물론, 코치 시절에도 그동안 2군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2010년 2군 코치가 되어 처음으로 2군 생활을 4개월 정도 하니까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말했다.

어쨌든 2000년 삼성에서 1년 동안의 타격코치 생활을 끝으로 10년간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에 공백기가 생긴다. 삼성 코치에서 물러난 후 2001년 전남 대불대학교에서 1년간 타격코치를 했다.


4.2. 야인, 스카우트, 지도자 2기[편집]


2001년 말 대불대 타격코치를 그만둔 뒤 3년간 완전히 야인으로 머물렀다. 그가 오랫동안 야인으로 머물자 이대로 야구계와 멀어지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래도 야구와 완전히 거리를 두지 않고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2002년에는 국민일보에 '장효조의 야구읽기'라는 코너와 관전평을 연재하기도 했으며, 이따금 특별 해설위원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부산 지역지인 '국제신문'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초빙됨과 동시에 ‘장효조의 만루홈런’이라는 관전평을 쓰면서 야구와 연을 이어갔다. # 야인으로 머물던 2004년 초 부산일보 인터뷰에서 그는 현장 지도자 복귀에 대한 희망을 강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2005년 삼성 라이온즈스카우트로 야구계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이 때 엉엉 울 정도로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20][21] 스카우트로 삼성에 복귀했지만 현장이 아니라 프런트였기 때문에 여전히 유니폼을 입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스카우트에 대한 대우가 훨씬 열악했다. 나중에 장효조는 자신이 병을 얻은 것에 대해 "스카우트 시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그래도 이후 다시 지도자로 돌아왔을 때 이전과 달리 선수를 육성하는데 뛰어난 역량을 보인 것에 스카우트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후 2009년까지 삼성의 스카우트 팀에서 일했다. 그가 스카우트로 일하던 시절 지명하거나 영입한 선수들만 해도 차우찬, 백정현, 채태인, 김상수, 배영섭 등이 있다. 스카우트 시절 인터뷰 1인터뷰 2

2010년에야 2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오랜만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10년만에 다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공석이 된 스카우트 자리는 우용득 前 감독이 하게 되었다. 말이 수석코치지 사실상 1군 감독이 2군을 총괄한다는 의미의 직책이기에 2군 감독이나 다름없었다.

류중일 감독이 부임한 2011년부터는 정식으로 2군 감독 직함을 달게 되었다. 여전히 타격코치도 겸하고 있었지만 8월 10일 강기웅이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며 짐을 덜게 되었다.

초기 타격코치 시절과 달리 10년만에 다시 현장에 돌아온 후에는 지도자로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배영섭을 필두로 모상기, 정형식 등 2군의 여러 타자들을 키우는 성과를 보였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3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되었고, 7월 23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식전 행사때 등장하여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파일:/image/076/2011/09/07/2011090801000549800044521.jpg

그러나 이 모습이 그가 팬들 앞에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5. 사망[편집]


2011년 7월 말, 급격히 살이 빠지며 건강에 이상을 느낀 장효조는 8월 2일 서울 삼성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고, 이틀 후인 8월 4일 간암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8월 19일 주치의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 고향으로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결국 8월 20일 자택 인근인 부산 동아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한편 삼성 2군은 8월 2일부터 양일환 2군 투수코치가 감독 대행을 겸직하고 있었다. 20일 가까이 삼성 2군이 감독 없이 경기를 치르자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느냐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강한 장효조는 자신의 투병 사실이 알려지길 꺼렸다. 삼성 구단은 가족과 이 문제를 조율했고 ‘건강이 나빠 입원 중이라는 사실만 알리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장효조의 투병 사실은 부산 동아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된 다음날인 8월 21일,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관련기사. 남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걸 꺼린 장효조는 구단에 “구체적인 병명은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면회를 사절하던 상황임에도 8월 30일 삼성 단장 송삼봉이 가족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1분 정도 장효조를 면회할 수 있었고, 병상의 장효조에게 "형님, 아직 살아 있잖습니까. 1%의 확률이라도 있으면 병원비 같은 거 걱정 말고 열심히 치료해 봅시다. 야구 천재가 이 정도(암)도 이기지 못해서야 말이 됩니까. 얼른 털고 일어나이소" 라고 간청하자 장효조는 "노력해 볼께" 라고 답했다 한다. 그리고 다음 날엔 삼성의 김인 사장과 운영팀장도 짧게나마 장효조를 면회하여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결국 2011년 9월 7일 오전 7시 30분, 간암으로 55세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발견 당시 이미 간암위암으로 전이된 말기 상태여서 의학적으로 도무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병문안을 갔던 류중일 감독은 이미 복수가 차고 황달기가 시작됐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고 말했으며, 이미 길어야 1달이었다고 알려졌다.

9월 9일 아침에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3가 동아대학교 병원에서 발인이 엄수되었다. 금정구 두구동 소재 영락공원에서 화장되었으며, 장지는 기장군 철마면 실로암공원이다.

파일:/image/076/2011/09/09/2011090901000719700059012.jpg

생전에 2군에서 같이 일하던 코치 6명이 고인을 운구했고 가족과 친지,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 구단 관계자 등 백여명이 운집하여 고인의 가는 길을 지켜봤다. 전설의 타자가 가는 마지막 길답게 전혀 쓸쓸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발인 당일 새벽 2시경, 광주 KIA 타이거즈전을 마친 삼성 선수단이 구단 버스로 문상을 와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며 이렇게 그가 치지 않는 공은 볼이라고 일컬어지던 타격의 달인, 전설의 교타자는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장효조가 사망하고 일주일 뒤, 최동원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묘하게도 최동원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비슷한 시기에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이 두 명이 작고한 2011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연고의 삼성롯데. 만약 두 팀이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 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2011년 한국시리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시리즈 준우승팀인 SK 와이번스의 감독이 공교롭게도 같은 삼성레전드이만수라는 점에서 역시 특별하다면 특별한 시리즈가 되었다. 이만수는 장효조와 같은 시대, 같은 팀에서 뛰며 각각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와 최고의 중장거리 교타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동시에 장효조의 지인로서는 유일하게 최동원의 임종을 지킨 절친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최동원을 추모하는 롯데와 장효조를 추모하는 삼성을 모두 상대했으니 이만수 역시도 꽤 복잡한 심정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人 장효조 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내레이션 by 안지환)

눈물을 꿀꺽 삼키며, 그는 떠났다.

길지 않았던 삶, 55년. 그 대부분은 야구장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 역시 야구를 생각하면서 보냈다. 오직 야구만 생각했기 때문에 최고가 될 수 있었고, 오직 야구만 했기 때문에 더 외로웠던 사나이. 그는 이제 떠났다. 하지만, 그의 기록과 모습은 지워지지 않을 전설로 남겨졌다.

(중략)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3할 3푼 1리는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남겨진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멈추지 않는 도전과 의지, 끝을 봐야 멈출 수 있는 투지와 신념. 그리고, 오직 야구만 사랑했던 그 마음. 단순한 숫자, 그 이상의 기록.

이것이 바로, 장효조가 남긴 유산이다.


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꿈꿔왔던 그 순간, 2011년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입니다!

한명재 캐스터의 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콜


그리고 장효조가 세상을 떠난 그 해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확정짓자, 한명재 캐스터가 팀의 우승을 보지 못하고 떠난 그를 염두에 둔[22] 우승콜을 외치면서 다시 한 번 삼성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후로도 한명재는 삼성우승하거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에서도 장효조를 염두에 둔 멘트를 하기도 했다.

동기인 김한근은 야구장에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야구장을 떠나있다 보니까 그 스트레스로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을 했다. 즉, 현장에 없어서 건강이 악화 되었을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6. KBO 영구결번 지정 관련[편집]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롯데에서 하긴 했어도 엄연히 삼성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한국 야구사에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대선수인데, 왜 영구결번으로 지정시키지 않느냐는 삼성팬들의 의견이 많다. 애초에 10번의 영구결번인 양준혁 역시 팀을 2번이나 갈아탄 적이 있기 때문에[23] 다른 구단에서 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장효조가 삼성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10번은 훗날 후배인 양준혁이 사용하였고 양준혁 은퇴 후 삼성에서는 양준혁의 번호로만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놓은 상태인데, 양준혁은 장효조와 함께 영구결번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지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장효조 편 말미에서 "제가 10번을 달고 영구결번의 영광을 누렸지만 사실 이 번호는 원래 장효조 선배님 겁니다."라면서 본인 역시 장효조의 영구결번 지정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했었다.

때문에 공동 KBO 영구결번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비록 아직까지 KBO 리그에서는 공동 영구결번이 탄생한 적이 없지만, 메이저리그는 몇몇 구단에서 공동 영구결번을 지정해놓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24] 무리한 의견은 아니다.

다른 의견으로는 그의 통산 타율이었던 0.331에서 따와 33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자는 얘기도 있다. 메이저리그에도 세자릿 수 영구결번이 있고[25] 그냥 10번보다는 장효조의 업적을 더 빛내줄 수 있으므로 이것 역시 가능성 있는 방안이다. 이 의견이 반영된 것인지 2022년 KBO 레전드 40인 수상을 할 때에는[26] 331번 레전드 유니폼이 나왔다. 그러나 2023년 장효조의 통산 타율이 0.330으로 정정되면서, 만약 33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었다면 삼성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 될 뻔했다.

한편 롯데에서 달았던 등번호인 20번은 2016년에 최영환이 달았던 것을 마지막으로 계속 결번 상태인데,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롯데 팬덤에서는 사실상 장효조와 임수혁을 추모하기 위해 결번으로 지정한 것으로 추측 중이었고 이후 진승현의 인터뷰를 통해 구단 차원에서 결번으로 관리중인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27]

한 편, 2023년 삼성 라이온즈 인스타그램에 시즌 개막 D-DAY를 실행했는데, D-10에 해당하는 사진에 등번호 10번인 양준혁과 장효조를 둘 다 게시했었다. 암묵적으로 장효조도 공동 결번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직 양준혁 하나이다.

7. 기타[편집]


  • 장효조의 원래 꿈은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 마구마구에서는 약간 느린 발이지만, 이를 송구로 커버하는 어깨 괴수로 출현. 특히, 삼성 세트덱에서 레어 87 장효조나 엘리트 83 장효조는 레벨업시 컨택트, 스로잉이 동시에 극상을 찍는 아름다운 탭간을 보여준다. 덕분에 플라이 이후 섣부르게 뛰었다간 끔살당한다. 더욱 충격적인 건 여태까지 나온 장효조 카드의 스로잉 평균은 80 중후반대이다. 그리고 87년 재평가로 인해 엘리트가 한장 더 추가되었다.

  • 87년도에 MVP를 땄지만, 최초의 똑딱이 MVP이다.[28] 그 해 홈런은 고작 2개. 타율 이외의 다른 기록까지 종합해서 평가한다면 오히려 프로 데뷔 첫해인 1983년의 성적이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해에는 불멸의 시즌 30승을 기록한 장명부가 있었고, 시즌 MVP는 홈런, 타점 2관왕을 차지한 이만수가 차지했다.

  • 대구상고 시절부터 프로까지 항상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 고교 시절에는 4개의 주요 대회에서 3번의 타격상을 수상하고 소속팀의 우승을 4번이나 이끌었음에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된 적이 없었다. 프로에서 와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프로 첫해에 MVP급의 활약에도 시즌 MVP는커녕 신인왕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1987년에 백인천 이후 최고인 3할8푼대의 고타율을 기록하는 등의 맹활약으로 프로시절의 유일한 MVP를 수상했다.

  • 고교 선수 시절, 장효조에겐 또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도루가 그저 몰래 한 베이스 이동하는 기술정도로 치부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홈 스틸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다. 그 점수는 그대로 결승점이 되어 그의 모교인 대구상고에 승리를 안겼지만 정작 본인은 홈 스틸을 성공시킨 후에 체력이 다해 기절하고 말았다. #


  • 프로 경력 말기였던 1991년 3할 4푼 7리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타율 순위 2위에 랭크됐는데 이 때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장효조의 대구상고 후배이기도 한 이정훈 한화 이글스 코치의 증언에 의하면 장효조는 실업 시절부터 매일 경기가 끝나면 자기 전에 캔맥주 2개를 꼭 마시고 잠을 자는 습관이 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1년 시즌 중 후배 이정훈과의 타격왕 경쟁을 위해 캔맥주를 매일 즐겨 마시던 버릇까지도 끊어버리고 그 시간에 타격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로 이 당시 장효조의 나이는 한국식 나이로 무려 36세였다.[29]

  • 선수 시절 자신의 집에 수십개의 배트를 걸어놓고 치밀하게 관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두고 민훈기 해설위원은 "마치 무사가 예리한 칼을 관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통산 병살타가 31개밖에 안 된다. [30] 장효조의 통산 타석수가 3,632타석인데, 이를 계산하면 타석수 대비 병살타가 0.85%로, 1%도 안 된다.

  • 전성기 시절 높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최다안타에서는 높은 순위에 들어간적이 별로 없는데, 이는 장효조, 이만수 같은 주전 선수들은 체력 안배를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전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시절 삼미는 최약의 약체팀이었기 때문에 주전 타자들과 투수들을 쓰지 않고도 압도적으로 이겼다고 한다.

  • 한편 그가 쓴 10번은 훗날 양준혁의 번호로 KBO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2011년 10월 25일에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고인의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를 했는데 등번호가 331이었다. 그의 통산 타율 0.331에서 유래했다. 일각에서는 331번을 영구결번 처리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1] 거기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한정으로 유니폼에 검정색 원형 패치를 달고 경기에 나섰다. 패치에는 LEGEND HITTER JANG HYO-JO라고 씌어 있고, 가운데에는 0.331이 씌어 있다.

  • 2011년 한국시리즈 당시 우승한 삼성 선수들은 하늘을 가리키는 세레모니를 했는데 이 세레모니는 하늘나라로 간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긴 세레모니였다고 한다.

  • 군인, 기업가, 정치인이었던 포스코 박태준 회장이 좋아했다고 한다.[32] 1979년 한국실업야구포철 야구단에 영입할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달라던 장효조에게 돈까지 얹어준 일화는 유명하다. 계약금 1,500만원에 집을 제공해 주는 조건이었다.

  • 장효조 감독이 별세한 2011년 당일 경기를 시작으로 12, 13년까지 3년 연속으로 승리를 거뒀으며, 2014 시즌은 기일에 경기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15년은 당일에는 경기가 없었으나 홈 경기였던 6일에 하루 일찍 추모행사가 열렸고 그 경기에서 승리하며 불패 징크스를 2015년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2016년에는 선발 요한 플란데가 불을 지르며 타선이 잘 따라갔으나 결국 큰 점수차를 뒤집지는 못하고 패했다. 다행히 2017년에는 승리. 그러나 2018년부터 2021년까지는 내리 3연패를 한다.[33] 2022년 대구 키움전에서 승리하고 2023년 울산 롯데전에서 역전패 당한 이후 현재까지 장효조 기일 승률은 11G 6승 5패 .546.

  • 대학 진학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한양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야구 명문이라는 점 외에도 집, 생활비, 부속병원비[34] 등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조건을 받았기 때문이다.

  • 매형이 고(故) 백대삼[35] 전 KBO 심판위원이다.# 참고로 백대삼 심판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0년대까지 활동한 심판이며,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 이영민과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야구계를 이끌었던 고(故) 백기주 선생의 아들이다. 또한 장효조의 작은아버지는 부산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선수로 뛴 적도 있다고 한다.

  • 대구상고 2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가 자신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자신감을 얻고 이후 봉황대기에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한다.

  • 육군 경리단에서 복무를 했었는데, 이 에피소드가 굉장히 골 때린다. 그 당시 군 야구단은 공군과 육군에만 있었는데 공군은 지원이고 육군은 징병이었기 때문에, 공군으로 가기 위해 시험을 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육군 경리단장이 대령이었는데, 대통령과 육사 동기여서,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장효조 선수 본인의 표현으론 '체포해와라.' 라고. 이후 공군 입대 이틀 또는 하루 전에 헌병차에 납치되듯이 끌려가 육군 경리단에 입대했다. 그 후, 공군 VS 육군 라이벌 전에서 승리하고 3개월 특별 휴가도 받았다.

  • 1977년 4개국 대학선발 친선야구 대회에 참석하러 니카라과에 갔었는데, 대회 준비 위원회 측에서 애국가 테이프가 준비되지 않아서, 육성으로 직접 부르게 되었다. 당시 감독이 "저, 뭐냐 너 가서 불러라."라고 해서 불렀는데, 이후 대회 시작 전 나오는 애국가는 장효조 선수의 목소리였다.


  • '장효조의 집'이라는 가게를 했었는데, 그 당시 나이키프로스펙스가 서로 대한민국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키에서 선전용으로 홍보를 위해 시도했었는데, 그리 영리적인 건 없었고, 4~5개월 이후 문을 닫았다.

  • 830g의 가벼운 배트를 주로 썼다. 본인이 스스로 가벼운 걸 선호한다고 밝혔다.

  • 타격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 2000년 삼성 1군 타격코치 시절, 김용희 감독이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고 멱살을 잡은 바로 출장정지 징계를 받게 되어 감독대행을 잠시 맡은 적이 있었다. 고작 6경기지만 4승 2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일부 올드 삼성 팬들은 장효조가 삼성 감독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떡밥을 던지며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 재일교포 선수 김일융과 절친 사이였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 전지훈련 캠프 때도 같은 방을 자주 썼고, 출퇴근도 항상 같이 했다고 한다. 5살이나 차이 나는 선후배 사이지만 성격이 잘 맞아서 진솔한 대화도 많이 나눌 정도로 사이가 끈끈했었다. 3년 간 같이 한솥밥 먹다가 김일융이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도 장효조가 롯데로 트레이드 된 당시 국제전화로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일본 전지훈련 기간에도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매일같이 통화했다고 한다. 장효조에게 야구인의 마음가짐, 그리고 진정한 프로 선수가 지녀야 할 자세 등을 집중적으로 전수하면서 장효조가 트레이드 사건에 대한 아픔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 공신이 바로 김일융이었다. 2011년 일본 대지진 때 걱정돼서 김일융에게 전화한 적도 있다.



  • 롯데 자이언츠의 후배격인 손아섭이 장효조를 자신의 모범이자 목표로 삼고 있다.[36] 현재 손아섭은 박민우, 이정후 등과 함께 장효조의 통산타율 기록을 깰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 야인 시절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사직구장에서 한 기자가 장효조에게 어떤 선수를 가리키며 "저 선수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장효조는 망설임도 없이 " 저 거구에 저 정도 유연성을 가진 타자는 아주 드물어요. 두고봐요.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될 겁니다!" 라며 "아직 선수 볼 줄 모르는구만!" 이라고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그 때의 그 선수는 훗날 조선의 4번 타자가 된다.[37]

  • 대구상고 출신이고 삼성에서 데뷔한 영향으로 인해 대구광역시가 고향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고향은 부산광역시다. 인터뷰에서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자신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부산 동래구 안락동에서 출생하여 영도구 영선초등학교[38]를 다니다가 3학년때 가족들과 대구로 이사와서 삼덕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야구부에 들면서 제대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 교타자라서 과소평가되는 부분이지만 신체 능력 또한 좋다.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동기이자 삼성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던 절친 김한근의 증언에 따르면 벤치 프레스를 140kg까지 거뜬히 소화해냈고, 주력도 100m를 11.3초만에 주파할 정도였다고 한다. #

  • 어린 시절 부산고등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했던 작은아버지에게 처음 야구를 배웠다고 한다.

  • 롯데 자이언츠 이적 후 별세할 때까지 고향인 부산광역시에서 쭉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삼성 타격코치에서 경질된 후 야인으로 있는 동안 부산 지역지 '국제신문'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2004년 인터뷰에서도 부산 금정구에 거주하고 있다고 나왔으며, 삼성 스카우트 시절인 2008년에도 부산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나오며, 삼성 2군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갑작스레 별세했을 당시 기사에도 자택 역시 부산이라고 나왔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학창 시절과 선수 생활의 상당 부분을 보낸 대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도 있지만, 동시에 고향항구도시 부산에 대한 애착도 잘 나타난다.

  •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다가 kt wiz로 이적한 김동욱 선수를 생전에 매우 아꼈다고 한다. 평소에는 쓴소리를 많이 했지만, 지인들에게는 무조건 성공할 선수라고 칭찬했다고. # KBO 리그의 10번째 구단인 kt에서 10번째 구단인 만큼 10번을 아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욱이 10번을 달겠단 의지가 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존경했던 장효조 감독이 삼성에서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가 10번이었기 때문이었다.[39]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종모가 술회하기를 1983년 타율 0.350을 기록했으나 장효조가 더 높은 타율을 기록해 타격왕을 차지못했다고 한다. 김봉연은 김종모가 같은 교타자인데 장효조의 벽을 넘지 못한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 양준혁이 인터넷 방송에서 언급을 하였는데 장효조가 직접 자신의 모교인 대구상고에 왔을때 당시 대구상고 야구부에 있던 양준혁을 야구부에서 적극적으로 중용하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양준혁 본인도 장효조의 영향을 많이 받고 그를 존경했다고 말했다.

  • 오랫동안 통산 타율이 0.331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1985년 7월 31일 청보와의 경기에서 1사 1, 2루 상황에서 2루타를 쳤으나 2루 주자가 3루를 밟지 않아 누의 공과로 포스아웃되는 바람에 안타가 취소[40]된 것이 뒤늦게 기록지에 반영되어 2023년에 통산 타율이 0.330으로 수정되었다.

8. 관련 문서[편집]


[1] 장효조의 출생 당시 부산은 (정부 직할) 부산시보다도 이전인 경상남도 부산시 시절이었다.[2] 과거 대구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산이 고향이다. 장효조는 자신의 고향이 대구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면서 실제 고향이 부산임을 강조하는 발언을 몇 차례 하기도 했다.[3] 김한근, 최병국과 동기동창이다.[4]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79년에 입단해서 1980년 9월까지 포항제철에서 활약한후 10월부터 군 입대 후 경리단 소속으로 뛰었다고 한다.[5] ~6월 14일[6] 6월 15일~[7] ~6월 4일[8] 6월 5일~[9] 원래는 불자였으나, 은퇴 후 한참 지나서야 원래부터 교회를 다녔던 아내를 따라 개신교로 개종했고, 장례식도 개신교식으로 치뤄졌다. 아내에 의해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는 후배 이만수전도를 2번이나 했을 때도 꿋꿋이 버티며 불자 생활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아들선교사이다. 참조.[10] 이 당시 롯데에서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자갈치' 김민호가 10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11] 주로 우익수 수비를 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비 실력은 타격에 비해 떨어졌다는 것이 일관된 분석이다. 게다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의 행방을 넘겨주는데 단초를 제공하는 초대형 실책(일명 '장효조 만세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12] 장효조보다 K%가 낮은 타자들은 BB%가 한 자릿수다. 이정후도 K%는 7.9로 장효조보다 낮으나, BB%는 9.4로 평범한 수준이다.[13] 이만수도 OPS가 0.907로 13위인데 wRC+는 2위다. KBO 초창기가 얼마나 투고타저 시대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4] 간혹 토니 그윈과 비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윈은 정교한 타격 능력에 비해 보그스보다 적극적인 타격 성향을 보여 타율에 비해 출루율에서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수비가 안 좋아서 WAR에서 보그스와 차이가 많이 난다. 다만 수비력이 좋지 않은 외야수였다는 점과 암으로 50대 중반에 사망했다는 점은 토니 그윈과 같다.[15] 이전 버전에는 장효조가 큰 경기만 되면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고 했는데, 선입견과 달리 장효조의 KBO 포스트시즌 통산 기록은 타율 0.359, 출루율 0.422, OPS 0.918로 리그 통산 기록과 큰 차이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경기에서 헛스윙만 한다는 이미지가 고착화된 데에는 1982년 당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2-2로 맞선 8회말 1사 1, 3루 찬스에서 병살타성 2루 땅볼을 쳐서 3루 주자 김재박을 홈에서 횡사시켰던 것과 삼성의 한국시리즈 잔혹사가 결합되어서 그렇다.[16] 하필이면 이 장면을 이건희 당시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 겸 삼성그룹 부회장이 잠실야구장에 도착한 순간 직관했다고 한다.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 비해 직관 승률이 지극히 낮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이건희 당시 부회장은 이날 사무실에서 TV로 경기를 보다가 삼성이 경기를 리드하자 "이쯤 되면 내가 가도 이기겠지?"라고 생각하고 잠실로 향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만세 사건'을 보고 유두열의 역전 쓰리런 홈런까지 목격하게 된다. 이날 경기 이후부터 이건희 회장이 야구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7] 왼쪽은 최동원이며, 우측에 나온 인물은 장효조와 친분이 깊었던 김일융이다.[18] 1998년 시즌 중에 롯데에서 해임된 김용희는 실업시절 동료인 서정환 삼성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9년에 삼성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되었고, 1999년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서정환 감독이 사퇴하자 감독으로 승진했다. 이마저도 원래 해태에서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려고 했는데 김응용이 2000년까지 1년 더 해태 감독을 맡는 게 확정되면서 영입에 실패하자 땜빵 감독으로 올린 것. 결국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삼성 감독으로 오게 되자 김용희는 자연스럽게 해임되었다.[19] 김용희 또한 타코 시절에는 훌륭한 업적을 거두었지만, 이 때문에 롯데 프런트의 섣부른 결정으로 39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감독으로 승진하면서 감독 시절에는 타코 시절때 만큼 좋은 지도력을 보이지는 못했다. 장효조 역시 현역 은퇴와 동시에 롯데 타격 코치가 되었는데, 훗날 장효조는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하고 너무 빨리 타격코치가 된 것이 결과적으로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20] 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삼성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엉엉 울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은 남편이 우는 모습을 그 때 처음 봤다고 한다.[21] 동시에 삼성 리틀야구단 감독도 맡았다.[22] 2022년 7월 11일자 스톡킹 채널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그 해에 장효조 코치의 사망 이후 혹시라도 보고있지 않을까 하며 준비해놨던 멘트였다고 밝혔다.[23] 해태 타이거즈 (1999), LG 트윈스 (2000~2001). 그리고 2002년부터 2010년까지는 계속 삼성에서만 뛰다가 은퇴했다.[24] 대표적인 것이 뉴욕 양키스의 빌 디키요기 베라의 8번. 특수한 경우지만 재키 로빈슨의 전 구단 영구결번인 42번 또한 마리아노 리베라, 브루스 수터 등이 공동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25] 클리블랜드 가디언즈 같은 경우는 455경기 연속 매진 기록을 세우며 성원해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455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26] 아들 장의태씨가 대리수상 하였다.[27] 최준석, 이명우 등 롯데의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들도 20번을 달긴 했지만, 이들은 20번이 아닌 다른 번호를 달고 뛰면서 이름을 알렸다.[28] 이후 2014년 서건창이 역대 최초 200안타와 개인 한 시즌 최다득점 신기록 및 타율, 최다안타, 득점 3관왕으로 두번째 똑딱이 MVP를 받게 된다. 그 외에 타율왕 및 비 홈런왕으로 MVP를 받은 1994이종범, 2015테임즈, 2022이정후는 홈런도 5위 이내에 랭크해 똑딱이는 아니다.[29] 당시만 하더라도 30대 초반의 나이에 들어서면 '노장' 취급을 받았고 30대 중반에 대부분 은퇴하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장효조는 37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관리가 뛰어난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30] 여담으로 한 시즌 최다 병살타를 기록한 2022년 호세 페르난데스34개의 병살을 쳤다. 말 대로 통산 병살이 한 시즌 병살보다 적었던 것이었다.[3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455(연속경기 매진 신기록),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중계 캐스터 톰 치크의 4306(연속 경기중계 수)로 세 자릿 수 이상의 영구결번이 있다.[32] 박태준이 축구를 가장 좋아했던 것이 더 유명해서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야구도 그만큼 좋아했었다.[33] 2018년에는 두산, 2019년에는 NC, 2021년에는 롯데한테 패배하게 된다. 2020년에는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었다.[34] 선수 자신이 부상을 입을 시에 치료를 지원하겠다는 뜻이거나, 저 때 가족 중에 병중인 이가 있어 이에 대해 지원하겠다는 뜻 중 하나다.[35] 2009년 11월 16일 별세[36] 다만 좌투좌타인 장효조와 달리 손아섭은 우투좌타다.[37] 우연히도 최동원도 비슷한 일화가 있었는데,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시절 한 신인 투수를 보고 김인식 감독이 WBC 대표팀을 이끌고 경기를 치르던 도중에 국제전화까지 걸어서 "감독님, 물건 하나 왔습니다."라고 말하였고, 최동원이 '물건'이라고 까지 표현했던 신인 투수는 후일 코리안 몬스터로 거듭난다.[38] 현재는 남항초등학교와 합병되어서 존재하지 않는 학교다.[39] 이후 김동욱은 황재균이 kt로 이적하면서 황재균에게 10번을 넘겨주고 자신은 33번으로 등번호를 변경했으며, 2018년 7월 23일 웨이버 공시되면서 kt를 떠나게 되었다.[40] 주자가 포스아웃 될 경우 안타가 아니라 땅볼로 기록되는데, 이는 누의 공과 상황에서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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